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불어넣기
1. 누추한 노동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왜 이렇게 궁핍한지 모르겠다. 하여간 이런 생각이 갑자기 시작 돼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보다 결국 나의 잘못된 선택이라거나 증발하는 것밖엔 답이 없다는 끝으로 되풀이된다.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일을 하며 산다는 건 너무 의미 부여를 과하게 하지 않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받은 돈 만큼 쓰임이 되고, 그로인해 내 입에 풀칠을 한다는 것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하는 일은 사실 막중한 일은 아니다. 또한 배부른 소리겠으나 내가 누울 곳, 먹을 것,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루하루를 유지하는 평행의 개념으로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나의 아픔이나 분노,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라는 신성함은 가볍게 잊은지 오래이며 사실 정신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는 안되는 ‘간신히 먹고 살 만한’ 싱거운 고립의 노동이라 할 수 있겠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이 감각이 타당한가, 파고 들다보면 한도 끝도 없다. 적절하다거나 상당하다거나 합당하다는 이치로 갖다 붙여 보는 게 맞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뭔가 해결하려고 하면 겨우 현상 유지하는 내 삶의 난이도가 올라가버리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어떤 문제라는 건 보통 하나의 문제에 하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결론나지 않는다. 하나를 해소하면 사실은 이를 발목 잡는 더 아래의 문제가 있고 또 그 아래의, 그 아래의, 아래의... 그래서 하나를 뽑으면 힘겹게 딸려 나오는 고구마줄기처럼 주렁주렁, 땅에 박혀있는 것이다. 나의 문제가 달콤한 고구마라면 캐서 먹기라도 하면 그만이지만 인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노고에 비해 굉장히 쓴 맛을 낸다. 그리고 고구마가 심긴 나의 땅은 이미 뭔가를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비어있는 셀에 뭐라도 뿌려놓아야 한다. 다만 그 가치의 총합이 늘어나거나 딱 들어맞지 않고 어딘가에 구멍이 생겨서 자꾸 샐 뿐. 입에도 풀칠하고 나의 구멍 난 노동에도 임시방편으로 풀칠을 하는 격이다. 분명 나는 스스로와 이렇게 연명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는데, 어느 순간 풀칠만 가득한 내 입이 딱 붙어 제대로 된 말을 할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덮친다. 다 밥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근데 무슨 밥?
「밥이나 잘 챙겨 먹으라우.」 이번주도 집에는 가길 글렀다고 하자 더 묻지 않고 밥이나 먹으라고 장난스레 말한다. 밥이야 너무 먹어서 탈이고 몰아 먹어서 탈이다. 정작 힘내려면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데 그러다간 전철 안에서 게워낼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찬 것을 끼얹는다. 꾸역 꾸역 쌓이는 좋지 못한 것들은 도통 소화가 되지 않는다. 속은 이미 까맣게 이러나 저러나 오십보백보 피장파장. 고통일 것이냐, 아니냐. 정도와 농도를 따지는 건 소용 없다. 그래야한다. 그래야만, 이 두벌식 자판을 계속 두드릴 수 있다.
「지금 바빠?」 「ㅇㅇ. 바쁨. 출근했음.」 별 용건 없이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 메시지라 별 성의 없이 답했다. 대부분 가볍게 떠보는 듯한 저런 메시지는 간단한 안부가 아니라면 아주 고심하고 있는 문제를 깊이 상의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가볍게 넘긴다. 나도 땅 파고 있지만 다른 사람 구덩이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근데 집에는 언제쯤 올 수 있어?」 그러게. 뭐가 그렇게 바쁘더라?
스크린 앞에서의 긴급했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실 조금의 큰일도 아닐뿐더러 아무 의미가 없는 일들이었을 것이다.(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큰일이라는 건 없다. 큰일 날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오는 상태일 뿐이다. ‘큰 일’의 주인이 불안을 고의로 주변에 전염시켜야, 다른 이들이 그다지 큰일이 아닌 것을 큰일 난 것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위에 효율이 군림한 이 시대에, 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렇기에 진정 인간의 존재를 누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생산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진리를 추구하고 균형을 잡는 일과 동행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텅 비어버린다. 결여된 땅 위에 무엇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너무 당연해서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런데 텅 빈 채로도 달그락거리며 굴러가는 것을 보고 가능하다 말하는 이의 비루함과 농락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면, 이 다음 나는 어떤 땅위를 걸어야 할 것인가.
2. 쟁기를 든 사람
인간은 평생 일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곤 하나, 비단 몸의 고단함만 있지 아니하고 소산물의 생명력을 섭취하는 축복,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게 될 운명, 삶을 삶대로 살아가는 모든 형태의 풍족함도 함께 허락되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숭고. 지금 내가 쓰기엔 괜히 커다랗고 멀리 있는 것 같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거룩함.
가끔은 진짜 쟁기라도 들고 싶다. 물질적으로라도 맞닿으며 언 땅이라도 좋고, 심은 것 없이 나올 것 없는 땅이라도 내려쳐서 온몸에 흙을 묻히는 감각이 절실해진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으려 죽은 듯이 허공에 김을 매는 행위에 대항하는 나의 갈아엎기랄까. 체념에 통달하면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고 산송장으로 사는 게 편하다고들 말한다. 조금의 자극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만 남아 각자 죽은-것 같은- 상태를 유지하거나 고요히 전파시킨다. 모든 것이 중요-큰일-하거나 모든 것이 싸그리 의미 없다는 식이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넘치지만, 역시 삼켜야겠지. 긁어 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그것들의 허름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이에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잠깐 웃음 지었던 기억들이다. 예를 들어 이 나이 먹고 친구들과 비를 쫄딱 맞고 겨우 피한 일이나 나보다 나이든 선배가 피곤한 얼굴로 입 벌리고 잠 들었을 때 그걸 보고 웃었던 일. 그것은 사람이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함께 노동하며 걸었던 길 위에서 벌어진 섬광 같은 신비함이다. 하지만 이런 살아있다는 감각을 마음에 묻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혹은 신비함의 진리를 겪어보지 않은 것처럼 한껏 쪼그라들어 어딘가에 앉아있다.
이도 저도 몸 둘 바를 모를 때면 자고로 몸을 움직이는 게 최선일 것이다. 몸을 움직여 생각을 멈추도록 할까. 아니, 생각을 더 해야지. 사유는 계속되어야 한다. 근육의 움직임과 사람답게 살기 위한 고뇌는 함께 이루어진다. 폐에 공기를 넣고, 안개가 가득한 뇌에도 바람을 불어넣어야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까.
3. 걷는 사람, 밭을 매는 사람
그리하여 사고하기 위해 묵묵히 걷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은 길 위를 박차는 것 뿐 아니라 길 위에 내려앉은 모든 것들을 경외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길 위에서 매순간 만나는 공기로 호흡한다. 그 마음은 결국 생명과 교통하는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한편 뿌리 뽑힌 가슴 아픈 생명에 대해서도 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살아가는 것은 고통인 것. 그리하여 비통한 절망이 있을 때 서로 간에 연민을 가지고 살피며, 회복으로서의 진리를 경험할 기회인 것. 그 가운데 서로가 안락이 되어주는 기적의 체험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을 통해 쓸데없이 떠들썩하기만 하고 인간을 기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도사리는 세상에서 가까스로 균형 감각이 망가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볼 수 있었다. 인간이 세상을 치장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듯 마찬가지로 대지는 인간을 수식하기 위한 기반이 아니다. 발바닥을 댄 흙을 느끼며, 그 발로 밀어내며 도달하는 영토의 범위를 짐작하는 것은 경작을 할 수 없는 우리의 황폐한 현재를 위로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지금껏 볼멘소리 가득 엄살을 부리며 썼지만, 실은 나의 생에도 넘치게 주어졌던 특권이 있었다. 그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해서 언급 하고 싶다. 계절마다 적막한 도시의 우리집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푸대자루 같은 것들이 즐비했는데, 그 말 못할 고생의 작물을 나는 가볍게 먹어치우며 자랐다. 꿀이 흐르는 고구마, 모든 음식과 김치에 들어가는 직접 빻은 고춧가루, 직접 띄운 메주로 만든 된장, 마을 사람들이 함께 딴 밤, 등에 지기도 힘든 쌀 포대, 뒷산에서 양봉한 천연 꿀, 집 옆 매실나무의 매실, 심지어 텃밭에서 난 강낭콩까지 전부 집으로 흘러들어왔다. 비옥한 땅에서 나와 사람 손으로 수확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집 바깥에서 먹는 음식 맛과 달라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에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의 값이 감당하기 어려워져 무엇이든 달게 먹지만, 여전히 터전의 맛을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한 농부가 온 가족과 그들의 가정을 먹여 살린 역사로 새겨진 것이나 다름없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라든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픈 것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잖아도 몇 년 전 할머니의 상여 때도 술을 고리짝으로 먹고 나타나 고꾸라지거나 행렬에 달려드는 등 행패를 부렸고 어째 세월이 흐를수록 술에 때와 장소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표정도 없고 감정이라곤 화내기만 하는 사람이 속상할 때 할 수 있는 건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것뿐이었나 보더라고 생각하고 말았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은 그에게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니라 생의 원동력이자 버팀목을 잃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모든 형제가 집을 떠나고 밭을 이어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 그는 터전의 옆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차를 타고 작은 도시에 나가 일을 하곤 했다. 쉬는 것은 곧 술을 마신 다는 의미였고 술의 양이 일반사람의 몇 배나 웃돌아 술통이 어지간히 크다고만 여겼는데, 문드러지는 속과 아픈 몸을 독주로 달래고 또 그 독주 때문에 기어코 몸이 무너진 것은 아닌가 한다. 어느 날 아파도 너무 아파 평소와 달리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농부의 헌신은 멈추게 되었다.
엄마는 몇 개월 사이 까맣게 말라버렸을 오빠가 보기 무서워 아이처럼 굴었다. 아기 때 귀한 조청 몰래 털어 나눠먹고 이빨이 전부 썩어 썩은 웃음을 지었다는 오빠는,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늘 주변 마음 졸이게 했던 엄마의 오빠는 엄마 앞에서 몸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모든 가족은 그의 고통을 제대로 몰랐다가 비로소 그 바탕위에서 가족이 지탱되었던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밭을 지키는 소명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 저주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가족의 배와 곳간을 채우고, 땅의 빈자리에 씨를 채우고, 오랜 시간 동안 생명을 일구고 키운 그의 노동은 태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가장 본질의 목적대로 수행한 존귀한 창조의 산물이며 사람을 살리는 축복 그 자체였다. 이제 땅의 부름으로 땅속으로 들어간 그를 보면서, 가족들은 한참 산과 집 언저리를 걸었다. 잘 닦이지 않은 땅을 밟았던 탓에 타월로 신발을 거칠게 털어내고, 땀을 닦아내고 서로를 격려하며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터전을 밟고 작물을 먹고 자란 내가, 도시의 목적 없이 메마른 인간 경시에서 다시한번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하지만 생의 감각까지 빈곤해지라고 명령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쟁기가 무엇이 되었든, 다른 사람과 공존하고 먹이는 결과로 이어져야 하며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묘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인 씨앗을 마음에 심었다. 그래서 동시에 간절히 바란다. 함께 걷고 밭을 맬 사람 공동체에 온기와 숨을 불어넣을 존재들을 만날 수 있기를.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하며 즉물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생의 짐을 기꺼이 감당하는 인간으로
이 땅에 설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