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이창동의『시』(2010)로부터
땅 파는 자, ‘우리’
92년생 화자인 내게, ‘땅이나 판다.’라는 말에는 현실성 없이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축내는 행위를 가리키는 뉘앙스가 있다. 우스갯소리 같겠지만,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자기 땅에 전쟁이 나도 예술을 논하고 있으니 정말 땅이나 파는 사람들로 보였을 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취리히에 모인 다다이스트(1)들은 기존 예술의 의미와 언어 자체를 의심하며 형식을 실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에 머문 자코메티 또한 극도로 작은 인간 형상으로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재현할 것인가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특별히 현실과 다른 곳에 놓인 존재는 아닐 테지만 죽음이 도사리는 시대에도 땅이나 파는 일에 시간을 쏟은 자들의 구멍 밑에는 창작이 있었다.
갯벌에 난 게구멍들. 지금 내 주변에도 곳곳에 그런 구멍들이 있다. 이젠 다들 각개전투이다. 어떻게 지내다 왔는지, 저 길로 숨은 쉬어지는지를 가끔 내미는 그들의 작품으로는 그 아래의 삶을 짐작할 수는 없다. 누군가 애써 둔 작품 앞에 모여 돌아가며 뱉는 소개 안에서 새삼스레 주변에 창작자가 깔렸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그곳을 나와 다시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누군가가 깔아둔 배경음악에도(〈아네스의 노래(2)〉는 이때 듣게 되었다). 우리가 각자 무엇을 하다 모인 사람이었는지 서리가 잔뜩 낀 창을 닦아낸 듯 차갑고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 무렵부터 꽂혀 듣게 된〈아네스의 노래〉가 차 안 가득 반복되던 때, 무려 16년 전에 나온 이창동의『시』(2010)를 보게 된다. 감독은 당시 한 인터뷰에서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어 만들어진 영화라고 했는데, 그런 『시』에는, 시나 써보려 문화센터를 찾은 미자라는 여성 노인이 나오고, 쓸 마음 없이 적당히 모인 사람들, 음담패설이 뒤섞인 낭송회, 시를 더는 쓰지 않으려는 술 취한 시인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시에 대한 창작자의 현실 이야기나 윤리를 전개하거나 죽어가는 시를 급히 살려낼 방법을 찾는 대신, 영화의 시점인 지금 막- 발생한 한 소녀의 죽음 앞에서, 지금 막-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한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시를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아름다움의 겉을 훑는 재생산의 언어 둘레를 돌고 돌다가 현실을 마주하는 방식 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창작에서, 쓰는 일은 결국 보는 일과 말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쓰기는 인간이 가지는 몸의 물리적 한계와 계급, 권력으로부터 가장 벗어난 곳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등장한다.
(1) 다다이스트(dadaist): 모든 사회적,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 운동 다다이즘을 신봉하거나 주장하는 사람.
(2)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시》(2010)에서 죽은 여학생 희진의 세례명은 ‘아네스’로 설정되어 있으며, 영화의 마지막에 미자와 희진이 낭송하는 시「아네스의 노래」의 제목으로 이어진다. 이 시를 바탕으로 가수 박기영이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디지털 싱글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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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 ‘희진’
영화는 강물에 떠내려온 한 소녀의 젖은 뒤통수로 아릿하고 떫은 시작을 연다. 이 대목에서 그 존재는 긴 침묵으로 다룬다. 소녀는, 말 하고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채, 중심축이 되는 사건의 모습을 띤 부표처럼 반은 물에 잠긴 채 반은 드러난 채 등장하게 된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 할 때마다 이기적인 산 자들에게 밀어 넣어지는 듯한 소녀의 이름은, 희진.
희진은 물리적인 죽음의 상태로 아무 말도 전할 수 없는 자이다. 여기서 희진의 말 하기란, 인물의 힘과 무력의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말하기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행위만이 아닌 현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발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희진이 처한 상황은 말할 수 있음의 박탈 곧 말하기의 한계 지점을 건드린다. 이후 영화 속 미자 할머니가 전개하는 쓰기는 실은 이 한계로부터 태동된다. 그렇다는 것은 이 쓰기의 행위로 남겨지는 기록은, 물리적 육체와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말할 수 없던 존재의 자리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내는 말하기의 한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외면하는 자, ‘종욱’
보지 않으면 기록할 것도 없다. 이창동의 직전 영화『밀양』(2007)(3)이 피해자 쪽의 시선에서 다뤘다면, 이 영화에서는 가해자 가족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피해를 입힌 자와 그의 가족 그 누구도 희진 쪽을 바라보고 서 있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도 속죄(4)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속죄는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해 또는 비겨 없애기 위한 식보다는 지은 죄로부터 기인된 직접적인 참된 행위를 수반한다. 개인의 회개를 넘어 공동체와 사회의 회복을 향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건의 반대편에 있는 무관한 사람들처럼, 말하기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지는 것을 막는다. 영화 초반 아무 설명 없이 미자를 태워 한 식당 안 독립적인 방에 데려와 모였을 때에도, 이 밖으로 다른 말이 나가지 않도록 먼저 말을 맞춰야 한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여섯 명의 남학생들과 그의 아버지들은, 각자500만 원씩 부담금을 정하는데, 죄값을 동일하게 나눠지자는 것이 아닌 적당한 위로금을 만들어 사건을 은닉하고 자식의 앞날이 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폭력적인 말하기만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그 말들 뒤에 종욱은 자신의 말조차 갖지 않고 맞춰 준 말 뒤로 물러서 있을 뿐, 희진 쪽은 물론 자신이 지은 죄 쪽 어느 한편도 바라보지 않고 티비와 컴퓨터, 오락기 등의 모니터만을 바라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딱 한 명. 종욱의 외할머니이자 그를 엄마 대신 돌보고 있는 주양육자인 미자만이 그 속죄의 텅 빈 곳을 서성인다. 그러다 미자는 성당의 장례미사까지 찾아가 우발적으로 희진의 사진 액자를 훔쳐 나와 종욱의 식탁 앞에 펴 둔다. 그 외면 한가운데로 소녀의 얼굴을 들이밀어 분노를 부여잡은 표정으로 미자는 손자를 한참 지켜본다. 쓰기 이전에 미자는 먼저 보게 하고, 보려고 했다.
(3) 밀양 : 이창동 감독의 영화《밀양》(2007)은 이청준의 소설《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며,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이 밀양으로 이주한 뒤 아들의 죽음과 신앙, 용서의 문제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다.
(4) 속죄(贖罪): 이 글에서는 넓은 의미의 속죄를 사용했으나, 문자 그대로는 ‘죄를 속하는 것’, 즉 어떤 대가나 행위를 통해 죄 있는 상태를 해소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종교적 맥락에서 발전한 개념으로, 죄의 고백과 회개, 희생 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죄책에서 벗어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의 사면과 구원의 의미로 심화되었다. (출처:라이프성경사전)
쓰기로 마음먹는 자, ‘미자’
미자가 등록한 문화센터의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시를 쓰기로 마음먹는 것이라 했다. 미자는 처음에는 주변의 꽃과 나무, 바람, 사과의 외형을 기웃거리며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부터 아름다울 수 있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했다.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시를 배우는 교실 안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때’라고 적힌 보드 앞에 앉아 돌아가며 그때를 회상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체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이야기에 속한다. 카메라의 앵글은 딱 한 번 보드의 아름다움이라는 글자 밖으로 치워지는데, 불륜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한 여인의 고백 앞에서만 그랬다. 그 한 번은, 이 영화가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테두리를 어디까지 믿는지 드러낸 순간이다. 그리고 미자는 자신의 머릿속 가장 오래된 기억, 이름을 불러주며 “미자야. 이리 와.” 하는 언니의 환한 목소리를 떠올려 이야기했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것은, 주체하기 힘든 슬픈 울먹임으로 그 기억을 간신히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죽은 희진의 운명을 바라보는 일은, 미자의 오래된 기억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찬란한 핏덩이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진 그런 현실. 미자만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미자의 기억의 역설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노인이 소녀를 가장 끝까지 붙드는 사람인 것이다. 기억하는 자들은 잊으려 하고 잊어가는 사람은 기억하려 한다. 이 아이러니가 기록의 절박함이 되어 쓰기의 다른 울림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쓰기의 행위로 남겨지는 기록은, 물리적 육체와 시간의 제약을 넘어 말할 수 없었던 존재의 자리를 다시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다. 말할 수 없게 된 희진의 한계와, 기억할 수 없게 되어 가는 자신의 한계를 수첩 위에서 함께 건너기 때문이다.
다시 위에 시종일관 이기심으로 가득한 가해자들의 작당모의의 방으로 돌아가면, 카메라는 그들이 앉아있는 방에 고정된 채, 방을 벗어나 바깥으로 향한 미자를 한 프레임 안에 비춘다. 나간 미자는 유리창 밖의 붉은 꽃을 들여다보고 있고 안의 사람들은 저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다며 끌끌 거린다. 지금 이런 중대한 대화 중에 나가 꽃이나 보는 게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들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꽃만 보던 미자. 영화에서 종종 클로즈업되던 미자의 수첩에 이렇게 적힌다. ‘피같이 붉은 꽃’. 이는 미자가 초반에 시를 쓰기로 들뜬 마음에서 방문한 병원 창가에 놓여 있던 동백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경탄하던 장면과 대조된다. 처음 미자는 겉의 아름다움만을 훑으며 느끼고 전달했다. 갸륵한 눈빛을 한 미자에게 의사는 사실 조화라 귀띔해 준다. 또 죽은 희진의 어머니를 설득하려 찾아가는 길에 만난 살구의 아름다움을 그 어머니 앞에서 심취해 떠들던 장면에서도 그랬다. 그때까지 미자가 보는 세상은, 진실을 마주 보는 주의력이 없어도 발견할 수 있는 흔히 시에 쓰일 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피같이 붉은 꽃’이라는 메모는, 더는 아름다움을 현실의 바깥에서 피상적으로 찾지 않게 된 변화의 순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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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남겨진 미자의 시 한 편이 낭송된다. 제목〈아네스의 노래〉는, 극 중 희진의 세례명 ‘아녜스’(5)를 따왔다. 처음에는 미자의 목소리로 낭송되다 중반부터 희진에게 시가 넘어간다. 두 사람이 읽는 하나의 시는 미자가 보여준 쓰기가 더는 자기표현만이 아닌,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글이 되게 한 일로 보인다. 목소리를 건네는 것으로 답하는 이 형식이, 이 영화가 시를 다시 묻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물론, 미자가 쓴 이 시 한 편이, 이미 죽은 자에게 위로가 되거나. 손주가 지은 죄값이 희석되거나, 또는 그 무엇을 대신하거나. 할 수는 영영 없는 것이다. 결국 그런 힘은 시 자체가 지닐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속죄가 비어 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채로 붙들어 두는 일만은 이 쓰기가 할 수 있다. 죽은 소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보여준 미자의 창작은, 영화에서 드러난 두 개의 죽음, 시와 소녀를 연결해 두기에 쓴다는 것이 지금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생각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지금도 도처에 죽음이다. 근본, 진실, 예술, 그런 것들은 무서운 속도로 상실해 가는 시대. 매일 조금씩 이러한 죽음 속에 우리가 있다. 현실의 창작자는 이런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예술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창작자들은) 서로가 파둔 좁은 게구멍 앞에 모여 앉아, 이것이 지금 유효한 짓인지, 되묻곤 한다. 답도 없는 질문-해서 뭐 하냐는 식으로 머쓱하게 끝맺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묻고 묻는 보기, 말하기, 그리고 쓰기의 방식을 창작자들은 끝까지 되묻기를 놓지 말자고 격려하는 듯하다. 그리고 저릿할 정도로 한 움큼씩 쥐고 있는 손안의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펴서 확인해 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 안의 것이 붉은 피인지, 피 같은 붉음인지 스스로라도 먼저 알기 위해서 말이다.
(5) 아녜스(Agnès): 영화 속 희진의 세례명 ‘아네스’와 관련된 성녀로, 4세기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성녀이다.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하며, 어린 양을 동반한 모습으로 주로 묘사된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