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의 변화는 이렇듯 하강이 아닌 상승의 형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향식 변화가 발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 표현에 ‘millionnaire’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백만장자’인데, 이는 백만 불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풀었을 때, 1달러에 대한 기준 환율을 대략 1,200원으로 보자면 우리 돈으로 12억원에 해당하는 자산을 가진 사람이 바로 백만장자이다. 사실 millionnaire의 사전적 의미는 엄청난 부자 즉 대부호라는 뜻인데, 12억원이 적은 돈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겠으나 그렇다고 그만큼의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 대부호라는 타이틀은 어딘지 모르게 다소 어색하다. millionnaire는 20세기 초에 등장하였던 말이고, 그 당시에는 백만 불의 가치가 그만큼 대단했던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통화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겪어 왔고, 그 결과 이젠 millionnaire라는 말 보다는 billionaire가 좀 더 현실감을 갖춘 말로 들리게 되었다. ‘billionaire’는 ‘억만장자’라고 번역이 되는데,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200억원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쯤 되어야 대부호라는 말에 격이 맞으리라고 요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가 보다.
나는 어릴 적 “6백만 달러의 사나이”라는 텔레비전 외화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기억이 선명하지 못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해당 드라마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KBS에서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애초 미국의 ABC 방송국에서 1974년부터 1978년에 걸쳐 “The Six Million Dollar Man”이라는 이름으로 방영이 되었던 것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에서 1976년부터 “6백만불의 사나이”라는 이름으로 방영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본 것은 동양방송 판을 10년쯤 지나 재방영하였던 것일 게다.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6백만 달러의 사나이는 첨단의 바이오 인공장기로 무장한 사이보그 요원이다. 해당 드라마에서 설정한 바를 따르자면, 사고로 신체 일부의 기능을 상실한 평범한 인간을 괴력을 가진 초인으로 재탄생시키는데 있어 소요된 금액이 6백만 달러였다. 6백만 달러를 다시 원화로 환산하여 보면 72억원이다. 72억원이 대단히 큰돈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6백만 달러의 사나이가 보여주는 어마무시한 능력을 감안하여 보자면 요즘 시대에는 ‘6백만 달러의 사나이’가 아니라 ‘6천만 달러의 사나이’ 혹은 쓰는 김에 좀 더 써서 ‘6억 달러의 사나이’쯤으로 불러야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언어는 이렇듯 곳곳에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