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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도저히 머리털 따위 상관하고 있을 틈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내가 하기는 귀찮지만 네가 손질해줄 거잖아?"

"재스민. 분명히 그게 제 일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매일 빗질 정도는 해주세요."

"굳이 만날 할 건 없지 않아?"

"안 됩니다."

"작전 중에는 심하면 한 달 내내 빗질 한 번 못할 때도 있었다고."

페퍼민트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빗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거울에 비친 재스민과 시선을 맞추며 딱 잘라 말한다.

"절대로, 안 됩니다.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에요."

"남들 앞에 나갈 때는 네가 알아서 해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페퍼민트는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최소한 미스터 클라이스트의 반만큼이라도 멋내기를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사람, 병실에서까지 미용사 출장을 요청했어요."

"그 남자도 좀 이상한 것 아냐? 그렇게 긴 머리는 치료에도 방해가 될 텐데. 아예 확 쳐버리면 될걸."

"그런 짓 했다간 그대로 쇼크사할 걸요."

지금 클라이스트는 손님 신분으로 '쿠어 킹덤'에 머물고 있다. 이미 몸은 완전히 좋아졌지만 배가 어디에도 기항하지 않으니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었다.

한 발 먼저 해방된 켈리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등 뒤로 하고 웃으면서 미용실에서 나왔다.

그때 헐떡거리며 달려온 프리스틴과 마주치게 되었다.

"여왕님한테 무슨 용무야? 유감이지만 한동안 놔줄 것 같지 않던데."

"아닙니다. 저기, 용무가 있는 것은 당신 쪽입니다. 머리카락을 한 올, 얻을 수 있을까요?"

"뭐어? 왜?"

"그것이... 친자 감별에 사용합니다."

켈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거 넘겨듣기 힘든데. 저건 내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아뇨. 물론 다니엘님은 당연히 당신의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다니엘님을 법정상속인으로 결정할 때 그런 자료가 필요해집니다."

"흐음?"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재벌은 불편한 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켈리는 막 다듬은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서 프리스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프리스틴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장갑을 낀 손으로 그 머리카락을 받아들어 시험관 안에 집어넣었다.

켈리와 헤어진 뒤 프리스틴은 빠른 걸음으로 선내의 의료구획으로 이동했다.

'쿠어 킹덤'에는 일류 의료설비 외에 어느 정도의 연구 시설도 갖춰져 있다. 그렇다고 정식 연구원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므로 평소에는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프리스틴은 사람의 눈을 피해 조심하면서 연구시설에 들어가 연구용 인공두뇌에게 말을 걸었다.

"특정 유전자의 모든 정보를 조사할 수 있을까?"

그러자 연구용 인공두뇌가 반문했다.

"그것은, 인간의 유전자가, 지닌, 30억 쌍의, 염기 배열을, 전부, 조사하라는, 지시입니까?"

"그래. 그리고 이상인가를 검색해주면 좋겠어."

"그것은, 통상의, DNA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검사입니다. 시간도, 걸립니다."

통상의 DNA 감정은 감정하고 싶은 두 사람의 유전자에서 특정 부분만을 검출해서 같은 인자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유전자의 염기 배열을 전부 밝힌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설계도를 전부 펼쳐보이는 셈이 된다. 신장, 체중, 체격, 눈 색, 머리 색, 피부색 등의 신체적 특징은 물론이고 체내에서 어떤 효소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결과 어떤 병에 걸리기 쉽고 어떤 병에 걸리기 어려운지 등등. 그 사람의 체질, 어느 정도의 성격, 그리고 때로는 수명까지 알게 된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약 세 시간, 입니다."

"좋아. 진행해줘."

연구용 인공두뇌는 작업에 들어가기 위한 지시를 몇 가지 내렸지만 이 방에 있는 것은 프리스틴이 본 적도 없는 기계나 장치들뿐이다. 지시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장치의 이름을 확인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간신히 검사기를 작동시키고 한숨을 돌린 프리스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뭘 하고 있지?"

이번에는 프리스틴이 펄쩍 뛰어오를 차례였다.

뒤를 돌아보자 켈리가 서 있었다.

이 남자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큰 체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척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신기한 듯이 연구실을 둘러보며 말한다.

"굳이 머리카락을 가져가지 않아도 내 DNA라면 이미 등록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최근의 친자 감정은 굉장히 거창한걸?"

어조는 온화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무엇보다도 눈이 웃지 않고 있었다.

프리스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눈을 보면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