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발표에서는 1980년대 한국 중·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전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진행 과정 동안 어떤 행위자가 참여했는지에 따라 ‘국산화’의 의미가 다르게 구성됐음을 보일 것이다. 이 사업을 주도했던 한국전력주식회사와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국산’ 핵연료를 만들겠다는 같은 이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기관의 지향점에 따라 이 이름에 담긴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상이했다. ‘국산화’라는 개념은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은 정치적 구상물이었다. 한국 중·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은 1970-1980년대 냉전과 핵무기 개발, 원전 도입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산’ 핵연료를 개발하려고 했던 두 기관의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준다.
이 발표에서는 1988년에서 1995년까지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업에 관여한 발안자, 설계자, 실무자, 국회의원, 그리고 언론이 각자 한국이 마주한 국제화를 어떻게 해석했으며 인천국제공항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국제화와 인천국제공항 사이의 관계는 인천국제공항 건설 계획 초기부터 최종적인 목표로 제시되었던 허브공항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그렇기에 허브공항 개념의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당시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업 관계자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국제화에 대한 이해를 어떤 모습으로 인천국제공항에 투영시키고 구현시켰는지 설명해낼 수 있다.
이 연구는 19세기 초 조선의 농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꼽히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본리지」의 풍토 논의에 나타난 보편성과 지역성의 측면을 그 사상적 자원과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서유구는 한반도의 지역별 풍토가 상이하여 그에 적합한 농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풍토적의(風土適宜)론을 보편타당한 지식으로 설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조선의 지역 농법 경험이 아니라 중국의 고전적 농서와 경세서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을 인용하는 데 그쳐서는 조선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하기에 그는 당시 최신의 지적 성과인 동국분야설, 북극출지 측정을 활용하여 이 문제에 대응했다. 한편, 그가 지역 농법의 실천을 불신하고 경계하며 풍토불의(風土不宜)론을 주장한 데에는 그의 엘리트적, 기술관료적 지향보다는 조선 후기 중앙과 지방의 정치경제적 위상과 역할의 재구성 상에서 노정될 수 있는 지방 행정의 자의적 운영 및 그에 따른 농민 공동체의 재난 상황에 대한 우려가 깊이 들어 있었다.
조선 후기 시기에 관상감은 삼력관들의 집합체인 삼력청을 중심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런데 삼력청에서는 오늘날의 상조계와 비슷한 '조애소'라는 조직을 별도로 만들어서 운영하였다. 본 발표에서는 삼력청의 조애소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과 세부적인 규정들을 소개함으로써, 조선 후기 관상감 관원들의 관직 생활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삼력청의 전체 운영 과정 속에서 조애, 즉 상사의 부조와 관련된 부분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앞으로 관상감을 포함한 조선 후기 중인 기술직 관서들의 운영 양상을 파악하는 하나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서는 2층설, 3층설 등 아직도 확정된 것이 없다. 조선의 거북선에 관한 가장 자세한 설명 자료는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설명이다. 이 자료를 후대에 실제로 거북선 제작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설명은 설계도에 해당하는 가장 자세한 기록이다. 그러나 자세한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구한 학자들도 각각 2층설과 3층설을 주장하고 있다. 거북선 제작에 사용할 정도로 상세한 설명도 연구하는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설명되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를 밝힐 길이 없다. 필자는 1795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설명 기록이 실제 제작에 활용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였으며, 이 설명 자료를 이용하여 거북선을 설계한 결과 3층 부분의 크기(폭 15척, 높이 5척 1촌)를 처음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795년 거북선의 구조가 3층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1867년부터 1899년까지 항공학자들의 새의 비행에 관한 탐구를 통해 비행의 문제가 어떻게 역학적으로 정의되고 ‘항공역학’이라는 학문의 탄생으로 이어지는지의 과정을 살핀다. 항공역학의 초기 역사에서 새에 관한 탐구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흔히 알려져 왔으나, 그 내용은 항공역학의 근대적 형성에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을 위주로 이야기되어왔다. 하지만 ‘항공역학’이라는 학문은 새의 비행이 ‘역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던 19세기 후반의 항공학자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행 원리가 역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자연학적 고려와 기술적인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때 항공학자들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물리학에 관한 서로 다른 가치와 신념을 반영하였다. 또 이 논문에서는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에 의해 항공역학의 문제와 풀이 방식이 어떤 방식으로 정의되고 발전되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1920년대 이전까지 나타나는 항공역학에서의 국가적 차이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컴퓨터가 한국에 경제개발계획과 과학기술연구를 위해 처음 소개된 시점은 1960년대 말이었다. 이 때 도입된 것은 전자계산을 위한 기계만이 아니었고, 그것이 가져올 사회 변화의 미래상도 동반하였는데, 그것은 "컴퓨토피아"로 불렸지만 실상은 당시 서구와 일본에서 부상한 정보사회론이었다. 산업사회가 야기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공산주의적 대안과 경쟁하는 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제시된 정보사회의 전망이 한창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던 1970년대 한국에서도 곧바로 대두한 일이었다. 이 발표는 후기산업사회의 전망으로서 정보사회가 1960년대 말부터 한국에 어떻게 처음 소개되고 수용되었는지를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이를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컴퓨터의 도입과 활용 그리고 사회적 수용 과정을 추적한다. 컴퓨터의 초기 수용은 한편 매혹과 열광으로 다른 한편 의혹과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데, 컴퓨터로 실현될 정보사회의 미래 가상 역시 양가적으로 수용되었다. 행정 전산화에 활용되기 시작해 인간의 수고스러운 노동을 대체하며 그 효율성이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실업의 공포를 자아내며 반론이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컴퓨터와 사회 변화의 관계를 기술결정론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도전받지 않았고, 그것은 오늘날 4차산업혁명의 담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발표는 2020년 11월에 한국 갤럽을 통해 실시된 약 1000명의 전화면접 결과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전 설문조사가 젊은 지구론, 오랜 지구론, 점진적 창조론 등에 대한 구별이 없었던 것과 달리 이 설문조사는 이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심층적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결과는 진화론이 한국 사회에 더 넓게 수용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에서 더 잘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여전히 30%에 가깝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들 중 다수는 다양한 형태의 창조론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창조론은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와 천주교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수용되고 있으며, 학력과 지역, 성별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