심장이 뛴다.

 그 박동이 어찌나 거센지, 귀를 울리고 가슴께를 두드리다 못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지축이 뒤흔들린다. 안전지대에서 섭취했던 카페인이 이제서야 도는 걸까. 원인을 분석하던 고개가 불순물을 떨쳐내듯 가로로 저어진다. 이어 다시 생각한다. 이는 오랜 시간 수면을 취하지 못한 신체가 스트레스로 인해 호르몬 생성을 저하 시키고 교감 신경을 활성화 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명이 뇌를 헤집는다.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임에도 머리가 물속에 처박히기라도 한 듯 감각이 온통 먹먹하게 울린다. 저 멀리서 들리는 불분명한 소리가 넓게 퍼지듯 전해진다. 쨍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날카롭게 후벼 판다. 드물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아주 느린 속도로, 감각이 돌아온다. 철야에는 이골이 나 있다고 자부했으나 그것이 죄다 헛된 자신감이었음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정말이지 서령하는, 말 그대로 딱 죽고 싶은 기분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




 오후 아홉 시, 비정상적인 무대의 막이 다시금 올라간 순간.

 함께 시작되는 인형극을 감상하며 서령하는, 그가 첫 번째 타자로 적잖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주인의 의지대로 춤을 추는 인형과 함께 달음박질 치는 나현진을 뒤쫓는다. 나란히 달리던 술래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줄에 감겨 목이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도한다. 너무 비현실적인 것을 보면 사고가 튀기라도 하는 걸까. 출발 직전에 주워 들었던 말이 때에 맞지 않게 떠오른다. ‘동화 속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인데요.’ 나현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총을 겨누던 이를 베어 넘기며 실없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다. 이곳이 동화 속 세계라면, 그 동화는 필시 사람을 미치게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몰아 붙이는, 피 튀기는 잔혹동화일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오후 열 시 이십 분.

 반지의 전달이 무사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 주변을 위성처럼 돌며 서령하는 묘한 감상에 잠긴다. 강해성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그것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사회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굴러다닌 사람 특유의 능글맞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미운 구석 하나 없는 것은 분명 그가 가진 고유의 매력일 것이다. 무협을 좋아한다 말하던 그 손에서 매화가 피어난다. 산들거리는 꽃잎이 칼날처럼 벼려져 술래에게 꽂힌다. 여름과 가을 사이 흐드러지게 내려 앉은 봄꽃의 조화가 꼭, 그를 닮은 듯하다.



 오후 열한 시 사십 분.

 일렉산더의 쨍한 울부짖음이 들린다. 서령하는 그 소리를 이정표 삼아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한 번 마음을 주면 그 상대가 쓸모 없는 고철덩어리가 될 지라도 끝까지 책임지겠다던, 정 많은 사람. 흉터처럼 남은 과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또한 상흔으로 남을 것이 자명하다. 다수의 인영이 어렴풋이 눈에 잡힐 무렵, 화약이 발포 되는 파공음과 함께 매캐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든다. 반대편에서 기태화가 접근하는 것을 확인한 서령하는 칼을 거머쥐고 가볍게 날아 올라 도축하듯 술래의 목을 베어낸다. 하성준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방해꾼을 향해 발포하는 총성에 묻혀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듣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하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서령하가 짓는 미소처럼.



 오전 한 시, 자정을 살짝 넘어선 시각.

 서령하는 높은 구조물 위에 자리를 잡고 아래를 살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최선을 다하겠다던 말을 목숨 걸고 지키려는 듯 숨 가쁘게 달리는 기태화를 눈에 담는다. 자유로이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 혹은 끊임 없이 팽창하는 우주를 닮은 사람. 처음으로 서령하의 눈에 비치는 생生을 살피던 사람. 기이하게도 그는 남이 꽁꽁 숨겨두고자 하는 속살을 헤치고 원하는 것을 들여다 보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듯했다.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멈춰 선 그가 총구를 겨누는 것이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곰인형이 휘청거린다. 서령하의 도움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의 다음 무대를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해, 멀리서 달려오는 검은 인영들을 향해 돌풍을 선사한다.



 오전 두 시 이십 분.

 그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지가 제법 오래 된 기분이다. 처음 며칠간 나누었던 대화가 미묘하게 어긋난 뒤로 행동반경 또한 함께 어긋난 것인지, 신기할 정도로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서령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지산겸의 전부를 눈에 담는다. 날갯죽지가 피로 젖었음에도 의연한 태도를 갖춘 그에게로부터, 불의 창이 신벌처럼 술래들을 향해 내리 꽂힌다. 가볍게 바람을 불어 그의 등을 밀어주는 것으로 응원을 대신한다. 무사히 돌아 간다면, 새롭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서령하가 그에게 집중하는 사이, 지척에서는 사냥감을 노리며 숨을 죽이는 짐승이 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서령하는 결국, 불식간에 달려든 짐승에게 어깻죽지를 한움큼 내어 주게 된다.



 오전 세 시 사십 분.

 그 즈음부터 지금까지, 무리로 이루어진 짐승들을 상대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나무 뒤에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윤이원을 마주한다. 숨이 멎은 걸까. 그러나 별도의 안내 문구는 없었다. 그 문장을 떠올림과 동시에 어느새 시스템에 익숙해진 스스로의 모습에 자조한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다가선다. 총에 맞았는지 피와 식은땀을 함께 흘리고 있는 모습에 미간이 설핏 찌푸려진다. 바람의 도움을 빌어 두 팔로 조심스럽게 윤이원을 들어 올리자 가물가물한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힘들게 절 옮길 필요는 없을 텐데요.”

 “바닥이 차가우니까요.”

 “그냥 내버려 둬도 되지 않나요. 어차피 다 같이 죽거나……, 되살아날 텐데.”

 “그럴 순 없죠, 팀원이니까. 당신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텐데요.”

 서령하의 말에 윤이원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의식을 잃고 눈을 감는다. 자고 일어나서 봐요. 그를 향해 조용히 인사말을 건넨다.



 오전 다섯 시, 그를 훌쩍 넘은 시간.

 서령하는 정문 근처의 의무실에서부터 놀이공원의 내부로 돌아오며 끊임 없이 덤벼 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오전 여섯 시 이십 분.

 반지의 흔적을 좇아 도착한 곳에서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 되었으며, 새롭게 시작 되어 있었다. 저 멀리 회색 가디건을 덮은 채로 엎어진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다가가는 걸음이 서서히 무너진다. 피웅덩이 속에서 두 무릎을 꿇은 채로 팔을 뻗는다. 자그마한 몸을 감싸 안고 무릎에 뉘인다. 본래 희었던 뺨은 제 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붉은 빛에 물들어 있다. “이서 씨.”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피에 젖은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언제나 서령하를 꿰뚫어볼 것만 같던 온화한 색의 눈동자도 이쪽을 마주보지 않는다. 삼키는 호흡이 옅은 떨림을 머금고 있음을 깨닫는다. 허탈한 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빠져나간다.


 아, 놀이공원이구나.

 비단 이 공간만이 아닌, 누군가가 빚어낸 이 세계 자체가.


 고통을 연료로 삼은 불꽃이 지척에서 피어 오른다. 이어 총성이 산발적으로 울린다. 그 한가운데에 서있을 이가 누군지 알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무게감 없이 가벼운 몸을 단단히 끌어 안은 채로 땅을 힘껏 박차고 허공을 딛는다. 연쇄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돌아왔던 길을 다시 거스른다. 윤이원을 데려다 놓는 사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끔 두꺼운 천을 덧대고 허술하게나마 바리케이트를 지어 놓은 의무실 한 켠에 김이서를 내려 놓고 커튼을 친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 든다.



 휘청거리는 이의 숨통을 노리고 쏘아지는 탄환을 투명한 막으로 쳐낸다. 서령하의 눈동자에서 산 것이 아닌, 죽음을 읽은 사람. 따뜻한 공기와 서늘한 물기가 뒤섞인 시간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무서운 일이라도 있었어요?’, ‘자주 겪는 일이 하나 있는데,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아서…….’ 한참을 망설이다 내어 놓은 뒷말까지도. ‘허약 체질이 아니라는 말, 사실입니까?’ 여선열이 꺼리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지는 물음이었다. 그런 이가 겪기에는, 지나치게 모질고 매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바람을 일으킨다. 그의 속에 맺힌 응어리를 남김 없이 불태워 버리길 바라면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함께 짊어지기 위해서. 순풍에 실린 푸른 불꽃이 멀리 번져간다.

 어느덧 그에게 할당 된 시간이 끝난 뒤, 서령하는 화상으로 그을린 여선열의 손바닥을 굳게 거머쥐며 나직이 말을 전한다. “모든 게 끝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면, 전할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 버티고 서있어요.” 끝까지 내 편 해주기로 했으니까. 빛이 꺼져가는 이를 향해 짤막한 당부를 남기며 재차 땅을 딛는다.



 오전 일곱 시 사십 분.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아직 열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다음 타자인 허유한은 제법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서령하와 동갑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자. 그의 포용력에 기대 난처한 상황을 만든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어린 아이들의 장난 같은 행위로 용서를 건네던 모습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줄이 휘둘러질 때마다 피가 흩뿌려진다. 그 속에서 가면처럼 웃음 짓는 얼굴을 발견하자 걱정과 동시에 한숨이 흐른다. 서령하는 검을 들고, 먼 발치에서 그를 노리는 잡다한 존재들을 하나씩 치워 나간다. 그의 무대에 방해꾼이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도록. 그리고는 담백하게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허유한은 다시 없을, 이 순간 속의 훌륭한 주인공임을.



 오전 아홉 시, 드디어 절반.

 폭음이 터진다. 하현월이 부여 받은 능력은 가히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정작 그 당사자는 그 사실을 반기지 않는 듯했지만. 미인밖에 모르는 듯 굴어도 결국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요령 좋게 잘 해낼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무겁게 까라지는 몸을 이끌고서는, 도저히, 남을 도우러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까닭이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이어 흐릿하게 돌아온다. 거울을 본다면 분명 허옇게 질려 있을 것이다. 어딘가 잘못 얻어맞은 건지, 부딪힌 건지, 단순한 과로 증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서령하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긴 채 잠시 쉴 요량으로 눈을 감는다. 그러고 있으면 문득, 이상쩍은 별명을 지어다 붙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서령하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돌아가면 다시, 파스타를 만들어 줘야겠다. 그런 다짐과 함께 까무룩 의식을 놓는다.



 오전 열 시 이십 분.

 검게 죽은 액정에 하얀 띠지가 떠오른다.

 [028649 : 한영원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피이잉―, 펑!

 폭죽이 터진다. 그 요란한 소리에 의식이 퍼뜩 돌아온다. 희미한 불안과 함께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시간과 알림을 차례로 확인한다. 현이선의 순서, 한영원의 사망. 현재 위치.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낸 서령하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현이선은 잘 하고 있을 것이다. 다치지 말라는 말, 안전을 중시하라는 말, 죽지 말라는 말, 수많은 이들로부터 차고 넘치다 못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당부와 걱정을 짊어진 채로. 생사의 갈림길을 달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호흡을 이어가는 이를 향해 담담하게 뭉친 신뢰를 바람에 실어 전한다.



 아직 살짝 삐걱거리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 휴식을 취했다고 금세 컨디션을 회복한 몸을 움직여 한영원에게로 향한다. 우뚝 솟은 타워 어트랙션의 근처, 엄폐물에 기댄 채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이미 누군가 다녀간 듯 경직된 손에 쥐여진 군번줄이 눈에 띈다.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주머니에 잘 챙겨 넣어준 뒤 길쭉한 몸을 안아 올린다. 차갑다. 서령하가 기대던 한영원의 어깨는 늘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음에도. 그 격차를 체감하고서야 참담하게 가라앉는 심장을 느낀다.


 곤란해요.

 당신이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으면.


 서령하가 바라보는 한영원은,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것이 온몸에 빛나는 무언가를 두르고 필사적으로 빚어내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미경험자의 서령하가 찾아내지 못한 답을 유경험자의 한영원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이야기할 때의 한영원에게서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확고함에 이끌려 그를 이정표로 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러나 길게 침잠해 있을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서령하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세 번째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이전보다 더 익숙해져버렸다.



 오후 한 시, 태양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시각.

 휴대폰을 들어 선우 찬의 위치를 확인한다. 게임이 시작된 16시간 동안 그를 마주친 적이 없는 듯하다. 움직이는 점 하나에 의존해 그의 생존을 확인할 뿐. 잘 숨어다니고 있다는 증거인 듯해 옅은 안도감이 스친다. 땅에서 지붕으로, 지붕에서 나무로, 전투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다 스러져가는 철근을 딛어 가며 조금 이르게 선우 찬을 맞이하러 간다. 그렇게 발견한 이의 상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썩 괜찮은 컨디션이 아닌 듯했다.

 “괜찮아요?” 희미하게 끄덕이는 고개.

 “거짓말.” 작게 웃는 얼굴.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서령하 씨, 나 좀 데리고 가 줘요.”

 “네. 그 말을 기다렸어요.”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부상 입은 몸을 끌어 안고서 놀이기구를 대신해 바람을 타고 오른다. 다시 땅을 딛을 때는 선우 찬의 능력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날아오는 총탄을 컨페티 삼으며 선우 찬에게 할당 된 80분의 시간을 버텨낸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안전을 추구하게 되는 법이라지만 그것을 넘어서 이상하게 어딘가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술과 별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어느 날들처럼, 그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휩쓸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후 두 시 이십 분.

 서령하의 차례가 돌아왔다. 반지를 넘겨 받는 것과 동시에 멀리 이동해 적당한 위치에 선우 찬을 내려 놓는다. 곧장 누구와도 얽히지 않을 구석진 곳으로 술래들을 이끌며, 손가락에 채워진 반지를 의미 없는 손길로 문지른다. 무게감 하나 없는 이 금속 따위를 지키기 위해, 빼앗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고, 사라질까. 수많은 생명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 기준으로 세워진 세계 인권 선언 따위는 이 무법지대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 죽인다. 얼마나 비극적인 울림인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얻어낸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상황에서 유리된 의식이 관망하는 시선으로 서령하를 내려다 본다. 그러나 이따위 상념을 통해 덜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흐릿한 죄의식 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장난감을 부수듯 칼을 휘두른다. 피가 튄다. 총을 겨누는 이들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비명 끝에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차례 소란이 정리 되고 나면, 부서질 듯한 잔해를 딛고 선 서령하의 무감각한 시선이 피웅덩이와 사체 위에 머무른다.

 클리어를 바라본다.

 이 지루한 시간을 끝내고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줄 유일한 수단을.



 오후 세 시 사십 분.

 나무 위에 숨어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광장을 살핀다. 지도에 찍힌 위치에 도착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술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구조물 뒤에 숨어 있는 걸까. 그러나 능력을 사용해 헤아려 봐도 시야에 잡히는 인원과 수가 정확히 일치한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팽팽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갈색의 밝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정소혁이다. 그의 기발한 발상에 눈을 둥글게 뜨는 사이 주변을 살피던 정소혁이 자연스럽게 이쪽을 향해 이동해 온다. 기척을 죽이고 아래로 떨어진다. 이어 정소혁을 이끌고 광장에서 좀 더 먼 곳을 향해 이동한다.

 “형.”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형, 피가…….”

 “하하, 남 걱정할 때야?”

 반지를 넘겨 주며 든든한 어깨를 두드린다. 마음 다잡아, 무너지지 마.



 오후 다섯 시.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 서령하를 스치고 먼 곳을 향해 급하게 뛰어 가던 이호열의 모습을 떠올린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잘 하고 있으려나. 그러나 확인하러 갈 방법이 없다. 지겨울 정도로 끈질기고, 끔찍할 정도로 지치지 않는 상대에게 발을 묶인 까닭이다.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저, 이호열! 그래도 제 몫은 다 하고 갑니다!”

 놀이공원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의미심장한 문장. 또다시 이어지는 울림. 그 모든 것이 겹쳐져 하나의 신호를 그린다. 불안정한 고동이 귓전을 울린다. 그리고 잠시 후. 거인이 밟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 서령하의 앞에 놓여 있던 존재가 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 서령하는 뒤늦게서야 이호열이 자아낸 굉음을 인지한다. 시선이 놀이공원의 중심부를 향한다. 붉은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인영이 보인다. 서령하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낼 기세로 달린다.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마주한 이호열의 얼굴은, 두려움 한가운데에서 고락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삶의 목표를 이룬 것처럼 행복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이 은이 있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몇 번 되지 않는 도약으로 술래들과 대치 중인 이 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분하고, 정적이며, 무뚝뚝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거리감을 좁혀 오며 사람을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 지난 며칠 동안 쌓아온 이미지로는 그러했으나, 지금 시점에서 서령하는 이 은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술래의 틈바구니에 섞여 들어 칼날을 휘두른다. 그러다 보면 옅은 색감으로 이루어져 눈에 띄는 인영과 점차 거리가 좁혀진다. 지척에서 등을 맞대고 선 채로 서령하는 조용히 말을 고른다. 그러나 가볍고자 하면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도, 무겁고자 하면 얼마든지 무거워질 수도 있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서령하는, 차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은 씨.”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이 은은 서령하의 뜻을 짐작하고 덤덤한 대답을 돌려 준다. 설령 짐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명확히 정해져 있었기에, 간략한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이호열이, 한영원이, 김이서가, 그 사이를 이어준 모든 이들이 남긴 뜻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오후 일곱 시 사십 분.

 클리어까지 남은 시간, 단 80분.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어딘가 초연하게 의지를 다진 듯한 팀의 막내, 장재하를 바라본다. 가장 어린 아이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안겨다 놓은 듯한 기분에 입안이 씁쓸하다. 그러나 서령하는 가까스로 그 감각을 떨쳐내고 검을 고쳐쥔다. 장재하를 믿는다. 장재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어나는 법을 아는 사람은 성공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기에. 어느샌가 높게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 서령하가 끼어들 틈은 없다. 단지 그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지 않기를 아득히 바랄 뿐.



 다시 오후 아홉 시, 막이 내린다.

 장장 62시간에 달하는 철야 근무 종료.

 거센 심장 박동과 머릿속을 헤집는 이명의 끝에―,

 서령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