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바깥에 천사가 이미 도착해 있다.
최혜련 《오늘 다시 사심을》(2026)을 위한 평론
세월을 맞은 챔버(CHAMBER)(1)의 나무 기둥과 드러난 벽 위로, 최혜련의 작업들은 들어맞듯 제자리를 찾아 걸려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로 아마 전시를 마주한 내가 작가가 성장한 시골의 집을 옮겨 놓은 듯 짜 놓은 공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탄생과 시작, 관련된 기억의 원본은 3대가 모여 살던 옛 집 방안의 풍경에서 시작하여 집의 구석구석과 그 주변 밭까지가 모티브이며, 각 작품의 견본이라 할 수 있는 집안의 물건과 상징들이 본래 묘한 분위기를 가진 탓(2)에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옥 처마에 달린 계절 곡식과 저장 음식, 흙벽과 흙바닥, (취향이라기 보단)시간차를 두고 모았을 색색의 가구들, 그 속에 모여 살았던 세대의 풍경과 전례 퍼포먼스를 묘사한 결과물은 현재와는 조금 동떨어져 이젠 추억할 노스탤지어라고 하기란 어렵고 비현실적인 설화가 되어있다. 분명 누군가의 과거라도 지금 시점에서 떠올렸을 때 고개를 갸웃하는 집마다의 특이한 관습이나 풍경이 있었겠지만 대다수 강렬한 인상이라거나 되풀이할 필요로 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가끔 이런 과거들이 어떤이에게는, 그리고 최혜련에게는 아직 생생하고 온기가 남아있는 유효한 원형으로서,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튀어나오는 식으로 놀래키거나 곁에서 얼쩡거린다. 그 인기척들은 《최후의 구조》(2013)에서 퉁샹에 대한 염원으로부터 스스로 굄돌이 된 채 등장하여(3) 《마지막 호사》(2015) 간절한 바람이 불러낸 의식의 향연으로 피어나고(4) 《누가 그 진주문 들어갈까》(2018)에서 주문의 효험으로부터 촉발된 ‘기도’라는 행위와 믿음의 실체(원본 혹은 출발점)에 대한 인식(5)으로 이어진다.
*이 내용은 이전의 전시 혹은 작품을 개별로 분석하지 못하고 《오늘 다시 사심을》을 기준으로 역행하여 바라본 해석을 따른다.
각기 작업의 발표 시기마다 간격은 있지만, 거듭되는 이미지가 있다. 물건이나 구체화 하지 않은 형태들이 쌓여있고, 그 위를 선이 지나가거나 늘어져 있는 식의 화면이다. 고목에 천을 묶어 늘어뜨린 서낭당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무작위로 쌓아올린 탑 같이 보이기도 한다. 내 생각엔,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이후의 행보에서 풀어낼지도 모르지만, 작가 스스로 커다랗게 가지고 있던 작업의 원동력인 불안과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여태껏 짚어준 적은 없다. 그러나 부단히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소망의 상징물을 제작하고 기도하며 음악으로 기려왔다. 단지 설명을 위해 단순화하긴 무리일 수 있겠지만, 무속과 민간 그리고 신화의 이미지가 주된 발화 도구가 된 경위로, 가장 편안하지만 동시에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토속적 삶의 터가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목가적인 전원의 분위기, 경험의 토대가 된 독특한 가풍은 최혜련의 작풍을 축적하는 질료가 되어 주었다.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상상을 팽창시켜가며 만든 형상들은 상승을 지속하다 어느 순간 지상으로 내려온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심줄을 캐는 것처럼, 진리는 현실에 내려 앉아 있었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은 것처럼. 기도와 음성과 현란함과 경건함은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숨 쉬듯 자리 했을 뿐인 벽지와 성화와 음률 없는 텍스트, 몇 걸음 바깥 밭 속에 어디 가지도 않은 채 고이 물들어 실존하고 있었다. 비록 ‘오늘 다시 산다는 것’을 오독해왔고 어쩌면 지금도 오늘 다시 사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그 마음을 아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최혜련이 구현해 놓은 피안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추상의 영역에 있지 아니하며 감각을 속이는 주문(6)도 아니다.
(1) 서울 성북구 소재 1965년 지어진 목조 단층 주택을 개조한 전시 공간 @chamber26_6
(2) 우연히 만난 작가와 대화 중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됨.
(3) 최혜련이 설정한 가상의 인격체 ‘퉁샹’에게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굄돌’이 되어 가상세계로 진입한다,는 작품의 세계관
(4) 안정감을 찾아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악몽을 꾸는 여자는 비행을 시도하다 추락한다. <마지막 호사>는 이 넋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5) 일명 ‘양파망 주문’이 발단이 되어 기도의 힘에 대해 제의적 해석으로 풀어내었다. 양파망 주문은 6번 각주 참고
영상 기록 : https://url.kr/l7dtfb
(6) 어릴 적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내려 보내고도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자, 작가의 할머니가 목에 양파망을 두르고 “물고기야 여기 그물이 있으니 빨리 바다로 도망가라”고 외던 주문을 말한다. 실제로 이 주문 덕분에 가시가 내려간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날개옷> 2026
방수 천 메타폴, 거치대, 홀로그램 행잉 볼, 가변설치
위: <주렁주렁>, 2026, 인조 모피, 천, 솜, 아크릴 볼, 실, 조화, 유목, 도토리 모형, 가변설치
아래: <자라서 뭐가 될 거니>, 2026, 수세미 삼베, 천, 인조가죽, 솜, 철사, 아크릴 볼, 비즈, 톱밥, 흙, 공작새 깃털, 대나무 살, PVC비닐, 실 커튼, 가변설치
<흙에서 캐낸 심장>, 2026
천, 솜, 금사, 은사, 우레탄 줄, 비즈, 아크릴 볼, 모형 산호초, 실 커튼, 줄 조명, 메탈 링, 망사, 공작새 깃털 트림, 가변설치
'감사의 공간’ 전경
<풍경, 풍경>, <수복>, <빛 무늬>, <오늘 다시 사심을>, <해가 드는 자리>, <희>, <꽃 방석>, <오늘 다시 잇는 노래>
<오늘 다시 사심을>, 2026
공단에 컬러 프린트 후 누빔, 솜, 비즈, 금사, 은사, 레이스 트림, 프린지 트림
<수복>, 2026, 공단에 컬러 프린트 후 누빔, 솜, 프린지 트림
/ <풍경, 풍경>
<풍경, 풍경>, 2026
공단에 컬러 프린트, 철사, 실 커튼, 깃털, 풍경 종, 줄 조명,
가변 설치
<잃어버린 낙원>, 2026
수세미 삼베와 천에 과슈, 실, 나무, 가변설치
상당한 노동력을 가늠케 하는 최혜련의 작품들은 작업량에 비례하려는 듯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부피를 허투루 채우지 않고 공중에 드리운 얇은 실의 모음과 아주 가벼운 깃털, 공간을 양감 있게 장악한 원의 형체들도 필요 이상 부풀지 않고 만족스럽게 배열되어있다. 특히 반짝임과 현란함은, 무엇을 감추기 위해 작품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실루엣을 밝히고 있다. 필자가 두 번째 전시를 관람하러 방문했을 때, 함께 공간에 있던 관객들은 일제히 작가가 배치한 영역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었다. 감각적이기도 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가 본인의 기질이 불러온 예상된 풍경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어느 형태 하나 뭉뚱그리거나 얼버무리는 점 없이 일관된 루틴과 목표를 향한 할당치에 대한 산물(7)이므로, 꾸준한 노동으로 가족들을 입히고 먹이면서도 가정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성실성과 철저함이라는 소산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순조롭게도 총 13점의 작품은 서로 다른 제목을 부여받아 흙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때론 부분으로, 때론 거리감 있는 하나로 엮여있기도 하면서 최혜련이 겪어온 시간대로 안내하고 있는데, 이 중 가히 눈길이 가는 <오늘 다시 사심을>의 경우는 다른 인상을 풍기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다른 작품들이 집 안팎의 정경이라거나 실제 들었던 음성, 문장, 장소로부터 비롯된 것에 비해 유일하게 지시 대상이 없는 도상이다. 예배, 생활의 구원, 삶의 노동, 기도, 농작물(생명)을 대응한 유기물로 둘러싸인 공간의 가장 안쪽에 두는 것으로 결국 이 모든 구성물의 궁극적 지향점인 천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8) 도상의 패턴은 찬송가와 성경을 담던 할머니의 철제 수납함-별다른 의도 없이 단지 보관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만화 같은 마을’이라지만 러시아 민중적 성화인 루복(Lubok, лубок)(9)을 자동으로 연상시킨다. 따라서 최혜련만의 루복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퉁샹이 있는 곳은 찾아 헤맬 곳이 아니게 되며 더 이상 저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탑을 쌓아 올릴 필요 없이 이 땅의 경험 안에 충분히 영성이 임재한다는-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점은, 언약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붙들고 간구했던 그 작은 방이 항상 감사하자,는 암송(10)을 빌어 나와 내 가족을 이어 살고 다시 살게 했던 거룩한 장소라는 점을 오롯이 오래 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7) 작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된 챔버 인터뷰를 바탕으로 기재함.
(8) 전시장 내 QR코드를 통해 연결된 pdf에는 작품마다의 짤막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대체로 표현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https://drive.google.com/file/d/1j0a5bK-uKqFGlhP9Kkkn2bADQfBmEg-n/view
(9) 러시아 민속화의 개념으로, 초기 루복의 경우 엄중한 정교회 이콘(Icon)을 농가의 문화와 소박한 정경을 통해 대중적으로 풀어내어 서민에게 도상을 친근하게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자신이 가진 문화의 독특함을 알게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온다. 아니, 느리게 온다기보다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깨닫는다.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타인과의 대화가 조금 깊어질 때, 문화를 공유할 때(만날 때), 각기 다른 추억을 말할 때, 물건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명절에 먹은 음식이 다르다거나 ‘원래’ 그래왔던 일들이 ‘원래’가 아니었음을 목격할 때.
최혜련의 작품은 지속해서 ‘그때 내가 본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표를 달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손끝으로 충실히 소환하고 복원해왔던 새로운 물건들과 방은, 이미 너무 명확하게 한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현 3~40대의 한국 여성, 특히 할머니-어머니로부터 가정을 이해해 온 소위 모성커뮤니티의 경험이 있는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삶의 형태는 제각각 일지라도 관통하는 인생의 사건이나 줄기의 형태가 서로 닮아 이로부터 오는 공감의 감각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도 있다. 특히나 할머니의 존재는 3대째 아이에게 인생의 방향이나 가치관을 형성하는 상징 혹은 전부가 될 수 있고, 이런 측면에서 ‘그것은 무엇이었나’의 물음보다 ‘나의 할머니는 어떤 경위로 내게 이런 형태를 남겨주었나’의 질문으로 변화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 전시로 말미암아 최헤련에게는 ‘이미’ 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계속해서 ‘다시’ 사는 풍경을 꺼내게 되는지도 자신에게 캐물을 수 있는 새로운 질문의 기회였다.
질문은 때로 답이 되고, 답은 이미 내려져 있기도 하며, 그래서 묻는다는 것은 답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질문의 문장을 한 땀 한 땀 직조해 나가면서 만져지는 실제 현상과 물질로 구체화한 결과물은 우리 눈앞에서 생생히 다시 오늘을 살았다. 그렇게 오늘 다시 살았던 옷(11)은 죽음을 예비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잊혀졌던 낙원에서 새로 입을 육신을 예비하는 일이었다.(12)
(11) 최혜련이 할머니의 수의를 모티브로 제작한 <날개옷>
(12) 참으로 우리가 여기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 5:2 (썩어질 육신 이후 영원한 부활을 염원하며 새 몸을 입기를 소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