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0
저마다의 행복과 편안함이 충돌한다. 세상이 그런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 혹은 "분배"에 집중하는 분이 대통령이 되셨다.
속칭 "노란봉투법" 문제로 노동계와 재계가 각을 세운다.
나라의 산업이 발전하는 시기였다면 동시에 분배가 중요했겠으나, 현실적으로 지금은 축소가 진행되는 시기다.
이런 시기에 "사장들의 배만 불린다"라는 논리가 과연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과연 세계정세상 "분배"를 앞세울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
한편 동시에 한국의 보수가 기업친화적이 아니라 이단친화적, 사이비 친화적이란 점도 참 재미있다.
원전 수출로 인해 한기의 발전기당 약 1조원을 해외에 보내는 계약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 보수도 진보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단과 특이한 종교단체가 세를 올리고 있다.
혼란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안함을 먹고 이단과 사이비가 무럭무럭 자라난다.
더 심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통 개신교 교회들도 슬슬 이단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그랬던 것 보다 더 빨리 말이다.
마치 러다이트 운동 때와 같이, 우리의 일자리를 사라져간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미래 세대가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기를 기대해야 한다.
산업혁명 시대의 농촌 마을의 붕괴와 같이, 지금 산업화 시대의 역군들은 정보화 시대에서 붕괴되어 나갈 것이다.
그들도 예전에는 산업의 역군이었다. 방직공들과 주산이 특기였던 경리, 기계가공의 전문가들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대두,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수명의 연장으로,
우리는 길고 두려운 미래를 맞이해 버렸다.
누군가의 혁신이 누군가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새로운 혁신의 주인공이 되려는 노력도 좋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나가라는 말도 좋다.
주어진 길을 갈 뿐이다.
2025.08.04
오랜만에 세미나로 삿포로에 다녀왔다.
큰아들과 제니바코 바닷가까지 자전거로 다녀왔다.
20년 전 여자친구였던 현 부인과 학생때 자전거로 갔던 길이다.
그 때는 그렇게 길고 멀었던 길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한가지 이유는 이번에는 전기자전거였다는것, 그리고 다른 이유는 구글맵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할 곳을 알지못하고 갔던 과거에는 힘들었으나, 가야할 길이 보이는 지금은 편했다.
사는 것도 그런 것 같다.
떠난 지 20년이 지난 곳인데, 일부는 비슷했고, 일부는 발전되었으며, 일부는 쇠퇴 하였다.
어느새 관광도시가 되어, 대기업만 살아남은 느낌이 강했다.
모교의 학생식당은 반찬과 음식수가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올라가지 않는 임금과, 높아진 원재료값 때문인 듯 했다.
아쉬웠다.
내가 학부 졸업논문을 발표했던 강의실의 바로 윗층에서, 이번에 세미나 발표를 하게 되었다.
내 학부 졸업논문 지도교수님은 지금의 발표를 보고 뭐라 하실 지 궁금했다.
모교의 현재 교수님들이 나와 나이가 비슷해 진 것을 보니 뭐라 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큰아들은 내가 두시간을 걸어가던 세시간을 자전거로 가던 어디든 잘 따라왔다.
체력은 스무살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전성기구나 싶었다.
유명 학교 교수님께서 "이제는 연구할 게 별로 없다"라고 말씀 하시길래 공감하였다.
근데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 분야 문제는 산더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분야 문제는 연구로 해결될 부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연구로 해결될 부분이 아닌 그 부분이, 왜 연구로 해결되는 게 아닌지 연구하면 되겠다 싶었다.
점점 사회가 이분화 되어 간다.
가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다면 세상에는 절망이 있는 만큼 희망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어떤 사람이 희망인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UAUS로 서울에 다녀왔다.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서로 사귀었던 시간에 대한 의리로, 헤어질 때 그 이유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을지로와 인사동은 낮과 밤이 달랐다. 토냄새가 나는 밤거리에 사람이 몰렸다. 10년전에는 안그랬는데.
서울의 거리는 창발(emergence)이었다. 자연스레 군집하여 패턴화 되었다가 사라진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UAUS 학생들이 작품을 가지고 온다. 3년째 튜터이다.
디테일한 메커닉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던져지면, 하나의 키네틱에 집중하고, 이에 대한 디테일로 인해 주제를 잃는다.
다시 주제로 돌아갈 수 있는 사색적 회귀가 요구된다. 아니, 어렵게 말할 필요가 없다.
깊게 생각해야 한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남을 놀라게 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북한 음식, 그 투박한 음식을 나도 좋아한다. 근데 이번에 가게에 데려가 보니 우리 큰아들도 좋아한다.
선호는 대물림된다.
한편, 복음과 신앙은 선호가 아니므로 대물림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과 같은 "동체"이시지만, 서로 다른 의미이며 다르게 만난 분이다.
우리 아들은 아직 하나님을 찾을 상황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찾을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팔자가 편한 우리 아들의 복인것이고,
하나님을 찾을 상황이 되어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 아들의 복인 것이다.
개신교 신앙이, 극우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극우화 되기 쉬운 자들이 개신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잘 살고 싶고, 남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속에 욕심이 가득한 자들이 교회에 모인다.
복 받기를 원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 성찰이 없고, 내로남불이 근본적으로 심한,
그런 이기적인 자들이 하나님을 찾는다. 자기가 잘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병자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으므로, 그런 이기적인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맞다.
교회는 병원인데, 환자들이 제대로 된 의사의 말을 싫어한다. 오래된 환자가 젊은 환자를 치료할 뿐이다.
잊지 말아라. 한국 교회에는 역사가 없다. 피흘린 역사가 없다. 일본의 민주주의와 같이 말이다.
눈을 들어 오래된 교회를 보라. 복음 위해 피 흘린자들을 보라. 희생한 자들을 보라. 카타콤을 보라.
한국의 교회는 댓가를 치룰 것이다. 나는 한국의 교회를 다닌다. 그래서 나는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슬픈 일이다.
2025.07.23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타인에게 악하다.
힘을 가졌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짐을 미룬다.
2025.07.15
난양공대가 있는 싱가포르에 다녀왔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더운 날씨에 길에서 누워 주무시는 분들이 있는 반면, 넘쳐나는 돈을 쓰지 못해 곤란해 하는 분도 있었다.
공영어인 영어를 못하는 호커센터의 중국인 아주머니들과, 세계 최고 저널의 에디터를 담당하는 석학들이 있었다.
사회는 안정되어 있었고, 다양성이 있었고, 그리고 스팩트럼이 넓었다.
사람의 인생이란 각자각자이다.
2025.06.28
근육 운동 만큼이나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스트레칭이다.
스트레칭도 본격적으로 하다보면 많이 힘들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다보면 체형이 교정된다.
기도는 마음의 스트레칭이다. 기도는 마음을 교정한다.
2025.06.14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언뜻 보면 정신승리와 한끗 차이다.
아니다. 같다고 해도 문제 없다.
둘 다 사람을 회복시킨다는 결과를 유발한다면 말이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는 사고적 유연함이 있고, 정신승리 논리에는 유연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헤를 받은 사람은 절망적 상황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귀를 막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2025.06.10
돌아가신 모친이 입버릇 처럼 말씀하시던 "감사하라" 란 말이 싫었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지 라고 생각했다.
근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디모데후서 3:1-5 KRV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감사하지 않는 이유는
- 자기를 너무 사랑하고
- 돈을 사랑하며
- 혼자 자존심을 세우고(자긍하며), 교만하며
- 거룩하지 않으며
-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무엇 보다 조급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43:1-4 KRV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내가 만약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다면, 감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감사란, 믿는 사람이던 믿지 않는 사람이던, 그들의 삶에 충실할 때 모두 잘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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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사하지 않았던 이유는 교만하고 조급했기 때문이다.
2025.06.07
최근 오랫동안 준비하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 마음을 상하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다칠 정도로 크게 상심하였으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주 동안 잠잠히 삶을 유지하는 것에 매달렸다.
생각해 보면, 2007년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심해 흔들림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세상걱정과 내 높아진 자아로 인해 초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주 하나님 아버지를 늘 믿으며"여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변질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실패는 참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난 현실적인 사람이다. 현실적인 증거가 없으면 따라가기 어렵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나온다. 기드온이 그랬고, 도마가 그랬다.
난 방언이란 은사가 없었다면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내가 목적하던 일 말고는 모든 일이 순조롭다. 좋은 학생들과 즐겁게 연구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이 은혜라는 생각을 머리속으로는 하고 있고 마음으로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받은 것을 세어보아라"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지,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하루하루 받은 은혜를 되새김질 하고 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에게는 교만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작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매우 자연스럽고 비겁하며, 신앙이 없는 사람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당당하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2025.02.12
이번 세기에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많은 세대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은퇴한 어르신과 계속 일을 하시는 어르신의 가장 큰 차이는 외로움과 고립이다.
교육 수준이 낮고, 정보가 부족하며, 고립된 어르신은 현혹되기 쉽다.
낮은 수준의 현혹이 바로 보이스피싱, 약장사, 효도관광 등이다.
높은 수준의 현혹이 최근의 태극기 집회이다. 실상 그들의 모티베이션은 외로움과 세상을 향한 울분이지만,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했을 때 참 애잔했던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소통 능력과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데도,
본인의 능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는 한 말이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어르신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식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짧게 보면 본인들이 자녀와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던 탓이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 또한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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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 중에도 극우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대부분 소통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고가 편협한 경우가 많다.
건강한 보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지적 능력의 부족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그들 역시 사회의 변방이다. 약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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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아무 죄가 없다.
예수님의 이름은 부족한 자들에게 이용당할 뿐이다.
이용당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돈을 벌거나, 그 이름을 팔아 자기 감정을 해결할 뿐이다.
그래도 된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은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기독교는 스스로 자정할 수 없다. 그래왔던 적이 없다.
결국 기독교에 답은 없다.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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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신학이 없고 고찰이 부족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로마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개신교는 이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 지 모르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지금의 한국기독교가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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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노인은 늘어날 것이며, 누군가는 그들을 이용할 것이다.
본인의 원인 모를 감정을 극우에 실어 보내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극우와 보수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 역시 늘어날 것이다.
지금의 사회 시스템이 과연 소통과 상식을 가르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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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때 그나마 상식적인 보수와 진보였던 김영삼, 김대중, 이회창, 노무현을 보고 자랐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광훈과 김어준을 보고 자란다.
서로의 극단을 보며 자신도 극단이 되어간다.
지금의 40-50대는 보수였던 부모 세대를 비판하며, 그 성향이 진보에 가까웠다.
지금의 10-20대는 부모 세대를 비판하기 때문에, 보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잘난 척, 착한 척 떠들었던 40-50대가, 실상 자기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모습을 보며, 20대는 보수가 된다.
그렇게 보면 진보도 보수도 없다. 부모와 윗세대에 대한 부정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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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이고 똑똑한 엘리트는 지금까지 사회적 법제 안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
그 대가로 부족한 자들의 감정적 배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젊은 자식은 부모를 외롭게 했다.
부자와 똑똑한 자는 약한 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성공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미신 속에서 말이다.
약한 자와 늙은 자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어려움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강한 자에게 복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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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귀족들은 혁명 당시 조상들의 죄로 인해 죽었다. 부유했던 대가로 죽음을 당했다.
세계 1차 대전 때 시민들은 부모 세대가 저지른 식민지 건설의 죄로 인해 죽었다. 부유했던 대가로 죽음을 당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가 만든 고도 경제 성장의 죄로 인해 죽어갈 것이다. 부유했던 대가로 죽음을 당할 것이다.
열매는 달지만 항상 대가가 따른다.
사회적 갈등은 막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물 흐르는 것과 같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갈등의 끝에는 전쟁이 있다.
젊은 사람이 많을 때는 내전을 하지만, 지금은 젊은이가 없으므로 테러를 한다.
둘 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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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2025.01.24
논문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논문을 제출하면 리뷰가 쓰레기인 경우가 많다.
2025.01.09
겨울이 되었고 날씨는 춥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마음도 추운 계절이다.
건설경기 악화로 학생들 취업이 어렵고, 연구비 삭감으로 연구비 확보가 어렵고, 지역대학은 항상 어렵고, 지역의 아이들은 심성이 거칠어져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기가 위험해 지고 있다.
잘 되는건 나와는 상관 없는 미국의 주식시장 정도 인듯 하다.
2024.11.27
흔들림이 없는 신앙이란 광신에 가깝다.
엘리야도 요나도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한 하나님이다"
신앙인은 항상 하나님을 잊는다. 기억한다 해도 그게 마음의 흔들림을 구제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신앙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앙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매일 감탄할 만한 기적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칸트가 이야기 한 대로 하늘의 별과 도덕법칙이 경외심을 매번 일으키면 좋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은 땅을 보고 산다.
저 나름의 시궁창에서 뻔한 하루를 산다.
그런 상황에서 흔들림이 없다는 건 광신이며 맹목이다.
흔들리는 우리에게 십계명이 이야기 한다. "나는 너희를 (아주 아주 오래전에) 이집트에서 구한 하나님이다."
오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과거의 구원의 경험으로 부터 시작된다.
오늘의 삶을 살아가며, 신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원망해야 한다. 의심과 원망이 없는 곳에는 참된 은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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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스로 모든 일에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 때문에 사탄 때문에 운명 때문에 상황 때문에 주변사람 때문에.... 모두 올바른 자세라고 하기 어렵다.
남을 탓하는 사람에게 은혜란 없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어렵게 이해할 필요도 없다. 부처의 "무소의 뿔"이란 개념도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광야란 그런 공간이다. 나와 하나님의 독대이다.
나를 유혹하고 무너뜨리는 건 결국 나이지 남도 아니고 사탄도 아니다.
2024.08.19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희의 것이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시를 쓴다.
고백이, 의지가, 탄식이 시가 된다. 그렇게 시편이 된다.
마음이 가난할 때와,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될 때 까지는 시간차가 존재하며, 그 사이에는 시가 있다.
2024.08.17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철저히 비판하고 의심하되 선을 넘지 않는것이 신앙이다.
거기까지가 신앙이다.
거기서 부터는 은혜의 영역이다.
은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건 우리가 할 수 없으므로 신앙(믿고 바라보는)의 영역이 아니다.
2024.08.14
이천년의 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세상 모든 일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대답은 누구나 한다.
기도를 했지만 응답받지 않는 것에 대해, 신실한 사람 사람이 받는 고난에 대해, 악인의 잘됨에 대해, 세상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해...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교회의 대답은 누군가에 "말장난"일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은혜"가 될 수 있다.
2024.04.23
최근 학생과 "딥러닝을 이용한 콘크리트 압축강도 예측"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배합비나 양생온도를 넣으면 강도를 예측하는 모델이다.
건설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콘크리트 품질저하 문제에 대해,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주변 환경의 영향을 정량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모델링이다.
이 모델이 재미있는게, 트레이닝을 시킨 데이터베이스가 "멀쩡한" 경우, 즉 정상적인 구조용 콘크리트 배합인 경우, 비정상적인 입상황을 입력해도 비정상적인 결과를 계산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콘크리트에 물을 200 까지 넣는게 정상인데, 300을 넣었다고 입력 하면 원래는 강도가 엉망으로 출력되어야 한다. 그런데, 200 까지만 훈련시킨 모델의 경우 300이라고 입력을 해도 정상 강도가 나온다.
마치 사람 같다. 착한 사람은 남을 잘 믿어 남들도 착할 것이다 생각한다. 개인으로서는 좋지만, 공인으로서는 통찰이 부족하다 하겠다.
결국 트레이닝을 위한 데이터에 "비정상적인" 결과를 잔뜩 넣어주면 된다.
마치 사람 같다. 망해본 경험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나도 아직은 많이 망할 나이 인 듯 하다.
2024.03.01
내가 요즘 쓰는 논문들은 대부분 저자가 6명이 넘는다.
우리 연구실에 사람이 늘어났다기 보다, 혼자 연구하는 주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부의 연구나 작업, 프로젝트는 해외의 외국인들과 진행하고 있다.
난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 치고는 상당히 영어를 못하는 사람인데,
문제는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차 영어를 못하게 되어 간다.
영어로 수업을 할 때는 오히려 편하다. 무엇보다 내 머리속에 있는 걸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 뿐 이니까.
그런데, "대화"가 필요할 때는 다르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데, 듣기가 안된다.
학생들과 연구를 하다보니, 정작 디테일 중 중요한 건 내가 점점 몰라간다.
몰라간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특히 최근에 철근부식장비 다루는 것과 DL/ML 분야는 더욱 그렇다.
최근 하는 연구들은 대부분 과거 시작했던 연구에 대한 "후속" 연구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어려운 문제에 대응하는 것 같으면서도, 저널에 게재가 잘 되지 않는다.
"신규성 부족" 이라는 이슈 때문이다.
근데 그래도 괜찮다. 시작한 연구에 대해 내가 "방문을 닫고" 나오고 싶었다.
2월달에만 제안서(계획서)를 총 5개 썼다. 주관으로 두개, 참여로 세개를 썼다.
그만한 숫자의 보고서를 썼다.
국토부 과제 보고서를 썼는데, 정량정성 증명보고서의 페이지수가 합쳐서 400페이지이다.
돈을 받기도 어렵고, 돈 받은 값을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일이란 걸 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
처형이 영업을 하시는데, 만약 내가 영업을 해야 하는 직업에 있었다면 난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학교에 신입생들이 들어온다. 요즘같은 학생이 귀한 시대에 학생들이 들어온다.
매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데, 10년이 넘도록 긴장이 된다.
아니다. 해가 갈 수록 더 많이 긴장이 된다.
해마다 높아지는 학생들의 흥미와 취향을 따라가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어떤걸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를 정하는 것도 어렵다.
어디가서 아는 척 하는 건 쉬운데, 어디가서 진짜 그 문제를 수습하기는 어렵다.
골재 물성평가를 10년 했는데, 아직도 품질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시멘트 특성은 그날그날 매번 다르다.
난 이제 물결합재비 미세조정 이론을 믿지도 않는다.
콘크리트를 만든다는게, 그날그날 도박 같다.
하루 하루 살다 보니, 뭘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게 은혜다.
2024.02.07
요즘 들어 부친 생각이 많이 난다. 보고싶다는 개념은 절대 아니고, 단지 나와 유사한 성격으로 세상을 살았던 선배로서,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부친의 실수를 내가 한다. 실수란, 눈앞에 주어진 일에 겁을 먹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친은 부친의 그런 모습을 "바보같다"고 하셨고, 우리 부인은 "잘한다"고 해준다.
2024.02.07
아시안컵에서 한국이 요르단에게 대패 하였다.
생각해 보니 부친께서도 국가대표 축구는 보지 않으셨다.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이해가 된다. 이긴다고 나에게 쌀 한톨 떨어지는게 없는데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축구를 재밌게 보는 우리 큰아들은, 대범한건지 순진한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우리나라 국민들이 마음 시원하게 즐거운 일도 없었겠다 싶다.
우리나라 최근 경기들을 보니, 참 마음이 불편하다.
아슬아슬 아슬아슬.
차라리 시원하게 져버린 이번 경기가 더 나았다.
마치 우리들 살아가는 것 같다. 아슬아슬 겨우겨우.
넉넉히 이긴다는 하나님 말씀은 가끔 참 멀다.
2024.01.19
나는 그나마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직장도 있고, 나름의 분야에서 나름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 학생들은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졸업한 학생들도 나름의 자리를 잡아간다.
2023.06.16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종교에 대한, 신념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다.
민주주의도 이타성도 사회적 통념도 모두 나름의 종교와 같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맞는 말이다.
어떠한 사람이 사회적인 통념을 따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앙이다.
신념과 신념의 충돌인 상황에서 전도란 참으로 건방진 행위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표현 안에 얼마만큼의 무지와 얼마만큼의 교만과 얼마만큼의 아집이 섞여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함부로 복음이란 표현 조차 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뭘 하고 뭘 믿고 사는지 잘 모른다.
2023.06.09
세상에는 모든 일을 하늘의 뜻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고, 동시에 사람의 의지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 중 사람의 의지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삼국시대의 조조, 그리고 철학자 니체가 있다.
맞는 이야기 이다. 이들은 하늘의 뜻으로 수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위선자들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하늘의 뜻을 의지해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이는 사실 어느정도 생에 대한 의지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삶을 내가 개척하겠다는 의지 부족에 댓가로, 내 인생의 주도권을 타인과 상황에게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 같이 살고 있고, 이로 인한 불편함 속에서 살고 있다.
니체가 이야기 한 "초인"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2023.06.07
행복에는 적절한 법칙이 있다.
몸이 너무 불편하지 않고, 적당히 잠을 자며, 식사를 하고, 주변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적절히 교제를 하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준의 고독을 확보하며, 타인을 비판하는 마음을 갖기 보다 적절히 받아들이고, 어느정도 보장된 직장에서 적절한 시간 일을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쉽지 않다.
사회적 요구와 상황으로 인해 필요이상 열심히 일 한다던가,
신경 쓸 일이 많아 잠을 자지 못하거나 혹은 식사를 너무 많이/적게 할 때가 있다.
서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그런 상황과 성격으로 인해 외로워지는 경우도 다반사 이고, 혹은 타인에게 집착하여 독립된 마음을 갖지 못할 때도 많다.
밥벌이가 어려워 고생할 때도 있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신을 불사를 때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평화란 동적(dynamic)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평화와 행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향상성인데,
이 향상성은 아무리 보아도 어렸을 때의 추억과 즐거운 시간들이 토대가 되는 듯 하다.
마음이 어려울 일이 있고 몸이 상했을 때, 다시 몸과 마음의 건강과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린날 갖춰진 기초체력과 건강한 마음이 중요한 듯 하다.
직업상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한 적절하고 건강한 토대를 만드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3.04.24
믿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교회를 다니며 어려서 부터 여러가지 신기한 일을 보았다.
큰누님과 아버지는 무언가를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알 수 없으나 귀신인지 천사인지 뭔가를 보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별 티를 내지 않기 때문에 나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우리 작은 누님만 해도 천식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알지만, 어느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나았다.
나의 친어머니 전에 계셨던 큰어머니(누님들의 어머니)는 유명한 은사자였다. 70년대 이미 여자 장로로 교회를 몇개나 새우신 분 이라고 전해들었다. 남아있는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그 때 사진이 있었다. 허허벌판에 현수막 하나를 내 걸고 교회를 창립하는 사진 말이다. 그런게 몇개가 있다.
아무튼 그 분은, 요즘 와서 믿을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귀신을 내 쫒고 아픈 사람을 고치고 기도해서 뭔가를 보는 그런 은사자였다고 한다.
나 자신은 그런 대단한 건 경험이 없으나, 단지 일본에서 신앙생활 할 때 반신불수로 고생을 오래 하시던 한 일본분이 어느정도 치유 되시는 걸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있다. 나 자신도, 우리 부인도 방언의 은사는 어느정도 있으나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다음과 같다.
큰 누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귀신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 것 같은데,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으신다.
아버지도 물론 돌아가실 때 알 수 없는 회개를 1년간 하셨지만, 우선 내가 어렸을 때 부터 들었던 건 다니시던 목사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었다.
아까 반신불수였다가 어느정도 좋아지셨던 분의 남편분은, 부인이 원해서 끝까지 교회에 나오시고 교회를 섬기셨지만 절대 신앙고백을 하지는 않으셨다.
부인이 죽었다 살아나도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도 요즘 교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많을 뿐,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지는 의문이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뿐이다.
스가랴 4장의 "힘도 아닌, 능력도 아닌, 오직 성령으로" 라는 말씀에서, 성령이라는 것이 오순절파에서 이야기 하는 이적과 기사와 환상 만은 아닌 듯 하다.
연구실에 계신 박사님께서, 우리 연구실 외국인 학생의 몸이 좋지 않을 때 마다 병원에 데려가 주신다.
한 병원에서 원인을 못 찾으면, 다른 병원에 데려가 주신다. 말씀도 안 하셔서 나는 몰랐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서 되는 일은, 생각 보다 상식적이고 생각보다 인간적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JMS 문제로 나라가 떠들석 하다. JMS는 빙산의 일각인데 말이다. JMS를 포함한 수많은 이단도, 그 설립시기에는 이적과 기사가 있다.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한다.
상식적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면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사실 잘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생각보다 하나님은 상식적으로 일 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2023.04.21
사람에게는 항상 다양한 종류의 욕구가 있다. 식욕과 같은 육체적 욕구가 있는가 하면, 인정욕과 같은 심리적 욕구가 있다.
육체적 욕구에 대한 충족이야 상황에 따라 채울 수도 있고 못 채울 수 있다. 이 충족이라는 것이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가 식욕을 못 채우겠냐 하지만, 극빈하여 밥이 없어 밥을 못 드시는 분도 우리나라에 여전히 존재하고, 몸이 아파 소화를 못시켜 밥을 못 드시는 분도 많으시다.
육체적 욕구를 충족 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심리적 욕구의 충족이다. 문제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충족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라 본다.
노력해도 안된다고 생각해 포기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어차피 인정 받기 어려운 것이라면 깔끔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 역시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가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있다.
인정욕을 채우지 못해 허세를 부리고, 사회적 관계욕을 채우지 못해 SNS에 테러를 하고, 성취욕을 채우지 못해 남이 한 업적을 깎아내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필요이상 높게 평가하거나 혹은 필요이상 낮게 평가한다.
이 역시 가능하다면 피해야 할 일이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다.
마치 식욕을 채우기 위해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참 다행이겠지만, 상황과 조건이 그럴 수 없을 때는 불량식품이나 대체식을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결국 사람이란, 자신의 욕구를 어느정도 채우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가능한 이 욕구를 현명하게 정리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내가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잠언 2장에 "근신이 너를 지키며"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한 히브리 원어는 알 수 없으나 영어 성경에서는 discretion이라고 한다.
이 단어의 뜻은 "분별: 자기 판단에 의한 자유재량"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 묘한 표현이다.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자유재량에 따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욕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야 말로 분별이 아닐까 싶다.
2023.04.20
최근 호나우두 선수가 상대방 선수에게 헤드락을 거는 기상천외한 반칙을 했다.
아스트로의 문빈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고가 되지 못한, 안정되지 못한, 자신이 자신을 만족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
타인의 인생이야 어찌 제대로 이해 하겠냐만,
우리 모두들 어느정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미래가 불안하고, 자기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실질적인 어려움이 갑작스레 내 앞을 덮쳐온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자신의 노력으로 될 부분은 하면 되겠으나, 그 마저도 노력의 끝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자신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부분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늘만 바라보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나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어떨 때는 행복이란 것을 너무 쉽게 단순화 할 때도 있다.
"밥 잘 먹고 걱정이 없으면 행복한거야." "가족의 웃는 얼굴을 보면 행복한거야." "원하는 것을 노력해서 얻으면 행복한거야"
근데 살아 보니, 걱정이 없고 밥을 잘 먹어도 불행할 때가 있고, 가족이 웃는 얼굴로 생활을 해도 불행할 때가 있고, 원하는 것을 노력해서 얻고 보니 허무할 때도 있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 행복이란 키워드에 중독되어 살고 있는게 아닐까?
BTS가 "Love yourself"라는 키워드를 전세계적으로 퍼트리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 덕에 최근 미국사회는 다양성에 대해 매우 열려가는 분위기 같다.
그러나 사실 내심 허무하기도 하다.
사실 BTS 정도라면 스스로 사랑받을 만 하겠지만,
남들에게 사랑 받을 만한 매력이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그건 대단한 멘탈의 소유자거나 아니면 오히려 사회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빨간머리 앤을 보고 위로를 얻었지만,
사실 빨간머리 앤은, 자기 자신의 특징을 남들이 인정해 줄 때 까지 타인과 끊임 없이 싸우고 그러다 안되면 관계를 단절한, 일종의 투쟁연대기 이다.
그렇게 투쟁해 가면서 얻는 것은 "사회 안에서의 자기 자리"이지 "행복"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 삶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2023.04.13
복잡하다 복잡해 현대사회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큰 사회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는게 당연한 일이리라.
그나마 확실한 직장과 상황 속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현대사회가 주는 두려움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하면 욕을 먹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소통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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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좋은 목수이자 사회인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30살 될 동안 수 없이 "장가가라"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나름 생육신으로 오신 것이니, 일을 배우다가 실수도 하고 사고도 치고 하셨지 않을까.
나름 사회인으로 세상에 오셨으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듣고 하기도 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의 공생애 전의 삶, 첫 사도들의 제자였을 때의 삶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난 지금의 나의 선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공생애를 시작하고 언제 사도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 오순절파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들의 지금 행동을 볼 때,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들의 간증을 들어도, 그건 그들의 삶일 뿐 나의 삶은 아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에 대해 하신 말씀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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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안다.
마음의 부담이 있고, 그리로 가야할 길을 머리로, 가슴으로 알고 있다.
그게 하나의 큰 방향일 수도 있고, 하나의 작은 행동일 수도 있다.
마치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예수님이 주인공에게 "사진을 밟으라"라고 음성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따르지 못해 부끄럽고, 순종하지 못해 부끄러운 일이 가득하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해야 하는 데 못하는 일에 민망해 하고, 해야 하는데 안하는 일을 부끄러워 해야겠다.
2023.02.27
지난주, 준비했던 과제 하나가 떨어졌다.
미선정 대상이라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올해 까지 학생들 줄 인건비는 확보해 두었으나, 내년은 모르겠다.
근데 바꿔 보면, 우리 연구실 인건비가 연에 2억인데,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채워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조선대에서 연구실을 열고 지난 10년간 장학금이 끊긴 적이 없고, 막상 내가 대학원때도 장학금이 끊긴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하게 인건비를 보전해 주셨던 수많은 교수님, 박사님께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로 또 하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생각하기로 했다.
2023.02.13
최근 일본 후쿠오카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여전히 마츠야 규동은 400엔을 넘기지 않았고, 편의점 푸딩도 150엔에서 200엔 사이었다.
가격이 좀 있는 대창전골집에서 4명이 먹었지만, 만오천엔을 넘지 않았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회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다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한국이라는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우리 연구실의 학생 중 세명은 에티오피아에서 왔다. 이미 박사를 받은 밀리언은 본국의 어느 건설소재 연구소 소장으로 가서 땅도 사고 집도 샀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난 몇 1~2년간 에티오피아에 내전이 발생했고, 더군다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어려움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하기 참 어려운 일이다. 에티오피아 학생들과 이야기 해 보니, 한국은 매우 안정적인 나라로 보이는 듯 하다.
반대로, 일본에서 살 때 나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만은 살지 않았던 것 같다.
튀르키에에서 최근 매우 큰 지진 피해가 있었다.
건축공학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부근의 지진 위험성이야 매우 명백한 것이며, 이미 지난 수십년동안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해 온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내진설계가 반드시 필요했고, 이로 인해 튀르키에에는 나름 유명한 내진구조 공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결국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국제사회와 여러 국민들의 헌신으로 "누가 구조되었다"는 기적만 바라고 있는 상황이다.
기적을 바란다는게, 메시가 월드컵 우승하는 문제가 아닌 이상은 일반적으로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린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회복이 있기를 바라고, 우리 나름 대로 그들에게 도움이 될 부분을 찾아야겠다.
2023.02.13
내가 거주하는 광주와 전남에 여러 어려움이 있다.
아마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이고,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 지역의 당면한 어려움은 물 부족이다.
요즘 같은 21세기에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비가 오지 않는다.
지역 산업기반이 약해지는 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물이 부족한 건 어떻게 못하는 것이다.
경남쪽에서는 반대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문제가 생긴다고 들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변화란 사람을 참 힘들게 만들지만, 어쩔 수 없다.
2023.01.31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보면 성령의 은사(gift) 중 하나로 "믿음"을 이야기 한다.
믿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믿음의 단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반복적인 행위와 방향에 대한 것이다.
예전 일본에서 찬양팀을 인도할 때 들었던 생각은, "목사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까지 무리를 하며 살까" 였다.
옆에서 같이 서포트를 해야 하니 나도 무리를 하며 도와 드렸고, 결국 병도 나고 힘도 들었다.
한국에 와서는 닥달하며 사역을 시키는 분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무리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내 마음대로 찬양팀을 하다가 내 마음대로 말아먹었던 느낌이 있다.
지금은 지금은 충실한 선데이 크리스챤으로 살아가고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 믿음의 분량 만큼 한 것이었다.
내 믿음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확신이다.
지금까지 삶을 이끌어 주신 것, 배고프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것, 맡은 바 일을 어느정도 감당한 것 등이다.
이에 대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일공에 합격 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내가 이 은혜를 갚아야 겠다"고 생각해 교회를 섬긴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라는 게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애매하다.
우리가 신앙고백이야 맨날 하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느냐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딘가 확신이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흔히 많은 신앙인들이 이야기 하는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것이 있었느냐 라는 부분은 나에게 있어서 애매하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남에게 확실히 전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사랑 이라는 부분과 대속(redemption)이란 부분이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 일까.
"(최소한) 나는, 내가 여기 까지 오도록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신 것과, 나를 먹고 살게 해 주신 것을 믿는다. (그런데 너한테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 앞으로도 아마 나를 이끌어 주실 것으로는 예상된다.)"
인듯하다. 나에게 적용된 현상이 상대에게 까지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증이 없다.
아무래도 내 믿음은 마치 적절한 비선형 회귀분석식 모델 같다.
결과값이 있는 부분 까지는 어느정도 예측이 되지만, 넘어가는 부분의 예측은 어렵다.
예전에는 구원의 확신이 완벽하게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보니 사역에 힘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믿음이란 은사가 맞다.
언젠가 믿음의 은사가 커지면 R2 값이 1에 가까워 지겠지?
2023.01.27
최근 서울 집 관리 자격 문제 때문에 3일간 소방안전교육을 온라인으로 받았다.
동영상만 보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실시간 교육 중 화면에 얼굴을 보여야 하고, 출석 체크 뿐 아니라 순간순간 퀴즈도 보고, 한두시간 걸리는 숙제까지 낸다.
수강생의 절반 이상이 어르신 들인데,
"줌"을 화려하게 사용해야 하는 이 온라인 수업이 매우 어려우신 듯 하다.
어르신들에게 시대의 흐름은 야속하다.
최근 외모 지상주의가 심해져 "잘하는 것 보다 이쁜 것"이라는 게 일반 통념이 되었다.
근데 안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다. "같은 값이면 비지떡"이란 말은 옛날 보다 있었다.
원래 같은 값이 아니더라도 비지떡인 세상이다.
2023.01.08
최근 일을 하다보면 느끼는 거지만
나도 남들도 “네”라고 한번 말하는게 아니라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말이 “나는 솔직히 일을 하기는 싫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본심을 숨기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는 의미로 들린다.
애잔하고 짠하고, 돌고돌아 슬프고도 장하고 멋지다.
어떻게든 잘 살아 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버티는 삶은 귀하다.
요즈음 사회가 참 호사스럽다고 느낀다.
호사스럽다는 단어를 다르게 표현할 방법은 없고 내실 보다 표면적인 사회라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학교도 사람도 일도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호사스럽던 적이 몇번 있는데, 항상 그 후에는 내부로 부터 시작된 전쟁이 있었다.
로코코 시대 다음에는 프랑스 혁명이, 빅토리아 리젠트 시대 다음에는 결국 1, 2차 세계대전이, 심지어 일본의 헤이안 시대 다음에는 원평전이 있었다.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23.01.07
유튜브를 열심히 보는 2012년생 둘째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뉴스에서 좋은 이야기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는 좋은 이야기가 꽤 나왔는데,
내가 아들 나이 때는 문민정부 처음 하던 시절이라 뉴스가 어느정도는 통제가 되던 시기였다.
지금은 안좋은 상황을 마냥 안좋게 표현하는데,
그 시절에는 안좋은 상황이라도 적당히 포장을 좀 했던 것 같다.
2022.10.03
시대가 점차 힘들어져간다.
당연한 일이다. 30~40년전에야 크게 고민하지 않고 노력을 하면 어느정도의 부를 획득 할 수 있는 기술적 경제적 상황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유럽, 일본과 같은 최첨단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중저가의 노동집약적 제품을 해외에 싼 값에 팔아 수익을 얻었다.
그 당시에야 중국이란 경쟁자도 없었고, 어느정도의 기술적 지식만 있어도 생산직에서 일할 수 있었다. 물가상승률에 비해 경제성장률이 높으니, 사람들은 모두 대학에 몰렸고 누구나 열심히 하면 사장님이 되어 적당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나라 사회를 지탱해 주던 중저가 생산직 일자리는 어느새 "좋소기업"으로 바뀌어 저가경쟁에만 뛰어 들 수 밖에 없다. 중국의 기술적 부상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진보쪽에서는 "사장과 직원이 돈을 벌던 회사가 사장만 돈을 번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 역시 살벌한 경쟁에 놓인 사장의 사정도 이해를 해 주어야 한다.
산업계의 불안은 부동산에 돈이 몰리게 하였고, 그 결과 임금노동 소득 보다 부동산을 통한 소득이 더 커지게 하였다. 주식과 비트코인을 안하는 사람이 없고, 이 챗바퀴에서 낙오한 사람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기도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고부가가치 산업"이란 것과, "낙수효과"란 것만 기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 정부는, 일부 기업만이 대응 가능한 인공지능과 반도체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의 사례와 같이 "러스트벨트"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러스트벨트는 말 할 필요도 없이 비수도권지역인 지방이다. 옛날이야 경남의 중소기업이 소재부품을 만들어 몇백억원의 수출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몇몇 기업을 제외하고는 어렵다. 그나마 대기업의 하청이라면 일거리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한때 한국의 20대 대학에 들었던 부산대와 경북대, 전남대는 어느샌가 몇십번째로 경쟁력이 밀리고, 전에는 들어본적도 없는 수도권 대학에 젊은이가 몰린다. 그러나 그런 대학을 졸업해도 막상 수도권에서 조차 그리 좋지 않은 일자릴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지하철 2호선을 타면, 강남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 뿐이다. 젊은사람은 차를 탄다. 모든 인프라가 갖추어진 서울이지만, 막상 노인인구가 늘어갈 뿐이다. 그들은 저가의 고급인프라를 공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소득 보다 높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 만으로 젊은 사람들은 밀려난다.
힘들어져 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이 할 일이란 남을 미워하는 것 뿐이다. 젊은이는 노인을, 노인은 진보를, 남녀는 서로를, 지방은 수도권을, 노동자는 사용자를 서로 밀어낼 뿐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 막상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다. 이 모든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우리 물건을 사줄 때야 모두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물건 대신 그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다. 기술력 만으로 경쟁력이 확보되는 분야는 별로 없다. 내수시장 규모 역시 무서운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옆에 1억이 넘는 일본도 해결을 못한 문제가 "새로운 경쟁력 확보"인데, 우리나라가 그것이 현재 가능할 일은 없다.
개인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옛 성현들의 말씀과 같이, 100년을 사는 자가 1000년의 걱정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열왕기하 4장의 수넴여인을 기역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던, 불의의 시대에, 엘리사는 오직 수넴여인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먹이고 자식을 살렸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오지 않은 집은 어찌해야 할까. 그건 알수가 없다. 단지 수넴여인은 "귀한 여인이 엘리사를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 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고 들어갔더라"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 해야 할 일을 하자.
2022.10.03
모친의 연세가 여든을 넘으심에 따라 급격히 건강이 안좋아지신다.
누구나 이런 시간을 거쳐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연스럽고도 애잔하고 그리고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자식으로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2022.07.18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없는 시대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말라버린 시대는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강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은 시기가 있었지만,
실제 긴 역사 속에서 그러한 시기가 몇번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익숙한 매체를 통해 중근동의 역사를 판단하지만,
실제 중근동 고대사를 통해 그려지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란 그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약소국일 뿐이다.
그나마 열심해도 중간을 가기 힘든 땅에 자리잡은 민족이 그나마 몇번의 신앙적 경험을 평상시에는 가지고 근근히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 적혀진 것들의 빈칸이 존재 한다.
신구약 중간기가 그렇다. 노아 이후 모세까지가 그러하다. 여호수아 부터 사무엘 까지의 사사기 전체가 간극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같은 일반인은 그런 시기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갑자기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몇이며, 태양이 뒤로 빠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몇이며, 기도 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몇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몇일까.
바빌론 유수 후 예레미아와 함께 원치 않는 이집트행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인들이 있다.
이스라엘 유다가 로마에게 망한 후 이집트로 들어간 콥트교도들이 있다.
지금도 곤란하게 살아가는 아르메니아 인들은 어떠한가.
북한에서 핍박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뭐가 신앙인지 잘 모르고 살아가는 남한의 우리는 또한 어떠한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 직전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 하신 것과 같이,
끌려갈 그 땅에서 아이를 낳고 밭을 일구며 그곳에서 살아나가야 한다. 그게 오늘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2022.05.07
유럽 축구 연맹 챔피언십(UEFA Champions League, UCL)이 진행중이다.
그들의 응원문화를 보다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축구라는 이름을 빌린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일상의 모든 분노를 축구를 통해 쏟아놓는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축구는 "훌리건에 의한 폭력행위를 근절하고 바람직한 팬덤 문화를 만드는" 뻔하고 귀여운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전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죽어도 썬더랜드"라는 다큐를 보아도, 유럽 사람들이 축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짤로 돌아다닌 것 중에 "캐나다 사람"에 대한 것이 있다. 블랙프라이데이에 서로 양보를 하며 마트에 들어가고, 운전을 젠틀하게 하고, 뭘 해도 얌전했던 사람들이, 하키에서 지면 폭도로 변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분노를 쏟아놓을 변기통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축구나 하키 라는 생각을 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 북"이란 영화를 보면 미국에서는 야구나 미식축구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은 이러한 역할을 정치와 연예계가 담당하는 것 같다.
그러나 축구나 야구 등의 스포츠에 비해 "분노를 효과적으로 쏟아놓기에는 너무 좋지 않은" 대상인 듯 하다. 스포츠에 비해 기준과 룰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스포츠 훌리건 보다 정치 훌리건이 많다.
스포츠 훌리건은 경찰이 제재 할 수 있지만, 정치 훌리건은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
사람은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수준의 분노를 쏟아 부어야 한다. 사람이란게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적절하지 않은 수준의 분노를 흘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스포츠와 연예인에게, 중국은 적대국가에게 그 감정을 쏟아 놓는 것 같다.
한국사람은 참 마음 둘 만한 적절한 곳이 없어 보인다.
2022.04.20
국토부지역혁신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한 곳에 전남도로 부터 땅을 할애받아 테스트베드 시험시공을 진행 하기로 했다.
농촌 마을이다 보니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다.
절차상 법적인 문제는 없으나, 지역주민들이 불만이 있어서 설득을 하러 갔다.
주민들은 분노하며 "주변 미관"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마을 개발 비용을 내라" 라는 주장이었다.
아차 싶었다.
자기 땅도 아니고, 공사펜스를 치고 작업을 하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내가 옛날에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내 친한 사람이 군청에 있다.", "공무원에게 돈을 먹였다.", "내가 땅이 천평이 넘는데, 시골 사람이라 무시 하는 거냐", "나도 연구과제 해봐서 아는데, 지역 사람들에게 돈 줄 수 있다. 내가 알아봐 주겠다."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런 이야기 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하고 왔다.
2022.03.17
사순절이다.
교부(Fathers of the church)들과 성인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토마스 아 켐피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존 녹스, 위그노의 성인들, 그리고, 본회퍼.
많은 교부와 성인들은 신앙과 정치이 엉켜있어 엉망진창인 부분이 있다.
프란체스코는 술탄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근데 십자군 기간이다. 지금 러시아의 정교회 신부가 젤렌스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미친놈 아닌가. 베르나르는 더군다나 멀쩡한 기사와 왕들을 십자군으로 보냈다. 선동꾼이 따로 없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는 스위스 내전을 벌였고 전투 중에 츠빙글리는 죽는다.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을 가톨릭이며 여자군주라고 비판했다. 위그노의 전쟁은 저항인지 정치적 내전인지 모르겠다. 영화 "여왕 마고"의 내용이 맞다면, 비록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위그노들이 먼저 공격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바르 왕국나 나바르의 앙리 4세가 더 나은 신앙인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들은 뭐가 신앙이고 뭐가 신앙이 아닌지 구분을 제대로 못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나름의 신앙의 행위와 의지는 모두 덕이 되지는 않는듯 하다.
2022.03.04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일반적으로 친러 반군에 대한 군사비 및 무기 지원 정도는 분쟁지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직접 침공은, 전쟁광이라는 것 말고는 표현이 어렵다.
전쟁에 대한 결정은, 대개 전쟁으로 죽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내린다. 1/2차 세계대전 역시 그러했다.
국익이란 말 뒤에는 안하무인이란 뜻이 있다. 국민이란 단어 뒤에 숨어 있는 사이코패스 스트롱맨들을 보면 역겹다. 그러고 보니 작은 조직이던 큰 조직이던 스트롱맨이 있다. 자기가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위선자들 말이다. 성경에는 천사가 사탄을 보고도 함부로 정죄하지 못했으나, 그냥 나같은 일반인이 봤을 때는 그냥 악으로 보인다.
2022.02.18
선거철이다. 동계올림픽이다. 다양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데, 애잔한 인간 군상이다.
언론이란 기사 클릭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자극적인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다. 자극적인 기사 중 대표적인 건 혐오와 미움에 대한 것이다.
연구비를 수주하기 위해 치사한 수를 쓰면, 언젠가 그 탈이 나기 마련이다.
2022.02.14
선거철이다. 동계올림픽이다. 다양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데, 애잔한 인간 군상이다.
언론이란 기사 클릭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자극적인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다. 자극적인 기사 중 대표적인 건 혐오와 미움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 비해 공약 자체가 불문명한 선거이며, 참모의 철학과 리더의 철학이라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선거이다. 맹목적인 노년과 분노한 젊은이들의 감정이 땔감이 되어 우민의 길로 뛰어들어가고 있다.
올림픽이 자국민 단합을 위해 이용된다. 내부 불만이 많은 중국은 욕받이로 우리나라를 타겟팅 했을 뿐이고, 이를 전하며 한국 언론은 클릭수를 채운다. 수많은 댓글 속에, SNS 플랫폼은 돈을 벌게 된다.
민족주의는 1차대전 이전에 국민 선동을 위해 사용된 일종의 사회적 도구 인데, 여전히 활용되고 있는 걸 보면 짠하다. 내 나라 지키는 감정이 아니라, 남 나라 무시하는 감정이니 짠핟다.
결국
2022.01.16
이번달 지난 11일 광주 화정동 아이파크 시공 현장에서 시공중인 슬래브 총 16층이 한번에 낙하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대한 고찰이다.
기술적 검토는 조심하기로 한다. 잘못하면, 관련 조사위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분야가 신문에서 다루어질 때 보통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혁신적인 건설기술을 개발해도 뉴스에 거의 나오지 않다. 하지만, 콘크리트 시공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뉴스가 도배된다. 어찌 보면 참 애잔한 분야를 전공한 것이다.
지난 학동 해체 중 붕괴 사고 때도 그렇지만, 건설사고는 항상 가장 약하고 작은자가 피해자가 된다. 건설 중 관리자가 사망한 일은 없다.
건설산업은 그 자체로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우리 분야는 실수하면 바로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산업에 비해 잘 한다고 칭찬하는 분야가 아니다. 최대한 잘 해도 그것이 관리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줄 알지만, 잘못을 하면 뉴스에 나온다. 요식업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는다는 측면에서는 무섭다.
이번에도 시공관련 책임자의 법적책임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들이 최종 가해자 인지는 모르겠다.
한국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실패하지 않는다. 모두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댓가로 모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수업시간에 항상 했던 이야기, 한중 조건에서 콘크리트 타설, 이 문제에 대해 수업시간에 조금 더 강조하지 못했던 것 같아 부끄럽다.
2022.01.10
다양성은 사회 시스템이던 생물환경 시스템이던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요인이다.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생물다양성을 부족하게 유지하던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마름병이 번지자 대기근이 발생했다.
종교적 다양성에 익숙하지 않았던 중세 유럽은, 종교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다양성을 스스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회나 생태계는,
멸절하거나 혹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다양성에 의해 공격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 인간은 인위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현명한 존재일까.
다양성이 주는 피곤함과 번거로움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다양성 속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한데
생각보다 그렇지 못한 취약층도 있다.
마치 예전 우루과이라운드 때 시위하던 농민들 같이 말이다.
다양성은 그 이면에 약육강식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겠는가. 다양성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되어 멸절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 다양성은 그 이면에 어느정도의 폭력의 트리거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2022.01.05
뮤지컬은 대사로 할 수 없는 감정의 크기를 담기 위해 노래를 사용 하는 것이다.
그림이란 말로 남길 수 없는 감정을 담기 위해 형태를 표현 하는 것이다.
영상이란 그림으로 남길 수 없는 감정의 형태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 역동을 담는 것이다.
감정의 크기와 생각의 모습은 모든 매체의 틀 안에 다 담을 수 없고
이를 위해 각각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설명서가 필요하다.
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남아나는 감정을 어디에 실어야 할까.
아니면 남아나는 감정을 자르고 사실만으로 소통하기 위해 논문이란 형태가 남은 걸까.
논문이란 어찌 보면 감정을 자르고 남은 세상의 절름발이 지식이 아닐까.
2022.01.05
새해다. 값진 일을 하고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런데, 사실 거창한 것 없이 하루하루 그냥 잘 살아가면 되는 것 같다.
대학본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직원분들의 세계도 참 복잡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하나만 조진다"라고 했던 영화 대사를 명심하자.
"네 주먹으로 그린 원이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복싱은 그 원을 네가 뚫어서 밖의 것을 쟁취해 오는 것이다"라는영화 "고"의 대사가 있다. 근데, 원 밖의 것을 쟁취해 오는 건 모르겠고, 원 안으로 들어온 적이라도 싸워 이기는 삶을 살아야 겠다. 누가 뭐라고 하던 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2021.12.30
학기말 그리고 연말이 되면 항상 아쉬운 것 반 보람된 것 반이다.
학생들의 수업평가는 항상 보람된다. "몰랐는데 가르쳐 주어 고맙다.",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어 고맙다"는 의견을 받으면 기쁘다.
무엇보다, 우리과 같이 자격시험이 있는 분야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부분이 있기에 이를 수업을 통해 알아갔을 때 기쁘다.
동시에 아쉽다. 더 열심히 할걸 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지만, 단지 마치 설겆이 같이 매년 가르칠 부분을 가르치는 것이 아쉽다.
그런데 더욱 아쉬운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을 위해 좋은 대학을 만드려고 노력해도
시대의 흐름 상 지역에 있는 대학들의 경쟁력이 점차 떨어진다는 것이다.
2021.12.22
현대 사회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따듯한 것 같이 말은 하는데 오래 지내다 보면 차갑다.
이타적인 것 같은데 오래 지나다 보면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말은 하는데, 잘 보면 이익집단이다.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앞에서는 지 자랑 뒤에서는 남 욕이다.
정치질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항상 깊에 생각해 보았다.
몇년전,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했던 적이 있다. 사회에서 좋은 행동을 하면 신앙인이 칭찬을 받고 복음전파가 될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막상 잘 생각해 보면 교회란 죄인의 모임인데, 선한 영향력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높은 목표"지 않았을까 싶다.
결론적으로 이 개념은 현실적으로 실패했다고 해도 되고, 결국 교회라는 조직은 사회에서 일정한 세력화를 이루고 끝이 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동시에 적절히 개인주의화 되어, "서로 마음속으로 비판"하는 공동체가 되어, 생명력 같은 건 잃어 버린지 오랜 조직이 되어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 말에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게 카타콤화 된 교회생활을 하고 있거나, 혹은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일부 개인의 열심과 선함이 있으나, 이는 믿지 않는 선한 사람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는 없다.
지금의 신앙인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당연한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와 신앙에 역겨워 할 필요가 없다.
초대 교회 부터 그러했다.
우리가 흔히 이상적인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하지만,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잘 읽어본다면, 오히려 지금 보다 더 엉망이었다 할 수 있다.
엉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살아가면 그 뿐이다.
2021.12.07
선거철이 되었다.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이 세상에 발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되고, 원하지 않더라도 선택을 해야 한다.
이미 당원 이라고 하는 조직에 의해 선출된 사람을 뽑아야 하는 애잔한 민주주의의 한켠을 보고 있다.
2021.11.23
젊은 세대가 원하는 건 "예측가능한 미래"이다.
도시에서 태어난 이들은, 도시에서 버려졌을 때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소액의 돈과 작은 집을 쥐어주면 적당히 산다는 논리는,
마치 초등학교 아이에게 인형이나 장난감만 쥐어주면 알아서 논다는 논리와 같다.
탈산업화 시대에 예측가능한 미래는 없다.
"의치대"와 "수도권"과 "부동산테크"라는 말이 키워드가 된 시대에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것은 생각 보다 "생존"인지도 모른다.
꿈이나 희망 같은 말이 아니고 말이다.
젊은 세대와 젊지 않은 세대 사이의 "젊지만은 않은 세대"가 할 일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버팀"이지 않나 싶다.
어느 시대이고 이렇게 시대가 험하지 않았던 적도 없다.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전 세대의 등 뒤에서 보았던 것 말이다.
2021.11.01
어느샌가 한 해가 다 가고 있다.
젊었을 때 참 체력도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능력도 있던 사람이, 나이 70 이상이 되며 노년을 안타깝게 보내게 되는 것을 본다.
백화십일홍이면도, 시간에 장사 없다.
가치 있는 삶, 유능한 삶, 경제적으로 유복한 삶 등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지만,
노년에 복은 적절한 정신과 육체 속에서 적절한 시기에 소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추하지 않고 괴롭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말이다.
돈이 있으면 늦게 죽고 돈이 없으면 늦게 죽는다. 지금같은 고도의 의료체계를 갖게 된 사회에서 말이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달릴 나이다. 그럼과 동시에 어느샌가 한해 더 노년에 가까워 졌다.
2021.10.18
선생, 아니 교수란 직업으로 살다보니 학생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랑을 하거나, 학생을 평가하다가 끝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막상 자기가 평가 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고 민망할 때가 있다.
평가하고 잘난척 하려고 선생 하는 것 같아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2021.10.01
멀리 아는 사람이 한명 있다.
지방 출신으로 어쩌다 보니 수도권에서 살게 되어 결혼을 하였다.
형이 한 명 있고, 부모님은 고향에서 이것 저것 하면서 산다. 어렸을 때 부터 가난했고 나이가 먹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수도권에서 청약을 넣고, 당첨이 되어, 3억짜라 아파트에 들어가고자 했다.
수도권에 3억짜리 분양 아파트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이 상황이 참 애잔한 상황인 것을 알 것이다.
최근 정부의 대출 규제에도 불구하고 영혼 부터 끌어 모아 약 2억 7천 정도를 마련했고,
모자란 3천을 자기 부모님에게 부탁 했다.
부모님은 아무리 돈을 짜내도 지금 당장 3천은 어렵다고 했다.
아들은 화가 났다. 도대체 서울에서 작은 집 하나 얻어 보겠다고 하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까지 도와 줄 수 없냐는 것 이었다.
부모님도 가슴 아프지만, 어떻게 해서도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부모님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벌벌 기어가며 돈을 빌렸고,
그 돈을 갚기 위해 자기 보험을 해약해 갚았다.
이제 그 집 부모님은 자기가 아파도 어떻게 할 수 가 없는 상황이다.
자식은 이렇게 돈을 빌려 집을 샀지만 부모님과 연락을 끊은 듯 했다.
자식의 논리는 이것이었다.
"왜 굳이 나를 낳아놔서 이렇게 고생을 하게 하는가?"
2021.09.27
점차 어두워져 가는 촛불을 보는 것 같다.
새로운 시대가 되어 감과 함께, 저물어져 가는 것과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
저물어 가는 것은 아쉬우며, 새로운 것은 위태하다.
무언가를 더 알아가고 공부해 간다고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부분의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살 수 있다.
과도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지식은 삶과 정신을 피곤하게 한다.
선악과의 폐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남을 정죄함에 있다.
엉성한 지식과 경험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자기를 판단하며,
자신감도 잃고 사랑도 잃고 결국 평온을 잃는다.
마음속의 분주함만 늘어가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모두 엉성한 것이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부분이 있고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부분이 있다.
단지 시대가 갈 수록 수많은 정보 속에서 나 홀로 빈부격차가 커져간다고 아우성 칠 뿐이다.
언론과 고등교육은 우리가 막상 알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 정보를 줌과 동시에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며, 하나님 외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높은 산이 평평해 지고 낮은 계곡이 매워진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나라는 존재가 죽기 전까지 존재한다면 그것이 영원이며, 내가 살 동안 강한 것은 강한 것이고,
내가 보기에 새로운 것, 세상이 그 당시에 새롭다 하면 새로운 것이다.
엉성한 정신승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사는 것이다. 순교자 코스프레도 어지간히 해야 한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수많은 초대교회 교부들은 카타콤 속에서 숨어서 피박을 받았다.
죽으라면 죽으리라 하고 살아난 에스더도 있지만,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뿌렸다.
하나님 은혜는 그렇게 값싼게 아니다.
2021.09.23
살면서 조심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남은 원하지 않는데 혼자 자기 좋은 대로 남을 도와주는 것,
자기가 열심히 하면 뭔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남이 말 하는 것에 끼어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하면 위험하다.
똑똑한 사람은 늘어가지만, 문제는 항상 커져간다.
2021.08.30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을 수록 건설공학은 직면해야 할 문제가 많아지고, 자연히 기술이 개발된다.
예전 학부 학생 동아리 친구들이 갑자기 들어와 "한국, 중국, 일본 중 건축공학 기술이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 라는 질문을 했다.
주저 할 것 없이 중국이 최고라고 이야기 했다.
당연한 일이다. 극한지 부터 열대, 산악지대와 바다를 모두 가지고 있는 나라는 당연히 기술이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기술이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걸까.
건설분야에서 엄밀하게 기술 이라고 말하면, 크게 두가지 일 수 있다.
1)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공사를 문제 없이 성공적으로 했던 경험
2)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공학적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 할 수 있는 지식
두가지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첫번째 기준에서, 초장대 교량이나 초고층 빌딩을 시공할 수 있는 있는 업체가 있는 우리나라는 세계 일류이다.
그러나 시공 분야 이외에 막상 돈이 되는 경제성 분석, 설계, 해석 등의 전문 엔지어링은 우리나라에서 잘 하지 못하며
그런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 등은 대단한 국가라 할 수 있다.
최근 스위스 재료연구소 (EMPA)에서 열역학 기반 상변환 기술에 대한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는데,
이는 어떠한 의미로 "기술 영업"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기술이 세계 최고이지만, 세계적인 시공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2021.08.23
3주기 대학평가의 결과가 나왔고 우리 학교도 "살아남았다."
교육부가 "원하는" PPT와 결과를 만드는 학교는 살아남고, 나름의 형태로 노력하는 학교는 죽는다.
수많은 교수님 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 것 같다.
수도권에서 떨어진 학교들은 "지방대 별도 평가로 인해 우리가 망했다" 라고 하고
지방대들은 "그럼 수도권대와 지방대를 어떻게 같이 평가를 하냐"고 말한다.
교육부가 꿈꾸는 교육이란 무엇일까.
한가지 확실한건 "서류가 많이 남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보지도 않고 창고에 쌓여갈 서류를, 우리 선생들은 몇일을 노력해 만들어간다.
개개인 교수들의 실제 교육을 위한 노력은, 교육부에게 있어 남는 것이 아닌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학생들에게는 남겠지 라고 자위 해 본다.
2021.08.23
방학이 끝나간다.
말이 방학일 뿐 대학교, 공대에 있어 방학이란 "수업핑계를 대지 못하는 시간"이다.
코로나가 유행하여 서울 출장은 적어 편하기는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육아와 업무의 불확실한 경계 속에서 뭘 했는지 모르게 되었다.
방학 마다 목표를 세우는데, 대게 무리 없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 이므로, 이번에도 달성 하였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겠다.
간간히 보는 학부생들과 꾸준히 출근하는 대학원생들이 애잔하면서도 기특하다.
예전 채 박사님께서 "박사는 졸업하고가 훨씬 힘들다"고 하셨는데,
대학원 때 생각을 하면, 지금 직장에 들어온 이후가 더 좋다.
2021.08.19
과거 우리가 종교인들에게 요구했던 도덕 수준을 최근에는 연예인에게 요구 하고 있다.
아마 과거 종교인들이 하던 사회적 기능을 연예인들이 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2021.08.18
신앙이 있다는 사람에게 삶이란 하나의 큰 테스트베드인지도 모른다.
작은 실험실에서 소형 실험을 성공하면, 현장 규모로 실험을 확대한다.
현장규모 실험이 잘 되면 다행인거고, 안되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거다.
잘 된다고 입 찬 소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 되는게 당연한 것이다.
2021.06.30
보수와 진보, 친미(일)와 반미(일), 지역간이 갈등하던 시대가 오히려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 기혼과 미혼, 육아와 비육아, 20대와 40대, 육식과 채식, 대기업과 중소기업, 나와 내가 아닌 사람이 갈등하는 시대가 되고 나니 말이다.
인터넷 덕에 세상 모든 소식을 들을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양 극단에 있는 극소수의 의견이 언론을 채운다.
차라리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normal distribution이라도 그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one sigma 까지만 우선 들을 수 있을텐데.
내가 위치한 곳이 normal distribution에서 어느정도인지만 알아도 덜 불안하고 덜 화날 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복종하고 온건하며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극단적인 의견의 편에 서지 마라 (르네 데카르트)"
2021.06.10
지금 글을 쓰는 시간을 기준으로 어제 (6/9일) 오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조선대에서 매우 가까운 곳의 재개발 현장에서 사고가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fe-mGTzMtI)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건설현장 사고사망자가 2020년 기준 458명인 상황(고용노동부 보도자료, 자료 1)인 상황에서, 한 현장에서 민간인이 9명이나 사망(6/10일 오전 1시 기준)인 사건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 가족들에게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황망하다.
인터넷 뉴스나 동영상 댓글 들을 보니 대개 “철거회사 망해라, 구청과 건설업체 구속해라” 등의 의견이 가득한 가운데 관련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우리 학교 졸업생일 것을 감안하면 또한 이 역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이다.
개인적으로 고3이던 2001년 911 테러 때 WTC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건설에 관심을 느껴 이 길을 선택했고,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에는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공대 1호관이 폭탄을 이용해 발파 해체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학교에 관심이 생겼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구조물 해체와 붕괴에 관심이 있어 동료 교수님들과 간간히 자료를 모으거나 공부를 해 왔다.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현재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상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근처에서 건축구조학으로 밥을 벌어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족하나마 의견을 써보고자 한다.
1. 해체업에 대해
- 건축과 토목 구조물은 시공되고, 운영하다가, 해체된다.
- 공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공이던 해체 이던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작업시 안전을 예측하고 계획을 새워 이를 진행하는 것이다. 시공의 경우 “시공계획서”를 제출하고 “시방서(작업을 위한 규정)”라는 것을 따라 진행하는데, 이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다. 특히 시방서는 일종의 법전과 같은 것으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모여서 이를 만들고 현장에 적용한 뒤 필요하면 개정한다.
- 건축물 해체는 사실 공학적 측면에서 시공 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시공 중에는 구조물을 구성하는 부재 (기둥이나 벽, 보 등)의 강도가 예측이 가능한 반면, 해체 공사 중은 부재의 성능을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작업 중에 원치 않은 손상이 쉽게 가해진다.
- 문제는, 해체공사의 경우 해체계획과 시방서를 작성하기는 하지만, 시공에 대한 것에 비해 내용이 부실하다. 내용을 보면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고 구체적인 것이 많지 않다. 해체 공사가 시공에 비해 더욱 복잡하고 작업 중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해체공사 표준안전지침, 자료 2).
- 구체적으로, 고용노동부 해체공사 표준안전지침에 따르면 “제4장 해체공사 안전시공, 제16조 일반안전” 부분에 “4. 외벽과 기둥 등을 전도시키는 작업을 할 경우에는 전도 낙하위치 검토 및 파편 비산거리 등을 예측하여 작업반경을 설정하여야 한다. 5. 전도작업을 수행할 때에는 작업자 이외의 다른 작업자는 대피시키도록 하고 완전 대피상태를 확인한 다음 전도시키도록 하여야 한다. 6. 해체건물 외곽에 방호용 비계를 설치하여야 하며 해체물의 전도, 낙하, 비산의 안전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 이상 더 구체적으로 기준을 만들기도 어렵고, 대부분 적당한 수준에서 이를 따라간다.
- 그러나 해체공사의 실무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건축 시공은 건축공학과 출신들이 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진행하는 반면 해체공사는 이에 대한 별도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다. 단지 업체가 “비계·구조물해체공사업종에 등록한 업체(면허 등록)”면 된다(자료 3).
- 시공의 경우 공사 공정에 따라 정확하게 적산과 품셈, 즉 비용 견적이 나온다. 특히 건축의 경우 고난도의 토목공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획된 비용과 실제 소요 비용 간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렇게 계산된 비용 역시 상당히 합리적인 비용이라 할 수 있다(하청에 재하청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러나 해체는 그렇지 않다. 잘못하면 계획보다 비용이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 무엇보다 해체 공사는 시공을 위한 전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즉, 시공사에 눈치를 보면서 비용을 결정해야 한다. 비록 어느정도 품(견적내는 기준)이 결정되어 있기는 하지만(자료 4), 이 역시 현실적으로 따라가기 힘들다. 차라리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부수는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기준을 만들면 좋겠지만, 데이터들 역시 영세 업체에서 관리하며 이를 활용하기도 어렵다. 동료 교수님도 이를 한번 체계화 시키려고 하시다가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영세한 업무이기 때문에 학회나 유관기관에서 이를 체계화 시키지 못했다. 이는 해외도 사실 마찬가지다. 데이터가 항상 많은 일본의 경우도 이를 전공하거나 하는 분들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자료상 한두분 있는 것 같다.)
- 특별한 해체공법(발파공법, 혹은 일본에서 사용한 저층부 우선 해체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기본적으로 건축물은 대형 브레이커(뿌레카)와 굴삭기(백호우, 포크레인)을 이용해 진행된다. 10층 이상 고층건축물 해체의 경우 1~4 t 규모의 소형 굴착기를 건물 상부에 올린 뒤 바닥판(슬래브), 보, 기둥, 그리고 벽을 해체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위에서부터 한층씩 한층씩 한층씩 작업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리 가벼운 굴착기라 하더라도 건물 바닥판이 작업중에 하중을 못 이기고 붕괴되는 일이다(자료 5). 물론 이에 대한 컴퓨터 해석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너무 구체적으로 검토를 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소모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해체 대상 건물의 구조적 성능을 별도로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콘크리트 강도나 철근량을 따로 다 조사해야 하는데, 이 조사비용이 해체공사비 보다 비싸다.)
- 건설업 산업안전보건관리비 계상 및 사용기준(고용노동부 고시, 자료 6)에 따르면 공사규모에 따라 안전보건관리비, 즉 안전을 위한 비용을 일정량 공사비에 추가해야 한다. 이 비용에는 안전관리자에게 줄 수 있는 인건비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안전관리자가 건축구조를 잘 아는 것이 아니며 그 정도의 전문가를 현장 안전관리자로 모시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 금액은 실제 공사금액에 대해 몇% 정도로 결정되는데, 해체공사는 이 금액 모수 자체가 작다. 결국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 보통 건축물을 설계하시는 분이나 시행사(이러한 사업 자체를 진행하는 측)에서는 이를 “시공사가 해체업체에 돈을 잘 안줘서”, 혹은 “해체업체가 (돈을 벌려고) 너무 대충해서” 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으나, 그러기에는 시공사와 시행사가 필요이상 “갑”인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 건설사의 대형 프로젝트(돈을 많이 투자하는 대신 큰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들)에서는 해체공사에 대해 관리가 잘 되는 반면, 소형 현장에서 사고가 자주 날 수 밖에 없다.
- “철거계약서에 서로 합의하고 충분한 견적 하에 진행했다” 라고 하는 말이 참 막연한 말이다. 견적이 비싸게 나왔다면 과연 그 업체에 일을 주었을까? 결론적으로 해체 공사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결국 1) 해체공사표준안전작업지침에 따라 작업이 진행되었는지, 2) 현장에 안전관리자나 공사감독이 상주하고 있었는지, 3) 안전관리비의 사용처가 적절했는지, 4) 해체작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는지 정도가 법적 다툼의 논점이 되겠으나 이 역시 모두 참 애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사고 발생 건축물에 대해
- 위에서 말한 것 같이 고층 건축물은 위에서부터 한층씩 부순다. 그에 반해 5층 전후의 저층 구조물의 경우 대형 굴삭기나 브레이커를 이용해 밀거나 긁어 내려서 부순다 (관련 동영상, 자료 7). 이런 경우 만약 해체를 하고 있는 주변이 공터라면 크게 문제가 없이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사고가 발생한 곳은 작업하는 곳이 도로 바로 옆이며 약간 떨어진 곳에 건물도 있었다.
- 작업현장 사진을 보면, 해체 공사시 작업 공간이 여유가 있었던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곳에부터 건물을 굴삭기로 부수기 시작해 점차 도로쪽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아마 마지막에는 남은 벽과 기둥 부분의 하부 중 도로 반대쪽 부분부터 부수어, 도로 반대 방향으로 건물이 쓰러지도록 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즉, 공사장 쪽에서 굴삭기가 남은 구조물을 안으로 모으듯 하여 붕괴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참고로 건물의 해체파괴는 나무를 자르는 순서와 같은데 먼저 아랫둥의 일부분을 한방향으로 파내고 파내어 마침내 건물이 그리고 쓰러지도록 한다 (자료 . 자료로 첨부한 굴뚝 해체 영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왠만한 숙련자가 아니면 어렵다는 것이다. 잘못해서 굴삭기 작업자가 구조물을 당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버리면 구조물은 목표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밀린다. 이번 사고는 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 굴삭기 작업자가 다행히 무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경찰에서 인터뷰를 해야 겠지만, 아마 공사장에 쌓여 있었던 건설폐기물의 산이 부분적으로 밀리며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건물을 도로쪽으로 밀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 남아있었던 건물은 벽식 구조물, 즉 내부에 가로세로로 벽이 지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외벽에 수직방향의 내벽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벽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건물이 도로 밖쪽으로 잘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표현으로, 콘크리트 T beam의 마이너스 모멘트 상황, 근데 철근이 부족하므로 인장은 기대하기 어려움) 그에 반해 도로 방향으로 밀면 외벽의 수직방향 내벽은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 즉 도로 방향으로는 쉽게 밀리는데 반해 도로 반대 방향으로는 잘 당겨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 그럼 이를 막기 위해서는 도로에 굴삭기를 두고 나머지 건물을 도로 밖 방향으로 밀어야 하는데, 이 경우 구청에 작업허가를 요청한다던가 하는 번거로운 일이 발생한다. 안전을 좀 더 고려한다면 그래야 하겠지만, 이 역시 굴삭기 작업자의 노련함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런 문제는 철거업체만 너무 무어라 할 수 없으며, 시행사나 시공사에서도 도의적인 측면에서 일정부분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적 문제이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장 조건에서는 이렇게 해체 해야 한다”는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기준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 기준이 현장에서의 작업에 쓸데없이 제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해체 공사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선진국에서도 세밀한 규정이 없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
3. 고민
- 현실적으로 누구나 납득할만한 “해체 공사”에 대한 견적(적산과 품셈), 그리고 관련 공사기준과 해체공사 순서 등에 대한 표준화 작업이 좀더 구체화 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그래야 해체업이 좀 더 전문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대학이나 학술단체 보다 현장에 기반한 협회가 주관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업체가 너무 영세하여 협회가 주도적으로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 아무튼 이 일 전반에 대해서는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 나서 주셨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기 전이라 못했지만, 국토부의 훌륭한 분들께서 나서주시면 좋겠다.
- 어느정도라도 체계화된 기준과 규정에 따라 해체현장 작업자에 대한 별도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 누구 한명 책임을 지게 해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형태로 일이 진행될 것 같다. 시행사와 시공사는 해체업체에게, 해체업체는 작업자들에게 말이다. 근데, 사실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 보니 서로 손해를 보기 싫어하고, 그러다 결국 법과 위법, 양심과 현실의 어느 경계선에서 누군가 손해와 피해를 보게 된다. 마치 의자에 빨리 않기 게임과 같이 말이다. 노래가 끝났을 때 누군가는 못 앉게 되는 그 게임 말이다. 그에 대한 대가가 9명의 사망과 그만큼 많은 수의 부상자이다.
참고:
- 자료 1: 고용노동부 2020년 산업재해 사고사망 통계 (http://www.moel.go.kr/.../enewsView.do;jsessionid...)
- 자료 2: 해체공사표준안전작업지침 [시행 2020. 1. 16.] [고용노동부고시 제2020-11호, 2020. 1. 7., 일부개정] (https://www.law.go.kr/.../%ED%95%B4%EC.../(2020-11,20200107))
- 자료 3: 비계구조물해체공사업협의회, (https://www.sdwcc.or.kr:9003/)
- 자료 4: 김경환, & 백화숙. (2015). RSMeans 와 비교한 리모델링 해체공사 표준품셈 체계의 문제점 분석 및 개선 방향.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구조계, 31(3), 73-80.
- 자료 5: 이택규, & 윤태호. (2018, October). 건축물 해체공사 중 슬래브 하중안전성 연구. In 2018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가을 학술발표 및 포럼 논문집 (pp. 49-50).
- 자료 6: 건설업 산업안전보건관리비 계상 및 사용기준 [시행 2020. 1. 23.] [고용노동부고시 제2020-63호, 2020. 1. 23., 일부개정] (https://www.law.go.kr/%ED%96%89%EC%A0%95%EA%B7%9C%EC%B9%99/%EA%B1%B4%EC%84%A4%EC%97%85%EC%82%B0%EC%97%85%EC%95%88%EC%A0%84%EB%B3%B4%EA%B1%B4%EA%B4%80%EB%A6%AC%EB%B9%84%EA%B3%84%EC%83%81%EB%B0%8F%EC%82%AC%EC%9A%A9%EA%B8%B0%EC%A4%680)
- 자료 7: 해체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7uf81SkoJM)
- 자료 8: 굴뚝 해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BbSdiCrAaA)
2021.05.12
최근 허리가 좋지 않아 도수치료를 받고 있다.
몇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1) 스트레칭이 매우매우 중요하다는 것, 2) 스트레칭을 할 때 마다 힘들다는 것, 3) 생각보다 눈에 보이는 근육 보다 코어 근육이 중요 하다는 것, 4) 바른 자세로 운동해야 한다는 것, 5) 중요 근율을 스트레칭 하다 보면 일종의 염좌나 근육 찢어짐 같이 몇 주 아프다가 시간이 지나면 (바르게 운동하고 푹 쉬면) 언젠가 유연하고도 강한 근육을 얻을 수 있다는 것, 6) 혼자 하면 자세가 바르게 운동하기 어렵다는 것, 7) 결국 돈과 시간을 써야 좋아진다는 것 등이다.
이를 신앙이나 연구나 교육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열심히 한다고 해 보니 허리가 좋다. 감사하다.
2021.05.05
지역혁신플랫폼 사업의 의견청취 회의가 있었다. 수도권에서 교육부 용역으로, 지역대학의 현황을 알아보고 이에 대해 규제를 완화할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수도권 대학에서 몇명이 와서 자세히 의견청취를 해 갔고, 그 용역 연구 책임자인 유명 대학 교수에게 어떤 의미에서 "훈계"를 듣는 자리였다. 명분상이야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으나, 듣고보면 "너희는 이대로는 살 수 없으니 특성화 만이 살길이다. 이정도라도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 주는 것을 감사해라" 라는 취지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렇다. 적자생존이다. 사립대가 80%인 한국에서 모든 대학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중이고, 대학교육은 적자생존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길러진 우수한 인재들은 적자생존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당연히 적자생존을 통해 정리가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맞다. 틀린 것이 아니다. 틀렸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 삶도 나름에 수많은 승리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사회적 약자나 패배자의 역할을 감당한 적이 별로 없다. 수업과 연구에 열심을 내지만,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패배자가 되는 것 같고 낙오자가 되는 것 같다. 그 것이 이렇게 쓴 것을 보면, 그만큼 내가 교만하게도 승리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지역은 지역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고, 나 역시 당분간 나의 사명대로 교육과 연구와 봉사를 할 것이다. 우리 학생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내면 더 할 나위 없다. 미움도 많고 분노도 많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남보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 아닐까.
2021.04.15
최근 대학가는 매우 뒤숭숭하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대학의 미달사태, 교육부의 공유대학 정책등이 그 이유이다. 정말 군소한 지방대 교수님들은 거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 같다. 자기 직장이 10년 정도 이내에 폐업될거라는 두려움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학교에 쏟았던 열정과 시간들이, 세상의 변화라는 것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는 것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 또한 고민이 많은 상황이다. 우리학교야 걱정없지 라는 생각을 서로 하지만, 그것 보다 내가 처음에 학교에 들어왔을 때 학생들 보다
2021.04.06
건설용으로 사용하는 철은 저탄소강이다.
철은 환원로와 산화로를 거치면서 탄소량이 조절된다.
탄소강의 미세조직 치밀화를 위해 예전에는 모루질을 했었고 지금은 압연과 열처리를 한다.
고온의 철은 일종의 고용체(solid solution, 쉽게 말하면 고체상태지만 분자구조는 액체와 비슷)로,
뜨거워진 상태에서 물리력을 가해 조직을 치밀하게 하고, 이 분자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급하게 찬 물에 담군다(담금질).
철광석은 환원로에서 석탄과 함께 타고, 산화로에서 산소와 함께 탄다.
그게 끝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부터 철은 계속 눌리고 맞고 그리고 차갑다가 뜨거워져야(어닐링, 퀜칭, 노말라이징) 한다. 이를 반복한다.
잠언에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욥기에는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끝이라 생각한 연단은 끝이 없다. 그것은 친구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번 만들어진 저탄소강은, (대게)용접에도 버티고 볼팅에도 버틴다.
너무 단단하지도(고탄소강), 너무 연하지도(순철) 않기에 구조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너무 단단하면 취성이 커서 구조재료로 못쓰고, 연해도 휘기 때문에 구조재료로서 못쓴다.
다 사용한 철은 다시 스크럽의 형태로 다음의 철을 제조하기 위해 재료로 사용된다.
사람의 인생이 이와 같은 것 아닐까.
학교에서 일하고 집에서 가장이다 보니 학생과 자녀를 연단하는 불과 철이 되기도 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2021.04.05
강성 공산주의에서는 신앙을 마약으로 분류한다.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신앙은 미신이고, 타파되어야 하며 인간성의 상실이며 착각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던 수정공산주의던 주체사상이던 결국 또다른 종교였으며 그 끝이 인류의 발전인지 국민의 인권탄압인지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난 신앙에서 긍정주의가 그렇게 싫었다. 한 때 유행했던 긍정의 힘도, 목적이 이끄는 삶도 모두 신앙에 반한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부정 없이 적당미지근한 희망주의는 정말 마약이고 미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나이를 좀 더 먹고 몇가지를 알게 되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나님만이 삶의 희망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기는 너무 어렵다는 것,
가끔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연히 주시는 기쁨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의 의식과 의지로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
현실을 본다고 너무 깊게 고민하다 보면 우울에 함몰되어, 실제 있는 희망 조차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비판에 익숙해 지면 (실제 호르몬의 영향으로)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 희망주의던 긍정의 힘이던 목적이 이끄는 삶이던 그런 것들에 빠졌던 모든 분들이 우리보다 더 험한 삶을 사신 우리의 부모와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라는 찬양의 가사는
자연스럽고 편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 삶의 투쟁과 노력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어 간다.
신앙이 있어도 걱정 근심은 항상 있고, 내 모든 삶에 늘 기쁨이 충만 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남을 비판할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한 현실비판은 자기회개라는 열매가 없이는 안되는 것으로, 남에게 뭐라 할 것이 없다.
2021.04.05
애잔한 일이다. 최근의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캡스톤디자인 수업을 하며 느끼는 것은, 수도권과 지역 간의 심리적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 젊은 남녀들 간의 심리적 갈등이 커지고 있다는 점, 자신의 지위가 고착화 되는 것에 대한 패배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보다 미국이 더 심하긴 할 것이다. "내 부모 때 보다 지금 내가 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절망감과 패배감, 그리고 억울함 들이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이란 표현은 참으로 슬프다. 미국은 어느 때 보다 지금 가장 잘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은 그리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지금의 세대는 억울한 마음은 들지만 뭐가 억울한지 어디가서 말하기기가 힘들다. 아무도 이 젊은 세대를 공부를 못하게 방해를 한 적도 없고, 사회적 기회를 박탈한 적도 없다. 타고 태어나 자기 할 일을 적당히 하고 그냥 살았더니, 부모 세대 보다 더 못 살게 되었을 뿐이다.
맞다. 열심히 했으면 된다. 적당히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 인생에 방해를 한 적이 없는 세대이다. 군사정권이던 독제정권이던 지역불평등이던 신분제던 누구도 내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 대학과 월급이 결정되었고, 나름의 공정한 룰에 의해 평가 받았다.
그러나 뭔가 알 수 없이 억울하다는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최저시급, 갑에 대한 을의 법적 보호 등 수많은 사회보장 시스템이 잘 가동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말이다.
아무도 지금 이상의 기회적 평등을 주장하기도 쉽지 않고, 이 이상의 사회적 기회제공을 주장하기도 어렵다. 아이템이 있어 창업만 하겠다고 하면 정부던 대학이던 지자체던 억대 비용을 빌려준다. 사회초년생에게 주택마련을 위한 기회도 대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팍한 현실이라는 건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 위에 올라간 사람은 "이 이상 더 어떻게 해 주나" 라고 이야기 한다. 맞는 이야기이다. 더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요시모토바나나의 첫사랑 온천에서 나온 대사 같이, "즐거운 순간들을 모아놓았다고 행복한 인생이었던 건 아니다".
굴레이다. 인생의 굴레.
더 이상 변변치 않는 남자에게 인생을 맞길 만큼 여자는 약하지 않고, 사회적인 인식 역시 바뀌었다. 지방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지역 외 사람들이 찾아와 일자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누구가 가장 좋은 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약용 역시 자녀들에게 "안목을 키우기 위해 무조건 서울 근처에서 살아라"라고 한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수도권은 희망의 땅일까. 수도권 취업률은 수치상 지역 보다 낮다. 평균임금은 수치상 지역 보다 50만원도 채 높지 않다. 평균 집값이 2배가 넘는 곳에서 말이다. 30평대 아파트 값이 평균 5~10억을 호가하는 곳에서 말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지만, 누군가 낙오하는 곳이며, 기회의 평등 속에서 무능한 사람은 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곳이다. 사람이 많다 보니 평균적으로는 크게 누리지 못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리자는 누구인가. 부부가 대기업 혹은 공기업에 다니며 아이를 할머니가 키워주는 집인가? 의사나 변리사 등 고소득직군에 있는 사람인가? 집이 잘 살아서 부동산을 이어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잘 사는 딩크족인가?
잘 모르겠다. 부부가 맞벌이로 좋은 직장에 다니면, 아이를 방치했다는 죄책감과 육아엄마 아빠의 억울함이 커져서, 육아맘을 "맘충이"라고 비판하며 피해의식에 휩쌓이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상하게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면 아이가 살이 찐다. 고소득 직군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와 소득이 좌파정권의 공산화에 의해 휘헙 받는 다며 불만이 많다. 가장 중요한 건 일이라도 재미 있어야 하는데, 고소득 직군의 사람 중 일이 재미 없어하는 사람을 상당수 알고 있다. 집이 잘 살아 빌딩이 있는 사람은 헉소리가 날 만큼 집의 관리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안다. 몇년에 한번씩 방수공사, 엘레베이터 공사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집이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관리비가 들어간다.
도대체 행복은 무엇이며 어디 있는 것인가. 각자 도생하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산업화 70년, 민주화 40년이 되며, 막연히 "잘될거야"라는 사람들 마음속의 믿음이 점차 사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신앙이 아니고서 희망과 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2021.03.14
조선은 기본적으로 역성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정치철학인 유학을 교리화 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유교를 기본적으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실사구시적 학풍을 이어간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 들어오며 점차 유학이 유교화 되면서, 유교는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점차 집단최면과 같은 사회지도층이 흘러 가는데 바로 그것이 "유교의 교조화"이다. 이 현상의 상징이 바로 송시열이었고, 이는 왕위 정통성 문제인 예송논쟁을 낳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조선은 그리 될 수 밖에 없던 것인데, 바로 "자립할 수 없는 국가의 명맥 유지"이다. 백날 정치를 잘하고 떠들어봐야, 중국 청나라에게 한대 맞으면 살아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소중화라는 자존심은 새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현실과도 닮아 있다. 열심히 생존을 위해 개개인이 노력하는 문제를 차치하고, 한국은 정치적이던 경제적이던 스스로의 힘으로 서기 어렵다. 국방은 미국에게, 경제는 중국수출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어렵다. 즉 남의 눈치를 봐야 하면서도 자존심을 잃기는 싫은 상황인거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며,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이것이 참 짠한 것이다.
최근의 한국 교회 상황도 비슷하다. 몇 년전에 "Again 1907"이라는 노래가 열심히 불러지더니, "Back to basic"이란 운동 역시 벌어지고 있다. 틀린 것은 아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틀릴 리가 없다. 그러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이 모든 노력들이 회개 운동이 아닌 교조화로 보인다. 신앙의 본질과 신앙의 방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교회지도자들이 과거에 익숙했던 형태의 무언가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다. Regression은 회귀라고도 번역 되지만, 동시에 퇴행이라고도 번역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현실에 대한 잔인한 분석과 판단이 필요할 때에, 교회에서는 기득권들에 의한 교조화가 진행된다. 사실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의 형태가 어떻던 이미 자리를 잡은 주류 목회자와 장로들은 자신의 대에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송시열이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 대로 떠들며, 효종과 현종에게 고고하게 대해도,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은 여전히 자기를 지지하며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당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인간군상의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이것은 참 짠한 것이다.
돌고돌아, 교조화된 시대의 결과물은 고난받는 백성이다. 대동법 시행 등의 일부 자기복구 노력이 시도되기는 하지만, 서서히, 그리고 명확하게 나라는 힘들어져간다. 교조적 집권층은 그 형태 유지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마치 열심당원들이 노력하던, 로마로 부터 멸망전 유대왕국 같이 말이다.
교조적 지도층은 그 교조적 논리로 자신의 지배와 특권을 정당화 하는데, 이것이 사농공상의 고착화이다. 어느정도 계급의 고착화가 사회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법조화 할 정도는 아니다. 고착화 시키면 안되는 것이 고착화 해 간다. 돌고돌아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할 수 없는 거세자들의 자위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이를 비판하고 다시 바꾸자 라는 답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인간본성의 결과로, 이는 참 짠하고 애잔한 것이다.
2021.02.24
전국의 대학가가 모두 초유의 정원 미달 사태로 난리이다. 우리학교도 슬슬 예외는 아니라, 일부 비인기과의 경우 미달이 발생하고 있다. 추가모집이 끝나는 내일 까지는 기다려 봐야 한다. 수도권이나 좋은 학교 교수님들은 자리를 옮기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과연 맞는 이야기 인지는 모르겠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이 있는 것 같고, 사실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당장은 여기가 내자리 같다. 지방이 낙후된다 서울에서 걱정하지만, 그렇다고 지역에서도 사람은 생활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나 말고도 누군가 선생으로 올 수 있지만, 마치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옮기는 목사가 꼴베기 싫은 것과 같다. 내 할 일을 해야 할 곳에 내가 있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여기 조선대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한다. 우리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허리이다. 여기가 튼튼해야 한국사회도 건강해 진다. 80년대 대학교 대량 개교시 만들어진 학교도 아니고, 73년 전 시민들이 돈을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다. 이사장 배를 불리는 학교도 아니다. 관선이사장이 운영하는 학교이다.
난 여기에 연고도 없지만, 이런 학교는 잘 되야 한다. 잘 되고 있다. 1년만에 공대의 외부수주 연구비가 100억이 늘었다. 우리학과에 투입된 정부 교육예산만 올해 3억이 넘는다. 특별한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이 학교와 이 학과 잘 되라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나랏돈으로 평생 교육받은 내가 할 일이다.
2021.02.22
이 정도면 학폭 공화국 아니냐고 말하는 의견이 있으나, 실상은 참으로 짠한 인간의 본성이리라.
생각해 보면 내가 초중고 에서도 학폭 비슷한 것이 항상 있어 왔다.
초등학교때 유명했던 아이 두명이 있었는데, 그 둘은 걸핏하면 친구들을 두들겨서 선생님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름 서울에서 알아주는 사립학교였음에도 말이다. 저학년 때 덩치가 큰 친구들이, 힘을 즐긴다는 부분도 있었지만, 실상 옆에서 지켜본 결과 가정에서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소모할 지 몰라 학교에서 엄한 친구들에게 함부로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초등 고학년 때 사춘기를 일찍 들어버린 한 친구가 유명했는데, 같이 수학여행을 갔던 일본에서 보기에도 가관인 여러 행동을 했다. 엄한 친구를 패고, 나도 생각해 보니 필름 카메라에서 필름 하나를 빼겼던 기억이 있다. 걸핏하면 "옥상에서 보자"라고 했던 그 친구는 당시 아버지의 여러 문제로 어머니가 곤란해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중학교 때 부터는 학교 폭력이 상당히 무서운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대놓고 패는 애들 보다 빵셔틀을 시키는 애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자애 한명이 있었는데,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실제 나도 그 여학생과 조별활동을 하던 중, 여학생에게 일을 많이 주었다는 문제로 그 고등학생(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마 학교를 자퇴한 남자친구)에게 끌려가 본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나가려는 중에 갑자기 그 문제의 여학생의 여학생 친구(로 말은 하지만 실상은 시녀이자 빵셔틀)들이 나에게 몰려와 "~~의 남자친구가 나를 보자고 하더라"라고 하였고, 겁이나 가보니 실제로 일진 고등학생 대여섯명이 모여, "내 여자친구를 니가 뭔데 괴롭히느냐"고 하며 욕을 욕을 해댔지만, 막상 내가 겁을 너무 내니 맞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중학교 때 심심하면 나를 때리던 친구 두세명이 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한명은 우이동 산 밑 달동네에서 어머니가 미싱을 하며 돈을 벌던 친구였고, 한명은 방학동 작은 평수 아파트에 살던 친구였다. 두명 집에 모두 가봤는데, 뭔가 너무나 어두웠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부터는 학교 폭력을 하면 정말 입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 였다. 특히 우리 학교는 폭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명한 학교 였기 때문에 다들 어설프게 주먹을 쓰지 않았다. (마치 크로우즈 같았다.) 당시 나는 매우 육중했기 때문에, 일진인 선후배들 모두 전혀 건드리지 않아 오히려 중학교때 보다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일진의 대장이던 친구 한명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단지 당시 일진은 크게 두종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아빠가 너무 잘 나가는 친구와 집이 너무 가난한 친구들이었다. 일진 중 가장 유명하던 친구는 부친이 어느 기업 상무였는데 어설프게 폭력을 하지 않고 항상 즐겁게 웃으며 생활을 성실하게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단지 여자친구 임신을 시켰다던가 하는 소문은 있었으나, 아무튼 부모님이 사주신 오토바이를 항상 타고 다녔다. 그 친구의 부친은 집에 별로 없지만 남성성을 통해 부친의 부재를 무마하려고 하는 느낌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졸업 전 반의 잔챙이들과 시비가 붙었던 이 친구는 경찰이 학교로 와야 했을 만큼 일이 커졌으나, 항상 그렇듯 젊은아이의 치기로 적당히 정리되었다. 단지 내가 옆에서 보았던 건, 이 친구의 절친들이 실제 활동하던 조폭이었고, 잔챙이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 뿐 아니라 졸업 할 때 까지 실제로 밖을 돌아다니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안다. 아무튼 일진의 잔챙이들이 일진의 대장에게 두들겨 맞았던 상황이므로 뭐라 말하기가 힘들다. 일진의 잔챙이 친구들은 대개 부모님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우셔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고생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는 우리 아들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요즘에는 학폭위다 뭐다 해서 (내가 보기에는 좀 짠할 정도로) 엄하게 다루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만, 아무튼 옆에서 보면 학교폭력의 가해 학생 부모들의 인생은 참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삶이 힘들거나, 일을 하느라 자식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쓰던가,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가 너무 힘이 강해서 부모 자신이 제어가 안되는 경우도 있더라. 돌고돌아 아이들은 부모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들 역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원칙으로는 동정할 수 없으나 , 가해자 역시 짠해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 하다. 단지 결과적으로는 이 악습을 끊어야 하니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어 공인들이 매장 되는 것은 옳다고 본다.
2021.02.16
박시백 선생님의 "만화"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었다. 원서를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글짜를 보는 건 귀찮으니 만화가 최고다.
생각보다 야사가 아닌 실록을 보고 느낀 건, 예전 삼국지의 원전을 읽었을 때와 같다. (아직 위서만 읽었다.)
1)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진행된다. 생각보다 모든 일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2) 단순한 개인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 보다, 당연히 조직의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다. 유능한 개인 보다 거대한 조직이 중요하다. 제갈량 뒤에는 양양 귀족이, 순욱과 순유 뒤에는 영천 청류가, 소론과 노론 뒤에는 영호남의 사림이, 그리고 그들은 고려 문신들이 있었다.
3) 망국은 대게 왕의 책임이 아니다. 사회적 책임이다. 단지 백성은 그 책임을 왕과 귀족에게 돌리고 싶어 한다. 국민들의 작은 욕심이 모여 사회는 암흑으로 간다.
4) 학문적으로 일대를 이루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욕구가 매우 강했던 사람이다. 위서의 최염이던, 조선의 송시열이던 말이다. 잘 보면, 무신정권의 포악이나, 문신의 득세나 크게 다르지 않다. 힘을 부리고 싶은 자가 부리는 것이다.
5) 우리가 최근 잊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글"의 힘이다. 글의 힘은 느리고 강력하다.
6) 오래 집권한 사람을 이길 수 없다.
2021.02.08
1) 교수나 연구자 스스로가 높아지기 위한 연구가 있고, 2) 학생을 공부시키기 위한 연구가 있고, 3)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가 있다.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의 개체수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건, 내 무능의 표시리라.
그러나 쓸데 없는 회개는 고종도 의미없이 했던 것으로, 프로라면 응당 그 교집합의 어딘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라고 받는 월급인 것 같다.
2021.01.31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천대까지 복이 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삼사대 까지 죄가 있다고 하셨다. 유산이란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뭔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부모의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은 모두 자식에게 전해지고, 좋은 것을 이어가기 어려움과 동시에 나쁜 것을 끊기도 어렵다.
믿음의 초자연성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상식성은 하나님의 명령이 나의 의지와 만났을 때 발현된다.
어렵게 이야기 할 것 없이, 하늘을 무서워 하고 사람을 사랑하면(경천애인),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경천애인이란, 성경의 미가서에도 나오지만, 동시에 유학의 근간이다.
신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믿던 안 믿던 사람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신앙이다.
2021.01.29
일본의 학교에 있다가 한국 학교에 들어와서 느낀 건 교수가 참 바쁘다는 것이다.
한 학과의 교수 수가 일본 국립대 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한국은 교수 한 사람이 원론적인 논문도 쓰고, 실용화도 하고, 사회 봉사 기여도 하고, 교육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게 젊은날 아름답게 열정과 정력을 불태우다가, 어느 순간 중년이 되면 적당히 산화해 버리는 것 같았다. 이게 대학교수인지 아이돌 그룹인지 잘 모르겠다.
나라가 작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다. 대학수가 많은 대신 교수가 적은 나라 이다 보니 관련 연구자 풀이 작아서 그런가 보다 라는 생각도 했다. 비교대상이 미국과 일본, 유럽과 같이 일단 1억이 넘는 인구인 세력과 비교를 하니 그런가 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다.
생가해 보면 동시에 모든 것이 핑계이다. 무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남의 부탁을 거절 하기 싫어서, 필요이상 자기 자신을 가속 시킨 것에 대한 핑계 이다. 연구에 집중을 하자면 자기가 그렇게 하면 되고, 교육에 집중을 할 거면 그리 하면 된다. 연구에 집중해 사회활동을 못했네 하는 비난에 대한 용기가 없던 것이며, 실용화나 사회 봉사에 기여하면서도 학교내 평점(업적점수)를 무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와 남을 핑계 댈 것 없다. 이 모든 건 대전략과 미래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적당한 재능과 가능한 수준의 노력 하에서, 정작 깊은 고민이 없었던 것에 대한 벌이다. 그 벌로 자기 자신의 정신을 산화시키고 있다.
일은 축복이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그리 말한다. 그런데 교수는 생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인양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매도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용기가 없는 댓가는 생각보다 길고 쓰다.
2021.01.06
I also could speak like you, if you were in my place; I could make fine speeches against you and shake my head at you.
욥 16:4
2020.11.27
정치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준 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념이나 노선, 혹은 당 같은 그런 가면을 쓰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유럽의 철학자 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던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가끔 잊는다.
정치란 한 사람의 현역 아이돌이나 고대의 아이돌을 끄집어 내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 하는 것인데, 가끔 아이돌의 Fan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Fan심은 상관이 없으나 현실문제 측면에서는 곤란하다.
2020.07.24
어째서 세계 최고의 의학 연구기관이 있는 국가들에서 일반인들에 대한 감염병 통제가 어려운 걸까.
어째서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이 있는 국가들에서는 교육을 거부한 사람들이 많은 걸까.
어째서 세계 최고의 선진화된 사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국가들의 지도자로 일반적 상식으로 납득이 어려운 사람들이 선출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