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익선생님 <나의 작은 철학> 간행을 기념하는 6월 10일 행사를 안내합니다

이미지 출처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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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유로 나가는 즐거움


  내가 아는 장춘익은 사유와 대화에서 몇 가지 따라갈 수 없는 미덕을 가진 철학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대화의 주제가 된 철학적·사회적·일상적 문제를 가장 빨리 그리고 깊게 그 핵심으로 접근하는 사람이고, 난제 앞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특별한 유머감각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유머 감각은 단지 재미있는 표현을 구사하는 말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화의 목적과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폭넓은 지적·문화적 소양에서 나오는 종합적인 대화의 기술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내적으로 확장되고 가벼워지는 즐거움을 누리는 가운데 문득 진실의 곁에 온 느낌을 자주 받았던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그와의 대화는 그를 직접 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자 행운이었다. 

  


  이 책에 실린 그의 80편의 짧은 글들은 놀랍게도 바로 이러한 철학자 장춘익 특유의 미덕, 즉 통찰력 넘치는 사유와 반전을 숨겨놓은 자유로운 대화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그의 가까운 동료나 학생들만이 누렸던 친밀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지적 대화의 행운은 이제 독자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자산이 된 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장춘익은 우리 일상의 다양한 영역과 상관있는 중요한 개념이나 현상에 대해 쉬운 말로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편안하게 툭 말을 건네는 것 같던 그는 어느덧 그 개념이나 현상이 발현하는 중요한 현실의 맥락과 문화적 배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을 읽었을 뿐인데, 우리는 수치심, 수줍음, 죄책감의 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관용의 실천을 어렵게 만드는 포함과 배제의 전략적 사고에 대해서, 고독과 불안, 저항과 용기, 부러움과 존경심이 겹치고 어긋나는 지점을 섬세하게 비추어내는 그의 관찰과 사유의 결과를 받아든다. 더 나아가 독자는 돈과 상품사회의 명암에 대해 간략하지만 적절하고 풍부한 레슨을 받을 수 있고, 신용카드의 사용에 깃든 인정 욕구를 이해하게 되며, 장차 전면적인 사회위기를 불러올 저출산 현상이 교육과 취업의 경쟁으로 출현한 새로운 잉여적 개인들의 ‘자기복제의 포기’와 상관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장춘익과의 대화에서 내가 특별히 감탄하고 좋아했던 점은, 날카로운 비판과 현실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는 삶에 대한 긍정과 행복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합리적 성찰에 앞서 내면화한 보다 근본적인 삶에 대한 태도일 터인데,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나의 사유와 정서 속으로 타인의 관점과 관심을 받아들여 “그 영향으로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또한 신에 의존하지 않고, 돈이 충분치 않고, 페미니스트로 살아도 삶에서 의미를 확인하면서 “나름대로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강조한다. 사실 삶에 대한 이 두 가지 입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세속적인 삶의 한계와 가능성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공유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타인들과의 연대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질적 타인들과 어울려 나름대로 멋지게 살 때, 그 삶의 가치와 의미는 구태여 옹호하고 선전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설득력을 발휘한다.


  철학적 내용을 중심으로 보자면, 이 책에서도 장춘익은 계몽적 주체성, 즉 이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사적 삶에서 자유롭게 실험하면서도 토론 공동체에의 참여를 기반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비판적 사회철학자로서, 근대 이후 계몽주의 전통의 문제와 한계에 눈 감지 않지만, 그 전통의 장점을 살려 현대의 문제에 얼마만큼 대처할 수 있는지를 줄기차게 탐구해왔다. 


  언뜻 철 지난 합리성에 얽매인 낙관적인 대학교수의 설교가 아닐지 염려하는 독자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책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서늘하기까지 한 현실감각, 즉 제거될 수 없는 현실의 우연성과 유한성에 대한 직시, 절실한 위로가 부재하고 거절당하는 것이 “예의 바른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현실적 드라마”라는 인식, 정서와 선택에서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들에게 “당연한 듯한 관습”과 “공정한 듯한 윤리와 제도조차도 번뇌와 고통의 원인”일 수 있다는 통찰은 그의 합리성 철학이 섣부른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최선의 숙고를 통해서도 이해, 해결, 변화시킬 수 없는 세상의 문제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6장의 글들과 그 외 몇몇 글들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책의 글들 대부분이 저자가 교육 현장에서 만난 청춘들을 대상으로 쓴 것인데, 바로 그들의 주요 고민과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춘익은 “성이 친밀성의 유일한 터전”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개탄하고 스스로 “기다리고 안타까워만 하는” 낭만적 사랑을 버린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동시에 “안온한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연인이나 배우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확산하는 친밀감”이 가능해지길 희망한다. 이는 중년 남자의 개인적 경험과 체념 또는 지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동시에 존재의 불안을 독점적 사랑으로 보상하려는 청춘들의 근시안적 태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장춘익이 말하는 ‘확장된 친밀감’은 사실 성평등이 보편적으로 실현된 현실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것은 “대등하며 존중할 만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재미”이다. 따라서 그의 사랑에 대한 사유가 여성의 실존적 자유와 사회적 주체성, 그리고 보편적인 성평등의 당위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철학적 사고의 깊이, 세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문학적 표현력에서 저자인 장춘익보다 부족한 내가 그의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쓰게 되었다. 이 년 전 그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나에겐 “잠깐 함께 분노하고, 그보단 길게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그 이후엔 제법 긴 침묵도 어색하지 않게 같이 한잔할 수 있는 친구” 한명이 사라졌고, 그만큼 나의 세계도 협소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추천의 글을 쓰기 위해 그의 문장을 다시 나의 눈과 손으로 옮기면서, 나는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일상의 난제를 마주한 길목마다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유로 나가는 해방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우리의 대화가 독자들과의 대화로 확장되고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주동률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