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사실과 가치 (2025.8.18)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교육 (2025.6.9)
오염된 법의 언어 (2025.4.21)
과학과 진실을 참칭하는 죄 (2025.3.10)
법조인은 반성하라 (2025.1.20)
배움의 즐거움을 북돋는 교육 (2024.11.26)
딥페이크 기술 오용의 맥락 (2024.10.14)
슬기로운 인턴제도 (2024.9.2)
평가 방식을 평가하자 (2024.6.24)
첨단기술과 미래 교육의 방향 (2024.5.13)
정답이 있으면 혁신은 없다 (2024.4.2)
서울의, 서울에 의한, 지방을 위한 (2024.2.7)
100세 시대의 대학 (2024.1.2)
한 명씩 치른 구두시험 (2023.11.20)
‘秘法’에는 책임이 없다 (2023.8.16)
기술 유행의 유혹에 빠진 교육 (2023.6.19)
블라인드 채용 폐지 유감 (2023.5.1)
생각보다 단순한 교육의 성공 비결 (2023. 3.20)
어설픈 '교육미신' (2023.2.6)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대학 (2022.12.26)
현장을 설득하는 교육혁신 (2022.11.28)
학생부 종합전형을 정상화하라 (2022.10.25)
연구윤리 다툼은 학계에서 (2022.9.20)
상상이 이상이 되는 무서운 현실 (2022.7.26.)
내 머릿속 샘플링의 오류 (2022.6.13.)
자기기만의 힘 (2025.9.1)
정치설교 막지 못하는 교단 총회 (2025.8.18)
'강약약강'의 사회,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025.8.4)
음모론에서 벗어나려면 (2025.7.21)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해 달라니 (2025.7.7)
일단 친구가 되자 (2025.6.23)
비상계엄에서 대선까지, 6개월의 감사제목 (2025.6.9)
시대를 배회하는 검열의 영 (2025.5.26)
세상과 나는 간 데 없고 (2025.5.12)
묻지 않아 생긴 무지 (2025.4.28)
실수할 가능성 (2025.4.14.)
인터뷰: "어느 편에 설 거냐"고 겁박하는 '무례한 기독교인들'에게 (2025.4.14.)
[10·27 집회 특별 기고] 집회 주동자들은 하나님과 한국교회·사회에 회개하라 (2024.11.5)- 국민일보 게재 거부 칼럼 ("10.27 집회에 불참한 이유")
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네이버 열린연단, 2022)
기술의 시대, 인간의 자리 (네이버 열린연단, 2018)
크리스천은 알고리즘과 편향성에 어떻게 대응하나? (CBS 광장, 보이는 라디오, 2025.3.30)
인공지능 시대의 과학기술 거버넌스 (계명 목요철학 인문포럼 제877회, 2024.11.15)
약하고 악한 사람이 같이 사는 방법 3: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우리온TV, 2004)
약하고 악한 사람이 같이 사는 방법 2: 민주주의 제도의 원리(우리온TV, 2004)
약하고 악한 사람이 같이 사는 방법 1: 민주주의 개념적 이해 (우리온TV, 2004)
ChatGPT의 여러 얼굴: 철학자의 시선 (동동마당, 2023)
인공지능의 윤리 (한국교양기초교육원, 2021)
기술의 시대, 인간의 자리(충남연구원, 2021)
대우 학술 D-Talk: 호모파베르의 미래 (대우재단, 2021)
읽어서 남 주는 서재 (한동대학교, 2020)
포스트휴먼 시대의 기독교와 기술 (열린교회, 웨스트민스터 컨퍼런스, 2019)
디지털 디스토피아: 모두와 연결되고 나를 잃다 (Seoul Digital Forum 2014) - from 11:20
Steve Jobs의 선택과 Google의 자비 (Seoul Digital Forum, 2012)
인공지능과 에너지 문제(<KPI Issue Brief> 2025.6)
'기술봉건주의'의 농노가 되지 않으려면 (<녹색평론> 190호, 2025 여름)
인공지능은 합리적인가 (<교수신문> 2025.3.19)
첨단기술시대의 전도 (<한국기독공보> 2025.3.17)
인공지능은 정치적인가(<교수신문> 2024.11.19)
<알고리즘에 갇힌 자기 계발> 리뷰 (<민음사 블로그> 2024.5.28)
초고령화 시대와 기술개발의 바람직한 미래 (<한국기독공보> 2024.5.8)
인공지능에 대한 물음에 대한 물음 (<녹색평론> 185호, 2024 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오해 (<한국기독공보>2023.12.12)
인공지능 시대의 참사람 (<참사람36.5-교보교육재단소식지> 2023.11)
후진 부모의 마음 (<한국기독공보>2023. 11.14)
강할 때 약해지기 (<한국기독공보> 2023. 10.17)
ChatGPT가 던지는 물음들 (고려대학교 <교육신문> 2023.7.19)
챗GPT의 오늘을 묻다 (<철학과 현실> 137호 2023.6.)
챗GPT의 현재와 사람이 만들어야 할 미래 (<월간목회> 2023. 5.)
기술철학과 기독교, 그리고 기술신학 (<목회와 신학> 2023.3.)
노령화 시대와 기술의 미래 (<지식의 지평> 33호 2022.10.)
지속가능한 ESG 경영 (<KPI Issue Brief> 2022.8)
기득권 상실하는 전환기의 대학…‘득실’을 따져보자 (<교수신문> 2022.4.25)
나는 이대남과 다른가? (<대학지성 In& Out> 2022.3.20)
메타버스가 놀이를 넘어선다면 (<새가정> 69호 2022.1.)
인공지능 추천 시스템과 메아리방 효과 (<목회와 신학> 2021.7.)
신기술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자율주행자동차 (<목회와 신학> 2021.5.)
기술과 노동, 그리고 안식 (<목회와 신학> 2021.4.)
'이루다' 사건으로 본 인공지능과 윤리 (<목회와 신학> 2021.3.)
재난 이후, 새로운 평형의 모색(<신앙과 삶>2020.9-10.)
기술사회 속 과제: '어떻게'에서 '무엇'을 넘어 '왜'라고 묻기(<신앙과 삶>2019.9-10)
대학생태계의 오염 원인은 '학생의 소외' (<행복한 교육> 2019.6.)
'초연결 사회'의 삶의 형식과 속도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 2019.4.30)
4차 산업혁명 시대, 인문학의 물음 (<행복한 교육>2018.11.)
알파고에 대해 묻다(<국민일보>2016.5.20.)
디지털 권력 정당성 물어라(<한겨레 신문>2015.5.13.)
첨단기술이 버린 땅, 적정기술을 입히다 (<포항공대신문 2013.11.6.>
기술을 어떻게 축복으로 공유할 것인가?(<크리스채너티 투데이 > 2011.2.24.)
경쟁력이 된 '연구진실성' (<교수신문> 2010.9.24)
보는 것과 보아야 할 것(<국민일보> 2010.2.16)
연구자 중심 연구윤리 확립 초석 되길(<교수신문> 2009.12.21)
가짜 공간? 새로운 공간!(<크리스채너티 투데이 > 2009.2.26.)
정보의 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한겨레신문>2006.8.25.)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전하라!(<한겨레신문> 2006.4.28.)
현대기술아 제발 '닦달'하지 마(<한겨레신문> 2006.4.21.)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 때문에 지구가 아파요 (2025.5.16)
딥페이크(Deepfake) 기술 음란물 소동이 가짜(Fake)가 되지 않으려면 (2024.10.14)
OpenAI의 위험한 도박 (2024.6.7)
과학처럼 깔끔하지 않은 현실: 영화 <오펜하이머> (2023.10.11)
ChatGPT를 묻다 (2023.2.15)
카카오 불통 사태 (2022.10.26)
챗봇 이루다가 무례했던 이유: 인공지능과 데이터 수집 문제 (2022.8.11)
'동물권'과 선택적 연민 사이: 말(馬)의 죽음을 보고 육식을 묻다(2022.2.10)
소형모듈원전: 이슈와 과제 (2021.11.24.)
메타버스와 한국교회 (2021.10.21.)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문제 (2021.5.7.)
데이터3법과 데이터 주권의 문제 (2020.7.31.)
신기술의 역습: 'n번방 사건이 제기하는 우리시대의 도전 (2020.4.8.)
교황청이 제안한 인공지능의 윤리 (2020.3.16.)
'타다'논란, 혁신과 편법 사이 (2020.1.9.)
인공지능 면접은 과연 공정한가? (2019.10.30.)
코오롱 생명과학의 '인보사'(세포유전자 치료제) 사태 (2019.7.24.)
월드와이드웹 30년: 하이퍼링크에서 하이퍼리드로 (2019.3.29.)
블록체인 기술과 비트코인 (2019.1.4.)
KT통신구 화재와 위험사회(Risk Society) (2018.12.4.)
어떻게 기술을 잘 사용할 것인가? (2018.11.27.)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한국교회 (2018.10.25)
기적의 소재 플라스틱 (2018.9.19.)
유전자가위기술, 배아논쟁을 넘어야 한다 (2018.8.24.)
그래서, 4차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2018.7.27.)
킬러로봇소동 (2018.5.21.)
10.27 집회에 불참한 이유 - 게재 거부로 연재 중단 - 뉴스앤조이에 실림(2024.11.5)
교단 총회, 개혁이 필요하다 (2024.10.4)
불가촉 귀족 (2024.9.6)
상식을 죽이는 법 만능주의 (2024.8.9)
국회의원 기득권도 줄여야 (2024.7.12)
'기술의 영향력'에 주목하라 (2024.6.14)
지도자의 책임, 지도자의 태도 (2024.5.16)
약자의 눈물을 닦는 교회 (2024.4.19)
선거와 하나님 나라 (2024.3.22)
민주주의의 본이 되는 교회 (2024.2.23)
준비된 리더 어떻게 키우나 (2024.1.26)
새해에는 너그럽게 (2023.12.29)
강자가 져야 할 평화의 책무 (2023.12.1)
정의로운 애도 (2023.11.3)
일상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2023.10.6)
비과학적 과학타령 (2023.9.1)
일상의 자기 검열 (2023.8.4)
킬러 문항과 정답 신화 (2023.7.7)
악을 퍼뜨리는 선정보도 (2023.6.9)
외국인 도우미와 아이 인권 의식 (2023.5.12)
기억 위한 연대, 연대 위한 기억 (2023.4.14)
사이비종교가 자라는 토양 (2023.3.17)
'갑'과 '을' 판별하기 (2023.2.17)
세대 차이를 극복하는 법 (2023.1.20)
일상 속의 전쟁 문화 (2022.12.23)
교회 안에 물음을 허하라 (2022.11.25)
불안문화 (2022.10.28)
전광훈과 진정 결별하려면 (2022. 9.29)
법의 통치와 법조인의 통치 (2022.9.2)
포항시는 포스코 지주사 전환을 몰랐는가 (2022.2.21)-게재 거부-연재종료
맥락 없는 공약, 성찰 없는 언어 (20222. 1. 17.)
새해에는 느긋하게 (2022.1.3.)
한 치의 오차도 불허하는 사회 (2021.12.20)
보기 민망한 벼랑 끝 전술 (2021.12.6.)
수능시험일에 수시 제도를 아쉬워하다 (2021.11.22)
검찰의 대선 승리를 축하합니다 (2021.11.8.)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 (2021.10.25.)
우리말로 말합시다 (2021. 10. 11.)
미움에 기반한 정치는 위험하다 (2021. 9. 27.)
휴대전화를 지켜주세요 (2021.9.13.)
환대의 선한 사슬 (2021.8. 30.)
금메달 집착과 집단주의를 극복한 올림픽 (2021.8.9.)
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 논란 (2021.7.26.)
2007년 대선의 문국현 후보 (2021.7.12.)
'공정한 과정'의 덫 (2021.6.28.)
장애인 복지, 시설 비리 근절을 넘어 탈시설로 (2021.6.14.)
리더의 나이와 실력 (2021.5.31.)
게으른 해결책, 외국인 가사도우미 (2021.5.17)
불안을 전염시키는 백신 보도 (2021.5.3.)
4.16, 아직도 흐르는 슬픔과 분노 (2021.4.19.)
카지노만도 못한 자본주의 (2021.4.5.)
제목장사는 가짜뉴스다 (2021.3.22)
보편적 대학교육을 제안함 (2021.3.8.)
진정한 검찰, 사법부 개혁 (2021.2.15.)
첨단 기술시대의 말실수 (2021.2.1.)
좋은 열매로 좋은 나무를 안다 (2021.1.18.)
유능한 법기술자가 필요하다 (2021.1.4.)
엉터리 비교의 자살골 (2020. 12. 21)
법조 정치를 우려함 (2020.12.14)
민주사회의 녹(綠), 뻔뻔함 (2020.11.23.)
SNS와 우리가 알던 민주주의 (2020.11.9.)
탈원전이 싫으면 권위주의를 버리세요 (2020.10.26)
이해(利害 )충돌의 이해(理解) (2020.10.12.)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 (2020.9.28.)
똑똑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싶다 (2020.9.14.)
전광훈과 함께 버려야 할 죄 (2020.8.31.)
의사협회, 시민을 설득하라(2020.8.17.)
민주주의의 색깔론, 멍청하거나 사악하거나(2020.8.3.)
남성 중심 문화의 극복(2020.7.20.)
생존을 위한 연대(2020.7.6.)
대학에게 주어진 방학숙제(2020.6.22.)
껍데기는 가라(2020.6.8.)
코로나 19 완치자의 복귀를 환영합니다 (2020.5.25.)
못된 사람들의 실력 타령(2020.5.11.)
유튜브 좀 그만 보세요 (2020.4.27.)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2020.4.13.)
'텃밭'에 살기 싫다(2020.3.30.)
정치하는 전문가와 언론 쓰레기(2020.3.16.)
민주주의가 전염병을 만났을 때(2020.3.2.)
떳다방 정치는 이제 그만(2020.2.17.)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기(2020.2.3.)
누구 맘대로 탄핵의 강을 건너나?(2020.1.13.)
국회의원 수는 늘리고 세비는 줄이자(2019.12.30.)
종교의 탈을 쓴 정치(2019.12.16.)
민주주의 사회의 국민 스포츠(2019.12.2.)
'법대로' 한국 사회의 불행 (2019.11.18.)
상상 속의 약자(2019.11.4.)
불안 마케팅에서 벗어나기(2019.10.21.)
상식, 초(超 )상식, 몰상식(2019.10.7.)
게으른 공평, 부지런한 공평(2019.922.)
이제 진짜 공평을 이야기하자(2019.9.9.)
홀로 불매운동(2019.8.26.)
낙관을 낙관하자(2019.8.12.)
갑질과 막말의 뿌리(2019.7.29.)
결과 집착의 문화(2019.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