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첫 한 학기 동안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에서 원어민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때 일이다. 한 학생에게 무언가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 후 “이해가 가세요?”라고 물었더니, 그 학생이 “네, 이해가 와요”라고 답했다. 의사소통 맥락에서 학생의 발화는 온전히 기능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그 어떤 곡해나 오해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해가 오다”는 말은 원어민이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연어는 모든 언어에서 나타난다. 영어의 경우 “high wind,” “severe frost”는 흔히 쓰이는 표현이나, “severe wind,” “high frost”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식이다. 우리말의 경우라면, 피아노는 치는 것이고 기타 역시 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는 대상이 악기인가 싶다가도, 기타와 마찬가지로 현악기인 우쿨렐레는 정작 기타와는 달리 치는 대상이 아니니 그 용례가 참 복잡해 보인다.
연어 표현은 언어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어, 목표어를 배우는 과정에 있어 모국어로부터의 전이로 인해 오류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give a speech,” “make a speech,” “deliver a speech”와 같이 표현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번역하여 “연설을 주다,” “연설을 만들다,” “연설을 전달하다”와 같이 말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말의 “진한 차,” “무거운 입”을 “thick tea,” “heavy mouth”로 옮길 수도 없다. 피아노와 기타도 우리말에서야 치는 것이지만, 영어에서는 치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특정 언어에서는 하나로 표현되는 것이 다른 언어에서는 여럿으로 분화되어 표현되는 경우도 흔하다. 영어의 “wear”는 한국어에서는 “입다(wear suits),” “쓰다(wear a hat),” “신다(wear socks),” “끼다(wear rings),” “차다(wear a watch),” “두르다(wear a scarf),” “메다(wear a bag),” “매다(wear a necktie),” “하다(wear earrings)” 등과 같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국어 입장에서 보자면 여러 다양한 표현이 영어에서 하나로 합해지는 것이고(coalescence라고 한다), 거꾸로 영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표현이 한국어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사례라 하겠다(split라고 한다).
흥미로운 만큼, 아니 그 이상, 언어는 참말로 복잡하지 않은가? 그 복잡한 언어를 인간인 이상 누구나 구사한다. 인종, 종교, 경제적 혹은 지적 수준, 사회적 신분 등과 무관하여 모든 인간은 언어를 쓸 줄 안다. 예외가 없다.
혹시 그런 점에서 인간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건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