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1일은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이 나라의 몽매한 백성들이 자장면의 고통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 좋아하는 짜장면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날이 바로 2011년 8월 31일이다.
* 관련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10831080900005
나는 지금껏 꺼내놓지 못하고 속앓이를 해왔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학식 높으신 국어학자님들께서 보신다면 역정을 내실 법도 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 워낙 민감하다보니 꽤 많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모르겠다.
MBC의 장수 프로그램 중에 “우리말 나들이”라는 것이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1997년 시작되어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냈고, 지금도 거의 매일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방송이 되고 있다. 실로 대단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혹시나 그 정체에 대해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 “우리말 좋은말,” “우리말 고운말,” “바른 말 고운 말,” “우리말 산책,” “우리말 겨루기” 등의 아류작(?)들을 나열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우리말 고운말”과 “바른 말 고운 말”은 프로그램의 공식 명칭인데, 그 띄어쓰기 방식이 서로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국립국어원의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 친절히 설명을 해주셨다. https://www.korean.go.kr/front/mcfaq/mcfaqView.do?&mn_id=62&mcfaq_seq=4383 결론은 “바른 말 고운 말”처럼 띄어쓰기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음, 그렇다면 TBS의 “우리말 고운말”은 프로그램의 제목부터가 엉터리인 셈인가?
열거한 프로그램들은 자국민들을 무지몽매한 존재로 규정하고 특히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와 관련하여 그들의 교화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모양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가 그 원인이겠으나, 공산국가 몇을 제외하고는 언어에 대하여 국민들의 계몽에 이와 같이 열을 올리는 국가를 나는 이 나라 대한민국 말고는 알지를 못한다.
언어의 통제라는 사명감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두어 가지만 이야기하자.
나의 어린 시절에는 TV 방송에 나오는 자막이라는 것이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의 모든 TV 프로그램에 자막이 필수적인 것 마냥 퍼져나갔다.
자막과 관련하여 한동안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내 시선을 계속해서 이끌었던 적이 있다. 출연자가 “너무 좋아요!”라고 하는 말에 대해 자막은 “너무 좋아요!”가 아니라 “정말 좋아요!”로 둔갑술을 부리곤 했다. 안 봐도 뻔한 비디오인 것이, “너무”는 부정적인 표현과 어울려야 하고 “정말”은 긍정적인 표현과 어울려야 한다는, 그래야 마음이 편하시겠다는 어느 분들의 의사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관심을 가지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정말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없다. 다들 “너무 좋아요!”라고 한결같이 외치는 상황에서 자막의 둔갑술은 공허할 뿐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이건 꼭 시험에 나온다며 외우라 강조하셨던 말이 있는데, 그것이 “시나브로”이다. 그 말씀 그대로 교내외 여러 시험에서 “시나브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출제가 되었다. “시나브로”가 옛 정취 넘치는 아름다운 우리말이니 그 사용을 널리 권장하자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 애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난리였던 것인지 기억이 없다. 그 바람이 얼마나 거셌던지 심지어는 “시나브로”라는 이름의 담배까지 출시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나브로”에 대해 그렇게나 귀 따갑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일상의 언어생활을 통해 “시나브로”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 그리고 주변에서 “시나브로”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또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시나브로”가 맞는지 “시나브르”가 맞는지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아야만 했다.
아나운서는 뉴스를 보도하고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우리나라의 아나운서는 조금은 특별한 자격 내지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 같다. 바로 몽매한 대중을 가르치는 일말이다. 앞서 언급한 TV 프로그램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라디오를 듣다보면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을 잇는 자투리 시간에 어김없이 아나운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열심히 나를 가르친다.
“여러분 지금까지 '2주 후'를 뭐라고 하셨나요? 혹시 '다다음주'라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잘못된 표현을 써오신 겁니다. 지금부터는 '땡땡땡'이라고 말하세요. 아시겠죠?”
그렇게나 짧은 시간 동안 부족한 나의 국어 실력에 대해 충분히 타박하고 그 귀한 가르침을 남기며 그들은 사라진다.
* '땡땡땡' 자리에는 무슨 말이 들어가야 할까? 정답은 '담담주'란다. 이렇게나 생소한 말을 나이 사십이 훌쩍 넘어서야 배웠다.
적어도 언어에 대해서만큼은 이 지긋지긋한 국가주의적 사고에서 이젠 좀 벗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언어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해 간섭하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길을 내어 안내한다고 해도 언어가 그 길 그대로를 따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표준어 정책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사실상 많지 않다. 대한민국은 그 많지 않은 국가 중의 하나이다. 더 중요한 사실로, 표준어 정책이 있고 없고 간에 우리 대한민국과 같이 온 국민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는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거의 없다. 워낙 통제가 깊숙이 이뤄지다 보니 국민들은 스스로에게 통제가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조차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잘 길들여진 결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해댄다. 누구 맞춤법이 어쩌고 저쩌고, 저쩌고 어쩌고... 지하에서 세종대왕이 통곡하시겠다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알지 않는가. 맞춤법, 띄어쓰기 그까짓 거 좀 틀려도 세종대왕님께서 그닥 노여워하실 것 같지는 않다.
소심한 나는 오늘도 나름의 저항의식으로 무장한 채 혼잣말로 외쳐본다.
“여러분 모두 국가주의적 사고에서 해방되시길 바래요! 너무 바래요!! 꼭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