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수는 내가 좋아하는 선배의 이름이다. (행수 형! 형의 이름을 거론하여 미안합니다.) 군 입대를 앞둔 어느 겨울날 후배 둘과 함께 2박 3일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나의 고향인 부여를 먼저 들른 후, 전라도로 내려가 강진, 목포, 해남 등지를 둘러보았고 경상도 쪽으로 넘어가 진주, 남해 등을 돌아보았다. 행수 형의 고향은 남해였고,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우리 셋은 진주에서 형을 만났고 남강을 둘러본 후 남해로 넘어가 하루를 묵었다. 행수 형의 고향집은 바닷바람이 거센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 위쪽에 위치한 널찍한 밭에 올라서면 무섭게도 돌진해 오는 바람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행수 형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공을 가장 잘 차는 사람이다. 주말마다 기숙사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이 열리곤 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행수 형은 언제나 열외 취급을 받았다. 형이 등장하는 순간 게임의 추가 한 쪽으로 금세 기울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행수 형의 운동화는 늘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렇게 다 해진 신을 신고도 형은 펄펄 날았다. 우리 쪽 골대부터 공을 몰기 시작해 순식간에 반대편 쪽 골대에 도달하였고, 형이 찬 공은 예외 없이 상대편의 골망을 시원하게 갈랐다. 행수 형이 어쩌면 그렇게 공을 잘 차는지 궁금하였는데, 그때 그 남해 여행을 통해 비로소 답을 얻게 되었다. 형은 어린 시절 고향집의 바닷바람 거센 밭에서 늘 공을 가지고 놀았다고 했다.

행수 형 부모님은 우리를 살갑게 맞아주셨다. 아버님께서 손수 잡아오신 문어가 저녁 찬으로 올랐다. 바닷가 음식 특유의 비릿함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한편, 그날 저녁이 더욱 특별했던 것은 식사시간 내내 이어진 부모님과 행수 형 세 사람 간의 대화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를 미궁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하였다.

“행수야, ... 행수가 ... 행수는 ... 행수를 ... 행수한테 ...”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행수 형은 끊임없이 “행수”를 언급하셨다. 행수 형을 바로 앞에 두고 왜 저리 행수를 찾아대시는가 의아스럽기만 했다. 행수 형은 또 왜 만 3세도 채 못된 아이 마냥 스스로를 "행수"라고 3인칭화하여 지칭하고 있다는 말인가.

식사를 마치고 형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내 그 비밀을 물었다. 왜 형을 바로 앞에 두고 부모님께서는 계속 행수를 찾으셨느냐고.

행수 형은 다섯 형제 중 넷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위로 두 형님이 결혼을 하셨고, 그래서 행수 형에게는 형수가 두 분이 계셨던 상황이었다. 큰 형수와 둘째 형수. 오랜만에 넷째 아들을 반갑게 만난 부모님께서는 가족들의 근황에 대해 한참 말씀 중이셨다. “큰 행수”와 “둘째 행수,” 그리고 식탁에 함께 있던 “행수”까지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대화의 흐름을 타고 등장하니 듣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혼돈의 저녁상이었다. 남해에서는 “형수”를 “행수”라고 발음하였던 것이다. 아니 적어도 충청도 태생의 나에겐 그렇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