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믿는가 (한스 큉) 중에서
우리의 생물학적 행복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경고한다. ... 인간의 행복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자주 정치적으로 오도되고, 상업적으로 악용된다. ... 자신의 감관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행복을 찾아 얻지 못한다. ... 행복한 삶과 지속적인 삶의 기쁨을 위한 마약이란 없다. 또한 행복은 수입이 늘어난다고 뜻대로 증대되지 않는다.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안심은 될지언정, 자동적으로 더 행복하게 되지는 않는다. ... 삶의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재정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태도와 활기다. 과연 (상대적으로) 행복한 삶이 확실히 존재한다: 들뜬 정조(情調)가 아니라, 불행한 상황도 관통하여 견지하는 바탕 정조로 이해되는 행복!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그러나 온갖 것과 타협하지 않는 행복! 나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거듭 새삼 경탄한다. 자녀가 매우 심한 장애가 있는데도 삶의 용기와 기쁨을 발산하는 부모들에게 찬탄한다. ... 일상의 온갖 노고를 무릎쓰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온전히 이해하며, 살아 낸 삶에 만족하고 온갖 곤경 속에서도 마음의 청명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실제 체험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슬로건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한 거야"는 아무튼 나의 삶의 원칙이 아니다. 쾌락주의적인 삶의 향유는 너무나 자주 환멸을 불러일으키며, 극히 우아하게 삶을 즐기는 사람도 조만간 '재미'가 사그라지고 모든 향락이 끝나는 상황에 빠져든다. 항구한 삶의 기쁨은 "나는 행복해"라는 문구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화해했으며 나 자신에게 만족해"라는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절정의 정조와 나락의 정조를 배제하지 않는다.
언캐니 밸리 (애나 워너) 중에서
인터넷 세계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의견과 잘못된 정보로 곪아 터지고 있었다. 나는 한꺼번에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머릿속에 타인의 말들이 둥둥 떠다녔다. 농담과 논평과 맹비난의 말들은 하나같이 어지럽고 부질없었다.
무한한 데이터를 담고 수집하도록 만들어진 플랫폼은 무한한 스크롤을 유발했다. 그 플랫폼들은 여가 시간을 온통 다른 누군가의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는 문화적 강박을 만들었다. 인터넷은 집단 성토장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의 배출구가 되었다. 소셜 플랫폼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존재했다. 고통, 기쁨, 불안, 권태의 감정이 그 안에 흘렀다.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테크 업계는 그것이 창조한 세계에 완벽히 들어맞는 소비자로 나를 바꾸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여가 활동을 즐기고 괜찮은 음식을 먹고 프라이빗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문화 활동을 풍부히 누릴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실리콘 밸리가 적절하게 조성하여 유지하고 있는 업무 문화 역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리콘 밸리에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실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라는 게 있었다. 그 안에 있으면 무한한 낙관에 사로잡혔다.
“내가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걸까? 테크 업계가 만든 서사에 내가 너무 몰입했던 거야?” … 일이 시간과 노동력을 돈과 맞바꾸는 거래라는 사실을 왜 이렇게까지 쉬쉬하는 거지? 이미 다들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재밌어서 일하는 척해야 하는 거야? 리아가 곱슬한 머리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네. 그런데 혹시 네가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하는 일이 어쩌면 평생 직업이 될 수도 있잖아.” 리아는 내 손목을 지긋이 잡고는 다시 자기 쪽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 네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도 괜찮아.”
하루는 마이크로블로그 플랫폼을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한 스타트업 창업자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읽게 되었다. 그는 7만 명의 자기 팔로워에게 책이란 자고로 짧고 굵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 세상이 간결함의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책이 짧아지면 그만큼 학습 속도가 효과적으로 높아진다. 달리 말하자면, 요즘 나오는 책들은 우리가 학습하는 속도를 *반토막*내고 있다는 (어쩌면 그보다 더 늦추고 있다는) 얘기다. 어이없지 않은가!’ 나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테크 창업자들은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음악과 책과 서브컬처를 깍아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독서라는 게 단순히 정보를 주입하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테크 업계에 팽배한 효율성 페티시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회사로 손꼽히는 곳들의 개방형 사무실에서 20대와 30대를 보내고 있는 이곳 사람들은, 모이통에서 모이를 쪼는 새처럼 공짜 시리얼을 수북이 부어 먹고 다 마신 과일맛 음료 캔을 찌그러트리며 하루하루의 지루함을 못 견뎌 했지만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실리콘 밸리에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잠재력이 인터넷 경제의 배수로와 같은 애드 테크 주위에만 고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리콘 밸리 남자들에게 없고 내게만 있는 그 무언가는 지난 4년간 내가 바꾸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테크 업계에 있으면서 나는 감정적이고 공상적이며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그래서 피곤한 나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의 감정을 일일이 신경 쓰고 진정성에 연연하는, 시장 가치랄 것이 아예 없는 나의 모습으로부터. 그러나 비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내게 있는 그러한 면들이 창업자들과 기술 전문가들이 우선시하는 가치보다 값어치 없지 않음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중에서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사회가 힘이 셀수록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적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하다. 이 세상엔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니까. 우리는 스치듯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미 많이 배웠다. 마치 스마트폰의 기사를 검색하는 손가락의 가벼움처럼. 그러나 무엇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슴 아리게도 '설레는 느낌'도 없이 살게 된다. 삶은 시들하다 (시들한 사람의 특징. "아무것도 관심 없어!") 그러나 메모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리가 없다. 메모는 절대적으로 나 자신과 상관이 있는 일이고 내가 뭔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싶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냥 살지 않는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산다. 마치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가듯이.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진다.
나는 이 사회와 닮지 않은 사람이 좋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있을 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일을 해내려는 것, 그것만큼 내 빈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도 없다. 그것만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없다.
"돈 좀 돼?" 빈 공간에 떠다니는 세 번째 에너지다. 뭐 좀 하려고 하면 묻는다. "그걸로 돈이 되겠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낸 나의 모든 책은 시장을 잘못 읽은 상품에 불과하다. 내 생각을 시장의 언어로만 인정받아야 하다니. 나는 그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돈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돈 때문에 정말 많은 성장 이야기들이 사라졌다. 돈이 안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돈이면 다 된다가 야기한 나쁜 결과를 수없이 알고 보았다. 한국 사회에 널린 수많은 죽음을 생각하면 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로 강도 높은 자본 중심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많은 좋은 것이 반자본주의적이다. 우리는 돈이 안 되는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돈이 안되는 것들의 도움으로 산다. 무화과 냄새, 라일락 꽃향기, 재잘재잘 새소리, 바다의 즐거운 에너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 그리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의 수많은 모습들.
나는 재미, 이해관계, 돈이 독재적인 힘을 갖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을 아무렇게나 채우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아서, 좋은 친구가 생기면 좋겠어서, 외롭기 싫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 작은 세계, 메모장을 가지길 바라 마지 않는다.
실용적이지 않은 외국어 공부
...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곧 무언가를 하기 위한 도구를 얻는 것이라는 실용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외국어 공부도 얼마든지 그 자체가 목표인 공부가 될 수 있다. 사실 중고등학교, 나아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모두 실용적인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실용적인 성격을 벗겨내자는 것이 목표다. 적어도 '인문'계 고등학교나 '인문'대학 등은 그렇다. 이곳에서는 공부 자체가 목적인 공부가 중심을 이룬다. 실용적인 목표에 집중하자면 문과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직접 적용할 일이 많지 않은 수학을 그렇게 오랜 기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구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음에도 그렇게 오랜 기간 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사회에 나가 외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외국어를 배운다. 이 모두가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문교육이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외국어 공부는 교양교육의 내용을 꼽을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언어 교육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실용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어나 수학과 마찬가지로 공부 자체를 위한 공부이며, 굳이 목표를 제시하자면 인간을 배우고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일 뿐이다. 인문학의 대상으로서의 외국어와 실용적인 도구로서의 외국어를 기본적인 수준에서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양쪽 다 제대로 못 챙기기 십상일 것이다.
정영목 번역 에세이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중
죄는 '죄들'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Hamartia)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범죄, 곧 절도, 폭행, 살인, 거짓말, 도적질, 간음 같은 '도적적 죄' 내지 '법률적 죄'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죄들을 죄라 하기보다 '악(kakos)' 또는 '악행(kakia)'이라 부른다. ...
이 같은 '도덕적 죄' 내지 '법률적 죄'와 달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서 그를 떠났다는 뜻에서 '종교적 죄'고, 존재물이 존재를 떠나 존재를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죄'다. 바로 이런 의미로 파울 틸리히도 <파울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죄는 죄들(sins)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죄의 개념은 단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말로 종교적 죄와 도덕적 죄를 구분했다....
정리하자면 종교적(또는 존재론적) 죄는 신에게 짓는 죄이고, 도덕적(내지 법률적) 죄는 인간에게 짓는 죄다. 전자는 '의와 죄'의 대립구도와 연관되고, 후자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와 연관된다. 다시 말해 종교적(또는 존재론적)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에 따라 '죄인'과 '의인'이 판별되고, 도덕적(또는 법률적)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에 따라 '악인'과 '선인'이 가려진다.
...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서는 죄와 악, 그 둘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고 포괄해 다양한 의미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죄와 악이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냐고? 누구든 신에게서 돌아선 '죄인'이 되면 점차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신을 향하는 '의인'이 되면 점차 선을 행하게 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죄가 악의 근원이고 의가 선의 원천이다. 악은 죄의 결과이고 선은 의의 결과다. 이것이 죄가 악과, 그리고 의가 선과 맺고 있는 관계다.
김용규 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중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칭의
...바울은 하나님이 도덕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드시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흠 있고 죄로 물든 상태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임과 동시에 죄인이다"). 이러한 역설은 루터가 왜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에 매료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루터는 바울의 은혜 신학을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데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을 값없이 그리고 이타적으로 줄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내리 은혜" 안에서 이웃을 위한 자발적 섬김이 이제는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강조는 서구의 "순수 기부 (pure gift)"라는 개념이 안착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
존 M. G. 바클레이 저 '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관한 소고' 중에서
누가 구원자인가?
사마리아인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걸 서남동 선생이나 안병무 선생은 다르게 해석해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강도 만나서 쓰러진 사람을 치료해주고, 자기는 상인이어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지만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돈도 주고 가고요. 또 사마리아인은 이민자이고 돈밖에 모르는 상인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강도 만나 쓰러진 이를 성직자들은 모른 체하고 간 반면, 이민자이자 상인인 자가 호혜의 주역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어요.
서남동 선생은 이 텍스트에서 예수가 말한 '누가 이웃이냐'라고 하는 물음 속에는 '누가 구원자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도발적이게도 구원자는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나 죽은 듯 쓰러진 사람이라고 해석하죠. 그 사마리아인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에 안 보였던 것, 격리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 있지만 우리가 관심이 없어 보지 않았던 것이 어느 날 내게 보였을 때 그가 나의 구원자라는 얘기를 하는 거에요. 누군가를 돕는 내가 구원자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도움으로써 내가 도리어 구원을 받는다는 거죠. 이게 사회적 영성에서 얘기하는 '심성의 윤리학'인데, 여기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건 내가 누구를 구호하는 행위가 아닌 거에요. 그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수행인 거죠. 이런 식의 담론적 노력, 이러한 이야기를 프로그램을 통해서 퍼뜨리고 토론하는 것이 사회적 영성 프로그램이고요...
김진호 저 "권력과 교회" 중에서
구원의 대상
우리는 예수님을 '이미'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직' 완전히 실증적인 차원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적 긴장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이 긴장에는 타종교문제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건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명시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고 신앙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상식적이라는 것은 보편적이라는 뜻인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걸 완전히 외면합니다. 장 아무개 목사가 얼마 전에 불교와 승려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는데, 교회 안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얼마든지 폄하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 매우 경솔해 보입니다.
상식의 차원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신앙적으로도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건 구원 이기주의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겠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명제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멸망당하기를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주 전체에세 활동하는 생명의 영입니다. 위의 설명을 예수 믿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오지 못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분이지요.
정용섭 저 "마가복음을 읽는다 2" 중에서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관을 가진 분들에게 위 글을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항상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자가 없다'는 교리를 생각하면 표면적으로는 상충된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어떤 율법교사와 부자 청년의 질문에,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시지 않았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를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고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를 싸구려 은혜를 만들려는 시도를 제발 그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