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직 〈Let’s birding!〉: 어떤 감각을 활성화하는 능동적인 공동체
김민관(아트신 편집장)
‘새를 하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는 새와 유대감을 갖는 것, 새를 반려동물로 길들일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야생동물로서의 새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그와 삶의 반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감행하고 그에 대한 감각을 살피며 이전의 내가 가진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새를 사랑하는 것. 어쩌면 새를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 ‘새-하기’를 하자는 것, 곧 ‘렛츠 버딩(Let’s birding!)’은 새-하다를 새-하다를 함께하는 연대의 정치로 확장하는 이름이다. 지난 《2021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에서 선보인 〈Let’s Birding〉(2021)의 연장선상에 있는, 〈렛츠 버딩: 새 보기 편〉와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열리며 청각과 시각이 다소 불편한 새로운 관객을 초대했다.
우선 다섯 시간에 걸쳐서 자기소개와 탐조(探照), 탐조의 결과물을 함께 나누는 과정은 일반적인 워크숍의 형태에 가까운 반면, 공연과 퍼포먼스를 해온 이성직의 활동에 비추어 보면, 이는 관객의 수행성을 강조하는 조금 더 능동적인 참여가 바탕이 되는, 너른 의미의 공연 혹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워크숍이 일반적으로 예술의 결과물보다는 결정적이지 않고 더 정밀하지 않으며, 따라서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어떤 선입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굳이 워크숍을 공연의 열화 버전으로서 전제하며 워크숍으로 이를 정의하지 않을 필요 역시 없을 것이다.
강원도 화천의 자연 생태를 바탕으로 한 지난 공연에서의 탐조는 실외에서 진행되었다면, 이번 워크숍은 일정한 구획이 명시되는 창경궁 안에서 진행되었다. 창경궁은 화천에 비해 다소 인공적이며 인간의 질서와 합성된 하이브리드 생태계에 조금 더 가깝다고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경계 없이 펼쳐진 자연 광경으로서는 화천이 나았지만, 담으로 구획된 공간의 안정성이 주는 집단의 경계는 창경궁이 조금 더 안정적이었다. 일단 앞선 새로운 관객의 초대로 인해, 일반적인 음성 언어 체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렛츠 버딩: 새 보기 편〉에는 두 개의 통역―문자 통역과 수어 통역―과 총 세 개의 언어가 동원되었고, 이는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에서는 하나의 음성 언어가 자리 잡는다.
이념적인 차원에서 이번 ‘렛츠 버딩’의 가장 큰 변화는 이러한 새로운 언어와의 관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은 이와 같은 차원에서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다. 기존에 새를 타자로 두는 ‘렛츠 버딩’의 형식이 기존 형식을 반복하되 타자와의 네트워크를 더함으로써 단순하게 이원적 양식으로 분별되고 그럼으로써 은폐되는 인간-비인간 사이의 다양한 존재들을 재현하여 펼쳐내며, 위계적이고 계급적인 네트워크를 조금 더 유연한 방식으로 변환한다고도 할 것이다.
진행을 맡은 백소정은 전체 워크숍의 가이드로 임한다. 처음 참여자는 자기소개할 때 이름의 한자 뜻을 함께 말하고, 앞에 주어져 있는 새 이름과 뒷면의 설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소개 이후 다른 참가자들은 두 손을 들어 반짝거리며 “환영해요 ○○○”라고 하여 자신의 새의 이름 ○○○―사회적으로 합의된 이름―을 받아들인다. 이어 눈을 감고 각자 생각한 새에 대한 기억을 전하는 한편, 등 뒤로 양쪽 어깻죽지의 날개뼈를 찾아보고 둘씩 짝지어서 상대방의 날개를 두드리는 시간을 갖는다. 다음으로 “‘함께 새 하는 중’을 위한 마음가짐”이라는 열 개의 어떤 테제를 백소정이 선창한 후 참여자 모두 함께 읽는다.
창경궁으로 버스를 함께 타고 이동하여 본격적으로 새를 탐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쌍안경 사용법을 배우고, 새를 발견하면 쌍안경으로 새를 나의 쪽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새의 시간 안에 ‘머문다’. 새는 날아가고 그 시간은 깨어진다. 새는 우리를 마주하지 않고서도 우리를 감지―아마도 위험이나 자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간주―하고 도망가는 것일 수 있다. 인공의 시간 안에 자연의 시간이 들어왔음, 그 생경한 감각이 새가 날아가는 순간 우리가 완전히 자연의 질서를 우리의 것으로 전유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 곧 자연과 인간의 간격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확인하는 순간 생겨난다.
“탐조 규칙”은 공동의 보기와 듣기를 위해 존재한다. 그중에 소리는 새를 보게 하는 순간의 일부이다.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방향을 지시하도록 하는 탐조에 대한 공동의 기호는, 비단 소리를 뒤늦게 듣는 자에게도 또는 소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에게도 도움을 주지만, 그 소리를 먼저 들을 수 있는 자가 소리를 ‘단지 볼 수만 있는 자’에게 전하는 번역의 방식으로서 존재한다.
창경궁 안에서의 탐조 이후, 다시 돌아와 네 명씩 조를 지어 보고 왔던 새를 조류도감인 〈한국의 새〉를 통해, 정확히 식별하는 동정(同定)의 과정을 갖는다. 이후 ‘비로소’ 이름을 찾은 새와 그 새의 개체수를 누구나 조류 생태계를 관찰하고 나서 기록할 수 있는, 조류 관찰 데이터베이스인 “이버드(e-bird)”라는 어플을 통해, “Let’s birding!”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안녕히 날아가세요!”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은 〈렛츠 버딩: 새 보기 편〉에서는 문자 통역과 수어 통역이 없다. 아마도 참여자는 조금 더 명확하게 자신의 말을 들리는 범주 안에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모니터링한다는 감각을 준다. 시각적 어려움을 가진 참여자의 감각은 새-하기의 특정 감각―곧 듣기의 감각―과 절합된다.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은 새의 언어를 이해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탈바꿈시키면서 잘 듣는 자―보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자―에게 잘 들릴 수 있게 하는 매개의 역량을 동시에 요청한다. 이는 보는 것을 듣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과 같다.
쌍안경을 사용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익히는 대신에 현장에 오기 전에 소리들을 고유한 새 각자의 몫으로 돌려주기 위한 어떤 절차가 준비된다. 곧 시민 과학자 모니터링 웹 “네이처링”에서 아카이브된 새의 소리를 듣는다. 이는 창경궁에서 주로 출몰하는 그리고 그렇게 예상 범위 안에 들어오는 새들에 해당한다.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은 〈렛츠 버딩: 새 보기 편〉에 비해 새의 언어에 조금 더 친숙해지도록 한다. 새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새의 시간 안에 있음 그리고 새의 공간 바깥에 있음을 깨닫는 것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정보이며, 새의 기호를 인간의 언어가 가진 복잡성과 세밀함으로 조금 더 온전하게 치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한 감각은 보기에서 듣기로 대체된다. 물론 이는 보기의 감각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쌍안경 대신 우리는 귀의 감각을 앞세운다. 보기는 보조적인 감각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하나를 더 보게 된다. 곧 우리는 보기 힘든 이가 새 이외의 모든 것을 듣고 있음을 본다. 새를 듣는 과정은 모든 것들을 소리 정보로 치환하며 그 정보로서 세계를 재편하거나 압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탐지 또는 감각하는 차원에서 우선 정보의 출처를 소리로 옮기는 어떤 과정은,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또는 소리를 듣고 난 이후에 복기의 차원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이는 ‘비로소’ 세계를 들리는 것으로 만드는 것 또는 세계의 이미지들에 어떤 소릿값을 부여하는 것이다.
창경궁의 탐조에는 각자 들었던 소리를 녹음하는 미션이 추가되었다. 이는 탐조 이후 돌아와서 공유 이후 모두 함께 듣고 그 특징을 기록하는 시간으로 연장된다. “시민 과학자 모니터링 웹 “네이처링”에 기록하는 절차에서 〈렛츠 버딩: 새 보기 편〉과 마찬가지로 “렛츠버딩”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한다. 현장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던 분―“쇠솔새”로 명명되었던―은 ‘서울의새’의 이진아 대표로, 그는 탐조 이전에 새의 상황에 따른 다른 언어가 존재함을 주지시키며 새의 소리가 하나의 언어로 대표되고 있음의 지식에 균열을 낸다. 현장에서는 대표적인 새의 소리가 조금 더 복잡한 언어 체계 속 일부이며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소리를 통해 그 언어가 문법의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직접 경험한다. 또한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는 환경적인 요소 외에도 의도치 않게 녹음 플랫폼 자체에 따른 소리 왜곡이나 감축 등 전반적인 소리 변형에 의해, 기억을 더듬어 나가며 소리를 복기해야 하거나 선지식에 따른 재환원 작용이 필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렛츠 버딩: 새 듣기 편〉은 처음에 “철새의 텃새화”를 이야기한다. “이동한 곳의 서식지 환경이 적절하면” 또는 “원래 서식지가 파괴되면” 다시 돌아가지 않는 현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화두를 ‘렛츠 버딩’이 이후 어떤 식으로 확장할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타자로서의 새에서 또 다른 타자의 감각으로 연장하는 어떤 감각 공동체로서의 연대의 윤리를 지속할지도 알 수 없다. 반면 “렛츠 버딩”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탐조 아카이브를 활용하거나 탐조의 첫 경험을 선사하는 것을 넘어 탐조의 조금 더 지속적인 경험 자체를 유도하며 탐조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탐조의 방식은 작가를 넘어 참여자에게도 다른 감각, 자연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는 경로, 다른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태도 등을 향한 교육의 방법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일방향적이기보다 우연적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생명과의 짧은 조우가 도시의 리듬에 균열을 낸다. ‘새-하기’라는 용어와 함께 ‘렛츠 버딩’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보다 세계의 재구성에 대한 어떤 역량을 준다. 새와 나 ‘사이’를 확인하는, 그 경계에 위치하는 능동적인 ‘하기’의 방식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