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large와 big은 정말 동의어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닌 것 같다. 그 증거를 하나만 들자면, my big sister는 “나의 큰 언니”쯤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나의 큰 언니를 이를 때 my large sister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단어의 관계는 ‘동의어’ 보다는 ‘유의어’라는 말로 기술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동의어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어휘들의 짝은 많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할까요?”라고 영어로 물을 때 “Can I ask you a private question?”이라 한다면,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다소 어색해 할 것이다. 그에게는 “Can I ask you a personal question?”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상의 의미를 기준으로 private과 personal이 서로 공유하는 바가 분명 있을진대, 쓰임새는 이렇듯 다를 수 있다.
심지어 우리말의 “예/네”와 영어의 “yes”도 상호간 동의어로 보기가 어렵다.
뉴스 앵커가 광화문에 나가 있는 취재 기자 홍길동 씨를 연결한다.
“취재 기자 연결해 보겠습니다. 홍길동 기자 나와 주세요.”
“네, 저는 광화문에 나와 있습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인사를 한다.
“네, 시청자 여러분 한 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광화문에 나가 있는 취재 기자의 “네,” 사회자의 인사말 속의 “네”는 모두 영어의 “yes”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동의어처럼 보이는 유의어들의 사례는 그밖에도 무궁무진하다.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변소”라는 말을 쓰셨다. 이젠 주변의 누구도 “변소”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수업 중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선생님, 변소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주변은 웃음바다가 되어 버릴 것이다. 변소에 다녀온 학생에겐 아마도 변소 냄새도 좀 날 것이다. 당연히 “화장실”이라는 멋지고 세련된 말이 “변소”를 대신한지 이미 오래고, 이는 완곡어법(euphemism)이라는 사회언어학적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완곡어법의 대상이 되는 모든 어휘들의 짝(예: 죽다-돌아가다, insane-sick)들과 마찬가지로 "변소"와 "화장실"은 사실상 동의어일 수 없다. “변소”는 웃음을 자아내고 변소 냄새가 따라붙는 공간이지만, “화장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벽한 의미의 동의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옳다.
왜일까? 동의어는 왜 존재하지 않을까?
인간 언어의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한 속성은 경제성에 있다.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을 두 개 이상 가지는 것은 경제적이지 못한 일이다. 어떤 말과 어떤 말이 경쟁을 하다보면 반드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게 되어 있다. 공평하게 쓰임새를 나눠 갖는 경우란 없다. 경제성의 논리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동의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의어는 왜 존재할까? 어차피 거기서 거기의 의미라면 굳이 두 개 이상의 유의어를 운용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만사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법, 유의어의 존재에도 당연히 이유는 있다. 그것은 인간의 표현 욕구이다. 자신의 생각을 남들과는 다르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부터 유의어는 존재 이유를 가진다.
이렇듯, 동의어의 부재와 유의어의 존재는 “경제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가치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