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빌립에게 뭔가를 가르치시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넘게 모인 사람들을 보시며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요 6:5)
마치 큰 식당을 오랫동안 경영해 온 사람처럼 빌립이 5천 명이 넘는 식사량을 순식간에 계산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레가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안드레 자신도 자기의 행동이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멋쩍어하며 안드레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9)
빌립과 안드레 둘의 믿음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에게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계산적인 빌립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라는 마음만 있었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편, 안드레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원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늘 건강하길 바래”, “늘 부족함이 없길 바래”, “늘 꽃길만 걷길 바래”, “모든 것이 네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길 바래’…. 모두 행복을 간절히 빌어주며 건네는 말들입니다. 행복을 빌어주는 말속에 나타나듯이, 우리는 부족함이 없어야 행복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만, 부족함 없이 풍족해야만, 시련 없이 꽃길만 걸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 또 다른 신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수하여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뜻하지 않게 남에게 상처 줄 때가 있고, 상처 받을 때가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병 들고 늙어갑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세상’을 창조하셨지 ‘천국’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땅은 천국과 같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부족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병들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도 맞이합니다.
부족함 없이 늘 풍족해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늙고 병들지 않아야, 시련 없이 늘 기쁜일만 있어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런 행복은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행복입니다. 천국이 본향인 우리들, 본향으로 향하도록 창조된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천국의 행복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없는 걸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늙고, 병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행복하려면 그 근원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행복의 근원을 다른 데서 찾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하여 수고합니다.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행복의 원인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일입니다.
성경의 탕자는 돈이 있고, 세상의 유흥을 마음껏 즐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끔찍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탕자와 같이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불행과 허무함에 빠집니다.
많은 이들이 많은 돈, 권력, 인기에서 행복이 오는 줄 압니다. 화려한 것, 감각이 자극되는 것, 박장대소하는 것에서 행복이 오는 줄 압니다. 입술로는 “나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향하여 불나방과 같이 달려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행복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역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오랜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고, 지금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외롭고 불행하다고 고백하는 인기 연예인들을 보십시오. 큰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핏발 선 눈으로 소리 지르며 싸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많은 부를 얻었지만 언제 누구로부터 공격당할지 몰라 경호원들과 감시 카메라의 보호 속에 사는 이들을 보십시오. 엄청난 부와 인기와 권력을 가졌으나 불행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영적으로 방황하게 되고,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패한 인생이란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다가 끝나는 인생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완벽한 모델이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셨을까요, 불행한 삶을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이 제자들에게도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신 위기감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자신에게 있는 충만한 기쁨이 제자들에게도 충만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고, 우리에게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모델’이 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행복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 못 살게 구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오직 사랑과 존귀히 여김만 받으셨기 때문일까요?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큰 권력을 누리고, 날마다 박장대소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셨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셨고, 배신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행복은 ‘어려움, 고통,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 또 하나의 ‘천국’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광야 길’을 걷고 있습니다. 광야 길은 고생으로 가득합니다. 험란하고 배고프며, 지치고 힘이 듭니다. 때로는 비를 흠뻑 맞을 수도 있으며, 언제든 돌밭이나 진흙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이 율법책을...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형통하겠고 네가 성공하리라." (여호수아 1:8)
이 외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형통한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리는 참된 복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만사형통'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만사형통'은 물질적인 풍요나 세상에서의 성공, 또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형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츨라흐(צָלַח, tsalach)'의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츨라흐는 '번성하다', '성공하다', '목적을 이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복을 '샬롬(שָׁלוֹם, shalom)', 곧 평강과 온전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져 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형편에 놓이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23)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한 때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데 이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던 때였습니다. 최악의 상황 같아 보이지만 성경은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편이 좋다고 해서 만사형통인 것도 아니고,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만사불통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은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혹시 '만사형통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조금 서운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가장 사랑이 많으시고, 가장 선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만사(萬事)가 형통(亨通)합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많은 문제는 내 뜻이나 사람의 뜻을 고집했을 때 생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내가 고집을 또는 다른 사람이 고집을 꺾지 않아 문제가 생긴 적이 많지 않습니까?
마치 사탕을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당장은 서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될 때 우리는 반드시 가장 선하고 가장 유익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사야 43장 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생명을 얻은 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나는 부모로부터 왔고, 나의 부모는 조부모로부터 왔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인류의 근원에 대해 묻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생겨났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입니다. 만일 우리가 창조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지, 하나님이 나의 부탁, 나의 이익, 또는 나의 계획을 위해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계획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말 그대로 낙원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척이나 행복하도록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창조주의 목적 안에 머물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그 범위를 벗어날 때 행복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이 이 진리에 해당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뜻을 벗어날 때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온다면 그때부터 행복은 끝나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머물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창조물은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는 순간 모든 문제와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발생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립니다. 이때부터 참된 행복은 깨어지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으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린 죄인들은 하나님, 다른 사람, 그리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끊임없이 겪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가장 완전하신 분, 가장 안전하신 분, 가장 능력 있으신 분, 우리에게 가장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 그렇게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로 돌아갈 때 참된 평안은 다시 회복됩니다.
가인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쫓겨났습니다. 그는 깊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습니다. 성벽 안에서 안심은 조금 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외로움과 우울, 불만족과 불안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한 일들이 반복됩니다. 나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다 해결될 것 같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친히 약속의 증표를 주셨음에도 가인은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약속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셨지만, 이것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걱정과 근심 속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걱정 근심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든지 죄인 된 나를 받아 주실 분,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 완전하신 분,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 주실 분, 나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는 분,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분,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입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고, 내 머리카락 수까지 다 세고 계신 분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내 환경, 내 능력,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의 조건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어 일시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마음속 걱정과 근심 불만족과 공허함은 또다시 찾아옵니다. 오직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위기 순간의 기도 제목이 가장 간절한 소원이 아닐까요?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간구하던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앞두시고도 ‘십자가 고난’보다 ‘우리의 기쁨’에 더 큰 관심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꼭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 중 하나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쁨을 누릴 것을 얼마나 강조하셨나?”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세상으로부터 얻는 ‘박장대소하는 기쁨’이 아니라, 세상에서 누리시던 ‘예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지금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겨우겨우 고난을 이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가난한가 부유한가, 직위가 높은가 낮은가, 유능한가 무능한가의 문제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씀 묵상 생활을 하거나 작정하고 기도하며 예수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납니다.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어느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4주 동안 진행되는 특별한 설교 집회를 기획했습니다. 그는 불신자들을 초청하고, 특별한 열정을 쏟아부으며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어느 무신론자가 목사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교회에 등록하고 싶습니다.”
목사는 너무 기뻤습니다. 목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설교 중 어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좋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저 앞에 계셨던 할머니 때문입니다. 집회 내내 늘 기쁨이 가득한 그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저도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만일 우리가 불행하게 산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복 중 ‘기쁨 넘치는 삶’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비록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다면 그는 분명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돈이나 권력 그리고 인기가 없어도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 말은 돈, 권력, 인기 등이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에 필수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참된 기쁨은 상황이나 형편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성령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습니다. 그때가 통곡하며 회개하는 때라 할지라도, 통곡하는 마음 후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기쁨을 증언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바울 일행이 안디옥에서 박해를 받고 쫓겨났을 때에도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행 13:52)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기쁨으로 온전히 하나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이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기쁨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잘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 안에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기쁨이 넘친다면 내 신앙 상태가 건강하다는 표징입니다. 반대로,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지금의 나의 상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기쁨과 동일한 기쁨이 충만합니까? 그렇다면 나의 신앙 상태는 매우 건강한 상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나타난 일 중 하나가 기쁨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기쁨입니다. 내 교회에 기쁨이 충만합니까? 그렇다면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 18)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똑같은 상황을 살아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같은 봉사를 해도 어떤 분은 ‘명령 때문에 희생하는 일’로 생각하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봉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주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하는 일’로 생각하며 기쁘고 즐겁게 봉사를 합니다. 헌금을 드려도 억지로 드리는 사람이 있고,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100세를 살아도 누군가에게는 100세 인생이 고통스럽기만 하고, 누군가에게는 100세 인생이 기쁨이며 복입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까지 행복하게 만듭니다. 기쁨으로 봉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봉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만 주지 않아도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헌물이라도 기쁘게 드리는 것은 받으시지만, 억지로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충만한 기쁨 속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8-11)
시편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날마다 일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면 행복할까요? 날마다 술과 마약에 풍족히 취하여 살면 행복할까요?
어릴 때에는 장난감을 소유해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청소년 때에는 중간·기말고사를 잘 봐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청년 때에는 아름답고 멋진 이성 친구를 사귀어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성인 때에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성인이 되어 돌아보면 장난감을 소유하는 것, 중간·기말고사를 잘 보는 것, 예쁘고 잘생긴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이 참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숙한 어른이 된 후, 이 모든 것에 집착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그저 철없던 시절로 느껴지며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성인의 모습은 어떨까요? 돈과 권력을 가지면 행복할까요? 돈, 권력, 인기가 행복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참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절대적인 권력, 부, 외모, 인기, 모두 다 가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싫은 소리를 한마디도 듣지 않고 살았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는 막강한 권력, 부, 외모, 인기를 모두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도니야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왕상 1:6a). 게다가 아도니야는 싫은 소리를 한마디도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 1:6b). 왕도 섭섭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감히 누가 왕자에게 서운한 소리를 했을까요? 없습니다. 아도니야는 싫은 소리도 안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행복했을까요? 아도니야는 부정한 계획과 왕권에 대한 욕심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막강한 권력, 부, 인기, 외모…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 14:25). 그래서 압살롬이 행복했을까요? 압살롬은 역모를 꾸미고, 아버지의 아내인 왕비들에게 패륜적인 죄를 저지르고, 아버지와 전쟁을 벌였다가 요압의 군대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것도 그의 외모 중에 가장 뛰어났다던 머리털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큰아들 암논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그는 그가 행한 죄로 인하여 동생 압살롬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솔로몬이 조금씩 변했습니다. 솔로몬이 권력 확장을 목적으로 정략결혼하여 얻은 1000명의 부인들은 자신이 섬기던 우상들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결국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의 감람산이 우상을 섬기는 신당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왕상 11:7~8).
다윗의 자식들은 절대적인 권력, 부, 외모, 인기, 지혜…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인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식들에게 안 가르쳤을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죽을 때까지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대상 28:9)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의 자식들은 실패자로 전락했을까요? 그들은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은 늘 하나님만 갈망했습니다.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간절히 물을 찾듯’(시 63:1) 늘 하나님만 갈망했습니다. 심지어 원수들로부터 쫓겨다니다 지쳐 잠들었던 다윗이, 순간 놀라며 잠에서 깰 때에도 “주님!” 하고 부르며,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시 17:15). 이런 다윗을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다윗이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승리한 삶, 행복한 삶을 산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이 행복한 삶, 축복받는 삶의 비결입니다. 늘 말씀으로부터 성령의 감동을 기대하고, 늘 삶 속에서 대화하듯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늘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상과 그 영광의 크기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의 상과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셨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의 크기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반면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영원’이라는 시간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살았을 때 백 년이라는 인생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영원’이라는 시간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않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만 합니다. 그래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이 세상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천 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길지 않습니다. 천 년도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서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천년도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한데, 이 세상에서 백 년을 사는 우리는 정말 순간의 순간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순간의 순간을 살면서도, 우리는 그 순간을 사는 동안 불편하다고, 부족하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존재들이 순간의 때를 지나면서, 영원을 살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순간을 살기 위한 존재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단 1분만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우리의 태도는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우리의 만족과 평가와 가치와 목표가 달라질 겁니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람이 이생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으는가', '남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정과 사랑을 받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생에서 꼭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천국 백성이 되는가, 안 되는가?'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과 지옥에 가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아무 재산과 능력이 없어서, 산에서 나물을 캐어 시장 어귀에서 신문지를 깔고 나물을 팔며 살아도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부와 권세와 인기를 누리며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수고하지 않고도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굽신거림을 받으며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행복도 영원하며 지옥의 고통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천 년의 행복을 누리고도 마치 오늘 새로 시작하는 것 같이 다시 행복이 시작되는 곳이 천국이며, 천 년의 고통을 누리고도 마치 오늘 새로 시작하는 것 같이 다시 고통이 시작되는 곳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은 죄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경멸하십니다.
죄인인 우리들은 죄를 사랑하고 옹호합니다.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 평생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며 사는 거지' 하며 끝까지 죄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너무나도 미워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진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으실 정도로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길 원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도 천국의 행복을 누리길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죄를 떠나 주님 편에 서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라.”(삼상 15:3) 그러나 사울은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겨두고 아말렉 왕 아각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을 때 사울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울은 자기 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좋은 양과 소를 남긴 것을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였습니다.(삼상 15:15)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말했습니다. “양을 많이 가진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어린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진노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나단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삼하 12:7) 다윗은 자기가 그런 죄를 지어 놓고도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도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행 2:36) 이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회개의 순간이 그들에게 구원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몸에 병이 있는데, 그 병을 모르고 있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예를 들어, 몸에 암이 있는데 그 암이 말기가 되도록 모르고 있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일이 있습니다. 내게 심각한 죄가 있는데 그 죄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서운 육체의 병이라 할지라도, 그 병은 내가 천국에 가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죄는 나를 영원한 지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죄가 만연한 환경 속에 살다 보니,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죄 불감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뭘...”이라고 말하며, 다 죄짓고 살면 죄도 죄가 아닌 줄로 착각하며 삽니다. 노아 때에 물로 심판을 받기 전 세상의 모습이 이와 같았고, 멸망을 당하기 전 소돔과 고모라가 이와 같았습니다.
다 죄짓고 살면 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위로와 믿음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마음일까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마귀가 주는 마음일까요?
자신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영적 생명의 시작이고, 거듭남의 시작이고,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삶은 놀라운 변화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주께서 내 삶을 10년, 5년, 아니 1년만 이끄셔도 내 삶은 놀라운 변화와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이끄는 삶은 비참함과 불행을 가져다줍니니다. 죄가 누군가의 삶을 10년, 5년, 아니 1년만 이끌어도 그 사람의 삶은 정말 비참하고 불행하게 변합니다.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나의 정욕과 죄를 언제나 눈감아 주시는 분’, 그리고 ‘그래야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지!”라고 말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이렇게 사는 거지’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죄 지우개’ 정도로 여깁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 3:7-8)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우리가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배 같은 피를 흘리신 이유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온전히 죄를 떠나지 않으면, 온전히 예수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온전히 죄와 이별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한 발은 죄의 편에, 다른 한 발은 예수님의 편에 놓고, 그렇게 죄의 편과 예수님의 편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온전히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완벽한 삶을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벽함과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죄를 완전히 포기했으나 실수하여 넘어지는 것과, 끝까지 죄를 포기하지 않고 원할 때마다 주님의 편과 죄의 편을 오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신앙입니다.
조셉 얼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죄의 길에서 얻게 되는 평안은 저주받은 평안입니다(신 29:19-20).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죄와 함께할 때 느끼는 평안, 죄 안에 있을 때 느끼는 평안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니 거듭나지 않아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길 바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함부로 바꾸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자신의 진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으십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신들에게 자비만을 베푸시길 원하는 뻔뻔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고통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헛된 소망을 몹시 싫어하시며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죄인들을 야단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하나님은 절대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시지 않습니다.” (Joseph Alleine, “An Alarm to the Unconverted”)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복은 천국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마 7:21).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히 죄를 포기하고, 온전히 예수님 편에 선 사람을 말합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구원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무슨 복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여전히 엉망입니다. 저는 여전히 좋은 직장을 얻질 못했습니다. 특별히 행복하다고 느낄 만한 일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만, 제가 무슨 복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큰 복이 있습니다. 바로 ‘죄 사함’이라는 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지워졌다는 사실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죄 사함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안정된 가정, 많은 돈을 얻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문제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영원한 나라를 맞이할 때가 옵니다. 그때는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감사하게 될 겁니다.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그를 예수님께 내려보냈습니다. 병이 낫길 간절히 원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이 사람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으니 안심하라.”
큰 병을 앓는 사람에게 병을 고침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원이 있을까요? 중풍병자에게는 병 고침 받는 것이 가장 큰 일로 여겼지만, 예수님에게는 죄 사함을 가장 큰 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식사 자리에 앉아 계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춘 후,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당시에 여인의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지위와 명예, 영광과 아름다움을 의미했습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자기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눅 7:36~50)
어린 자녀가 바라는 것과 부모가 자녀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어린 자녀는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원하지만, 부모는 자녀에게 성공한 인생을 선물해 주길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돈 또는 남 부럽게 사는 삶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선물해 주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잘 모르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2편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시길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 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복이 아니라 가장 큰 재앙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죄 사함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시편 90: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기쁘고 즐겁게 하소서”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서 가슴을 뜯으며 통곡하고 회개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분을 볼 때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회개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회개의 문이 열리길 원해도, 그저 답답한 상태에 머물러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회개를 통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까지 생각하면, 통회자복하는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회개합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합니다.
참된 회개가 빨리 이루어지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만큼 일찍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그만큼 오래 그 관계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생명이 하루라도 더 많은 날을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했으니, 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상과 영광이 다 그들의 것이니, 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빠를수록 복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온갖 죄를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교활한 계산을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구원의 은혜’조차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 속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간다. 이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죄 속에 있어야 즐거운 사람이 죄 없는 천국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한 발은 주의 편에, 한 발은 세상 편에 놓고, 내키는 대로 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반만 영접해 놓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는 죄에 묶여 있어 예수님 편에 온전히 서지 못하는 사람들, 즉 ‘죄의 종’이 된 사람들이지만 오직 입술로만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역겨워 토해 내실 자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이것이 역겨운 것인지도 모르며 오히려 이것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고 나서야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왔던 천국과 지옥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땅을 치며 통곡해도 소용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 있는 자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영원한 상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듯,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고도 반드시 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인정하기도 싫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근심을 깨닫고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의 찔림을 억지로 눌러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책망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주시는 성령의 책망은 나를 징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주시려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려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착한 자녀가 부모의 뜻을 조심히 살피는 이유는 ‘벌을 받을까 봐’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 상할까 봐’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죄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 역시 ‘지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상할까 봐’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신 부모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는 때만큼 불행한 시간도 없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인생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와 친밀히 동행할 때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노아, 에녹, 요셉, 다윗... 이들도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었던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거두어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니엘, 예수님의 제자들... 역사 속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게도, 이 복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치던 중, 지쳐서 잠들었다가 깰 때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시 17:15).
온갖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1, 4).
그런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게 한 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죄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죄를 지으면 그토록 좋던 아빠, 엄마가 두려워집니다. 부모는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갑자기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죄와 은밀한 친구가 되면서 동시에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죄를 온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죄를 온전히 포기했으나 실수하여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잘못을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떠나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그분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면, 이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려면, 가장 먼저 내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로 옮겨져야만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삶을 이끌고 나아가려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모든 만물과 함께 나의 생명도 창조하신 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지, ‘하나님이 나의 뜻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는 ‘도깨비방망이’나 ‘램프의 요정’을 섬기듯 하나님을 섬깁니다. “금을 주세요!” 하면 금을 주고, “은을 주세요!” 하면 은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나 보네” 하며 쉽게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우리는 무당과 귀신에게 소원을 비는 샤머니스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달이나 큰 나무에게 소원을 비는 애니미스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온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분’, ‘나의 종’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부담스러우니 내 삶의 어느 한편에 조용히 계시다가, 내가 어려울 때에만 나타나셔서 나를 도와주는 분, 내가 부를 때에만 나타나셔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대체 누가 ‘주님’이고, 누가 ‘종’입니까?
입술로만 “주님”이라고 외치며, 실상은 자신이 ‘주’가 되고 하나님이 ‘종’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자비만 겨우 경험할 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왕, 내 삶의 주권자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1)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6)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9)
성경 속에는 ‘하나님은 복 주시길 원하신다’는 말씀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자기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기를 망설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나의 모든 소유도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면, 예수님이 내 주머니 속 잔돈까지 다 가져가시고, 나는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불쌍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 저는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 곧 처참한 순교지로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모든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인생의 모든 기쁨도 함께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런 마음을 심어 주는 것일까요? 성경은 온통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길 원하신다’는 말씀으로 가득한데, 대체 누가 이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일까요?
예수님께 주권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사탄이 이런 생각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권이 예수님께 넘어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기적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잔치의 한쪽 구석에 손님으로 앉아 계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가 하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명령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어느 상황에서든지, 무슨 명령이든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예수님의 신분이 한쪽 구석에 앉아 계신 ‘손님’에서 무슨 명령이든 내리실 수 있는 ‘주권자’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어라.”
하인들이 그대로 순종하자,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는 손님들로부터 가장 좋은 포도주였다는 평가를 얻었습니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한쪽 구석에 앉아 계신 손님으로만 머무신다면, 우리는 아무런 은혜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해도, 어쩌면 이런 대답을 들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님이 내 삶의 손님이 아니라 주권자가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모든 사람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저마다의 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가 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가 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빚이 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 없이 영적 고아처럼 살아갑니다.
목자 없는 양은 자유로워서 행복할까요?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걱정, 근심,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푸른 초장 맑은 물가에 누워도 걱정은 그치질 않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사나운 맹수들이 자신을 덮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극에 달합니다.
하지만 목자가 있는 양은 행복합니다.
작은 근심이 마음속에 들어와도 목자를 의지하면 곧 근심은 사라집니다.
푸른 초장 맑은 물가에 누울 때에도 마음속에 감사만 가득하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목자가 함께 계시기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목자가 있는 양에게 근심, 걱정, 두려움은 양의 몫이 아니라 목자의 몫이 됩니다.
자기 양들의 모든 근심 걱정을 목자가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을 때, 우리의 걱정 근심은 예수님의 몫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운다는 것은 주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환경이 변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환경이 변해도 근심, 걱정, 두려움은 끊이질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근심, 걱정,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환경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 걱정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라고 단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면, 고생조차도 더 이상 근심과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면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의 나의 삶도 천국과 같이 변합니다.
‘내가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게 살겠어’라고 체념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나의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근심 걱정 없는 삶으로, 감사와 행복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결론은 당연히 “하나님이 이긴다” 같지만,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수많은 날을 하나님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고집은 정말 대단합니다.
내 안에서 명령하시는 성령님을 이기며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 삶의 주권자이시다’, ‘내 생명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내 삶의 주권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내 삶의 주권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드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입술로는 “주님, 주님” 하지만, 실제로 내 고집을 꺾고 삶의 주권을 주님께 드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고집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고집 때문에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 때문에 결국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 내가 고집하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왜 내 삶을 인도해 주시지 않나?’
순종하겠다고 입술로만 고백할 뿐 결국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고 싶으셔도 인도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외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 극히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격적인 분이셔서 억지로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늘 분쟁과 불만족,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가득 찬 고단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니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이런 약점을 그냥 놔둘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주로 고집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내 삶 속에서, 내 가정 안에서,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주의 공동체 안에서도 사탄은 주로 고집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고집 때문에 개인의 삶이 메마르고, 가정에 불화가 생기며, 주의 공동체도 분열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분은 모두 ‘주를 위하여’, ‘더 잘되기 위하여’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교회에 두 명 있으면 교회는 둘로 쪼개지고, 세 명이 있으면 셋으로 쪼개집니다.
마귀는 이렇게 교묘하게 역사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하더라도, 고집과 분열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는 순간은 참으로 복된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들이 회복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늘 가장 좋은 것을 얻습니다.
내 고집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는 마음이 크게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들은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내 고집이 아니라 주인의 기쁨을 고집하는 이가 주의 참된 종입니다.
고집은 자신도 모르게 내 삶과 가정, 공동체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고집을 내려놓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인간적인 계획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고 유혹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정서, 내 형편, 내 계산에 잘 맞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각은 나와 잘 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혜, 계획, 역사하는 능력, 모든 것이 나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내게 설득력도 없고, 유혹적이지도 않고, 내 계산과 잘 안 맞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냥 떠나라고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도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도 축복을 약속하시고, 가나안에 들어설 때에도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복귀했을 때에도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래와 아브람은 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급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계획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 속에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을 통하여 쉽게 아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이 수월하게 해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적인 계획으로 사래가 얻은 결과는 ‘종으로부터 받는 멸시’였습니다.
상대가 목사이든 대통령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면 그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고, 부모와 자신 사이에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무시당하는 일은 이토록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왕이나 부모도 아닌 자신의 몸종으로부터 무시 정도가 아니라 멸시를 받았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으로 아브람이 얻은 결과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아브람에게 침묵하셨습니다.(창 16:16~17:1)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다는 것은 정말 큰 벌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내게 계속 말씀하시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께서 내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면 그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경험할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계획, 능력... 하나님의 모든 것은 나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십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기근이 든 땅, 피해야 할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첫 하나님의 성전이 들어설 땅, 구세주가 오실 땅, 구세주가 속죄물이 되실 땅, 인간을 구원하실 엄청난 계획을 시작하실 땅’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실 때에도 ‘한 민족의 고귀한 아버지’가 아니라 ‘열방의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을 보셨습니다.
요셉 형제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에게서 ‘꼴 좋게 된 요셉’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습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러 가는 요셉’을 보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궁궐에서 도망 나와 40년 동안 양을 치고 있는 무능한 노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모습에서 ‘거대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모세’를 보셨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쫓아오는 군대’와 ‘가로막힌 홍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갈 길’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다릅니다.
내 모든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도 진행됩니다.
시편 118:8-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나의 믿음이 확인됩니다. 돈을 믿는 사람은 어려운 일 또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론 입술로는 “주님만이 나의 힘이고 나의 능력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은 돈이 자신의 힘이고 능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또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권력을 믿는 사람은 권력으로, 사람을 믿는 사람은 사람으로, 물리적인 힘을 믿는 사람은 물리적인 힘으로 반응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정말로 믿는 힘이고, 의지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 “돈으로 해결해”라는 말만큼 부담스러운 말이 없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 “힘으로 해결해”라는 말만큼 실망스러운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사람에게 “주님이 계시잖아!”라는 말만큼 짜증나는 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진짜로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자 권사님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으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권사님에게 친구 같은 동생 집사님이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힘내. 하나님이 함께 계시잖아.” 이 모습을 그 교회 장로님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저걸 위로라고 해! 어떻게 저런 말을 해? 아이구 참... 난 저런 말 못 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선하심을 정말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로님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이분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가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철저히 짓밟고 모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이 보인 반응은 세상의 정치적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랍사게의 모욕적인 편지를 들고 곧바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펼쳐 놓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그는 자신이 가진 군사력이나 세상의 인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치셨고, 예루살렘은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에 망명했을 때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함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블레셋 지휘관들이 반대하여 결국 거처인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노하여 성읍을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 자녀들, 그리고 재물까지 남김없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을 본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제가 이 군대를 추격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격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아말렉을 추격했습니다. 얼마나 힘든 추격이었는지 다윗의 군사 중 3분의 1이 추격을 포기했습니다. 이 말은 아내와 자식들도 포기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죽을 힘을 다해 아말렉을 추격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다윗의 군대가 아말렉을 치고 빼앗겼던 모든 가족과 재물을 단 하나도 잃지 않고 도로 찾아왔습니다.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힘이고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곧바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방법을 간구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페르시아 궁전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고 성문들은 불탄 채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에 슬픔에 빠진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슬픈 얼굴을 보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그들 앞에서 율법의 말씀을 읽어 내려갈 때, 백성들은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오랫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눈물이기도 했지만, 또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지만 자신들의 막막한 앞날과 초라한 형편 때문에 흘린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렇게 위로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한 마디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입니다. 그들은 혹독한 종살이가 끝나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차가운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뒤로는 바로의 군대가 철병거를 타고 무섭게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불평했습니다.이때 모세가 슬픔에 빠진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한 마디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압과 암몬, 마온의 대군이 남유다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대군이 다가오자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은 큰 두려움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이 야하시엘에게 임하자, 그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한 마디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 대신 찬양대를 앞세워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친히 적들을 치셔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로 귀환하여 막막한 현실 앞에 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옆에 당신이 계셨다면, 성경을 통하여 그들의 결론을 아는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차가운 홍해 바다를 앞에 두고 철병거로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뒤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옆에 당신이 계셨다면, 성경을 통하여 그들의 결론을 아는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만일 큰 연합군의 침공을 앞두고 깊은 슬픔에 빠진 남유다 백성들, 그들 옆에 당신이 계셨다면, 성경을 통하여 그들의 결론을 아는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명확하고 올바른 정답이 아닙니까!
혹시 기가 막히는 사연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환경과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 인구 중 영양실조는 20%,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은 1%, 비만은 15%입니다.
이 지구의 모든 에너지 중 20%의 사람이 80%를 사용하고, 80%의 사람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없는 사람은 25%,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조차 없는 사람은 17%입니다.
공습, 폭격, 지뢰, 살육, 무장단체의 폭행이나 납치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20%입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상위 8%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상위 7%에 해당하는 부자입니다.
- 도넬라 메도우스, “만일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1990년 원작 -
우리는 어떻습니까? 감사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이렇게 반문하곤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감사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지금 나누고자 하는 말의 의도는 문장의 논리를 따지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은 부족함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최고급 사치품이었던 코끼리 상아로 궁전을 가득 장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수도의 주 궁전 외에도 여러 별궁을 따로 두고 계절에 따라 오가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왕상 22:39). 당대 최고의 무역 강국이었던 페니키아(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여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확보하고 이것으로 막대한 상업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 영토 확장, 그리고 조공 수취로 매년 어린 양 10만 마리와 숫양 10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밭을 얻지 못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습니다(왕상 21:4).
솔로몬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르호보암은 세계 최고의 부를 축적했던 아버지의 나라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만족을 모르고 더 큰 지배력과 권력을 탐했습니다. 그는 “내 아버지는 너희를 채찍으로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벌하리라”(왕상 12:14)라며 백성들을 더 가혹하게 쥐어짰습니다.
한 나라를 다 가져도 다른 나라가 탐나고, 여러 나라를 가졌어도 더 많은 나라가 탐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큰 집을 얻고도 감사는 금세 시들어지고, 더 큰 집을 얻지 못해 우울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감사를 보지 못하고, 끝없이 다른 조건을 갈망할 때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어도, 만족과 감사는 순간입니다. 만족과 감사는 금세 시들어지고 또 다른 조건을 갈망하며 지금의 행복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행복 결핍의 굴레’에서 쳇바퀴 돌듯 반복하며 삽니다.
분명히 감사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족하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행복할 조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 행복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 또 다른 신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실수하여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 로봇을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엽을 감으면 “하나님, 찬양합니다”라고만 반복하여 고백하는 장난감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 감정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하도록 프로그램화된 고성능 로봇을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아무 감정 없이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아무 의지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말씀의 선악과는 ‘자유 의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명하신 이유는 특별히 그 선악과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유 의지가 있는 아담과 하와는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자유 의지가 있는 우리도 ‘순종’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불순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고,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지만,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양보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주권을 우리에게 양보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재물로 만물의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겠습니까?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능력으로 만물의 창조자를 기쁘게 해드리겠습니까?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데, 그분을 섬기며 살면서도 왜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까요?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길 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한 기도였습니다(요 17:13). 이런 예수님을 믿으면서 왜 날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지 못할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말씀의 결핍’입니다. 말씀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감동이 끊어지면, 과거에 아무리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어도 금세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날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엘리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영적 승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홀로 맞섰습니다(왕상 18장). 그가 기도했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의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까지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 버렸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백성들이 두려움 속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성령 임재의 확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권능 있고 강력한 영적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곧이어, 우리는 전혀 다른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세벨의 협박 한마디에 엘리야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칩니다. 그러고는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절망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 19:4).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권능의 선지자가 갑자기 광야에서 그저 죽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강하고 권능 있게 쓰임 받던 종도 지쳐서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먼저 먹이시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엘리야를 회복시킨 것은 강한 불이나 바람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듣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이 지친 우리의 영혼도 일으켜 세웁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붙잡은 말씀이 오늘의 나를 지켜줍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등불은 한 번 켜졌다고 계속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기름이 공급되어야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로 행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얻는 성령의 감동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말씀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감동이 끊어지면 과거에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도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윗은 늘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광야의 시절에도, 왕이 된 후의 영광의 시절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을 때에는 그의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 가장 안정되고 평온한 시기에 있을 때 다윗은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야산과 굴을 전전하던 시절에 다윗이 주야로 붙잡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대적이 정복되고 군사력이 최정상에 도달하자 다윗의 마음이 느슨해졌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삼하 11:1~2)
다윗은 늘 전쟁에 친히 참가하여 ‘군사적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에서 왕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특별한 이유 없이 전쟁에 불참했으며,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후 늦게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오랜 고난 끝에 찾아온 성공과 평온함 속에서 그토록 붙들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의 끈을 마음에서 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정욕과 간음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죄를 짓고 맙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수많은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도, 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하던 사람도 말씀이 끊어지면 죄 앞에 무기력해지게 됩니다.
솔로몬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인물도 드뭅니다. 솔로몬은 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의 마음은 일천번제로 하나님께 고백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친히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라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뿐 아니라 부와 영광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임하는 놀라운 순간들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과거의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 뜻을 따라 사는 주님의 종들에게는,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왕상 8:23, 새번역) 이랬던 솔로몬이 부귀영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7장은 왕에 대한 규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 17:16),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7).
당연히 솔로몬도 이러한 규례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냉정하게 기록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그 여인들이 그의(솔로몬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1~4)
지혜의 절정에 있던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 어떻게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말씀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8~19)
왕에게 주어진 이 명령의 핵심은, 아무리 큰 지혜와 부와 권력을 가졌어도 날마다 말씀을 곁에 두고 읽지 않으면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솔로몬의 비극은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날마다 말씀을 붙드는 삶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잡고, 통회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18)
주저앉은 엘리야를 일으켜 세운 것도(앞서 나눈 내용,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얻는 방법’), 무너진 다윗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의 결핍이 우리를 죄로 이끌지만, 말씀이 임하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에스겔 36:36-37
“ ...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면 결국에는 이루시겠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우리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얼마든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하게(우연처럼) 경험하길 바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길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이미 온 천하에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저절로 역사해 주시겠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저절로 역사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꼭 기도해야만 합니다.
단 1분이라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사실,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른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이 기도를 안 하면서도 ‘나는 기도해’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싶다면 기도하지 않고도 기도했다고 믿는 이 잘못된 믿음을 단 1분이라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유치원 아이가 하루에 10분을 공부하고 “공부했어요”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공부하려는 시도 자체가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자녀가 하루에 10분 공부하고 “오늘 공부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을 어느 부모가 인정해 주겠습니까? 특히 기말고사와 같은 시험을 앞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하루에 10분을 기도했다면, 우리는 “너무 잘하셨네요”라고 격려할 것입니다. 기도하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10분 기도하고 “나는 기도했어”라고 한다면, 이것을 누가 인정해 주겠습니까? 똑같이 하루에 10분 기도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이것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과 천국 시민의 삶을 사는 문제는 중학교 기말고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10분 기도하고 ‘기도하는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오래 기도해야만 기도하는 겁니까?
많은 사람이 “꼭 오래 기도해야만 기도하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꼭 오래 기도해야 하나요? 시간이 뭐가 중요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1시간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나 제자들은 “예수님, 꼭 오래 기도해야만 기도하는 것입니까?”라고 되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깨어 기도합니까? 이외에도 성경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등 많은 구절에서 열심히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도 “네가 기도생활을 하고 있구나” 라고 인정해 주실까?’ 라는 점입니다. 기도를 안 하고도 기도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고도 “기도해도 소용없어!”라며 하나님께 서운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너는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해 주실까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싶다면 기도하지 않고도 기도한다고 믿는 이 잘못된 믿음을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또 매 순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 있는 놀라운 축복의 비밀 기도 안에 놀라운 축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8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영접한 사람들은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며, 오랜 친구처럼 지내던 죄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정결하게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회개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남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고, 죄를 완전히 포기했어도 죄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끊기면 죄가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얼마나 뜨거운 고백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으로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초신자도 아니고, 신앙에 열정이 없던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 믿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험한 세상 속에서 죄로 더럽혀지는 우리의 영을 어떻게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용서받고, 힘을 얻고, 점점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화됩니다.
유독 반복적으로 무너지게 되는 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죄짓고 후회하고, 또 그것 때문에 죄짓고 절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이 나를 사로잡아 후회와 절망 속에 가두는 것일까요? 나 자신은 끊기를 간절히 원하고, 당연히 성령의 역사도 아니니, 악한 영의 역사가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내가 원치 않는 죄에 갇혀 있을 때에는 어떤 영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지를 하루빨리 영적인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 곧 성령의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은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끊을 수 있습니다. 죄의 능력에서 나를 해방시키실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고, 성령의 역사는 기도로 얻을 수 있습니다(눅 11:13).
기도를 통해 회개하고, 기도를 통해 죄를 이기고, 기도를 통해 새 목표를 이루어 나갑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날마다 새 사람이 되어 갑니다.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말을 할지...
중요한 것은 모든 선택에는 열매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맺게 될 열매도 달라집니다.
성경은 이것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그러므로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복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참된 행복을 얻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분의 백성들과 친밀하게 관계하시고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 32:8).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변함 없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지시하시고, 이끄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사실인데,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할까요?
이유는 ‘고집스러운 자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갈 길을 보여 주시지 않아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데도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클까요?
내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클까요?
내 경험이 하나님의 경험보다 많을까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내 경험과 지혜에서 비롯된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의 고집은 정말 대단합니다.
내 고집대로 선택해야 후회 없는 삶을 살 것 같지만, 그렇게 선택하고 후회하는 삶을 삽니다.
내 고집대로 선택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지만, 그렇게 선택하고 속이 무너지는 삶을 삽니다.
이러한 일들을 수차례 경험하고 후회를 하고도, 여전히 같은 실수를 고집합니다.
이렇게 내 지혜와 계산, 내 감정과 내 욕구대로 나의 삶을 통제하려는 나의 고집이 하나님의 인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려 주셨지만, 그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사울이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고집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후 회개하기는커녕 “다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한 일, 다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입니다”(삼상 13:12, 15:15)라고 하며 끝까지 고집스러운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나으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몰라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등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그는 예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고집스럽게 예수님이 아니라 재물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은혜의 길을 제시해 주신다 할지라도, 그 길을 내딛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한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먼저 용서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내게 와서 무릎 꿇고 빌 때까지 기다리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 사람을 비판하길 원하십니까, 격려하길 원하십니까?”,
“제가 이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프시겠습니까?” ...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매우 명확한 답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사울, 부자 청년... 그들 모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고집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려운 형편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형편도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우리의 ‘고집’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고집이 문제입니다.
“주님, 주님”이라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내가 내 삶의 주권자가 되려는 나의 고집스러운 자아가 문제입니다.
이 고집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이 고집을 내려놓은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주신 마지막 명령이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온전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고 하면 ‘내 몸이 갑자기 불같이 뜨거워지는 것’, ‘내 혀가 불같이 갈라지며 방언이 터지는 것’, 또는 ‘말기 암이 갑자기 치유되는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방언이나 병 고침을 받는 것도 분명히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며 은혜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은혜입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크고 감사한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굳어진 나의 마음이 부드럽게 치유되는 일입니다.
간이 굳어지는 것, 피가 굳어지는 것, 근육이 굳어지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시라도 급하게 치료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간과 피와 근육이 굳어져도 천국에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나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가장 큰 권능(능력)은 나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기도의 자리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통회 자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성령의 권능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이 초대 교회를 이루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고, 누구도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행 4:32).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성령의 권능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령의 권능은 초자연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에 그 본질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방언은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명절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의 언어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똑똑히 알아듣는 ‘실제 외국어’였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신 이유는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에서 언급되는 방언은 ‘실제 외국어’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남용과 교만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을 자신들의 영적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경고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바울은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알아듣기 쉬운 가르침을 강조하며, 모든 은사의 목적은 개인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사랑에 있음을 명확히 선포하였습니다.
굳어진 마음은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한 마음, 비판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사랑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귀가 그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부드러운 마음은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 화평을 이루는 마음, 오래 참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성령님이 그 마음의 주인이 되셨다는 증거입니다.
갑자기 몸이 불덩이가 되는 것, 입에서 이해할 수 없이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 말기 암이 치유되는 것, 만일 성령의 권능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도대체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장 큰 성령의 권능과 은혜는 내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3-4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 중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입니다.
명품과 보석 등으로 외모를 꾸미는 데에는 많은 공을 들이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공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화장과 옷으로 외모를 꾸미는 데에는 매일 몇 시간을 소비하지만, 마음을 돌보는 데에는 하루에 30분도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장이나 간에 이상이 생기면 난리가 나지만, 마음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나 외모보다 더 열심히 가꾸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잠 4:23)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그리스도인이란 전에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전에는 기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기도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생각의 권위를, 즉 마음의 결단을 그리스도께 드린 사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주께 순복하는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7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울은 왕이 된 후 점점 자기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사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평판과 인기’가 있었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 15:26)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 16:1)
사무엘은 제사를 명분으로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들은 모두 제사에 참석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새의 아들 8명 중 7명만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막내 다윗만 그 자리에서 빠졌습니다.
아버지인 이새조차도 다윗은 제사에 빠져도 되는 인물, 사무엘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여겼나 봅니다.
한편, 사무엘의 눈에는 큰아들 엘리압이 정말 왕이 될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결국 사무엘은 이새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삼상 16:11)
이새가 대답했습니다.
“아직 막내가 있긴 한데, 그 아이는... ”(삼상 16:11)
사무엘은 당장 다윗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니,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강력히(צָלַח)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을까요?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안 계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압을 왕으로 사용하시길 거절(מָאַס, Reject, 거부)하셨을까요?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안 계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족조차 미덥지 않게 여기던 다윗을 선택하셨을까요?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양을 지킬 때에도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골리앗 앞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다윗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죄가 있었고, 연약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에도 다윗은 사울처럼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즉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윗은 평생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시 16:8)라고 마음으로,
그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찾으시고, 그 사람과 교제하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은밀한 중에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밀한 중에 늘 남을 비판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밀한 중에 늘 음란한 죄를 짓습니다. 이런 사람은 ‘음란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밀한 중에 늘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밀한 중에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은밀한 중에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다윗은 은밀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양을 칠 때에도, 사울을 피해 동굴에 숨었을 때에도, 홀로 광야에서 지치고 목말랐을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를 그의 중심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은밀한 곳 중에 가장 은밀한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그의 대표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이것은 시편 19편 내용으로 만들어진 가사이며,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셨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난달에 뱉은 ‘당신 입술의 모든 말’이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열납되어도 괜찮으십니까?
특히 ‘은밀한 중에 뱉은 모든 말’이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열납되어도 괜찮으십니까?
당신은 지난달에 품은 ‘마음의 모든 생각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열납되어도 괜찮으십니까?
특히 ‘은밀한 중에 품은 마음의 모든 생각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열납되어도 괜찮으십니까?
솔직히, 저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뱉었던 모든 말들’과 ‘제가 품었던 모든 마음의 생각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상달 되는 일이 없기를 오히려 소망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셨으나 제가 사랑하기 힘들어했던 사람들을 향하여 품었던 저의 불평과 마음이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상달 되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다윗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윗 마음의 소원은 왕이 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시 27:4).
평생 동안 다윗이 한 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시 16:8)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이런 다윗을 보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행 13:22).
은밀한 중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 ”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마음이 언제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려’ 하는 생각을 넣어주었습니다(요 13:2). 유다는 그 생각이 마귀가 주는 생각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인지 분별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다는 그 생각을 계속해서 마음에 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라고 말씀하시며 유다의 마음을 찔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요 13:18)라고 다시 귀띔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자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요 13:21).
제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동요했지만 가룟 유다는 끝내 그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팔게 되었습니다.
다윗하면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충신인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한 왕’입니다. 다윗의 이 수치스러운 잘못은 3천 년이 지난 후에도 온 세상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왕궁의 옥상에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밧세바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신하를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그 생각이 마귀가 주는 마음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인지 분별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밧세바를 마음에 품은 다윗은 결국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다윗은 계속해서 밧세바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충신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도 저질렀습니다.
계속해서 질투하는 마음을 품었던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했고, 계속해서 탐심을 품었던 아간은 결국 전리품을 훔쳤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히 11:25)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도 계속해서 자기 민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에스더는 왕비가 되었지만 자신의 지위만 안전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금식하며 기도하다, 마침내 이러한 결단을 내립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결국, 에스더는 멸망의 위기에서 유다 민족을 구원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었던 요셉은 결국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겨냈고, 계속해서 성벽 재건을 마음에 품었던 느헤미야는 결국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생각은 반드시 말과 행동과 삶으로 그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시작입니다.
고린도후서 10:5-6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면 그때부터 내 마음은 지옥이 됩니다.
의심, 미움, 원망, 교만... 이러한 것들이 내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곧바로 현실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관계가 깨지고, 싸움이 이어지고, 울고 싶은 일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사탄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면, 나의 삶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사탄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면, 나의 삶은 참으로 비참해집니다.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더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가는 것, 이것이 사탄의 계획입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사탄이 부정한 생각을 우리 마음에 심으려 할 때, 우리는 그 부정한 생각을 부지런히 뽑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채워야 합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삼키려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쟁하듯,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홀가분함, 평안, 용서, 감사... 이러한 것들이 내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곧바로 현실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관계가 회복되고, 기쁜 일이 이어지고, 웃을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성령께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면, 나의 삶은 점점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성령께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면, 나의 삶은 정말로 행복해집니다.
천국 같은 삶을 살다가 더 행복한 천국으로 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계획입니다.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치며 삽니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요?
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치며 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초가 되는 믿음입니다.
반면,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주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환상이나 환청, 또는 초자연적인 체험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자연’과 ‘자연의 질서’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왜 무에서부터 자연과 자연의 질서를 창조하셨을까요?
무시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자연의 질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려고, 일부러 무에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무속적인 신앙 형태를 고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환상이나 환청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물론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뜻하시면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홍해를 가르실 수도 있는 분이시고, 영안을 열어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보여주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만일 100만 명 중 한 명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면, 나머지 999,999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못 받는 것일까요?
만일 100만 시간 중 한 순간만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했다면, 나머지 시간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들 안에 존재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일부러 무에서부터 자연과 자연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주로 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육성이 나의 귀에 환청으로 들리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또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한마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생각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 드는 모든 생각이 전부 성령님의 음성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은 ‘생각과 감정’입니다. 그래서 마귀로부터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 ‘생각과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꼭,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하게 됩니다.
신명기 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생각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 드는 모든 생각이 성령님의 음성(감동)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악한 영이 주는 생각’도 있고, ‘육신의 생각’도 있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도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안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역사하는 곳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고집, 미움, 시기, 질투, 비판, 정죄….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들은 우리의 불안정한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지극히 본능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성령의 음성(감동)인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이 되고, 나의 감정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고, 나의 감정에서 나온 환상이 하나님의 비전이 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내가 하나님이 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령께서 주신 음성(감동)인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는 ‘절대적 당위성’을 지닌 다음 세 가지 기준으로 정확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음성(감동)이
1. ‘성경(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2.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인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인가’를 판단하여, 성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7-2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3.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가 되는가?’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 같은 뜻이지만 다른 표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은혜가 되는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음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이라면, 우리가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배워서라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6-19)
잘못된 성령의 감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성령의 은사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어느 원주민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대된 강사 목사님이 갑자기 어느 원주민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학교 선생님이 될 거야!’
성령께서 자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청년은 몇 달 후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어느 청소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안수하며 학생들에게 예언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어느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건축가가 될 거야!’
이 학생은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줄을 섰습니다. 다시 이 학생의 차례가 되자, 강사 목사님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요리사가 될 거야!’
학생은 그 자리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뻥이네.’
사역지로 떠나시는 어느 분에게 어느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왼쪽 어깨 위에 작은 빛이 보입니다.’
저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지도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도 않는 저 환상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된 은사자들은 자기 자신이 알고 행하였든지 모르고 행하였든지, 자신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이 되고,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고, 자신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이 된 사람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거짓 은사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동시에 나 자신도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반드시 분별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 즉 성령의 감동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성경 말씀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입니다. 고된 포로 생활 속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고, 훗날 성벽 재건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의 심령 골수를 쪼갰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가 나아가 담대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37). 이날 세례를 받은 이들이 3천 명이 넘었습니다. 이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이유는 베드로의 말재주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예루살렘에서 우상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던 중 오랫동안 잊혀졌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이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요시야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자기 옷을 찢으며 통곡했습니다(왕하 22:11).
이것은 옛날에만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은이의 아버지는 공사장 일 때문에 늘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은이의 어머니는 남자 친구를 만나 가정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은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남동생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은이 안에는 늘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나? 심지어 나는 왜 부모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은이의 얼굴에는 늘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은이가 말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은이가 해맑은 얼굴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스바냐 3장을 읽고 있었어요. 이 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던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을 다시 읽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딸아, 나는 구원을 베푸는 전능자이다. 그런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과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즐거이 노래 부를 정도로 너를 사랑한단다. 이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니? ”
은이는 그 성령님의 음성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랑만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후, 은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늘 어둡기만 했던 은이의 얼굴은 이날 이후로 해와 같이 빛났습니다. 은이는 중등부 선생님이 되었고, 많은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본능적인 ‘자기 사랑’에 속아서 자신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니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며, 그 사람의 실제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기도하는 사람과 가까이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도다”(시 145:18)
또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바울이 기도 중에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음성을 들은 것도, 기도 중에 듣게 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고넬료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4-5)라는 음성을 들은 것도 기도 중에 들은 음성이고,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라는 음성을 들은 것도 기도 중에 들은 음성입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성령의 음성과 감동을 얻게 됩니다.
이사야 30: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우리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빌립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가던 중에 빌립은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행 8:27).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빌립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단순한 사건 같지만, 이 사건은 아프리카의 영적 흐름을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에티오피아에 복음의 씨앗이 심기고, 아프리카 전역으로 복음이 흘러들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우연’ 같지만, 모든 관계와 상황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마치 우연처럼 바울은 고린도에서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원래 이 부부는 고린도에 살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 밖으로 추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행 18:2).
이러한 이유로 아굴라 부부는 삶의 터전을 잃고 고린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이 부부는 바울의 든든한 선교 후원자이며 선교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의 인간관계는 이처럼 ‘우연 같은 만남’으로 가득합니다.
바나바, 디모데, 루디아 등을 만난 것과 안디옥 교인들 및 빌립보 교인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런 만남과 관계를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표현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모든 만남과 관계들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이면에는 성령님의 막으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만남과 상황에는 ‘하나님의 뜻’, 더 정확히 표현하여 ‘하나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관계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하기도 어려운데, 반드시 같은 공동체에서 얼굴을 보며 관계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아마 성령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네가 그를 사랑으로 품길 원한다.”
우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와 상황 안에는 하나님의 기대(뜻)가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길, 서로 험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길, 서로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길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기대(뜻)’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 속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할 때, 매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사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성령의 음성(감동)을 듣고, 그 음성이 ‘정말 성령님의 음성이 맞는지’를 정확히 확인했다면, 그 음성에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마리아는 빌립이 목회 활동을 하기에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혈통적 혐오와 종교적 갈등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고,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성공적으로 목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사마리아 성 전체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행 8:26)
성공적인 목회지와 사랑하는 교인들을 두고 광야 길로 떠나는 일은 빌립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광야 길에 들어선 빌립은 에티오피아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내시)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다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빌립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 관리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매우 단순한 전도 사건으로 보이지만, 이 일은 훗날 아프리카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꾸는 일이 됩니다. 기쁨으로 복음을 안고 돌아간 에티오피아 관리는 고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복음을 전파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니, 아프리카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꾸는 일에 빌립이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야, 일어나 사울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행 9:10-12)
이것은 매우 단순한 명령 같지만, 결코 쉽게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거나 심한 고초를 겪게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신자들을 결박하러 이곳에 왔다는 소식까지 퍼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숨어야 할 상황인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가라.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아나니아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가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습니다.” (행 9:13)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행 9:15)
아나니아는 두려웠지만 그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기도하니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서신서들을 기록하며 복음의 지경을 온 세상으로 넓혔습니다.
아나니아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 중에 들려온 음성에 순종했더니, 세계 기독교 역사를 쓰는 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진이와 남동생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하루는 남동생이 아버지로부터 구타당하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정신이 돌아오게 한 후, 다시 남동생을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진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러다 죽어도 상관 없지만, 내 동생만은 꼭 살려야겠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진이는 남동생을 데리고 몰래 보육원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진이는 제가 사역하던 보육원(고아원)의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진이의 분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진이는 자주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아빠가 길 위에서 가장 비참하고 초라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길 위에 납작하게 말라 죽은 동물의 시체처럼 그렇게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진이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내 안에 역사하는 성령님의 감동 발견하기) 훈련에 참여했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금요 기도회 시간이었습니다. 진이가 기도하다가 갑자기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계속 울기만 하던 진이가 기도하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진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진이에게 물었습니다.
“기도 시간에 왜 그렇게 울었어?”
진이가 대답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어요. 나는 용서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용서하래요. 나는 너무 싫은데...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속 아빠를 용서하래요.”
진이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다시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진이에게 말했습니다.
“진이야, ‘아빠가 도로 위에 동물 시체처럼 비참하게 말라 죽었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은 마귀가 주는 감동이 분명해.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해. 그건 육신의 생각이 분명해. 그런데 그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거스르며, 게다가 네가 눈물이 날 정도로 싫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아빠를 용서하길 원한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이 너무 분명해.
진이야! 너무 싫고 힘든 것 알아. 그런데 성령께서 주시는 그 감동에 한 번만 순종해 봐. 그리고 성령께서 또 감동을 주실 거야. 그러면 그 감동에 한 번만 더 순종해 봐. 그리고 성령께서 또 감동을 주실 거야. 그러면 그 감동에 한 번만 더 순종해 봐. 그렇게 딱 10번만 해 봐. 그리고 너의 뒤를 돌아봐. 너는 이미 예전과 다른 길로 들어서 있는 너의 모습을 너의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야. 그렇게 순종하며 1년만 지내봐. 그리고 너의 뒤를 돌아봐.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어떻게 놀랍게 이끄셨는지를 너의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야.”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진이가 제 사무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진이가 말했습니다.
“저... 아빠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용서하고 나니 제가 살 것 같아요.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지옥 같은 마음에 사로잡혔었는데, 그 지옥 같은 마음에서 해방되니 오히려 제가 살 것 같아요. 그리고 아빠를 용서하고 나니, 아빠가 너무 불쌍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진이가 다시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데 진이가 흘리던 눈물은 예전에 흘렸던 눈물과 완전히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흘리는 눈물이었지만, 이때 흘리던 눈물은 분명히 ‘아빠를 긍휼히 여기며 흘리던 눈물’이었습니다. 저의 눈에는 이미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 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들어선 진이의 모습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상황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셨다면, 꼭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순종하고 또 순종해 보십시오. 그렇게 1년만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뒤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얼마나 놀랍게 이끌고 계신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고린도전서 2:9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창조된 것은 창조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입니다.
실물보다 더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만든 조각가는 그 조각상에 대한 모든 것을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물보다 더 실제 같은 조각상이라 할지라도, 그 조각상은 조각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조각가는 창조자이고 조각상은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창조물의 지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최첨단 컴퓨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만든 기술자는 그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컴퓨터라 할지라도, 그 컴퓨터는 기술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술자는 창조자이고 컴퓨터는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창조물의 지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에게도 나름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자신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기의 지혜와 부모의 지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해’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엄마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배 속 밖의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이해하지 못하듯,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천국의 경이로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상과 그 영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의 상과 그 영광이 얼마나 크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천국의 상을 강조하셨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크기에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지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에, 그분의 진노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천국은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그분의 진노로 가득 채워진 지옥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간 후에 “내가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놀랍고 행복한 곳이었네”라고 말하며 감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1:3~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행복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좋은 대학을 가려 하고, 좋은 직장을 구하려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돈을 모으고, 여행을 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을 좇다 알코올, 마약, 도박이나 육체적 향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살을 하는 사람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갈망하지만 행복을 정말로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때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콘센트가 빠진 가전제품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듯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창조된 그 목적대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행복을 갈망해도 행복의 공급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행복도 공급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공급됩니다.
어쩌다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부모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지켜볼 때 마음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어”,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라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제적인 사귐’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10~20년 믿어도, 예수님과 실제적인 사귐이 없으면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과 실제적인 사귐을 시작하였을 때는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이 충만합니다. 그런 후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에 소홀해지면 여전히 교회는 다녀도 기쁨과 행복이 점차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주위에서 쉽게 목격하고 또는 직접 경험하기도 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는 삶의 변화가 있다가,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에 소홀해지면 우리의 삶은 다시 죄악된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다가,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에 소홀해지면 예수님의 인도하심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길을 걷게 되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되고, 행복이 충만하게 되고, 승리를 얻게 되는 삶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서 옵니다.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열두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관심을 단 한 순간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늘 제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심지어 산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도 마음속은 제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바닷가에 홀로 계실 때에도 바다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폭풍 속에서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폭풍 속에서 힘겨워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폭풍이 거세지고 두려움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분은 언제나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된 걸음을 막아 주시고, 흔들리는 발걸음을 붙잡아 주시고,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
삶의 무거운 짐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짓누를 때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시고, 영혼에 힘을 부어 주시고, 마음을 위로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요한복음 9:40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건강한 육체의 눈은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시력을 잃으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 광경을 보질 못합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느끼는 감격도 느끼질 못합니다.
시력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그 얼굴을 보질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느끼는 감격도 느끼지 못합니다.
시력을 잃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자유롭게 일하거나 이동할 수도 없으며, 눈과 연관된 모든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육신의 눈이 뜬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은 일이며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영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뜨이면 육신의 눈이 뜬 것보다 더 놀랍고 감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그 안에서 순행되는 질서를 보며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은 똑같은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보지 않아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 중에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더 크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들은 내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들은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외치며 통회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은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모습을 보질 못합니다. 통회자복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을 보며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의 눈이 멀어 자신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남을 비판하고 공동체를 비판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공동체를 깨뜨리고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들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우리의 원수인 것을 보질 못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양 속에 삽니다. 죄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내가 더러운 죄를 범할까 봐 죄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들은 죄로 더럽혀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도 없고, 회개를 통해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도 모릅니다. 그저 죄를 은밀하게 맛보는 삶의 행복 정도로 여깁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정결한 삶을 통하여 오는 축복을 봅니다. 이들은 정결한 삶을 통하여 성령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며, ‘또 내일은 어떤 은혜를 경험하게 될까?’ 하며 설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은 정결한 삶에서 오는 축복을 보질 못합니다. 그래서 ‘정결한 삶’이란 말만 들어도 숨 막혀 하며, ‘어휴, 무슨 낙으로 살아?’라고 고백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자신이 영적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봅니다.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마귀의 간교한 역사를 보며 ‘이것이 마귀가 기뻐할 일이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과 싸우지 않고 마귀와 싸웁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고, 공동체도 지킵니다. 그렇게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들은 마귀의 간교한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인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과 싸우지 않게 될 텐데, 그들은 마귀의 꾀를 보질 못합니다. 그래서 늘 사람과 싸웁니다. 그러므로 관계는 깨어지고, 마음은 지옥과 같이 변합니다. 자신의 마음만이 아니라 공동체 사람들의 마음까지 슬프게 만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고도 자신은 ‘승리했다’라고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누구를 기쁘게 하는 사람인지, 곧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마음으로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고백을 하고 있는지도 보질 못합니다.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보게 될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도,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도,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셨던 것도, 천국과 지옥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도, 천국의 상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지옥의 형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이 모든 것들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될 날이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찍 영의 눈을 뜨고 감사함 속에서, 이러한 은혜들을 준비하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이러한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이것만으로도 큰 능력을 얻은 사람이며,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며, 감사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입니다.
시편 144:15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
요셉은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요셉은 사랑받는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들의 미움을 받으며 자란 요셉은 행복했을까요?
형들에게 미움을 받다가 결국 살해 위협을 받으며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행복했을까요?
은 이십 개에 팔려 노예로 끌려가던 요셉은 행복했을까요?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히 일했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은 행복했을까요?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요셉은 행복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1-2)
요셉이 홀로 견뎌야 했던 긴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요셉은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행복한 사람이었나요?
모세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죽음의 위협 속에 태어나 나일강으로 떠나보내진 모세는 행복했을까요?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공주의 손에서 자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모세는 행복했을까요?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도망자가 되어,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행복했을까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들을 이끌던 모세는 행복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모세는 늙어서 기력이 쇠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생명은 여기까지이다” 하고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는 행복한 사람이었나요?
다윗은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사울의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된 다윗은 행복했을까요?
죽음을 피해 광야와 동굴을 전전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은 행복했을까요?
블레셋과의 전쟁, 아말렉과의 전쟁, 사울 군대와의 전쟁, 여부스 족속과의 전쟁, 모압과의 전쟁, 에돔과의 전쟁, 암몬과의 전쟁... 게다가 아들 압살롬과의 전쟁, 말 그대로 계속된 전쟁의 삶을 살았던 다윗은 행복했을까요?
자신을 대적했던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행복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다윗은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행복한 사람이었나요?
분명히 요셉, 모세, 다윗,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고난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박장대소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도 날마다 웃을 일만 가득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모질고 거친 광야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역사 속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이들이 역사 속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 이들이 역사 속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이유는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이한 것은 끊임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 역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비판하며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 더 정확히 표현하여 ‘행복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따라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몹시 불편해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합시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합시다!”
그들은 이런 주장이 현실 도피적인 소리, 의지력이 약한 소리, 소극적 세계관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야망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게 판단합니다.
이들의 판단이 옳은 판단일까요?
결혼하는 신랑에게 “다른 신부를 사랑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현실 도피적인 소리일까요?
다니엘에게 “바벨론에 살지만, 바벨론을 사랑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의지력 약한 소리일까요?
고난받는 욥, 요셉, 다윗에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소극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소리일까요?
교회에 다닌다고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말은 오직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만 깨닫고 공감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 있던 욥, 요셉, 다윗, 다니엘이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날카로운 말이나 정죄가 육체적인 폭력보다 더 큰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감금이나 협박이 성도의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감사가 넘치는 삶은 세상에서도 천국과 같은 삶을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삶은 육적인 삶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창조받았습니다.
육은 관심도 많고 열심히 관리됩니다.
그러나 영은 영양이 결핍되고, 이상이 생겨도 잘 관리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끝없이 허전함과 불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이유는 영적인 존재에게 영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불만족은 술, 도박, 마약,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채우려 해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George Swinnock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은 뱃속의 심한 허기를 느낀다.
그런 그에게 음악을 들려주거나 명예를 수여해도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음식을 주면 허기는 곧 사라진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명예, 이익, 세상의 쾌락,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거나 주어도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허기진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느낄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만족을 얻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느낄 때 만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하며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 지’가 정말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머리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으로 너희를 가꾸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는 것으로 너희 속사람을 가꾸어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벧전 3:3-4)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은 ‘마음이 공허하게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청결함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고, 마귀의 뜻과 부정한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받는 두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돈으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은 모든 것을 돈으로 봅니다.
의심으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은 모든 사람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봅니다.
교만으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초자연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인 환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해석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 1:18),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골 1:15)과 같은 성경 말씀과도 가르침이 어긋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구원 받은 백성의 특징을 ‘마음을 청결하게 가꾸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5이하)라고 강조할 정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천국 백성이 되는 가장 큰 축복을 얻게 됩니다.
아무 마음이나 대수롭지 않게 품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중요한 일은 ‘마음 관리’입니다.
* καθαροί [katharoi] : 정결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 “카타로이 테 카르디아”(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여호와의 산에 설 것이다, 거룩한 곳에 설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2장 3~4절에도 “...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들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해석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여호와의 산에 서서, 다시 말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에서의 (ὄψονται)도 현실에서 환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ὄψονται는 문법적 시제상(미래형 중간태)으로 장차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베드로처럼 현재 세상에서 환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면 ὅραμα(호라마)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도적으로 ὄψονται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라”
저는 선교지에서 싱글 아빠가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들을 선교지에서 혼자 키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한국에 3년을 머물렀습니다.
이미 10년 이상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려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려 할 때의 일입니다.
3살 된 아들과 함께 다시 선교지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돈은 얼마 있으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돈은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걱정 없습니다.”
그분들이 말했습니다.
“아멘! 그런데 돈은 얼마 있으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돈은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걱정 없습니다.”
정말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분들이 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멘! 물론 하나님이 함께하시죠. 그런데 우리끼리 살짝 이야기해 보세요. 가서 생활하실 수 있는 돈은 있으세요?”
제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정말 돈은 없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걱정하지 않아요.”
그중의 한 분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교인분이 00지역에서 농장을 하시는데, 거기서 일하시면서, 시간이 나면 선교 활동을 하시겠어요?”
만일 저에게 여유 돈 100억이 있었다면, 이분들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남는 돈 100억이 있으시다니, 어디 가나 걱정 없이 사시겠네요”라고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돈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오늘 교통사고로 죽을지, 아니면 잠을 자다 갑자기 죽을지, 바뀐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리고 그 돈의 액수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돈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돈의 능력은 ‘믿음’과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라는 말은 이들에게 참으로 대책 없고 답답한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실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이시며, 능치 못할 권능이 없으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사실 이들의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돈보다도 훨씬 능력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을 돈보다도 못 믿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인정해 주실까요?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고 정확히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처럼 살자’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주 합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살아라’라는 말은 ‘거룩하게 살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 없이 살아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걱정 근심이 없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큰일들을 당하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헤롯 왕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영악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을 상대하셔야만 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흉악한 죄인들을 품으셔야만 했습니다.
계속되는 핍박과 살해 위협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말할 수 없는 모욕과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홀로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정말 고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에는 근심 걱정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함께하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갈 것을 미리 아시고도, 그리고 홀로 외롭게 고난 당하게 되실 것을 아시고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만큼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오늘도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계획, 뜻, 사랑 안에만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돌보신 것과 같이 나를 돌보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근심 걱정 없이 기쁨만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요?
쇼핑센터도, 레스토랑도 없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요?
다음은 선교자들이 선교지에 살면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슨 낙으로 사세요?”
“저는 2, 3일은 모르겠지만 1달도 못 살겠네요. 여기서 어떻게 사세요?”
“쇼핑센터도 없고, 좋은 레스토랑도 없고... 도대체 여기서 무슨 낙으로 사세요?”
천국에서는 무슨 낙으로 살까요?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사실 우리는 천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뱃속 밖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듯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천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아주 희미하게나마 천국을 예상할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얻는 행복은 고급스러운 쇼핑센터나 레스토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치가 ‘인생의 낙’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흥이 ‘인생의 낙’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밀히 즐기는 죄가 ‘인생의 낙’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이들에게 천국이 행복한 곳일까요?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천명하셨던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뒤엎으시고, 지옥의 문을 폐쇄하시고, 죄 짓는 것이 인생의 낙이 된 사람들까지 모두 천국에 보내주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들에게 천국이 행복한 곳일까요?
사치와 과시로 행복을 느끼던 사람들은 사치와 과시가 없는 천국에서 무슨 낙으로 살까요?
술 취함, 불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각종 죄를 즐기던 사람들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천국에서 무슨 낙으로 살까요?
군림하길 좋아하던 사람들은 어떨까요? 군림하기보다 섬기며 살아야 할 천국이 이들에게 맞을까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던 사람들은 어떨까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사랑하고 품어야 할 천국이 이들에게 어울릴까요?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죄를 은밀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저질렀더니, 행복하시던가요?
속이 시원하도록 남을 판단하고 정죄했더니, 행복하시던가요?
쇼핑을 많이 하고 기름진 음식을 실컷 먹었더니, 삶의 참된 행복을 얻으셨나요?
명품으로 치장한 삶 또는 남 위에 군림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의 근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빌립에게 뭔가를 가르치시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넘게 모인 사람들을 보시며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요 6:5)
마치 큰 식당을 오랫동안 경영해 온 사람처럼 빌립이 5천 명이 넘는 식사량을 순식간에 계산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레가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안드레 자신도 자기의 행동이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멋쩍어하며 안드레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9)
빌립과 안드레 둘의 믿음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에게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계산적인 빌립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라는 마음만 있었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편, 안드레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