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생활 기반을 갖추지 않은 곳에서의 장기체류는 나름의 고달픔이 있다. 예를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부터 오늘은 또 어디에가서 무엇으로 끼니를 떼우는가 하는 사소한 고민들의 연속이다. 미세먼지가 아니었다면 어제 저녁에 근처 빵집에 들러 고소한 빵 몇가지를 사놓고 아침에는 GS25에서 커피하나만 들고 오면 될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GS25 커피가 나름 수준급이다).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하는 법. 어쩔수 없이 출근길 동선위에 있는 카페에 들러 베이글을 먹어야 했다.
어쩔수 없이 라는 말은 쓴 이유는 언제인가 한번 그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뽑아 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뜨거운 물에 바로 부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원두를 가는 소음이 들리지 않고 빨리 커피가 준비된 듯한 느낌이었고 두번째로는 위에 거품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떤 광고에 의하면 이 크레마는 신선한 커피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내 느낌에는 에스프레소를 먼저 뽑아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면 아무리 크레마가 있었다 한들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커피는 항상 뜨거운 물을 먼저 담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살짝 부어 줘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이 담긴 컵에 직접 내리는 것 같다. 갑자기 마치 커피 칼럼니스트인냥 쓰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누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여하튼...어쩔수 없이 들른 그 카페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면서 소리에 집중하는데 오늘은 커피를 가는 소리가 들어서 그때 부터 마음이 차분해졌다.
커피와 베이글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글을 하나 읽었는데, 너무나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톨스토이처럼 샌님같이 돌아다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야생적 광기가 나올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톨스토이는 샌님이라는 단정도 마음에 들지만 야생적 광기라는 말의 조합이 상당히 착착감겼다. 이 말을 보고 아침부터 또 도스토예프스키가 괜히 뿌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말의 조합이라는 것이 힘이 상당하다. 지금은 유튜버인지 변호사인지 알 수 없게 된 대학 후배와 아주 먼 옛날에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까지 생생하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아주 의지가 강한 새끼 같아요." 만약 '새끼' 대신 '사람'이 들어갔다면 그 맛이 살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기억나는 표현으로는 '니체는 여자를 한번도 못 만나 봤을 거에요'가 있는데, 바로 그 철학자 니체가 갑자기 우리 주변의 흔한 모쏠이 되는 상상을 했었다.
여하튼. 아침부터 도스토예프스키가 자랑스러워진 샌님의 하루다.
한시간 거리에 있는 서울역에서 10시 기차를 타기로 되어있었는데, 8시 30분 정도에 나섰다. 맥도날드에서 에그 맥 머핀을 먹기 위해서다. 기차 시간이 빠듯할 경우 붐비는 서울역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고도 받아가지 못할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다.
다행히 주문한 에그 맥 머핀과 아메리카노는 빨리 나왔고, 출발이 20분 가량이나 남아 아직 아무도 탑승하지 않은 기차에서 느긋하게 아침식사의 여유를 즐겼다. 구로디지털 단지에 있는 맥도날드 맥 머핀은 치즈가 녹아 있지도 않고 계란도 너무 많이 익어 한국식 맥 머핀은 이런것이구나 싶었는데, 서울역 맥 머핀은 적당히 촉촉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캘리포니아 알바니 맥 머핀과 아주 유사했다.
잘한 선택이다. 지난번은 던킨 도넛 앞에서 파는 잉글리시 머핀과 커피를 먹었는데, 역시 머핀은 맥도날드가 진리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하지만, 소세지 맥 머핀만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그 느끼한 맛이란 도저히 상쾌한 아침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데리아 패티 맛이랄까...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은 아마도 지금 있는 곳에서의 마지막 큰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저자들과 한창 디스커션을 하던 것이 몇달 전인데 아직까지 드라프트를 쓰고 있다. 이제 공저자들께서 슬슬 이 일이 엎어진것은 아닌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다. 얼른 아직 살아 있음을 first draft와 함께 증명해야 한다.
글쓰는 것에 힘을 너무 줘서 그런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아주 전형적인 흐름인 "이 일은 다짜고짜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 이런 연구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했다." 보다는 좀더 힘을 줘서 엄청 흥미로워 보이게 쓰려고 하는데 아주 쉽지 않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작성 중인데 좀처럼 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내용은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좍 꿰어서 보이기가 너무 어렵다.
이전에 악몽을 꿨던 논문은 아주 희한하게 게재가 되었다. 제출하고 3주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어느날 폰트 등의 테크니컬 이슈들을 고치라고 연락이 와서 이제 리뷰를 하기로 결정 했나 보다 하고 바로 고쳐서 냈는데 바로 다음날 게재 승인이 왔다. 아무런 레프리 코멘트도 없이. accepted as is 같긴한데 내가 그렇게 논문을 잘썼나 싶은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그 저널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논문은 공저자들이 아주 피드백을 많이 주신 논문이라 그 덕에 내용 수정 없이 바로 제재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프랑스 동료들이 정말 고맙다.
요즘은 혼자 밥먹는게 좋다. 그리고 나의 행적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도 좋다. 하루 종일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짱박혀 일하다가 땅거미가 내려 어두컴컴해질때 즈음 몰래 칼국수를 먹으러 나왔다. 칼국수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즈음 양말에 구멍이 난 것을 떠올렸다. 좌식 테이블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가게 문을 열었는데 역시나 이 세상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다.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들어가 최대한 발 뒤꿈치가 눈에 띄지 않게 앉아 칼국수를 먹었다. 맛있었다. 같이 나온 생 당근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맛있었다.
다먹고 일어날때 즈음에는 바지 뒷 자락으로 잘 가려 일어났는데 아마 보였을것이다. 좌식테이블의 특성상 발과 다른 손님의 눈높이가 그리 차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잠깐 부끄러웠다. 점점 부끄러움도 잃어가고 아저씨가 되어 간다.
제출을 앞둔 논문의 코멘트를 받고 읽어보다가 잠들었다. 꿈속에서 이 연구와 똑같은 것을 이미 몇년전에 구현했고, 게다가 내가 아는 한국 그룹에서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며 잠을 깼다.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그룹에는 그런 툴이 없다. 게다가 그런 논문이 나온적도 없다. 악몽임을 알고 다시 잠들었다.
공저자로 부터 논문에 대한 코멘트를 받으면 이상하게 열어보기 싫다. 할 일이 더 생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그래도 어제는 그래도 대충 파악은 해야 머릿속으로 생각을 좀 할 수 있으므로 자기 전에 맥주 한캔 하다가 열어 보았는데, 그래서 악몽을 꾼 것인가 싶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맥주 한캔에 숙취가 온 것인지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좋고 아주 좋지 않은 시작이었다. 어서 던져 버려야한다.
지방 도시, 산책로가 잘 갖추어진 강변 옆 아파트 하나 사고 금요일 저녁에 퇴근 길에 마트가서 장보고 집에와서 달리기 하고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영화 한편 보는 삶을 산다면 무척 행복할것 같다. 주말에는 아무도 안만나고 낮에는 집청소하고 요리해먹고 저녁에는 또 달리기 하고 맥주 마시고. 집에는 턱걸이 기구도 하나 가져다 놓고 심심할때 마다 당기면 좋겠다. 해외는 밤에 퇴근 후 달리기를 하기도, 턱걸이 기구를 설치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한국 돌아가고 싶다. 조카 보고 싶다.
요즘은 '이 논문만 쓰고 그만 쓸거야' 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한다.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들면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그런데 큰것도 아닌 것들이 찔끔찔끔 나온다. 마스터피스, 레거시. 큰건 언제나...
내가 다 자랑스러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읽고 싶다. 지난번에 한국에 다 두고 와서 읽을 게 없다. 물론 지금 있는 것과 읽는 일을 별개라는 것을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