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과거나 의심스러운 모래에 심으세요
4학년 때는 하교를 하면 집까지 십 분 남짓한 거리를 전력 질주해야 하는 날이 잦았다. 함께 자란 동갑내기 사촌과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되었던 해가 바로 4학년이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초딩이 그날의 승자. 당시에는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는 일이 드물었기에, 우리 집에 있던 컴퓨터 한 대를 두고 매일같이 패자를 면하기 위해 치열하게 순서를 다퉜다. 패자는 승자의 등 뒤에서 씩씩거리며, 화면 속에서 무언가를 짓고 부수는 손끝을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무엇을 만들고 있었는지는 흐릿하다. 다만 무언가를 캐고, 밤이 되면 나타나는 몬스터로부터 몸을 숨겼다. 그때부터는 도착한 순서 앞, 뒤 없이 같이 마음을 쫄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서야 학원에서 가르치던 초등학생들이 마인크래프트(Minecraft)[1]라는 게임의 형상을 도화지에 광적으로 그려낼 때, 사촌과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찾아보니 시기상으로는 정식 출시 시기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억 속에는 블록을 캐고, 조합하고, 밤을 견뎌내던 것이 남아 있다. 마인크래프트. '캐다(Mine)'와 '만들다(Craft)'를 그대로 붙여놓은 이름을 보며, 사촌의 손끝에서 바라보았던 그 세계 역시 이와 닮은 어떤 게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며 우리가 있었던 그 단순한 세계가 현재 어떻게 되어있을지 뒤적거렸다. 그리고 지난 기억에서는 유추될 수 없던 달리 보이는 블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의심스러운 모래
따뜻한 바다 밑 폐허, 겉보기엔 평범한 모래와 다르지 않지만 오래전 것들을 품고 있는 모래가 있다. 유저들은 그 모래 블록을 '의심스러운 모래(Suspicious Sand)'[2]라 불렀다. 대부분의 블록은 삽이나 곡괭이로 캐면 그만인데, 이 모래만은 날 선 삽을 대는 순간 안의 것을 영영 잃는 구조. 왜 이 모래만 다른 손길을 요구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이 세계가 현실의 땅과 달리 애초에 이어진 땅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발붙인 현실의 땅은 하나로 이어진 덩어리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고, 내 땅 너의 땅, 마을과 나라, 가시적인 구획은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가도 가도 파도 파도 그 아래로 이어진 흙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임 속 흙은 이어져있는 것처럼 보여도 한 칸, 하나의 블록, 개별의 단위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의 흙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자라게 할 수 없다. 괭이로 갈아엎어야만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경작지가 되는데, 이 상태 또한 영구적이지 않다. 경작지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조건이 몇 있는데, 괭이질을 해두고 물을 안 주거나 아무것도 심지 않거나, 즉각적인 파괴 즉 플레이어나 몹[3]이 그 위로 뛰거나 착지하면,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버린다. 결국 흙의 조건은 돌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그 손길이 멎거나 맞지 않는 힘이 즉각적으로 가해졌을 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수만 개의 흙 블록 중 캐고 부셔서 무언가를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이 의심스러운 모래 블록 한 칸은 다른 규칙을 가지는 예외가 허락된다.
그 블록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붓질[4]이다. 겁먹은 사람처럼 작은 결로 조심스럽게 모래의 표면을 쓸어 걷어내야만 그 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속에는 도자기 조각, 뼛조각, 에메랄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이 과정에 굳이 '고고학'[5]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저들에게 이 행위는 채굴이 아닌 발굴로 여기게 만든 셈이다.
발굴과 산책
인류학자 애나 칭[6]은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낸 그 순간을 ‘산책’이었다고 말한다. 계획 없이 걷다 송이버섯[7] 하나를 마주쳤을 뿐이라고. 목적을 가지고 캐낸 것이 아니라, 걷는 사람의 발밑에 우연히 놓여 있던 것. 그 버섯은 일본어로 마쓰타케(松茸, まつたけ), '마쓰(松)'는 소나무, '타케(茸)'는 버섯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소나무 버섯"이라는 의미이고, 국내에서도 소나무 송(松) 자를 딴 송이버섯으로 불린다. 이 버섯은 실제로 멀쩡한 숲보다 나무가 베이고 토양이 메마른 폐허의 자리에서, 소나무 뿌리와 뒤엉켜 자란다. 소나무는 본래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에 약해서, 흙이 기름지고 울창한 숲에서 오히려 밀려나 사라지기 쉽다고 한다. 반대로 벌목 등으로 주변 나무가 듬성듬성 해지고 땅이 척박해진 자리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버티지 못하는 대신 소나무가 살아남고, 그 뿌리 곁에서 이 버섯이 함께 자란다. 지금도 인공재배는 거의 불가능해 전량 자연 채취에 의존하는데, 한국의 경우에서 몇 안 되는 재배 성공 사례 중 하나도 강원도 고성의 산불 피해지[8], 다름 아닌 불타버린 폐허에서 나왔다. 사람이 마음대로 기를 수 없어 산에서 직접 찾고 기다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다.
또 애나 칭이 말하는 폐허는 산업과 자본주의가 훑고 지나간 숲, 벌목되고 버려진 땅을 지시한다. 그녀가 중요하게 본 것은, 그 황폐한 자리를 쇠락의 증거로만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 무너진 자리를 끝난 결과로만 본다면 인간에게 남는 건 체념뿐이라고 했다. 대신 그 폐허 아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엉켜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잠복된 공유지(latent commons)'. 무너진 땅에도 발화하지 않은 약속이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또 그녀가 제안하듯, 이것은 "공동의 목적에 동원될 수 있는 얽힘"이라고 설명한다. 다종의 관계 맺음에서 상호적이고 비대립적인 얽힘의 공간이다. 잠복해 있는 공유지가 있기에, 폐허에서 송이버섯이 올라온다.[9]
과거 심기
다시 게임 속으로 돌아와서, 의심스러운 모래에서 나오는 부산물 중 특별한 것은 ‘알’이다. 이 알에서는 이미 멸종된 생물 하나가 깨어나는데, 이름은 스니퍼(Sniffer).[10] '냄새 맡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생물은 2022년, 유저들에게 직접 투표를 받아 세상에 내놓기로 결정한 존재다. 원래는 없던 생물이, 사람들의 선택으로 뒤늦게 이 세계에 놓였는데, 그 설정은 처음부터 '이미 멸종한 고대 생물'이었다. 새로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과거의 존재로 태어난 셈이다. 이 알을 부화시키면, 다른 생물들처럼 사냥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땅에 코를 박고 어슬렁거리며 땅의 냄새를 맡으며 걷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서면, 그 자리에는 오래전 사라진 식물의 씨앗이 발견된다. 이 세계 어디에도 자라지 않는, 도감에서도 지워진 식물의 씨앗이다. 플레이어가 할 일은 그 씨앗을 다시 흙에 심는 것. 발견은 다시 심어지는 데서 완성된다.
이 심는 행위에 또 미묘한 이름이 붙어 있다. '과거 심기(Planting the Past).'[11] 그런데 심는다는 것은 본래 내일을 향한 말이 아니었던가. 보통 오지 않은 계절을 믿으며 씨앗을 심지 않는가. 그런데 이 업적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심으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스니퍼가 찾아내는 씨앗도, 정확히 스니퍼가 살아있던 시절(오버월드)[12]에만 존재했다. 둘은 서로 다른 시간에서 우연히 만난 것보다는 하나의 생물이 사라질 때, 그 생물이 알고 있던 식물도 같이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다. 스니퍼와 씨앗은 그렇게 같은 순간에 함께 사라졌던, 그 시간을 나눠 가진 한 쌍이었다. 그러니 스니퍼가 이 씨앗을 찾아내는 건 우연한 냄새 맡기 재능보다는 자신이 속했던 시간을 알아챈 일에 가깝다. 이제 명확해지는 것은, 스니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는 지상의 땅과 밤낮이 있는 세계 하나가 있고, 그 근본이 된 세계를 '오버월드(Overworld)'라 부른다. 스니퍼는 한때 이 땅 위에 살다가, 이 땅 위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니 스니퍼가 돌아온 곳도, 씨앗이 다시 심긴 곳도 결국 같은 땅이다. 유저들이 그 씨앗을 심는 것은, 이 땅이 잃어버렸던 것을 이 땅에 돌려주는 상징적인 일이 된다. 그리고 기다린 씨앗에서 자라는 것은 게임에서 필요한 무기의 전투력이 있는 자원도, 생산적인 양식이 되지도 않는다. 횃불 모양을 한 주황빛 꽃 한 송이.
마치 과거를 심는 것은, 다시 하는 산책일까.
인류가 한때 맺었다가 지키지 못한, 크고 작은 이행되지 않은 약속을 발견하는 일. 따뜻한 바닷속 폐허도, 벌목된 숲에서도,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온 것은 폐허의 증거가 아닌 알과 버섯. 아직 죽지 않은 모습으로 이 땅과 엉켜있다. 현실의 땅에서도 급히 파낼수록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캐물으면 부서지고, 다그치면 흩어져서 곁을 서성이며 손끝으로 걷어 낼 때 진실을 보여주는 것들. 붓을 쥔 손과 냄새로 걷는 걸음으로, 딛고 선 이 땅에서 다시 마주치길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1] Minecraft: 모든 것이 정육면체 블록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블록을 캐고 조합해 무언가를 만들며 생존하는 오픈월드 샌드박스 게임. 이름은 '캐다(Mine)'와 '만들다(Craft)'를 그대로 합친 것이다. 2009년 첫 버전이 공개된 뒤 2011년 11월 18일 정식 출시됐다.
[2] 의심스러운 모래(Suspicious Sand): 마인크래프트의 고고학(Archaeology) 업데이트에서 추가된 블록. 겉보기에는 일반 모래와 같지만, 붓(Brush)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면 오래 묻혀 있던 도자기 파편이나 도구, 씨앗 등의 유물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따뜻한 바다 유적(Warm Ocean Ruins)이나 사막 신전 등에서 발견된다.
[3] 몹(Mob): 'Mobile'에서 온 말로, 게임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체를 가리키는 통칭. 좀비 같은 적대적 몹부터 소, 돼지 같은 우호적 몹까지 포함하며, 플레이어 역시 여기 포함된다.
[4] 붓(Brush): 고고학 시스템을 위해 추가된 전용 도구.
[5] 고고학(Archaeology): 2020년 최초 공개 후 세 차례 연기를 거쳐 2023년 정식 도입된 기능. 개발사는 귀중한 유물을 곡괭이로 캐지 않도록, 부수는 도구 대신 붓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새로 만들었다.
[6]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 미국의 인류학자. UC 산타크루즈 인류학과 교수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얽힘, 자본주의가 남긴 폐허 속 생명의 가능성을 다뤄왔다.『세계 끝의 버섯』(2015)에서 폐허가 된 숲에서 발견되는 송이버섯을 통해 이 논의를 전개한다.
[7] 송이버섯(Matsutake): 소나무 뿌리와 공생하며, 벌목으로 나무가 듬성해지고 토양이 척박해진 교란된 숲에서 오히려 잘 자라는 버섯. 인간이 훼손한 숲 곳곳에서 자라지만 여전히 재배가 불가능해 산에서 직접 채집해야 하며, 칭은 이 버섯의 존재를 자본주의가 남긴 폐허 속에서도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읽는다.
[8] 강원도 고성 산불 피해지 송이버섯 인공재배: 국립산림과학원이 2004년 강원도 홍천 시험지에 송이 감염묘를 옮겨 심은 뒤, 이후 강원도 고성의 산불 피해지에서도 16년 만에 처음으로 송이버섯 인공재배에 성공했다. (출처: 경향신문, 2023.11.10)
[9]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p.528-529.
[10] 스니퍼(Sniffer): '냄새 맡는 존재'라는 뜻의 이름으로, 2022년 마인크래프트 라이브 몹 투표에서 유저들의 선택으로 추가가 확정된 생물. 스니퍼와 고고학(의심스러운 모래) 시스템은 2023년 6월 '트레일스 앤 테일즈' 업데이트로 정식 추가됐다.
[11] 과거 심기(Planting the Past): 스니퍼가 찾아낸 고대 씨앗을 다시 심으면 달성되는 게임 내 업적 명칭.
[12] 오버월드(Overworld): 마인크래프트의 세 차원(오버월드, 네더, 엔드) 중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하는 지상 세계. 하늘과 땅이 있고 낮과 밤이 순환하며, 숲,사막,바다,산 등 대부분의 지형과 생물이 이 차원에 존재한다.
*이 글에 인용된 마인크래프트 게임 정보와 개념은 Minecraft Wiki(minecraft.wiki)를 참고했다.
*이 글의 제목은 마인크래프트의 숨겨진 발전 과제 '과거를 심다(Sniffing Out The Past)'의 설명 문구 "아무 스니퍼 씨앗이나 심으세요"를 변형해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