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알아도 단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자의 개별적인 뜻으로부터 단어의 뜻풀이가 따라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례를 들 수 있지만, 여기서 사례 다섯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국정농단은 제일 마지막에 제시됩니다.)
1. 우주(宇宙)
우주는 집 우(宇), 집 주(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우주를 가장 큰 집과 같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이는 현대의 우주관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아래 그림은 현대과학이 바라보는 우주를 압축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2. 회사(會社), 사회 (社會)
모일 회(會), 모일 사(社)의 결합순서가 뒤집히니 완전히 다른 뜻의 단어가 됩니다. 문맥 속 쓰임을 통해 이 단어의 차이와 뜻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인지, 한자의 뜻을 통해 추론해내기 어렵습니다.
3. 방송(放送)
놓을 방(放), 보낼 송(送)이 결합한 말인데, 원래 이 단어는 감옥에 갖힌 사람을 풀어준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broadcasting을 방송(放送)으로 번역했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지금의 뜻이 됐습니다. 참고로 JTBC, SBS, MBC, KBS 등 방송국에 들어가는 B는 모두 broadcasting을 의미합니다.
4. 새옹지마(塞翁之馬)
한자 뜻만 풀면 보면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한자어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면 단어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학습의 효율성을 따져본다면 어휘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공부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그냥 '새옹지마'라는 단어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새옹지마 뜻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해주세요.
5. 농단(壟斷)
최근 '국정농단', '국정농단 뜻'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자어만 살펴서는 농단의 뜻, 국정농단의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국정(국가의 정치)을 밭두둑(밭두렁) 끊는다고요? 한자 뜻과 별개로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단어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1.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
2 .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이르는 말.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물건을 사 모아 비싸게 팔아 상업상의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요... 사전의 뜻풀이를 봤다고 국정농단이 무슨 뜻이 이해가 되나요? 국정농단이란 국가 정치의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독점)하는 것인가요? 최근 뉴스에 자주 나오는 농단은 특정인이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는 것 아닌가요?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농단'의 '농'은 원래 밭두둑(밭두렁)을 뜻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희롱할 롱(弄)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정농단이 국정을 희롱함, 즉 국가의 정치를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가지고 놂'(=희롱)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자어 뜻과 다르게 단어가 사용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국정농단 대신 국정희롱, 또는 국정농권(권력을 희롱함), 국정농락(농락 : 새장과 고삐라는 뜻으로,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서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 등으로 바꿔써야 할까요? 사실 국정농락이 더 적절한 표현 같지만, 구태여 국정농단을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때 한자어의 뜻에 구속될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미 희롱한다는 뜻으로 농단을 많이 쓰고 있고, 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언젠가 국어사전에도 '농단'에 희롱의 의미가 덧붙을 것입니다.
결론! 농단의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국정농단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국정농단 : 국가의 정치(일)를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가지고 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