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1일  주일

이기풍 목사 (1865-1942)

186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기풍은 젊은 시절 성격이 거칠고 혈기가 많았습니다. 술과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1890년 평양 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얼굴을 다치게 하고는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기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평양이 전쟁터가 되자 그는 원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꿈속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분이 나타나 “기풍아, 기풍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원산에서 소안론(William Swa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1901년까지 성경을 판매하는 매서인으로 활동하며 함경도 지역에 복음을 전했으며,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소안론 선교사를 도와 황해도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조사(전도인)로 사역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이 과거 돌을 던졌던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9월 17일,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날 노회에서 제주도 선교사 파송 안건이 상정되었고, 이기풍 목사는 만장일치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복음이 거의 전해지지 않은 척박한 선교지였습니다. 이기풍 목사와 윤한애 사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을 질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전도 중에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거나 욕설을 듣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풍 목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 상처를 입으면서도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외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제주도 본섬뿐 아니라 마라도, 가파도, 우도와 같은 작은 섬들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배를 타고 들어가 전도했으며, 때로는 풍랑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헌신의 결과, 굳게 닫혀 있던 제주도에 복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3년 동안 성내교회, 성안교회, 금성교회, 성읍교회, 조천교회, 모슬포교회, 용수교회, 중문교회, 삼양교회, 한림교회, 법환교회, 세화교회 등 여러 교회가 세워지며 제주 복음화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광주제일교회와 순천중앙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그는 이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1938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출감하였지만, 건강은 크게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이후 마지막 사역지인 무학리교회 사택에서 지내다가 1942년, 향년 7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생애는 한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헌신의 삶을 보여 줍니다. 과거에는 복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생애를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으며, 특히 제주 복음화의 초석을 놓은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