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의식하지는 못하나 우리가 영위하는 언어생활 곳곳에는 흥미롭고 신기한 내용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것들을 이렇듯 하나씩 정리해 보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사실 가장 먼저 꺼내놓고 싶었던 이야기가 따로 있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다가온 그 생각이 나에게는 전율이 느껴지는 대단한 발견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어쩌다보니 순위가 한참 뒤로 밀리게 되었지만.
정작 의식하지는 못하나 우리가 영위하는 언어생활 곳곳에는 흥미롭고 신기한 내용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것들을 이렇듯 하나씩 정리해 보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사실 가장 먼저 꺼내놓고 싶었던 이야기가 따로 있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다가온 그 생각이 나에게는 전율이 느껴지는 대단한 발견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어쩌다보니 순위가 한참 뒤로 밀리게 되었지만.
다음의 두 문장을 보자.
“길동이가 길수를 좋아해.”
“길수가 길동이를 좋아해”
두 문장의 주어는 “길동이가”와 “길수가”와 같이 쓰였다. 그리고 목적어는 “길수를”과 “길동이를”과 같다. “길동”의 경우 주격조사 “가”와 목적격조사 “를” 앞에 “이”가 덧붙었다. 한국어 화자라면 이와 같은 쓰임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언어에 대한 조금의 지식이 있는 경우라면 받침이 있는 이름에 한하여 “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까지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새삼 신기할 것이 없다.
자, 이번엔 다음의 두 문장을 보자.
“길동이가 마이클을 좋아해.”
“마이클이 길동이를 좋아해.”
어떠한가. 두 문장에서 목적어 자리에 “마이클이를,” 주어 자리에 “마이클이가”와 같이 말하는 것이 왠지 부자연스럽다. 목적어 자리에서 “이”를 덜어내고, 주어 자리에서 “가”를 덜어내야 그 쓰임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외국인의 이름의 경우에 한정하여 우리의 언어가 이렇게 특별하게 작동하는 것인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신기한 노릇은, 목적어 자리에서는 본래 없던 “이”가, 주어 자리에서는 본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가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어서 다음의 문장을 보자.
“나는 유진이를 좋아해.”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유진”이가 아니라, 금발의 미국인 “Eujene”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그리고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음을 문장으로 표현해보자. (참고로 Eujene은 미국에서 흔한 이름 중의 하나이고, 주로 남성의 이름으로 쓰인다.)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나는 Eujene이를 좋아해.”라고 말하였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 “나는 Eujene을 좋아해”와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유진”의 경우에는 “나는 유진이를 좋아해”와 같이, “Eujene”의 경우에는 “나는 Eujene을 좋아해”와 같이 표현하게 되는 것일까? 이쯤 되면 자연스레 소름이 돋는다.
초등학교 4학년의 어느 학생은 선생님께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
“선생님! 저를 홍길순~이라 부르지 마시고, 다른 친구들처럼 길순아~하고 불러주세요!”
“홍길순~”이라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지고, “길순아~”라고 부르면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번엔 “유진”말고 “강유진”을 좋아해보자. 그리고 문장을 통해 그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다시 한 번 해보자.
어떠한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유진을 좋아해.”
어찌하여 “나는 강유진이를 좋아해”와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외국인 이름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혹은 외국사람 자체에 대한 반응의 결과인 것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이겠으나, 분명한 사실로 우리의 언어 문화는 우리가 외국인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