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한 비밀
늦은 저녁 설거지를 하던 중, 등 뒤가 서늘해지더니 오른쪽 엄지를 베이고 말았다. 달리 날카로운 것도 없었는데, 모서리 이가 나갔나 싶어 닦아내던 조그만 유리의 주둥이를 살폈다. 거의 반년을 써온 게 무색하게 유리 공도배의 입구가 엄청 날카로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충 부리 모양만 나 있는 줄 알았는데, 물을 따라내는 부분과 유리 몸체의 곡선이 마침 주둥이 중앙과 만나 더욱 더 모서리가 세워져 있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안심하고 주둥이 쪽을 세게 그러쥐었다. 이 날카로움은 이미 존재했고, 따라서 내가 손을 베이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몰랐다면 몰랐던 대로 그동안처럼 운 좋게 모서리를 피해갈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오른손 엄지가 아니라면, 언젠가 왼손 엄지라도 베는 식으로 발견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딱 주둥이 꼭지점 만큼만 패인 상처가 꽤 오랫동안 욱신 거려 물건을 잡을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예기치 않았지만 내게 언제든 예비된 불행. 불행이라기엔 하찮아서 그럭저럭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달 내내 선물 같다던가 무작위적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내게 ‘내려오는’ 혹은 이미 ‘내려와 있던’ 일들에 대해 쪼잔하리만치 짚어보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작은 일마저 본래 피해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숨 막힌다 하겠지만, 그 반대로 지루함을 어느 정도 타파해주는 사건이지 않느냐고 긍정해보면 선물 같은 일들도 내 삶에 준비된 채로 얼마든지 줄 서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걸 양날의 검이라고 해야하나. 그건 너무 흑백의 논리라 나는 이것을 결론내리기 앞서 조금 미적대며 작은 단위 위주로 살펴 보기로 했다. 다만 굳이 설명을 한다면 귀찮은 얘기들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천 번 어쩌면 순간마다, 일상에, 일생에, 우주는 이런 뜻밖인 수레바퀴와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와중 굳이 먼지만한 부품을 서술하겠단 변변찮은 선언인지라..
단순히 마침, 어쩌다, 갑자기, 무심코, 공교롭게 벌어지는 일들은 각별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건이 나와 관계가 있을 때야 비로소 특별해진다. 그래서 사건에는 각자의 해석이 이미 입혀져있다. 독해될 필요 없는 이야기나 계기는 가차 없이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한번 이상의 판단이 개입되어 결국 그 계기가 중요하다기보다 자신에게 선사된 찰나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연성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야기의 무대화가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 무대는 자판기인양 결과의 형식이나 순번이 정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화자 개인과의 관계성을 빼면 그 외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담백한 진리다.
아오이 유우 주연의 영화 <타마타마>(2011). 떠돌아 다니는 스틸컷을 주웠다. 어릴 때 우연히 본 적 있다.
일전에 어떤 공동체로 찾아갔을 때, 누군가 내게 그곳까지 도달한 경위와 계기를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에 ‘타마타마’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우연히’. 그러나 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인지 상대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사실 나는 긴 여정의 처음에서 ‘당신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에서 시작됐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대답을 한 꼴이었다. 우연-발견은 충돌한다. 그들을 발견한 것은 내가 지속적으로 그들과 같은 모든 이미지, 매체를 끌어당겼기-찾아다녔기- 때문이며, 관련된 모든 계기에 활짝 열려있어 그들이 내게로 간접적으로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래한 만남을 나는 내 의지대로 클릭하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나의 염원대로 내게 노출되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계기가 신의 선물처럼 주어졌다고,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 저절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왔노라며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물론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간도 있어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삶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기적을 우연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상반된 쪽에 있을 것 같은 필연성이나 규칙은 오히려 우연의 확장판이다. 사실 이것도 별 놀라울 것 없이 오래전 정해진 흔해빠진 원리다.(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우연을 강조하다 결국 운명을 건드는 지점부터 무거워진다. 누구 하나라도 희생해야 할 것 같고, 조금 전엔 부품이었던 것이 이젠 마모되면 전체가 멈추는 톱니바퀴로 변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야기 첫 머리에 우연성을 가미하는 것은 평범한 내용도 신화가 될 수 있는 마법적인 가능성을 주입하기 때문에 이 유혹을 이기기란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이야기의 신비를 드러낼수록 사건마다 오묘함으로 감싸진 거대한 질서가 있고 섭리 안에서 탄생되어 왔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설명 불가한 신비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설명이 가능한 때가 아니라는 전제를 품어야한다. 그리고 스스로 발화한 이야기를 붙들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우연히 탄생된 것처럼 그 끝도 우연히 찾아오리라고 여긴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각자의 드러나지 않은 신비는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자 한다면. 물론 의지로 되는 것은 이 세상에 몇 없다. 글쎄, 통제가 될까 말이다. 궁극적인 결말은 가 봐야 아는 법이다. 설명하려하면 도망간다는 신비란, 대다수 그저 신비로움의 겉면을 핥는 것, 혹은 신비의 껍데기를 씌워보고 싶었던 순간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초라한-작은 것이 아닌, 몸집이 부풀려진 것들- 이야기의 경우다. 이야기의 끝맺음은 입을 뗀 직후 엄격한 필연성, 개연성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발견’된 섭리는, 맺어지지 않으면 뒤꽁무니가 열린 채 언제까지나 화자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래서 이를 끝까지 추적하고자 할 때(성공 여부와 상관 없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늠하려면 영화 「테넷Tenet」을 보면 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머리를 싸맸던 시간성, 숙명, 우연, 순종 그리고 이것의 역행-정확히는 ‘반전되어’ 동시에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의 속성을 시각적으로 펼쳐 놓음으로써 섭리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들이란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 혹은 ‘되감아 봄’으로써 속도감과 통제가 화면 곳곳에서 폭발하는 수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득 떠올린 게 민망할 정도로 나는 아주 일부라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공감했을 뿐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해 영문을 모르는 상태임을 자백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해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유력한 해석을 달리 찾아보진 않았다. 그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우연의 끝을 추격한 뒤에도 의문이 해석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난감함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한 것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몰아가야 비로소 설명할 수 없는 조각이 있다고 여지를 남겨볼 수 있다.
극 중 주인공을 제외하고 두번째로 중요한 인물이지만 전체 의미와 구조적으로서는 가장 작은 부품으로 여겨지는 닐(Neil)은 굴레의 신비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직 완성까지도 가지 못한 흐름의 중간의 일부로 사용되기 위해 기꺼이 정해진 죽음으로 뛰어 들어간다. 동시에, 반드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재촉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하나의 작은 행동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미래에 영향이 가거나 파괴될 수도 있다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망설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돌아올 듯이 가볍게 인사하고 자신의 존재를 던지던 장면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닐이 단순히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라거나 감독의 메시지를 위한 광적인 인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겪은 적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시스템이지 않은가?–이것이야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에 거의 도달한 것일까- 그가 당연하게 굴 때마다 자연스레 사용되고 폐기되었던 작은 우연의 일상성을 눈치챌 수 있으며 한껏 몸을 키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유일하게 대항하는,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섭리>라는 본질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한다. 마침내 인지 못한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 둘러싸인 삶의 계획이라는 것, 고로 사방이 틀어 막힌 구속이 아니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끝이자 시작에서 어쩌다 맞물린 모서리를 확인할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