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째 화분에 묻었다
그는 숲속에 놓이는 것과 잎이 내는 내음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종종 닉네임을 지을 일이 생기면 ‘나무’를 사용했고, 그의 실제 이름의 어감과도 유사했다. 나의 동거인- 그를 부르게 쉽게, 그리고 종종 출현할 수 있는 빈도를 생각하여 ‘나무’라 칭하겠다.
그와 교제한지 햇수로 2년이 넘어갈 무렵, 밤 산책 중 내가 나무에게 불쑥 “무언가 돌보고 싶어.” 라고 선포 하듯 말했다고 한다. 나무는 이 말을 건성으로 여기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그럼 새가 좋겠어.”라는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 ‘행복’이라는 이름의 진홍빛 앵무새를 키운 적 있었던 그의 입에서는 나올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앵(무새)집사의 삶. 한 마리에서 여섯 마리가 된 사정은 생략하는 편이 좋겠다.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명목은 서리 눈처럼 조용히 불어나 나무와 나의 머리와 어깨를 점령하고 있었다.
부추
부추는 여섯 마리의 새 중에 다섯 번째로 들인 암컷 퀘이커 앵무새이다. 이 명칭은 특이하게도 잉글랜드 한 기독교 교파의 퀘이커(Quaker)[1]의 종교적인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특유의 고개를 부르르 떠는 습성이 있는데, 이 모습이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 중 몸을 떠는 의식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실제로 새끼 때는 일명 ‘아기짓’으로 불리는 떠는 행위가 잦고 점점 클수록 줄어들어서 나를 포함한 앵집사들은 그때의 모습만 찾아볼 정도로 그 모습을 그리워한다.
부추는 키울 여력이 안되어 일찍 어미의 곁에서 떼어낸 솜털도 막 떼어지지 않은 새끼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왔다. 그 시기에는 이유식을 하루에 4번 이상 손수 만들어 먹여야 했고 다른 새들이 다가와 해치지 않도록 곁에 두고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들어오는 현관 문소리 또는 내 목소리에는 멀리서도 힘차게 날아오는 새가 되었다. 그리고 그만의 애정표현으로 매일 생성되는 내 콧속에 무언가를 부리로 쑤셔 넣고 열정적으로 꺼내 먹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런 부추가 문소리에 날아오던 날갯짓을 멈춘 채 대부분의 시간을 둥지 안에 머물고 있었다.
훈이
훈이는 세 번째로 들어왔다. 두 번째로 들어온 수컷 코뉴어 맹구의 짝을 맞춰주기 위해 같은 종으로 찾았던 것이 훈이었다. 코뉴어 종은 본래 애교가 많고 사람을 잘 따라서 한국의 애완조 세계에서는 선호하는 앵무새로 꼽히기도 한다. 당시 새끼 훈이를 보내던 주인이 이 아이의 어미가 차를 타면 멀미를 심하게 한다면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걸리는지 걱정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별일은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때 이후로는 자기 어미처럼 멀미를 했다. 훈이는 처음부터 의젓했고 유독 큰 눈망울로 사람과 눈을 곧잘 맞추곤 했다. 그런데 새들은 주인에 대한 질투가 많고 앙칼진 탓에 다가오는 훈이를 이뻐하려 들면 득달같이 쫓아와 기어코 멀리 쫓아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는 아이로 컸다. 대신 그 이름을 더 다정하고 특별한 음을 넣어 불러주곤 했다. 이런 훈이도 부추와 비슷한 시기에, 매일 하던 목욕을 거르기 시작했다.
In Ovo
부추와 훈이, 두 마리가 하루 차이로 알을 낳았다.
매일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일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두 녀석을 보니 참 신묘했다. 총 12개의 알이 탄생했는데, 핸드폰 불빛을 알 표면에 바짝 갖다 대고 붉은 실핏줄이 보이면 부화가 가능한 유정란이다. 훈이는 수컷 맹구와 교미를 했기에 여섯 개의 알 중 다섯 개가 유정란이었다. 반면 부추는 교미 없이 홀로 낳은 여섯 개의 알이었고, 확인해 볼 것도 없이 모두 무정란이었다.
새의 몸은 산란 전후로 역할에만 몰입했다. 알의 성질은 달랐지만, 날갯죽지를 부풀려 빠짐없이 품 속에 넣으려는 모습은 두 마리가 모두 같았다. 그래도 어쩐지.., 알 속의 생명의 유무를 가늠하고 나니, 태어날 가능성이 없는 무정란을 종일 몸을 짓눌러 품고 있는 부추가 그렇게 딱하게 보였다. 그러나 부추의 몸은 그 사실을 이유로 태도를 바꾸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것을 ‘헛된 것’으로 대할 수 없었다. 가끔 주어지는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오롯이 아랫배에 집중하고 있던 새의 시간을 뜨듯한 겉면의 온도로 대신 느껴볼 수 있다. 그러다 문득, 내게 허락된 최대치의 접촉면은 이 껍데기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추에게는 더 깊이 닿아있는 이 껍질 내부, 그 곳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In Ovo’. 라틴어로 ‘알 안에서’를 뜻한다. 이는 글을 쓰는 이름으로 택한 ‘인오보’를 발음 그대로 옮긴 말이기도 하다. 이 단어를 마주쳤을 때, 알의 내부를 미 접촉의 세계이자 드러나지 않은 채 잠겨있는 공간 같았다. 그런 내부의 것을 외부로 조금씩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한 나의 현재 상태와도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알 안의 공간은 내게 잠재적 상태를 지시하는 것 이기도 했다.
흔히 잠재성은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으로 이해되거나 무엇이 되어야 하는 가로 수렴되는 힘처럼 작동한다. 나 역시 요 근래 그 틀 안에서 그들을 바라봤는지 모른다. 훈이보다 무정란을 품는 부추를 더 딱하게 바라본 것도, 그 알이 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 먼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에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능태(dynamis)[2]의 개념처럼 현실로 나아갈 힘을 내부에 지닌 상태였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았으나 조건이 맞고 어느 것도 이를 멈추지 못하는 경우 실체가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3]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져질 수 있는 실체를 만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잠재성을 그렇게만 본다면, 부추가 알을 품는 행위처럼 끝내 실체가 될 수 없는 상태를 기다리는 일은 그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이런 잠재성을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읽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4]은, 그것은 단지 할 수 있음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있음’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잠재성은 실현되지 않을 능력까지 품고 있는 상태다. 그것은 반드시 어떤 결과로 귀결되어야 하는 힘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음까지도 스스로의 가능성으로 간직하는 힘에 가깝다.
부추 역시 ‘되지 않을 수 있음’을 향한 수행으로 보인다. 실현의 경로가 닫혀 있음에도 새의 몸은 여전히 잠재성의 형식을 유지한다. 스스로가 정한 믿음의 방향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또 연결하는 것은, 잠재된 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힘과 관점을 기다리는 일과 같다. 그것은 당장의 미래를 약속하는 일은 아니지만, 현재를 충실히 품고 머무는 힘으로 기록 될 수 있다. 부추는 앞으로 내게, 그 지속 속에서만 드러나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만날 것을 예감하게 했다.
그렇게 알을 품은 지 14일이 흘렀다.
정상적으로 산란할 수 있도록 주인이 곁에서 돕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알을 빼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한다. 무작정 늦추면 무정란은 썩을 테고, 유정란은 서둘러 삶을 부여받기 때문에. 보호보다 버팀에 가깝다면, 오늘은 꼭 알을 빼줘야 했다. 사정과 달리 마음은, 생명에 향해있던 터라 야금야금 그 시기를 늦춰왔다. 그러나 손바닥 중앙에 알들을 모아 살포시 움켜쥐니, 삶과 죽음 사이의 놓인 이 질긴 막을 마주하는 일이 언제나 나를 가장 미련스럽고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는 움켜쥘 수 없다는 것과, 좋은 땅을 고르는 일이 내 몫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2월 초의 바깥 땅은 대부분 얼어 있었다. 더 정확히는 언 땅을 도저히 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찬기 속에 둘 수 없었다. 번거롭더라도, 입고 있던 코트 속에 감싸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작업실로 와야 했다. 당연하게도, 땅속의 서늘함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흙을 고르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화분장(花盆葬)을 해주면 될 것 같았다. 작업실에서 키우는 식물 중에서 잎이 다 떨어져 줄기만 휑하게 있던 유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심긴 깊이를 보니 알들을 차곡히 묻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껍질째 화분에 묻었다.
곧 날이 따뜻해져서도 있겠지만, 며칠 뒤 유자나무에 새 잎이 돋아 있었다.
[1] 퀘이커(Quaker):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의 격동기 속에서 조지 폭스(George Fox)가, 성직자나 교회의 중개 및 의식 없이도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직접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창시한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출처: 나무위키)
[2]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사물의 생성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개념. 사물이 가능적 존재인 가능태(可能態) 에서 현실적 존재인 현실태(現實態)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네이버 사전)
[3]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Joe Sachs 역(Santa Fe: Green Lion Press, 1999), 서문 lvii.
[4]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 아리스토텔레스 전통과 하이데거, 벤야민, 푸코 등의 영향을 바탕으로 생명정치와 잠재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확장해온 현대 이탈리아 철학자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