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果樹)
나무가 본성을 잃으면 국소부위로 시작하여 깊이 부식되어간다. 한때 단단했던 외피 아래를 조금만 파면, 짓뭉개진 조각이나 축축한 가루들이 만져질 것이다.[1] 그렇게 죽은 나무 혹은 죽지 않았더라도 부러진 나무는 주변의 튼튼한 나무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즉, 위로 뻗어나가는 다른 나무를 위해서 베어낼 제거대상이 될 수 있다.[2]
만약 사람의 마음 안에 나무를 키울 수 있다면, 꼭 그 나무가 녹음이 우거지지 않아도 된다면 어떤 묘목을 심어야만 할까. 사실 내가 말하려는 수종은 앞서 타인으로부터 탄생한 비유이기 때문에 이미 정해져있다. 매해 꽃을 피우고 과실을 수확하며 사람과 동물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나무. 숲을 이루지 않아도 사람 가까이에서 아주 오래 살 수 있는 대표적인 과수, 감나무다.[3]
⟡
마음속에 뿌리내린 하나의 대목은 부러지거나 상처를 입더라도 회복이 가능하다면 베어내지 않아도 괜찮다. 오직 나의 책임으로 돌보며 때로는 빠른 성장을 위해 접붙이기도 더해가면서 정성스레 키워나가면 된다. 단, 한 그루만. 내게 주어진 한 그루라는 건 평생 한 번의 기회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로 표징한 사람과 그의 영혼도 포함한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어린나무는 결코 저절로 아름드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켜야 할 나무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영혼의 집을 지키는 보호수의 역할도 하도록, 함께 기대는 존재로 성장해야만 한다. 영혼과 삶이 혼재된 숲을 이루지 않는 하나의 과수는 평생 가꿔야 하는 소중한 정수(精髓)라는 귀결로 나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수히 축적된 상흔과 고난은 오히려 숭고를 향한 계기라고나 할까. 번지르르한 소리일진 모르지만 엉겨 붙는 것, 깨끗하지만은 않은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
이러나저러나 감나무가 튀어나온 이유에 대해 뒤늦게 설명하려면 결국 ‘감’의 정체를 감 이외에 최대한 알맞은 언어를 찾아 제시해야할 필요마저 느낀다. 그러나 실은 감나무의 비유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과 별개로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언어화하는 문제를 고민하자면, 덜컥 걱정이 드는 것은 사실 나는 ‘감’이라던가 ‘감나무’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작 내가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인걸까.
나무의 비유라 하면 대개 성경의 포도나무(연결과 열매 맺음), 무화과나무(‘때’와 회개)[4]가 연상되지만, 감람나무(접붙임 비유)도 자주 등장하여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전혀 다른 종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중국의 감람수(橄欖樹)로 오역되어 한국 성경에도 적용된 결과다.[5] 심지어 이 감람나무를 종종 ‘감나무’로 발음하거나 표기한 것을 보고 ‘성경에 감나무 비유가 있구나!’라는 착각도 불러일으키곤 했다.[6] 하지만 감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서로 비슷한 열매, 접붙임으로 과실을 맺는다는 공통점에서 어느 정도 ‘천상의 비유를 따라가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단단한 나무와 오랜 생명력으로 시간을 견디는 유사점은 결국 암시의 도구이자 상징으로 함께 에워싸여 있으며, 전체는 다를지라도 접붙이듯 부분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가능하다고 긍정했다.
⟡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꼴을 상상해보면 마당에 탐스럽게 매달린 단감과 떫은 감(예컨대 대봉)을 연상시키고 이를 이용한 홍시, 연시, 곶감, 감말랭이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매 계절마다 착실히 열매를 맺는 탓에 보릿고개를 넘게 해주는 고마운 나무로 자리 잡아왔다.[7] 하지만 과실이 성숙했다 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시기별 감은 따로 있다. 여름 들어 꽃을 피운 후 9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걸쳐 익어가지만 지역과 품종, 심지어 햇빛의 양이 익는 속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을이 절정에 이르는 10월 말부터는 서리를 맞으면서 익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렇게 시장에 감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본래의 시기보다 이르게 수확하면 떫어 먹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순리대로라면 적당한 때까지 기다리며 나무에서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지만, 후숙이라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재래종, 떫은 감 종류는 미리 따두고 먹을 상태가 될 때까지 지켜보면 된다. 이처럼 나의, 우리의 단 하나뿐인 마음의 과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된다면 인생이라는 감나무도 누구에게나 한정적인 자원이므로 시간선 위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될텐데, 심지어 열매를 다시 맺을 수 없는 불가역의 성질이 뒤덮여 애처로울 정도로 소중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은 너무 익어 먹기 전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익을 때가 도래하지 않아 기다리게만 하는 것일 때도 있다. 더 안타까운 건 이 ‘감’은 때로 나만을 위한 결실이 아닐 수도 있단 점이다. 내 안에 자라나되 다른 사람이 취하는 결과도 초래한다. 그리하여 감이 알맞은 시기에 영글었을 때, 준비된 스스로가 적절히 맛을 보려면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나의 때를 찾아가야 하고, 타인에게 갈취당하지 않도록 분별하는 훈련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만일 감나무를 기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이 삶이고, 그것에만 노력을 쏟는다고 가정한다면 짐작하건대,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말도 못하게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웠을 것인지. 그러나 나는 그런 달콤한 순간도 빼앗기는 순간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지금 이 찰나에도 가지는 착실히 비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감나무는 어디쯤에 도달했으며 온전히 가지 위에 달린 감은 얼마나 되는지 멈춰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수확 시기를 놓쳐 바닥에 눌러 붙은 무른 감 찌꺼기들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간 누가 나의 감을 허락도 없이 빼먹었는지, 내가 쥐어준 감은 몇 번이나 허망하게 나를 떠나갔는지. 주고받음에 있어서는 슬프게도(슬플 필요는 없으나) 주는 쪽에서 언제나 많은 고뇌를 해야 하는 법이다.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게 가장 값진 것이 누군가에겐 아무 맛도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프지만 인정해야한다. 대신 과실(果實)을 헤아리다 실수(過失)를 자책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끝내 감나무는 모든 것이자 모든 것에 대한 비유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하며 선택하고 감수하는 것의 미세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마음속의 저울이다. 중간부터 잘려버리거나 부러져서 쓰러지더라도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누운 채로도 옆으로 뻗을 수 있다. 충분히 생태계를 이룰 수야 있겠지만 홀로 엄숙한 고목이 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허락된 결실을 찬란하게 거둘 수 있는 지혜라는 생각이다. 조금 더 끈질기게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 이 시점 그리고 올해 돌아오지 않을 또 한 번의 젊은 날의 수확이 도래하면 ‘감’이라고 표현했던 나의 고귀함, 소중함, 유한함, 능력, 시간을 한 나목(裸木)[8]에게 주고 싶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만 골라 내게 주고 정작 내 것은 맛보지 못한, 이제는 바람에 껍질도 벗겨져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나의 나목에게
나누고 싶다.
[1] 고다 아야, 『나무』, (책사람집, 2024), 19-20p
[2] 위의 책 내용 중 ‘반드시 베어낸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일본의 산림보호법에 근거 ‘관리상 제거 명령’으로 해석 해야한다. 일본 「산림법」과 한국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는 고사목을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제거하도록 규정한 조항은 없다. 일본 「산림법」 제34조 및 벌채 신고 규정은 관리·절차 규정에 해당하며, 한국 법 제10조·제36조 또한 벌채 후 조림 및 벌채 절차를 규정할 뿐이다.
[3] 수령은 50년부터 시작하며 경남 의령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고령나무도 있다. 시조나무는 감나무과 감나무속의 활엽목인 고욤나무인데, 지금의 감나무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접목하여 재배한 결과이다. 국립생물자연관 홈페이지
[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2-33
[5] 디지털 인문학 센터, 올리브나무(감람나무)
[6] 한국 성경 번역 상 올리브나무를 감나무로 옮긴 사례가 없으나 일부 매체를 통해 올리브나무를 ‘감나무’로 지칭한 사례를 발견. 이는 단순한 착각에 의한 부정확한 용어 사용의 결과로 보인다. 일례로 전북중앙인터넷뉴스, 「감나무와 세례받음」, 2012.10.16
[7] 엄밀히 말하면, 지난해 가을 수확한 작물이 떨어져가는 5, 6월 피기 시작한 감꽃을 주워 먹었다. 물론 보릿고개가 지나고 조금 이르게 열리는 땡감은 떫지만 후숙해서 먹는 소중한 간식이기도 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보릿고개
[8] 벌거벗은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