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꼬대에 부쳐
잠꼬대에 부쳐
1. 도주
지금껏 이라고 해봐야 다섯 번의 주제어를 다루며 글을 진척시켰던 방식은 초장에 직접적으로 주제어를 언급하기를 경계하고 온갖 비유와 유사어와 경험과 허구를 섞어 종래에는 주제어를 에둘러 드러내는 방식을 취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휴면’이란 단어 그리고 그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떠올리자 일순간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게다가 제가 가진 내밀한 풍경과 이어보려 했으나 마땅히 빗댈만한 이야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단어가 빚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실제 쓰임의 괴리가 있다 치더라도 그 정도 쯤이야 소소하다고 여기고 구태여 집요하게 굴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정도 쯤은 단어에 대해 끈질기게 얘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되는대로 주제어를 발설하고 생각을 수선해나가며 지면을 채워볼 생각입니다.
이 낱말을 어떤 식으로 인식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궁금해졌습니다. 잠깐 찾아보니 어느 외국의 무명씨는 자신의 코마 상태 경험, 그리하여 의식 없음을 말하고 또 누군가는 다중인격 중 제 1인격이 나오지 않았던 시기를 휴면기라고 표현하더군요. 그 외에는 결국 평범한 생물학적, 정서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해석이 많았습니다. 사용하기 나름인 상태라는 걸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휴면은 활동을 멈춘 상태입니다. ‘활동’이라는 단어와 양립할 수 없는 뜻이지요. 종종 ‘휴면-활동’이라는 이상한 합성어를 사용하는 예도 심심찮게 보입니다만, 그것은 잘못 쓰였다기 보다 이제 자신의 실정에 맞게 왔다갔다 선택할 수 있는 기능으로 인식했다고 봐야겠습니다. 휴면으로 접어든다는 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동반하지 않는 전략적인 선택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앞선 예의 극단적인 것은 극소수만 해당되니 제외하겠습니다) 어떤가요? 단적으로 이 단어를 생각하면, 짐승이 몸을 숨기고 오랫동안 잠든 동면이 떠오르긴 합니다. 사람도 동물일진대, 동면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수면이 있지만 말입니다. 문명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발전하는 가운데 우리는 수면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동면으로 채울 수는 없는 걸까요. 물론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고 지극히 현대인이라는 우리가 그런 것이 가능할리가 없습니다.(멈추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인간의 정지란 결국 가사상태입니다. 굳이 정지 상태에 접어든다면 그것은 어떤 사회 활동의 중지 상태 쯤 되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몸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에너지를 보존한다는 의미겠지만 정확하게는 에너지가 심히 소모되는 관계, 장소, 직분을 포함한 어떤 상태에서 물러나는 모양새, 또는 누군가의 바람이겠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휴면은 ‘완전히’ 사라지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그것에 성공하게 된다면 인간으로서 자신을 지킨 게 되는 것일까요?
가정해보도록 하죠. 인간이 동면에 접어든다면, 최소 한 계절 이상은 세상과 단절되어야 합니다. 확실히 해낸다면요. 흔히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 사회(혹은 그룹)에서 소외될 경우,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문제가 없을 것처럼, 타인이 지옥인 것 보다야 낫다고들 하지만 어불성설입니다. 연결 없이 산다는 것은 오만이지 않은가요? 어떤 간접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르는 거고요. 누군가 깊은 잠에 빠지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깨어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어쨌든 그렇게 되면 사람 사이에는 관계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될 겁니다. 각자 동면을 하고 돌아와 모였을 때 온전한 연대나 신뢰가 생기기 어려울테니까요. 뭐 어디까지나 가정이므로 현재 관점으로는 이정도로 예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 인간은 그에 맞게 혼자서도 잘 살아남도록 신체가 발달해야 합니다. 그럼 현재의 인류 외형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실제로 동면을 취하는 박쥐, 곰, 몇몇 설치류와 같은 외형으로 진화했을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게다가 살고자 택했던 동면은 기실 더 위태로울 수 있는 방식입니다. 활동을 재개하기 전 깨어나는 순간 바닥을 보인 몸의 비축 에너지마저 고갈되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요. 너무 오래된 잠은 몸과 마음을 무기력하게도 만드니까요. 비유가 아니라 실제가 그렇답니다.1)
이렇게 생각을 뻗다보면 보통은 결론이 나지 않아요. 결국 그 끝에 ‘모르겠다’라는 의문만 남을 겁니다. 가정은 이쯤 정도로 합시다. 왜냐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사람은 동면을 할 수도 없고 솔직히 동면의 형태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들때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단절감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장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일겁니다. 시야 안에서의 분리, 도주를 허용하는 정도만 되어도 숨이 좀 트인달까요. 극단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휴면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반대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적극 권장하는 사회는 오히려 건강하지 않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잠들지 못하는 것과 깊게 잠들고자 하는 것은 항상 동시에 존속해왔습니다. 막다른 곳에서 도망을 갈망하듯이요.
여튼 인생에서 몇 번 쯤 중요한 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요즘 시대의 필살기랄까, 강력한 일격을 갖다 대기엔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습니다만 완벽한 물러남을 위한 유도탄 같은 것이지요. 일단은 살고 봐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도 한 법입니다. 하지만 필살기는 기운을 끌어모아 분출하는 행위. 여러 번 반복하면 생명력이 닳아버리고, 이를 되풀이하다가 오히려 아주 작은 일격에도 목숨을 다하고 마는 꼴입니다. 그야말로 살을 내주어 뼈를 지키려는 아슬아슬한 방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가상의 존재라면 부활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생은 한번 뿐입니다. 주저앉는 것도 계속되면 그 다음은 눕고,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마법처럼 모든 의문에 휘장을 드리웁니다.
희망적이든 절망적이든, 미래를 그려낸 영화에서 꽤 자주 반복되는 클리셰가 있습니다. 가사 상태에서 주인공이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평화가 깨지고 긴장이 시작된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텅 빈 실험실 혹은 공격이 난무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엉망인 장소에서 주인공만큼은 깨끗하게 깨어납니다. 자는 동안 습격을 당하지도 않았어요. 동면 상태라는 이유로 보호 받는 것일까요? 저라면, 디스토피아에서 물리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한 이들부터 제거되는 게 수순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적 허용은 가볍게 넘깁시다. 현실의 사건은 심플하고 순식간이지만 이야기의 전개란 게 있으니까요. 자 이제 아무것도 몰라도 되었던 인물은 세상의 진실 혹은 자신이 깨어난 이유를 알아내야 됩니다. 때때로 잠들었다는 이유로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임무를 넘겨받기도 합니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휴면은 확실히 ‘언젠가 돌아오겠다’라는 의미를 어느 정도 완성하기는 하나 봅니다. 잠시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짊어지게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로 복귀했을 때 무거운 책임보다도 더 혹독한 형벌은 예상치 못한 타자로서의 외로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2. 어쩔 수 없음
써내려가다 보니 휴면과 동면은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적어도 저는 와닿는 실체를 본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 속성의 본질이 개개인의 사정에 묶여있는 탓이던가 애써 언어를 발라내는 시도를 하지 않은 탓일까요. 생각의 길이 잘 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해보겠습니다.
휴면은 선언이 없습니다. 방식도 통보나 종종 잠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이는 휴면을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2) 그러나 누군가가 휴면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멈춘 게 아닙니다. ‘전부’의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만약 ‘쉼’의 의미로 휴면이라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면, 차라리 긴 잠을 자러 간다고 말하는 쪽이 맞는 것 같아요. 휴면은 긴 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휴면을 반복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진심이자 사실, 핵심입니다. 그 심정만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 미결성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유조차 드러나지 않는 점도 휴면이라는 조건을 완성합니다. 다만 초반에 ‘휴면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동반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가피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놓고선 그 속성이 중심에 있다니, 모순입니다. 어쩔 수 없음은 다양하지만 지면관계상 두 가지로 나눠보겠습니다. 모든 상황적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해나가려했으나 불가능하여 방법이 없는 경우, 단순히 방법을 몰라 당황하여 포기한 상태가 있습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상태를 택한 사람의 복잡한 서사를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친절히 운운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음을 내포한 휴면을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이란 사유 없이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휴면을 ‘꿈’꿉니다. 어떠한 현실이냐에 대해 얘기하려면 사회학 또는 사회병리학까지 언급해야 할텐데, 저는 얘기할 처지가 못 되니 제 경험 안에서만 서술해보겠습니다. 과도한 경쟁, 고역 수준의 정신·신체 노동, 상호간 몰이해, 사회적 외로움에 대항하는 고립, 실패에 대한 두려움 혹은 실패, 그리고 수치심이 발생했을 때일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가족이나 타인의 사정에 영향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물러날지, 언제 돌아올지 정하는 건 곤란합니다. 상황이나 마음이 정리될 때 까지겠지요. 그런 면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전략입니다. 물론 원한다고 하여 퇴장과 등장이 자유로운 것만도 아닙니다. 의지대로 실행할 수 없는 형편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 마음먹고 실천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본래 유한한 세상의 속성에서 인간은 무한히 활동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물질 세상 속 무한을 강요당하는 모순에서, 유한한 물러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망설임 끝에 멈출 결단을 내린 이들을 두고 도망으로서의 낭만을 감행한 부류와 섞어서는 안됩니다. 여유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의 탈출을 단조롭게 일탈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요. 엄살이 심한 사람과 이미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다친 사람을 적어도 구별해내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아마 어렵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건 다른 지점에 있어요. 휴면의 본성을 착각하거나 행위를 낭만적으로 해석하거나 거듭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으로 여기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에 해당 하는 사람 중 진실로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3. 벼랑 끝에 선 사람들
하지만 누가 별 수 있나요. 휴면은 생각보다 간단명료하며 단순한데 비해 모두가 헷갈려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보니 또 생각난 게 ‘고스팅’입니다. 처음 시작은 모르지만 접한 것은 옆 나라 일본의 경우였습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알고 지냈던 친구, 동료가 다음날 증발해버리는 사건. 당사자는 이름도, 정체도, 사는 곳도 삶도 ‘리셋’을 하는 느낌으로 증발한다더군요. 정말 기이했습니다. 진정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실행하는 건지, 실행하면 믿어진다는 굳은 의지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몇 년 전 쯤 인데, 암담하게도 지금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니 바로 이전에 체념의 과정이 있었다고 봐야할까요? 저는 그리 옛날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현상을 어째서 체념할 수 있고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해는 바로 어떤 상황에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일어나잖아요. 나 자신도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 라는 원리로요. 글쎄요. 저는 아직까진 제 자신을 미래에 성급히 적응할 인간으로 미리 만들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시 지금까지 어디까지나 가정과 추측일 뿐이고, 고스팅이라는 것도 ‘휴면’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극심하게 맞대본 사례입니다. 같은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아예 상충하는 관념도 아닌 것 같아요. 벼랑 끝에 섰다고 여길 때, 등지는 방식 그리고 공동체와 책임으로의 복귀가 가능한가? 이것의 유무로 차이를 가늠해볼 순 있겠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자신과 비슷한 어둠, 아픔이 있는 대상에게 끌립니다. 그래서 쉽게 다른 이의 쓰라림을 판단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고통은 제각각입니다. 실상 말을 나누어보면 그 농도가 판이해서 놀랄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아픔을 전시하고 엄살을 부리며 누군가는 썩어 문드러져 있고 또 누군가는 울면서 웃는 이들은 상처가 없다고 손가락질해요. 그래서 판단만큼이나 섣부른 옹호나 동기화도 점점 조심스러워지며 서로 간 말수도 줄어듭니다.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지니까요. 그게 또한 존중으로 불리지만 힘이 빠지는 건 사실입니다. 다 그럴만한, 삶의 무게에 가벼운 말소리로도 내어지지 못하는 중압감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결국 휴면이라는 선언을 했던 게 아닙니까? 그렇지만요,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함 이라는 건 결국 털어내는 움직임 속에 나타나는 것 아닐까요? 웅크린 위치에서는 찬미, 충격, 경악, 칭송 같은 것들이 풍족히, 넘치도록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일찍이 ‘배불리 먹고 눈물이 없고 죽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존재뿐인 삶은 비인간 로봇’3)이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고통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 고통이 반드시 임하라는 저주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닥뜨린 크고 작은 불편함이나 불행함을 직면하고 살아내는 일 없이는 인생이라 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도 경이로움도 진실로 담겨있는 것이지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MISS가 된다면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동시에 뭔가를 경험할 기회를 잃었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동면하는 동물이나, 활동하지 않는 가상의 계정이나, 신기루처럼 증발하는 연기가 아닌 사람이니까요. 행여 누구나 다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요. 오히려, 누구나 사정이 다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라는 것 말입니다. 사정과 사정이 맞닥뜨리면 어떤 사정이 우선시되는 걸까요? 궁금합니다. 이전에 고통의 농도가 달리 느껴졌다고 언급했습니다만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지요. 이런 자잘한 집착은 제 오랜 의문에서 비롯되었고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균형은 진정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않지요. 다만 그를 위해 유지하는 다른 에너지가 극심할 뿐. 휴면을 반복하는 인간이 있다면, 휴면하지 못하는 인간도 반복적으로 발생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한 제 글의 기조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더 많은 것을 말해야만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주변의 것을 끌어와 비유하려 하면 할수록 결국 더 멀어질 것 같은 걱정이 있어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이젠 어떤 행동을 하든 서로에게 별로 상관없다고 여기는 편이 보통입니다. 관계가 없다고요.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정말 관계가 없었는지를요. 우리가 항상 관계 속에 있다는 것, 영향을 받는다는 것, 완전한 개인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제가 처음 고민을 시작했던, 휴면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존재이유를 점검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1) 도윤호, 「[사이언프리즘]잠에서 깰 때가 더 중요한 ‘동면’」, 세계일보, 2021.12.15
2) 1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사이트의 계정은 휴면계정으로 전환된다는 통보 메일을 받곤 합니다. 계정주가 휴면을 원해서 방치한 것이 아니라 잊었다는 이유나 뜸하다는 이유로 활동의 정지로 간주됩니다. 이건 비용·관리적인 측면의 조치입니다. 휴면을 선언하든, 통보받든 결국 어느 쪽이든 상호적이지 않습니다.
3) 박경리,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다산책방,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