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과학원 초학제 독립연구단 <느린 과학, 낮은 기술, 거꾸로 선 예술>
연구배경
고등과학원 초학제 독립연구단 <느린 과학, 낮은 기술, 거꾸로 선 예술>
연구배경
<느린 과학, 낮은 기술, 거꾸로 선 예술> 연구배경
연구의 문제의식
‘반증 가능하지 않은 이론은 진실이다’는 말처럼 과학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기에 한없이 느린 것이 속성이다. 이론의 완성은 끝없이 반증을 통해 계속되어야 하고, 반증은 당연히 이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또 한 켠에서는 ‘현대의 유일한 종교는 과학이다’는 말처럼 과학은 ‘신봉’ 받고 있다. 하나의 미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 이다. 과학자는 사제고, 조만간 과학자에게 금욕을 요구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과학의 대중화’라는 건 또 무슨 고귀한 꿈인가? 이는 ‘전 인민의 무장화’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말의 성찬일 뿐인가? 서세동점의 시기에 맺힌 과학에 대한 포원이, 산업화 시대에 ‘과학입국’의 염원을 세우며 만들어졌고, 이 말은 과연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대중 강연, 유튜브, 과학관을 비롯한 과학 교육의 문제까지, 가장 객관적인 학 문이라는 과학을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거꾸로 우리에게, 다양한 과학의 이론들이 당대의 어떤 사회 인식과 연결되어 있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생학과 인종주의, 진화론과 제국주의, 우주과학과 냉전 이데올로기 등은, ‘느린 과학’의 자율성에 목적을 가진 방향을 더했다. 그 목적을 위해 국가 단위의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고 기술이 발전한다. 쓸모없는 과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쓸모없음의 유용함을 역설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과학은 무용한 과학의 쓸모를 설명할 수 있을까? 독일 본 대학 교수 헤르츠는 부도체도 통과할 수 있는 전자파를 실험하여 ‘라디오’ 로 명명되는 ‘헤르츠파’를 확인한다. 이 발견의 쓸모가 무엇이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지. 그냥 거장 맥스웰 선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실험일 뿐일세. 우리는 지금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미스터리한 전자기파를 확인한 거라고.” 학생이 즉시 되물었다. “그 다음은요?” 헤르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헤르츠의 스파크 파동 논문을 읽은 이탈리아 청년 마르코니는 이 실험 결과를 전자파동을 신호로 보내는 데 사용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과학은 쓸모가 없거나, 있다. 틀린 이론은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쓸모없는 이론은 없다. 여기에는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과학 내적인 선택과 사회 공동체의 인식이 작용한다. 여기에서 기술은 공동체의 필요, 편리,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술과 자본의 편익을 위해서 과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장한다. 이쯤 되면 느린 과학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이제는 기술 과학이나 과학의 미신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 된다. 기술의 진보는 곧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의미한다. 아무리 필요한 기술이라도 그것에 돈의 값어치만 부가되면 필요한 사람들의 극히 일부만이 그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대중적인 기술이더라도 지배적이면 지배적일 수록 그 기술은 배타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우리가 진보라고 믿었고, 민주주의를 더 잘 작동시킬 거라고 믿었던 과학기술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카스트를 생산하게 된 다. 적정기술이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특정 지역의 문화, 정치, 환경, 경제를 고려하는 적정기술은 ‘보다 보편적으로 낮은 기술’로 전환해야 한다. 더 싸고, 더 간단하며, 누구나 고칠 수 있고, 아무나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술이 없더라도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카스 트를 조장하는 기술에서의 소외가 계급계층적 소외를 낳고, 결국 인간을 배제한다. 예술은 이것에 저항한다. 미디어아트는 미디어를 도구로 예술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 카스트와 연동된 기술에 저항한다. 이 저항은 거꾸로 기술을 재고하여 느린 과학의 역방향에 대해 환기할 수 있고, 예술을, 무용하므로 늘 거꾸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예술의 운명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초학제적 배경
1) 진정한 하이테크는 언제나 로테크를 지향한다
하이테크놀러지는 앞으로 인류의 진화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인류의 몸을 이끌 환경의 변화는 재난(갑작스러운 환경변화)이 유일할 것이고, 만약 그런 재난이 온다면 지금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류는, 바로 그 적응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없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하이-테크놀러지를 통한 기계와 인간의 공진화는 인류가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이-테크놀러지는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고 지구환경을 피폐하게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완벽한 인공의 장치/환경 속에서 인류가 생존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신(神)의 계산이 따라야 한다. 이 불가능한 계산을 인공지능이 해줄 수 있을까?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로-테크를 지향하는 하이-테크를 그려볼 수 있다.
모로코 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맨땅의자(souk tool)’는, 자세히 보면 의자 의 네 다리의 길이가 조금씩 다 다르다. 네 다리가 다 다르다면 분명 실내에서는 끄덕대서 앉아 있기가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맨땅의자는 바닥이 고르지 않은 야외에서 사용하는 의자이다. 바닥이 고른 데서는 기우뚱거리지만, 바닥이 고르지 않은 데서는 각각 길이가 다른 네 개의 다리를 이리저리 맞춰서 고르면 정확하게 들어맞는 안정적인 상태를 찾을 수 있다. 바닥을 고르고 의자를 놓는 대신, 바닥은 만지지 않고 의자의 다리를 제각기 한 것이다. 모로코 시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이 의자는 아무 데서나 팔고 살 수 있는 만큼, 만드는 사람들도 여럿이다. 그러나 종류는 세 가지다. 큰 의자와 조금 작은 의자와 작은 의자―작은 의자는 큰 의자의 길이의 반이고, 조금 작은 의자는 큰 의자와 작은 의자의 차이의 딱 반만큼 높다. 다리의 길이도, 정확히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비례를 가진 듯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나온 제각각 만든 의자들의 다리가 거의 동일한 비례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의자의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수평이 안맞고 비틀어진 이 의자는 5년 전에 모로코에 여행 갔을 때 구입한 것 이다. 모로코에서는 아주 흔한 의자인데 길거리에 있는 노점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들고 다니다가 바닷가나 길거리 등 쉬고 싶을 때 어디서든 앉아서 쉴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엉성해 보이지만 울퉁불퉁한 땅에서도 의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면 어떻게든 맞는다. 또 착석감도 만족스러웠다. 그때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던 의자였는데 도시에 오니 바보가 되었다. 의자를 디자인할 때 다리의 수평을 맞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걸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땅도 수평이 되어야 한다.” 이 의자는 그 땅과 의자 다리의 수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고, 진정한 하이-테크놀러지는 로-테크를 지향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도로는 바퀴가 잘 굴러가기 위해 수많은 길을 포장한다. 처음부터 바퀴를 재고할 수는 없었을까? 예술은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기술과 과학의 방향을 천천히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2) 기술로 표현되는 예술
예술로 표현되는 기술
인간의 삶과 과학, 기술, 예술은 유리되어 있어도 괜찮은가? 과학을 위한 과학과, 예술을 위한 예술은 있을 수 있어도 기술을 위한 기술은 성립할 수 없다. 기술은 언제나 사회의 필요로 발전하고, 거꾸로 필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술은 강력한 자본의 영향을 만들어내고, 그 때문에 미디어아트는 항상 위험하다. 위험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산업자본의 거대고리에 엮여 예술의 비판성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 만든 공예품이 될 경우다. 두 가지 모두 “기술로 표현되는 예술”의 함정이다. 붓으로 표현되든, 모터로 표현되든, 전자적 알고리듬을 사용하든 예술은 (도구와 상관없이) 인간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예술은 기술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기술 역시 예술로 표현되어야 한다. 기술이 단순한 도구로 이용되기보다는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바로 거기서 예술의 가능성을 끄집어 내야 한다.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숨어 있는 한 사내의 괴로움을 보았듯이 모터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무표정하게 돌아가는 모터가 우리에게 어떻게 절실할 수 있을까?
그래서 쓰레기들로 작품을 만들었던 독일 하노버 출신의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887~1948)가 말한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고, 새로운 것들이 그 파편 속에서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메르츠’이다. 그것은 내 안에 일어 난,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혁명과도 같았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서 ‘메르츠’는 회화에서 출발한 후, 콜라주 작업으로 확장한 쿠르트 슈비터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붙인 말이다.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온전한 것이란 오히려 당시의 예술가들에게는 위선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위선을 기술로 폭로할 수 있을까? (다른 쪽에서 보면) 기술이 그 위선을 드러낼 수 있을까?
3) 연구의 초학제적 빗금
조엘 모키르(Joel Mokyr, 1946~)는 산업혁명이 문화와 사회제도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결과였다. 여기에는 18세기 이전까지 서구의 과학과 기술이 분리되어왔던 이유, 그리고 그것이 하필 18 세기에 과학기술로 결합하여 산업혁명을 낳은 인문사회적 원인이 있었다. 본 연구는 사회문화적 분석을 통해 과학과 기술 혹은 과학기술의 당대성을 밝히고, 예술(좁게는 미디어아트)을 통해 과학과 기술을 재배치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과학과 기술, 예술의 정량적이고 수학적인 모델링을 제시하지 않는다.
4) 연구 수행의 얼개
㉠ 연구의 양 날개와 몸통
본 연구는 과학기술+사회학의 한쪽 날개와 예술+과학기술의 다른 쪽 날개를 갖는다. 그렇다고 두 날개의 공통분모인 과학기술이 이 연구의 몸통은 아니다. ‘과학기 술+사회학’의 날개는 과학사, 과학지식사회학, 역사, 사회학, 전기, 초학제에 대한 담론까지를 구성하며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인식을 규명한다. 다른 날개인 ‘예술+과학기술’은 예술사회학, 예술과 기술의 공진화, 사이버 펑크 문학, SF, 환타지, 과학기술의 대중적 인식과 과학자들의 인식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다. 또한 예술이 수용하고 저항하는 당대 과학기술의 주류와 시대적 한계, 그리고 그 가능성을 비교 분석하여 지금의 예술과 과학기술이 맺는 접점을 점검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당대성이 이 연구의 몸통이다.
㉡ 예술가들의 제안에서 생성되는 자장에서 출발하기
본 연구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목적을 위한 목표를 굳혀가는 것이 아닌) 3인의 예술가들이 제시하는 분명한 제안을 통해 생성되는 자장에서 출발한다. 자유로운 것은, 진행 과정에서 예술가들이 제안한 화두가 다른 연구원들에 의해 사라지거나 다른 주제로 바뀔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