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 본당 청년회 회원들이 본당 내/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올려놓았습니다.
출처: 각 출판물 (해당 링크 참조)
(본당 월간 반모임지 울림과 잠김 4호, 2020년3월 31일)
저는 사실 처음에는 알렐루야 프로젝트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워낙 스케줄이 들쑥날쑥 하여 부활절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부터 어린이 합창단, 뮤지컬 합창단, 대회 합창단 등등 대학 시절까지 늘 합창단원으로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노래하는 걸, 특히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하는 걸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맞아 성가대가 알렐루야 프로젝트로 자원 봉사자를 많이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고민끝에 일단 첫번째 오리엔테이션이라도 가보고 계속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첫 오리엔테이션을 한 뒤에 파트 배정을 소프라노로 받고 (두둥 o.O), 혹시라도 연습을 좀 빠질수 있을지라도 혼자서라도 열심히 연습을 해서 꼭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제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동안 많은 합창단을 거친 것같은 느낌이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알렐루야 프로젝트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중단이 되었지만 함께하는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은 무엇보다도 소중했고, 제가 왜 노래 하는 걸 그리 좋아했었나를 다시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몇 년 전 ‘남자의 자격’이란 프로그램의 합창단 프로젝트를 기억하시나요? 그때도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만드는 아름다운 소리에 감동을 많이 받았었습니다. 비록 저희 알렐루야 프로젝트는 그 프로그램에서 처럼 끝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서로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화음을 맞춰가면서 점점 하나가 되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보통 크리스마스 때 부르는 곡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부활절에 끝내지 못한 이 곡을 다시 모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지휘자님, 성가대장님, 성가대와 알렐루야 프로젝트 특공대 멤버들, 그리고 특별히 우리 소프라노 멤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12월에 다시만나 ‘알렐루야’를 부르게 된다면 더 열심히 연습해서 완벽하게 부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본당 주보 2220호, 2020년 2월 23일)
작년 4월 경 창세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첫 수업이 생각납니다. 창세기 교재를 보며 ‘배움’ 파트의 답은 척척 찾아 나갔지만, ‘묵상‘ 부분의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묵상도 배움과 같이 답을 찾으면 되겠거니 하고, 단답형 답을 준비해서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봉사자 분의 묵상을 듣는 순간, 답만 찾으려고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저를 자매님께서는 당신의 나눔을 통해 사랑으로 지도하여 주셨고 제 삶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제 자신을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창세기 공부를 마치고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연수를 가기 전만 해도 저에게 하느님은 막연한 존재, 저 멀리 위에 계신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는 와중에도 나는 하느님을 언제 볼 수 있을까. 그 분은 나에게 언제 다가와 주실까. 생각하며 바라고 원했습니다. 저는 어쩌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는, 혹은 얼굴을 뵙는 사건이 일어나기 만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은 제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봉사를 더 해야할까요. 왜 저에게만 많은 일을 주시나요. 얼마나 해야 만족을 하시는지요. 라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연수를 다녀와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제 곁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 이맘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고통 속에 있을 때에도 그 분은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때로는 제가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으로, 때로는 성당 교우분들, 친구로 저에게 다가와계셨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외면한 것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당신에게도 현재 하느님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속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을 느껴보세요.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 17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복음 28장 20절)
(본당 주보 2219호, 2020년 2월 16일)
저는 세례를 받고 거의 바로 창세기 성서 모임에 들어갔었습니다. 제 의지 보다는 주변 사람의 이끌림에 의해 들어갔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성경에 대해 1도 모르는 비신자였는데 바로 성경을 공부한다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작하면서 겁이 났습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내가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성령이 제게 내리셔서 천사같은 봉사자 분을 만났고 제 마음이 홀린듯이 성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창세기를 공부하는 내내 제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 이었습니 다. 이렇게까지 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깊이 반성할 수 있는 행복한 순 간이 또 있었을까요. 그러나 저는 금방 나태해져서 창세기 공부가 끝나고나 서 다시 성경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때의 은총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몇 달 뒤 창세기 연수에 참가했는데 처음에는 낯선 환경과 부끄러운 생각 으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령이 저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제 마음은 이를 참지 못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과 대화를 하 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나요. 항상 현실을 생각하여 고민하게 만들고 늘 걱정거리가 가득하게 만드셔서 매일 불안하게 하고 주 님 생각을 못하게 하시나요. 도대체 제가 이렇게 고생하는 동안 당신은 어디 계셨나요.. 그 때에 하느님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어떨 때는 신부님이시기도 하셨고 또 어떤 때는 아내의 모습이기도 했습니 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주 보던 신자 분의 모습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의 모 습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늘 제 곁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늘 불 평만 하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말도 안되는 걱정과 불안을 피곤한 모습 으로 모두 받아주고 계셨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으로 저에게 사랑을 주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받았던 사랑이 떠오르며 또다시 눈물이 쏟 아졌습니다. 하느님, 도대체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큰 사랑을 저도 모르게 주고 계셨나요.. 이 때 하느님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비오야, 많이 기다렸다. 이제서야 다시 돌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