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유별함은 외향이나 성격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color terms)에서도 드러난다. 대개 여성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이 남성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보다 그 범위가 넓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어떤 특정 개인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의 범위는 그 사람이 경험한 바에 의해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남녀의 유별함은 외향이나 성격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color terms)에서도 드러난다. 대개 여성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이 남성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보다 그 범위가 넓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어떤 특정 개인이 사용하는 색깔 표현의 범위는 그 사람이 경험한 바에 의해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나는 특정 색깔에 끌렸다.
어쩌다 사는 옷은 항상 그 당시 좋아했던 그 색깔의 옷이었다.
하루는 가방을 새로 사서 학교에 들고 갔다. 물론 그 역시 내가 좋아하던 색깔을 가방이었다.
동일한 색깔의 아이템들을 내가 마치 수집이라도 하는 듯 보였던지 동기 여학생 하나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카키색 가방이네? 넌 카키색을 정말 좋아하나봐?”
세상에 태어나 “카키색”이란 말을 그때 그 여학생을 통해 처음 들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그 여학생이 말하는 카키색이 내 가방의 색깔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겐 그저 녹색, 굳이 세세하게 구별해서 말해야 한다면 짙은 녹색, 혹은 내가 당시에 실제 쓰던 표현으로는 국방색이었을 가방 색깔에 대해 카키색이라는 이름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제야 나는 비로소 녹색과 카키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몇 해 전 해외 출장을 떠나던 날의 에피소드이다. 일 때문이라지만 매번 혼자 출장을 나가게 되는 것이 미안하여 아내에게 출국 전 시간이 되니 면세점에서 선물을 하나 사 주겠노라고 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필요한 것이 없다던 아내는 재촉하는 나를 달래려는 요량으로 립스틱이나 하나 사다 달라고, 대신 색깔은 “분홍 말고 핑크”로 부탁한다고 했다.
별 생각 없이 버스에서 내려 면세점의 화장품 코너를 기웃거렸다. 여자 화장품에 조예가 깊을 리 없는 나를 꿰뚫어본 점원 하나가 이내 따라붙었다.
“찾는 것 있으세요?”
“아, 네... 립스틱을 하나 사려고요. 분홍 말고 핑크색 좀 하나 골라 주실래요?”
점원이 열심히 분홍 아닌 핑크색 립스틱을 내보여 주었으나 내 눈에는 모두 똑같이 보여 결국 립스틱을 구입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대개 여자들이 립스틱 색깔에 민감하니 본인이 직접 고르는 것이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분홍 말고 핑크”가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는 매장을 빠져나오면서 깨달았다.
세상에나... 분홍이 핑크고 핑크가 분홍이지, 분홍 말고 핑크가 뭐람...
애초 그렇게 말한 아내나, 점원에게 그대로 말을 전한 나 자신이나, 내 주문에 대해 열심히 분홍 아닌 핑크색 립스틱을 찾아 나섰던 점원이나, 잠시지만 모두 이상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다시 면세점 장면으로 되돌아가, 점원은 나에게 여러 개의 립스틱을 보여주며 각각의 색깔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A 립스틱의 색은 B 립스틱의 색에 비해 어떻고, 다시 A와 B에 비해 C 립스틱의 색은 또 어떻고...
그런데 나에겐 A나 B나 C나 모두 다 똑같은 색으로 보일 뿐이었다.
“다 똑같아 보입니다”와 같이 말하면 바보라도 될 것 같아 알아듣는 척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점원이 하는 말은 실상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내가 점원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 남녀의 유별함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특히 빨간색을 지각하는데 있어 남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여성이 남성에 비해 빨간색의 여러 종류들을 세세하게 구분한다. 빨간색을 보는 유전자가 X 성염색체에 있는데, X 성염색체에 있는 그 색깔 유전자가 쉽게 돌연변이를 일으킨다고 한다. 주지하듯 남성에 비해 여성이 X 염색체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이유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더욱 많은 빨간색을 구별하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남성은 XY, 여성은 XX).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색깔을 어찌하여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혹은 하나의 색깔을 무슨 이유로 구분하여 말하느냐고 이성 친구를 혹은 배우자를 마냥 타박해서는 곤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