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인 빙그레 하면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가? 정작 질문을 띄운 나에게는 세 가지가 먼저 떠올려진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빙그레 이글스”가 그 첫 번째이고,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바나나맛우유가 그 뒤를 잇는다. 그 중 바나나맛우유 이야기를 좀 해보자.
바나나맛우유는 내 나이랑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매일유업이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는 이름의 아류 제품을 내놓았으나 바나나맛우유의 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나를 포함하여 바나나맛우유에 대한 대중의 충성도는 실로 대단하다.
바나나맛우유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용기의 디자인마저도 소비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고 있는 각종 제품 중 디자인 측면에서 그 독특함과 꾸준함으로 소위 아이콘이라 부를만한 것이 바로 바나나맛우유의 용기인 것이다. 그 특유의 배불뚝이 항아리 용기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변함이 없다. 코카콜라 병의 디자인이 지난 2015년 10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는데, 바나나맛우유의 용기 디자인도 계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다들 아는 사실로 바나나맛우유엔 바나나가 들어가지 않는다. 상표등록을 위해서 “바나나우유”가 아닌 “바나나맛우유”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지금은 바나나 과즙이 아주 미량으로 첨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바나나는 내 어릴 적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아주 비싼 과일이었다. 그 비싼 바나나를 감히 어찌 우유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 싶다.
그런데 초창기의 바나나맛우유의 용기를 보면 재미있게도 “바나나”와 “우유”에 비해 “맛”의 글자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얼핏 보면 마치 “바나나우유”처럼 보인다. 당연한 마케팅 전략이겠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나는 내가 그리 좋아라 하는 그 우유의 이름이 “바나나우유”인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바나나맛우유”와 “바나나우유”의 차이는 “맛”이라는 한 음절에 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무시무시하다. “바나나우유”는 바나나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우유이고, “바나나맛우유”는 그렇지 않아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나나를 전혀 첨가하지 않고도 제품의 생산이 가능했다. (지금은 소량의 과즙만 추가하면 되는 일이고 말이다.)
“바나나우유”에 대비하여 “바나나맛우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청자에게는 “맛”이라는 말이 도드라지게 된다. 이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하자면 active zone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Active zone은 말에서 의미적으로 활성화가 이뤄지는 부분을 뜻한다. “바나나우유”에 대비하여 “바나나맛우유”라는 말을 고려해보면 “맛”이라는 어휘의 의미가 의미적으로 보다 활성화되기 마련인 것이다.
바나나맛우유의 초창기 용기 디자인에서 “맛”을 상대적으로 작은 글씨체로 표기한 것은 “맛”이 active zone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판매 전략이었던 것이다.
“파란 눈,” “빨간 눈,” “시퍼런 눈”의 세 표현을 비교해 보자.
모두 눈의 어디쯤과 관련한 색깔 표현들이다. 각각은 정확히 눈의 어느 부분에 대한 묘사일까?
아마도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내놓는 해석이 동일할 것이다.
“파란 눈”은 눈동자가 파랗다는 것이고, “빨간 눈”은 눈의 흰자 부위가 빨갛다는 뜻, 그리고 “시퍼런 눈”은 눈두덩이 멍이 들어 파랗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 각각의 부위가 바로 active zone이 된다.
“노란색 자전거가 참 예쁘다”고 말한다면 말하는 이는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자전거 체인이 노란색이면 “노란색 자전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전거의 안장이 노란색이어야 할까, 바퀴가 노란색이어야 할까, 아니면 프레임이 노란색이어야 할까? 체인과 안장, 바퀴, 프레임 중 어느 부분이 노란색일 때 노란색 자전거라고 부르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질까?
“빨간책”은 어떠한가? 책의 표지가 빨간색이면 빨간책라고 말할 법 한데, 종이가 온통 붉은색인 경우에도 빨간책이라고 말하게 될까? 내용이 불온하여 빨간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 어떠한 경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