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에 잠든 발
폭우에 잠든 발
빗금에 젖은 새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 복도를 따라 맨 끝에 있는 현관 쪽으로 종종걸음을 놓고 있었다. 천장은 마치 처마처럼 내리는 비를 막지만 그 옆은 뻥 뚫린 긴 복도라 빗줄기가 옆으로 번지며 들어와 어깨 끝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다 오른쪽 시야 끝에 검은 점이 걸려 몇 걸음 더 가다 멈춰 돌아보니 전깃줄 위에 검은 새 한 마리가 오는 비를 다 맞으며 전깃줄을 움켜쥐고 있다. 빗줄기 너머 꼼짝도 하지 않고.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성큼 찾아드는 인연이 있다. 최근 우연히 마주친 짧은 머리의 중년의 한 여자가 그랬다. 힘없이 움켜지지 못한 손과 잠자리 한 마리가 그려진 내 그림에 대해 궁금해했다. 왜 이 쓰러질 듯한 작은 생명 하나를 빗금 속에 놓았느냐고.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일단 저 그림을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그림을 자신의 집 쪽으로 가져다주러 오면, 커피를 한잔하자는 제안을 남기고 떠났다.
여자의 집 앞을 찾아가기로 한 날, 간만에 주유소에 들려 세차를 하기로 했다. "근데 곧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라는 세차장 직원의 양심적인 말에도 그래도 한 번 씻겨줘야 할 것 같다며 차를 닦았다. 그러고는 예상한 약속 시간보다 5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여자의 집 담벼락 옆에 차를 세워 두고 좀 일찍 도착했다고 연락을 넣을까 고민했지만, 이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어 관뒀다. 이윽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여자는 주변을 기웃거리며 나타났다. 그날 짧은 대화 이후로 두 번째 만남이어서 살짝 어색한 공기에 인사말을 건네고 집 앞에 아주 말끔하고 잘생긴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를 발견했다며 힐끗 내 표정을 살피며 카페로 안내했다. 그 말에 기대를 가진 채 커피를 시켰고, 여자는 달달한 에이드를 시켜 폭이 좁은 탁자에 마주 앉았다.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 대신 자신은 줄곧 그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보냈는지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림에 빗금들이 저기 보이는 생명(잠자리)에게로 곧바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베일처럼 느꼈다는 여자의 말. 그 말도 틀리지 않았음을 표현하려 긍정하다 시선을 잠시 카페 창밖 녹음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빗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때 본 젖은 새 이야기를 꺼내게 돼버렸다.
나는 한동안 집에 들어가기를 멈추고 그 새를 보았다. 피할 곳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날아오를 때를 정하지 못한 것인지. 꽤 강하고 긴 소나기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빗줄기가 방향을 바꾸며 새의 몸을 스쳤을 텐데, 전깃줄을 움켜쥔 채 미동 없이 그 비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잠시 집에 들어가 다시 나갈 채비를 하고 문을 열자 비는 잦아들었다. 이제 그 새는 갔겠구나 싶어 다시 그 자리를 보니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집중하며 다른 추임새 없이 말을 이어 듣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말하기를 멈췄다가, 근데 나중에서야 집에서 애완새를 키우게 되면서 목욕을 마친 새들이 젖은 날개가 마를 때까지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같이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숨겨둔 속 날개를 조금 아래로 펼쳐 공기를 통하게 마를 때까지 그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그 젖은 새들의 형체에서 마치 자기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젖은 몸으로는 당장 날 수 없다는 것을 알듯이. 섣불리 날아오르지 않는 이 멈춤이 오히려 자신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고. 그래서 그 전깃줄 위의 새를 처음 마주쳤을 때는 처량하고 아릿했지만, 어쩌면 그런 앎 안에 있는 기다림의 시간으로 다시 보이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이후 갑자기 폭우 같은 비가 세차게 올 때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간이라도 사람들이 이 비에 대해 생각할 것 같아서. 그래서 누구든 이 빗속에 잠겨 있는 걸 느끼며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고 했다. 거대한 빗금 속에 예외 없이 놓여 있다는 것. 그냥 그게 내게는 동시적인 감각처럼 느껴져서. 왜인지 모르게 좋다는 말을 덧붙여 젖은 새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녀는 긴 말의 끝을 기다리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고 카페를 나섰다. 들어올 때보다 눈에 띄게 우중충해진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며 "곧 비가 오겠군요." 중년의 여자는 쏟아지기 전에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말 그 뒤로 집에 오는 길 차 앞 유리에 빗방울이 톡톡톡 떨어지다 다음 날까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여자는 자신의 공간에 건 그림 사진과 메시지를 남겼다. "좀 별난 사람이군요. 아무리 세상 시끄러워도 결국 제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아는 듯 속삭이네요, 이 차분한 빗소리처럼."
잠든 발
어디 가서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할 일이지만, 따로 독립하기 전까지 엄마와 곁에서 잠을 청했다. 지금도 본가에 가면 으레 그 옆에 자리를 편다. 그 숨소리가 고르게 방 안에 가득 차면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이 감는 것이 편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다 가끔 새벽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곤히 잠든 이불 끝에서 삐져나온 발들을 지켜봤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것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근데 엄마는 이 발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했다. 투박한 자기 발이 내내 신경 쓰인다며, 여자 발 치고 거칠고 부드럽지 않아서 예고 없이 드러나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했고, 너는 내가 죽을 때 꼭 기억해서 양말을 신겨 달라고 했을 애증의 발이다. 글쎄, 그 황당한 약속을 엄마의 죽음의 순간에 간절한 한 여인의 소원을 먼저 떠올려 지켜줄 수 있을지 자신 없지만, 모든 긴장이 빠져나간 살결, 정렬되어 서로에게 기댄 개구리 알 모양의 작고 둥근 발가락들. 발바닥 피부에 포슬포슬하게 덮여 있는 껍질이 별다른 걱정 없이 쉬고 있는 모습은, 이상하게 애쓴 만큼 아름답고 위안이 된다. 낮 동안 그 발이 감당해온 것들이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안락하게 이불 위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 뒤로 함께 잠든 사람들의 발을 몰래 지켜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친구의 낮도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견뎌내기에 뜨겁고 바쁘다. 유독 남들보다 깊이 잠드는 편의 사람이라서 힘이 풀려 조금 벌어진 채 새근거리는 발 모양. 낮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잠시 의식이 거두어진 푸르스름한 어둠에서 조금씩 느껴보곤 했다. 침묵이 스며든 잠든 발들을 지켜보는 것은, 되려 긴장한 내 몸처럼 여기며 여기저기 훑어보며 편히 쉬라고 말을 건네보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Project Hail Mary)[1]에서 잠자는 발을 지켜보는 것과 닮은 장면이 있다. 미국 작가 앤디 위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기억을 잃은 채 홀로 우주선에서 깨어난 과학자 ‘그레이스’가 태양계를 위협하는 미지의 문제를 해결하러 떠난 여정을 그리는데 그는 우주에서 전혀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 ‘로키’를 만난다. 언어도 몸도 전혀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해가며 살아남는 이야기다. 그 우정 속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둘이 처음으로 함께 잠드는 일이었다. 로키는 인간과 달리 잠드는 동안 뇌의 의식 기능이 완전히 멈추어 스스로 깨어날 수 없다. 마치 마취된 것처럼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종족 에리디안은 서로 번갈아 잠든 상대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을 오랜 문화적 규율로 삼아왔다. 로키는 홀로 우주를 떠돌던 46년 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시선 없이 잠들어야 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인간 그레이스를 만난 날, 건넨 첫 부탁이 그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뒤로 벌러덩 쓰러지듯 누운 채로 로키는 힘없이 말한다. "I … sleep … You … watch … question?(나… 잠든다… 네가… 지켜봐… 괜찮아?)" 그리고 그레이스가 굳이 안 그래도 되지 않냐고 하자 로키는 짧게 답한다. "Eridian culture rule. Must watch.(에리디안 문화 규칙. 반드시 지켜봐야 해.)"
잠든 발을 지켜보는 일 또한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 곁에 앉아, 그 취약함은 당신만이 가진 한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주는 일. 그 안정감 속에서 지켜보는 사람 자신에게도 잠시간 일종의 피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고요한 시간 속으로 밖에 내주었던 마음을 거두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사느라 지친 인간의 몸은 각자의 방식으로 피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과 피해 있을 시간을 마련하지 못해서, 제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빗속에서, 평범하게 청한 잠자기 동안이라도 잠시간 턱없이 부족한 고요함을 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피정(避靜)[2]은 ‘세상을 피해 고요한 마음을 지닌다’는 뜻으로 가톨릭에서 피세정념(避世靜念)[3]이라 풀기도 한다. 주로 성직자나 신자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물러나는 것을 뜻하는데, 나는 이 말에서 '피한다'라는 것을 도주가 아니라 일종의 거둠으로 읽었다. 밖으로 뻗던 것을 잠시 안으로 거두어서 세상을 다시 밖에 두고 자기 내면으로 들어오는 일. 겉으로는 멈춘 것처럼 보이더라도 인간의 잠자기처럼 충만한 회복의 시간이다. 그 멈춤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몸을 다시 볼 수 있다. 날개가 젖었을 때는 날지 않는 것. 잠이 들면 힘이 풀리는 발 모두 같은 몸짓을 하고 있다.
로키와 달리 인간은, 지켜보는 이 없이 스스로 그 장소에 갈 수 있다. 피정이라는 것이 특별한 장소를 따로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나에게 약속하듯, 내면의 장소로 가서 깊이 침묵하는 것으로 그 장소를 마련하는 샘이 된다. 특히 침묵은 말과 소리를 제한해서 신 또는 자신을 더 깊이 만나는 자리의 조건을 만든다. 실제 자신의 영혼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다른 이와의 말이나 도움이 결코 필요치 않은 일이다. 때문에 철저히 홀로 남겨진 자리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함으로, 유한한 몸과 시간의 굴에서 차분히 다시 숨을 고른다. 지나치게 밖으로 내주었던 마음을 떼어내어 내적인 고요함에 온전한 시간을 부어주기 위해서. 어떤 이는 전깃줄 위에서, 어떤 이는 새벽 이불 끝에서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들이키고 다시 내쉰다.
다시 그 여자의 메시지의 일부를 떠올렸다.
'세상 시끄러워도 결국 제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아는 듯.' 폭우 속에 꼼짝 않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보다가도, 수고한 자의 잠든 발을 보면서도, 나의 존재를 겹쳐보며 내려 앉히는 앎이지 않을까. 그 밑에 깔린 침묵 속에서 지난 소란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대로 사라져도 좋을 것만 같은 거짓된 기분에는 속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뒤로도 날아오를 수 없는 것 같은 무기력함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전깃줄에 걸려 있는 짧은 침묵의 시간 속에서 미약한 몸을 흠뻑 느끼고 다시 날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1]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Project Hail Mary, 2026): 앤디 위어의 동명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국 영화. 기억을 잃은 채 홀로 우주선에서 깨어난 과학자 그레이스가 태양계를 위협하는 미지의 재앙을막기 위한 여정 중 외계인 로키를 만나, 언어도 몸도 전혀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해가며 함께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2] 피정 [避靜]: 성직자·수도자·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신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하여 어느 기간 동안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묵상·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남을 뜻한다. 피정의 장소로는 성당이나 수도원 또는 피정의 집 등이 이용된다. 피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면서 기도하였던 일을 예수의 제자들이 본뜨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피세정념(避世靜念): 피정은 합성어로,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면 '고요함을 피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이라는 설과'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준말이라는 설이 공존한다. '피속추정'은 '세속을 피하여 고요함을 따른다'는 의미이고, '피세정념'은 '세상을 피하여 고요하게 마음을 지닌다'는 것으로, 두 용어의 뜻이 대동소이하다. 이 중 어느 것이 맞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피세정념'의 준말이라는 설이 좀 더 지배적이다. 출처: 가톨릭대사전(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