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복음이 틀렸음에 대한
심층분석
다락방의 복음이 틀렸음에 대한
심층분석
출처: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19
다락방 출신 목회자가 밝히는 류광수 목사의 신학적 문제점을 올립니다. 이 원고는 이광은 목사(우리주님의교회)가 2008년에 다락방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촉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목사는 2004년까지는 평범한 다락방 목사였으나 2005년부터 다락방 신학의 문제점을 알게 되어 고통스러워하다가 2009년 류광수 목사에게 다락방 메시지 수정을 촉구하며 신학 질의를 하고 탈퇴한 목사입니다. 이 목사의 문장은 쉽고 짧고 간결합니다. 더 큰 장점은 그러면서도 다락방의 핵심적 문제점을 파고 든다는 점입니다. “다락방이 왜 이단인가?” 궁금한 독자 여러분들도 이 글을 읽다보면 다락방 이해에 큰 도움을 받으리라 사려됩니다.
다락방복음과 십자가 복음(1) - 원죄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아직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이 둘의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내용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같이 사용하는 용어 속에 담긴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입니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성경본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좀 더 정확하게 성경이 그 당시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를.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다락방 용어들 앞에 모두 다락방이란 단어를 붙여 십자가 복음과 구분을 지으세요. ‘다락방 복음’, ‘다락방 복음을 붙잡고 하는 기도’, ‘다락방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세계 다락방 복음화’···. 다락방 분들은 이 말이 약간 거슬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가르치는 내용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다락방 복음은 십자가 복음과 분명 다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다락방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복음을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모든 분들을 위해 이 글을 기록합니다. 저의 작은 글이 다락방 내의 분들에게는 다락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들의 위치를 알도록 하기 원하고, 또 한국교회 분들은 다른 것은 다 거부해도 무당 전도등 불신자 전도에 관한 몇가지 부분들은 방법적으로 유익하게 받아들이고(분명히 제한된 방법적으로만이라고 한정합니다), 함께 공유해서 한국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전반부에는 제가 확인한, 다락방이 근본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내용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로 기록할 것이고, 후반부에는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다락방에 대해서 몇가지 좋은 점을 기록할 것입니다. 앞으로 논의될 것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락방 복음은 인간의 근본문제 곧 원죄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 신분, 소속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언약을 거부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인간은 모두 불신자의 상태에 빠져있고 그 해결책이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죠. 물론 선지자와 제사장도 언급하지만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일반교회와 차별화시켜 구체적으로 사탄을 꺽으신 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락방에서 복음을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고 특히 사탄을 꺽으신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교회에는 없거나 희미한 부분으로 다락방이 다른 교회와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이 강하고,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격하고, 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에 헌신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원죄와 사탄과의 관계에 대한 차이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다락방 복음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이다. 죄, 하나님 떠남, 사탄에게 잡힘은 모두 거의 같은 동시적 사건으로 보고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탄은 원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 교인들은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전혀 모르고 있다. 심지어 죄와 사탄이 존재론적으로 같다고까지 확신 있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무지한 것이니 언급할 가치가 없고···.
다락방 목회자들도 원죄에 대한 이 정의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 만약 알면서 그렇게 가르치면 그분은 신학계에서 언급되어지는 사탄신학을 가르치는 분이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한국교회에서 사탄신학을 드러내놓고 자신 있게 가르치는 곳은 베뢰아와 그 아류들 밖에 없는데 설마 다락방 목사가 자기는 베뢰아 신학을 동의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분은 잘 모르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락방 목사는 원죄가 인간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교인들에게는 원죄 속에 사탄을 포함시켜 가르치고 설명하고 그렇게 믿도록 가르치지만 혹시 신학적 질문이 들어오면 죄와 사탄은 다르다고 말한다. 물론 죄는 비인격적이고 사탄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원죄에 빠진 인간은 인격적 존재 사탄에게 결정적으로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원죄 속에 사탄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알고 있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원죄를 해결하는데 사탄을 직접적으로 꺽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제 곧 원죄가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것이라면 해결책은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을 꺽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탄을 꺽어야 죄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논리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다락방 복음의 핵심이 된다.
2. 십자가 복음
성경에서, 특히 바울이 설명하는 복음에서 원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책(죄값)과 그 후 모든 인류가 갖고 태어나게 된 부패한 죄의 본성이다. 여기서 원죄의 정의를 사탄까지 확대하지 않고 인간 개인에게 한정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원죄란 아담의 죄 값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법적으로 죄인된 것과 그 결과 지금 내 자신에게 아담의 부패한 죄의 본성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원죄는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아담이 지은 범죄로 인해 내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인된 법적인 것이며 이것은 내가 지금 실감할 수 없는 아담의 원죄이다. 대부분의 일반 신자들은 원죄를 이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다락방은 여기에 사탄을 첨가해서 좀 더 확실한 것처럼, 일반인들이 듣기에 생생하게 설명한다.
둘째는, 아담의 원죄로 인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원죄인데, 그것은 우리가 범죄한 아담의 속성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원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즉 원죄는 아담으로 인해 얻게 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의 역할은 원죄를 짓도록 아담을 속였고, 또 지금 원죄에 빠져있는 인간을 유혹함으로 부패한 죄의 본성을 자극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지으면 우리를 참소하는 존재이다.
3. 번거롭지만 다시한 번 요점을 정리해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없는 문제에 대해서 다락방 복음은 한가지로 본다. 즉 사탄을 포함한 원죄 한가지이다(=의미론적으로 사탄은 원죄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락방 복음은 사탄을 꺽는 것이 곧 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내 개인의 부패한 죄의 본성에 대한 내용이 없으니 모든 책임은 사탄에게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사탄만 결박하면 된다. 사탄과 원죄의 일원론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이런 신앙생활로 귀결된다.
십자가 복음은 두가지로 본다. 즉 인간 개인에게 내재된 부패한 본성인 원죄와 그것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탄 두가지이다(=의미론적으로 사탄은 원죄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은, 내 안에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적 요구와 싸우는 것과, 또 내 밖에서 죄의 본성을 자극하며 유혹하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싸운다. 칭의와 성화를 통해서···. 이것이 영적싸움이다.(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인도, 임마누엘)
그렇다면 여기서 다락방 분들의 사탄과의 영적싸움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겠고 로마서와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 - 원죄에 대한 개념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2) - 영적 싸움에 대하여
원죄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바로 다락방에서 말하는 복음 즉 그리스도의 의미와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루는 핵심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류광수 목사가 말하는 다락방 복음이 아니라 바울과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복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오해 없으시길...
저는 다락방 교인들중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락방 교회를 다니는 분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에서 아예 십자가 복음은 틀렸고 다락방 복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저도 순수하게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다락방이 복음 설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큰 위험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다락방 교인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담임목사님에게 가서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과 같은지 다른지 물어보라는 말입니다. 다락방 목사님들은 분명히 말할 겁니다. "우리가 당연히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당연히 십자가 복음을 믿고 있다고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가르치는 객관적인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가르침으로 볼때, 다락방 복음은 십자가 복음과 엄연하게 다릅니다. 원죄의 개념, 영적싸움, 그리스도의 삼중직, 칭의와 성화의 성도의 삶···. 기타 여러가지 부분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온갖 말도 되지 않는 그런 행동들이 목사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한국교회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배운 복음을 사랑하는 다락방의 순수한 분들은
다락방에서 불거져 나오는 이상한 스캔들 소문을 들을때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아니면 단순히 그들이 영적싸움에 져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십자가 복음아닌 사탄신학으로 흐른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이 십자가 대속 없이 사탄꺽는 복음만 지금까지 계속 배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각설하고... 다락방복음은 인간의 원죄의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것처럼 말하고 또 다락방복음을 옹호하는 교인들도 그렇게 확신하고, 심지어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원죄의 개념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 정도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을 깊이 읽고 배운 분들은 아담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하고 자기 주인되려 한 교만으로 인해, 인간이 법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없는 영원한 죄인되었고 또 실제적으로는 아담의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진 것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은 분들을 제외하고 일반 신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무슨 엄청난 짓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토록 벌하신단 말인가?” 또 “아담이 지은 죄를 내가 왜 형벌 받아야 하는가?” 등등 직접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 궁금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지만 누가 질문하면 확신이 없어 대답하지 못하는 상태란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을, 자신은 그렇게 믿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락방이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한국적 상황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무속과 굿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들을 제시하면, 일반신자들은 지금까지 막연하게 배웠던 원죄의 의미를 분명하게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이때, “바로 그 사탄 꺾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만나게 하신 그리스도” 하면 일반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확실히 이해된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기가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복음을 깨달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락방의 그리스도와 성경의 그리스도가 조금 다릅니다. 다락방에서 아무리 부인해도 그 강조점과 무게 중심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것은 다음 번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 복음과 다락방 복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모든 인간이 사탄에게 잡혔다”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 말은 원죄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다락방식(?)으로 반드시 사탄을 직접적으로 꺾어야만 하는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1. 다락방 복음
인간은, 어린 아이가 집을 나와 길을 잃어버린 영적 고아 거지와 같다. 그정도가 아니라 나쁜 인신 매매범에게 잡혀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스스로 집을 찾아갈 수 없다. 하나님 만나는 길을 모를 뿐만 아니라 사탄에게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을 먼저 꺾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탄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 그 근거 구절들은 간략하게 적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들은 사탄에게 잡혀있다.
요8:44 너희 아비 마귀, 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 고후4:4 이세상 신, 요16:11 세상 임금...
(2)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전도할 때마다 사탄세력을 꺾었다.
박수무당 엘루마 바예수(행13장),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행16장) 에베소 마술하던 자들(행19장)
(3) 바울서신과 일반서신을 보면 영적싸움을 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후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하려 함이라,
엡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6:10-20 우리의 씨름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벧후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며
히2:14-15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2. 십자가 복음
(1) 모든 인간이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다락방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탄이 하나님처럼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탄은 형벌 받을 피조물이지 하나님처럼 보좌에 앉아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심판받을 범죄한 천사, 영적 피조물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사탄의 나라여서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김정일 때문에 북한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은 헬라 이원론의 영향받은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처럼 사탄을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 것으로 틀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다 따라서 이 세상 권세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다. 이 세상이 사탄의 나라요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볼 때, 인간들이 자기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의미이지 이 세상은 하나님이 손 대실 수 없는 사탄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2) 그러면 사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 고후4:4 이세상 신, 요16:11 세상 임금... )
인간 속에 있는 범죄한 아담의 속성인 부패한 죄의 본성(원죄) 때문에 인간은 자범죄(죄의 행위들)를 지을 수밖에 없고 사탄은 이 원죄와 자범죄를 근거로 하나님께 인간을 자기와 함께 심판해야 한다고 참소한다. 사탄은 인간과 함께 멸망 받으려는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없고 필연적으로 죄를 지음으로 사탄과 함께 멸망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부패한 본성(원죄) 때문에 사탄의 공격(위협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자범죄)를 지음으로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죄를 짓고 싶지 않아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마약중독자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는 절대 마약을 복용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덧 마약 판매상 앞에 가서 마약을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것같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탄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죄라는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께는 형벌을 주어야 한다고 참소하고···. 인간에게는 너는 죄의 종임으로 나와 함께 멸망받아야 한다고 참소하고···. 인간을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만드는데 그 손에서 자기 힘으로 빠져나갈 자가 아무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일차적 의미이다. 이차적 의미로 직접적인 귀신들린자 들에 대해서는 글자 그대로 당연한 의미다.
(3) 요8:44 너희 아비 마귀라는 구절은 무슨 의미인가?
이 구절 의미는 본문 앞뒤 문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모든 진리의 기사와 표적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유대인 바리세인들에 대해서 일컫는 말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처럼 거짓말 하고 진리를 믿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아, 너희는 진리를 보고도 거짓말하고 진리를 믿지 않는다. 마치 거짓의 아비 마귀 처럼···”라고 일차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이 구절은 바리세인들이 거짓말하며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부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거짓의 아비 마귀를 예로 든 것뿐이지 모든 사람이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락방처럼 모든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식의 극단적인 의미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신자의 아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4) 바울이 전도할 때마다 흑암세력을 꺾은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갔지 흑암세력을 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같이 사탄이 직접적으로 꺽이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과정 가운데 사탄의 역사가 방해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당연한 현상이다. 바울은 온 세상에 꽉 차있는 귀신을 제거하기 위해 찾아다니고 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갔는데 그 복음을 사탄이 방해할 때 흑암세력을 꺽은 것이다.
사도행전은 갈릴리 동네에서 시작된 예수를 따르던 작은 무리들의 사상과 공동체가 어떻게 로마와 마게도냐, 소아시아까지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온 세상에 전파되었는가를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설명할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한마디로 복음과 교회의 확산을 중심으로 객관적 사건을 나열한 역사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기록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바울이 가르친 복음, 즉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내용의 의미는 다른 바울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잘 나와 있다.
특히 로마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다락방 복음처럼 사탄을 꺾은 왕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이의를 달지 말라.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연하다. 2천년 기독교 역사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증거한 복음이 바로 이것이었고 이 복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이 부분은 다음번 그리스도의 삼중직에서 자세히 언급하겠다.
(5) 신약성경에 나타난 영적싸움과 관계된 구절들은
영적싸움을 마치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귀신과의 싸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락방이 영적싸움부분을 언급한 것은 한국교회를 위해 참 잘한 일이지만 그것을 다락방식으로 제한, 왜곡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박수무당을 꺾고, 귀신들린 여종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이들은 모두 귀신에 직접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다락방 처럼 직접 귀신과 싸우는 것이 영적싸움이다. 그러나 다락방의 문제점은 이런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 즉 직접 귀신 들린 사람들을 전도하는 구절들을 모든 일반인에게 적용했다는 데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귀신들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인되어 사탄과 함께 멸망받을 존재라고 하지...
그러나 이들 중 귀신들린 특별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귀신들린 사람은 그 의식이 사탄에게 완전 잡혀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의식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행동은 그가 하지만 실제는 사탄(귀신)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행동의 책임은 없다. 사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완전 귀신에게 잡힌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전도할 때는 다락방 식으로 직접 귀신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과 판단의 주체인 내가 있다. 판단도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위협하고, 광명의 천사처럼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만, 그것에 굴복해서 죄를 짓는 것은 사탄이 아니고 바로 “나”이므로 그 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성경은 이런 일반적인 인간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교회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에 위치한 아주 유력한 교회였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을 사역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중요한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온 후 고린도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다. 이런 문제에 대한 내용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고린도 전서 후서이다. 고린도교회에는 큰 문제가 여러 개가 생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교회내의 성도간의 파당문제(1장), 음란문제(5장) 소송문제(6장), 결혼문제(7장) 우상제물문제(8-10장), 예배 때 무질서 문제(11장) 은사문제(12-14장).
이런 문제를 접한 바울의 대답은 다락방 식으로 분열의 영을 꺾어라, 음란의 영을 꺾어라, 소송의 영, 무질서의 영...이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복음을 위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서로 용납하고... 라고 말한다. 만약 바울이 영적싸움을 귀신들림과 직접 싸우는 것으로 정의했다면 신약성경 모든 서신서의 내용은 필요없다. 왜냐하면 문제를 만날 때마다 다른 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항상 꺾어라. 쉬지 말고 꺾어라. 범사에 꺾어라.”
신약성경의 영적싸움 부분들은 그 앞에 기록된 성도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과 신약성경기자들은 주로 전반부는 십자가 대속과 예수의 주되심을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확인시키고, 그 다음 그 복음을 받은 성도의 실제적인 삶에 관한 부분을 언급한 후, 그 삶의 현장에서 나 자신의 죄의 본성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사탄과의 영적싸움임을 일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다락방식의 영적싸움 구절들로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설명과 그 복음을 가진 성도들의 실제 삶에 관한 부분으로 꽉 차있다. 로마서에는 맨 마지막에 “주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시리라”(롬16:19)라는 단 한구절만 있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성도의 치열한 성화의 삶이 바로 영적싸움임을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다락방식 영적싸움도 성경이 언급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귀신들린 사람에 한해서 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영적싸움을 하신 사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에게 영적싸움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앞에서 나온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귀신들린 사람을 제외하고 귀신과 사탄의 세력을 꺾은 일이 없다. 풍랑이는 파도를 보고 귀신을 꺾으셨는가? 예수님이 일반적인 병고치실 때 귀신을 꺾으셨는가? 제자들에게 일단 복음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사람의 귀신을 꺾으라고 가르치셨는가? 삭개오에게 복음전할 때 귀신에 관해서 말씀하셨는가? 바디매오, 간음한 여인···. 예수님의 기적중 25%가 귀신과 직접 연관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귀신에게 직접적으로 잡힌 인격체 사람에 한해서였다.
이 부분은 간단히 이 정도로 하고, 후에 언급하게 될 성도의 신앙생활 부분에 가서 로마서를 중심으로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다음번에는 다락방 복음의 핵심중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2) - 영적싸움에 대하여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3) -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다락방에서 이 구절을 얼마나 자주 설교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말 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모든 축복을 부으셨을 정도로 귀중히 여기셨던 단어 “그리스도”. 수 천년 구약 모든 선지자들이 기대했던 히브리 단어로 “메시아”. 그 예언을 신약에 성취한 단어 헬라어로 “그리스도”. 바울과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 메시지 “예수는 그리스도”(행 17:3). 이 그리스도를 전 세계 어느 교회도 깨닫지 못했는데 다락방이 2천년 만에 회복했다는 겁니다. 다락방의 자부심 중의 자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또 하나의 자부심, 다락방 20가지 전략은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듯 다락방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말하고 강조하는 단체인 것 같습니다. 설교의 제목이나 메시지에 나오는 그리스도 단어 수 등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나, 설교를 듣는 성도나 모두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전하고 있고,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렘넌트, RUTC가 더 중요하지만... 참 이상하죠... 강조점이 그리스도에서 언제 RUTC 건물이 되어버렸는지... 만약 류목사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하면 다락방을 떠나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러한 순수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다락방을 이단시비 속에서도 여전히 결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다락방 복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혀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예수님이 바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일을 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꺾는 참 왕으로(요일 3:8), 죄 문제를 해결하신 참 제사장으로(롬 8:2),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신 참 선지자(요 14:6)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 일은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결하셨다. 다락방은 그리스도를 전할 때 반드시 왕 선지자 제사장(이하 삼중직)으로 설명한다. 일반교회 목사가 그리스도 설명할 때 삼중직이 나오지 않으면 다락방 사람들은 “저 목사는 그리스도 못 깨달았다”고 쉽게 말하고 혹 우연의 일치로 그리스도를 삼중직으로 설명하면 “다락방 메시지를 참고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다락방은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한 애착과 확신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락방처럼 삼중직으로 설명되어야만 하는가? 일반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다락방식으로 선지자·제사장·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잘못 가르치는 것인가? 많은 다락방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이 이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다락방처럼 삼중직의 의미로 고백한 것이고 바울이 마게도냐와 소아시아를 다니며 전한 복음의 내용도 바로 예수가 선지자·제사장·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설명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2. 십자가 복음
(1) 그리스도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일컬을 때 사용된 칭호이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 단어를 이해하려면 초대교회 당시의 배경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바울과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로 설명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일한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선언하시고(창 12장) 아브라함 자손이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과 그 자손들이 기거하게 될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창 15장)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된 증표로 할례를 주셨다(창 17장).
참고로, 창15장은 아브라함이 제사 잘못지내 벌 받는 장면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쪼갠 짐승사이를 지나며 자신이 앞 구절에서 하신 말씀 곧 자손의 번성과 그들이 기거하게 될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언약을 맺는 장면이다. 짐승을 쪼개는 것은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의미로 당시 고대 근동국가의 언약체결 방식이었다.
하나님은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그 약속대로 모세를 통해서 건져내셨고 그 언약이 성취되게 하셨다. 이러한 출애굽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민족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얻게 하셨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왕 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려던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주신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기반이 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삼하 7:13-16)
첫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7:13).
둘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실 것이다(7:14).
셋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다(7:16).
나단의 예언은 가깝게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취되어졌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가장 크게 확대시켰다. 심지어 먼 아프리카의 시바여왕이 예물을 들고 찾아올 정도로 강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 왕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졌다(시편 2편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왕의 등극식 때 부르는 노래이다.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신약교회는 시편 2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해주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을 아들로 삼으셔서 직접 다스려 주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두 나라로 분열되어 계속 몰락의 길을 걷고 결국에는 앗수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혼란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다윗 왕에게 주셨던 예언은 어떻게 된 것인가?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은 모두 무너졌고 하나님의 아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다윗의 위는 견고하게 되기는 커녕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완전 망해버렸다. 이 엄청난 신학적 혼란은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것을 회개하는 율법 회복운동이 일어나게 만들고, 다시 한 번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사상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다시 메시야 곧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 왕을 보내주시고 우리 민족을 전 세계의 최고 민족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다.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나난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곧 다윗 왕의 영광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 왕을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였다. 삼하 1:14을 보면 다윗이 사울왕의 죽은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아말렉 소년을 책망하는 구절이 나온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한글성경에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메시아(messiah) 이다. 즉 사울 왕이 바로 메시아로 기록되어졌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 이 구절을 보면 역시 “주의 그리스도를”(ton criston kuriou) 죽였다고 나온다. 즉 유대인들은 사울 왕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아무 이상함도 없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우리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의 본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의미 보다는 어떤 직분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 정도의 의미였다.
한 예로 AD 132년 유대 최고 랍비 아키바가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출하려던 민족적 영웅 바르 코흐바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공식 선포했다(김세윤, 바울복음의 기원 P82).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인식했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그리스도에 용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는 유대인들에게, 소망은 오직 하나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광을 회복해줄 하나님이 보낸 사람, 위대한 지도자 곧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셔서 말씀과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니 유대인들에게 큰 기대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례요한이 앞서 와서 예수를 증거하였으니 말이다. 드디어 우리를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이방인 위에 뛰어나게 하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오셨구나.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독립 같은 영웅적인 일을 하지 않으시고 죄사함, 속죄, 교회, 같은 메시지만 하시다가 대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왜 십자가에 죽이려고 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죄인을 죽일 사형법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스데반이 돌로 쳐서 죽일 때 그들은 로마에 의해 아무런 제제나 거리낌을 받지 않았다. 이스라엘 종교법에 의해 얼마든지 사형시킬 수 있다.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종교법으로 예수를 돌로쳐서 처형하면 그 제자들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멈추지 않고 더욱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다. 즉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다 핍박받은 것처럼 예수도 핍박받아 죽었다. 이것만 봐도 예수는 올바른 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 분을 죽인 자들은···.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율법을 사용하기로 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21:23 말씀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여야 제자들이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저주받아 죽은 자로 알고 그 가르침을 포기하리라.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던 내용이었다.
복음서에 많은 구절이 있지만 간단하게 몇 구절만,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하심이라.
마26:28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종교지도자들의 의도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에게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율법에 의하며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가 아닌가?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은 자가 어떻게 우리 메시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크게 낙심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육체가 죽지 않고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개인적 소망을 주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 부활은 예수께서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분이 아니요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으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받으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내내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예언하셨던 것이다.
예수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 제자들은 지나간 예수의 모든 메시지가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예수는 단순히 우리를 로마의 속국에서 건져내줄 육신적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몸을 하나님 앞에 속죄제물로 드리심으로 전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 자녀 만드시는 분으로 올바로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교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의미적으로 확연하게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는 한 민족을 구원하는 육신적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아담의 원죄로 인해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며 사탄의 공격과 참소당하는 인간을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미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미래에 얻을 구원을 축복을 불완전하지만 선취적으로 맛보게 하시고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아담으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부분적으로 나마 다시 회복시키시다가 재림의 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전 회복시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 전부가 예언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미였음을 초대교회가 구약성경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확인하게 된 사실이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예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초대교회는 그 이후부터 유대인들이 육신적으로 자신들에게만 사용했던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 성전, 아브라함 자손 등 모두를 영적으로 확대 해석해서 또 이것이 그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또 그 구절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본래적 의미이다라고 자신있게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십자가로 거듭난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이 사실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었다.
구약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의 육신적 회복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는 육신적 지도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가 하나님의 속죄제물로 보내신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예수의 부활이 이 사실을 증거하지 않느냐고 헬라지방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바로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시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이 내용을 밝히 증거한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17:2)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바울이 한 이 메시지는, 구약 성경에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것이다. 부활은 예수가 자기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결정적인 증거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가는 곳 마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증거하고 그 확고한 증거로 예수 부활을 제시하였다. 예수 부활은 실제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증거를 반박하지 못했고 기독교 복음은 거침없이 확산되어져 나갔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에 관한 구절로 가득 차있다. 몇 구절만 간단히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증명하기 위하여 더 많은 구절이 필요한가? 정말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죄사함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초대교회의 증거했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그리스도는 말을 타고 정복자로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육신적으로 구원해줄 유대인만을 위한 위대한 인간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와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나님을 거부하여 죄와 사망에게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다시 그들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추가해보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란 의미로 쓸 때는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신약성경과 바울서신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반드시 십자가 사건과 직접 연관되어 사용된다.
(2) 그렇다면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삼중직으로 설명하는 것은 칼빈에 의해 최종 정립된 개혁교회 신학의 귀중한 전통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한 최초 언급은 AD 4세기경 유세비우스(260-340)에 의해서였고 이것을 오늘의 삼중직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16세기의 요한 칼빈(1509-1564)이다. 개혁교회의 삼중직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그리스도를 예표한 선지자, 제사장, 왕과 비교하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을 잠시 참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선지자 -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의 선지적 사역을 땅 위에서 계속하신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의 기억력을 보조하시며 그들에게 새 진리를 가르치시며 그들을 모든 진리의 이해에서 인도하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에 의하여 풍부케 하신 것이었다(요14:26,16:7-15). 그 약속이 성취된 오순절 날부터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큰 선지자의 활동을 여러 모양으로 행하셨으니, 성경의 영감에서, 사도들과 교역자들의 전도에서, 교회를 인도하여 진리의 기둥과 터로 만드심에서, 진리를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에 유효하게 만드심에서 그리하셨다.
제사장 - 하늘 위의 그리스도는 또한 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그의 능동적 수난이 종결되었다는 의미의 표현이요, 그의 제사적 사역에 그 종점에 도달하였다 하심이 아니었다. 그의 제사적 사역은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왕 -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위를 자주 그의 왕정과 연결시켜 말한다. 그는 그의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통치하고 보호하시며 그의 임명하신 직원들을 통하여 이것을 관리하신다. 천상만군은 그의 휘하에 있으니 천사들은 그의 사자들로서 성도들에게 그의 주시는 복을 전달하며 그들을 주위의 위험에 대항하여 보호하기로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는 자연의 세력 위에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권력 위에 권위를 행사하시어 통치하시기를 그가 최종원수를 굴복시킬 때까지 하실 것이다.
개혁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한가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세가지 설명이다. 즉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성령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선지자),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계신다(제사장).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만왕의 왕이 되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왕). 이 얼마나 정확하고 귀중한 설명인가?
십자가 사건이 먼저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십자가 사건이 본질이고 그 십자가 사건을 세가지 방향으로 적용해서 설명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삼중직의 의미이다. 다락방처럼 삼중직을 먼저 설명하고 그것이 초대교회가 붙잡았던 그리스도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은 벌써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아무리 교회 역사를 찾아보아도 최초 언급은, 그것도 불완전한 삼중직으로 AD 4세기에 가서야 겨우 나오는데(그 이전에는 전혀 없다) 초대교회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처럼 삼중직으로 설명했다는 것은 큰 오해이다.
(3) 그렇다면 다락방의 삼중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다락방의 삼중직은 제사장 부분은 같지만 선지자와 왕직에 관한 설명은 개혁신학과 조금 다르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를 개혁신학과 조금 다르게 하나님 만나는 길되신 선지자, 죄문제 해결하신 제사장 사탄의 세력을 꺽으신 왕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를 틀렸다고 할 마음은 없다. 이것은 불신자 전도 현장에서 개인적인 적용으로 볼 때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절한 설명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단 불신자 전도 상황일 때라는 단서가 붙을 경우이다)
책을 읽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한 푼 아껴가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한국 일반인들을 전도할 때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 보다는 하나님 만나게 하는 선지자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 지금 당장 귀신에 잡혀 고통당하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온 세상을 통치하는 천년왕국의 왕보다는 당신을 괴롭히는 사탄을 꺽은 왕이 훨씬 실감나는 설명인 것 같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대속이 주된 강조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괴롭히는 사탄의 세력을 꺽으셨다. 십자가 보혈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 이런 전도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분명 다락방의 삼중직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강조하는 내용 위에 불신자 전도시 개인에 따라 적용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유익을 주는 전도의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에 대한 내용은 없고 혹 십자가를 언급하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단어 수준이라면, 다락방의 삼중직은 과격하게 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언급한 다른 복음(갈1:6-9)에 해당될 수도 있다.
갈라디아 교회 이단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엄청난 괴물이 아니다. 초대교회 내의 유력한 히브리파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믿되 할례도 행하고 율법을 조금 추가하자는 정도의 것이다. 바울은 이 작은 것을 십자가를 거부하는 저주 받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은 전혀 강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오늘 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다락방 사람들은 자기는 제사장 직을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를 설명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이야기해보자. 속죄사역이 사탄을 꺽은 것인가? 아니면 왕직을 설명하기 위한 속죄사역인가?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계신가? 십자가의 속죄사역이 사탄을 꺽는 왕직의 근거가 된다고 철저하게 가르치고 계신가? 불신자에게 사탄문제가 해결되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피맺히게 설명하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다락방 복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십자가 복음을 믿는 분이다. 우리 같이 힘을 합쳐, 다락방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사랑하는 다락방의 진실된 모든 분들께 부탁드린다. 불신자 전도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특히 왕직을 강조하되 십자가 대속에 철저히 의지해서 가르쳐달라고···. 그래야만 다락방 복음이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전도내용이 될 것이고,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다락방 복음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저주받을 다른 복음으로 확인 될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다락방 핵심 표어인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3) -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하여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4) -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 다락방이 표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보면 잘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일반교인들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다락방 메시지에 대해서 잘 표현한 글이 바로 과유불급이란 한자성어입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그것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좋은 도구가 되지만, 다락방은 그것만 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 다락방의 모든 메시지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바탕 위에 불신자 전도현장에서 전도 대상자에 따라서(반드시 이 부분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지나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하면 어느 한도까지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 모든 것에 적용하거나 심지어 성경까지 해석하기 시작하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다락방 메시지란 초창기 다락방에서 정리해놓은 전도 메시지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몇 가지만 주의하고 전도현장에서 대상자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 실보다는 득이 많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즘 다락방은 나가도 너무 멀리 나간 느낌입니다.
지금 다락방 메시지는 전도현장을 위해 잘 정리해놓은 초창기 메시지보다 “류 목사 강단메시지”로 바뀌었습니다. 류 목사 설교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 그 본문을 기록한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자기가 확신하는 메시지를 그 성경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을 혹시나 알고 계신지요? 류 목사가 자기 확신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 확신이 성경에 비추어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류목사는 “성경의 수종자”가 아니라 “성경의 사용자”입니다. 그가 “성경의 수종자”가 아니고 “성경의 사용자”인 대표적인 증거가 사도행전 다락방 전도방법론입니다(언젠가 사도행전의 20가지 다락방 전도 방법론에 관해서도 언급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대도 다락방 목사들과 성도들이 성경은 전혀 읽지 않고 매주일 나오는 “류목사 메시지”만 바라봅니다.
성경이 “류 목사 메시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류목사 메시지”가 성경을 해석합니다. 이제는 아예, 성경은 없고 그나마 초창기 “다락방 메시지”도 아닌 “류목사 메시지”가 성경을 대신합니다. 과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다락방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다락방 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락방 교회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실상은 그렇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시는 진실된 다락방 분들께 한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다락방 메시지보다 더 사랑하며 읽고 묵상하고 계십니까? 다락방이 말하는 렘넌트 7명 이외에, 성경의 더 풍성한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기도수첩과 류목사 메시지보다 성경 말씀 자체를 더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다락방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 복음에 가까운 분입니다. 당신도 언젠가 우리와 같이 손을 잡고 십자가 복음을 위해 기도할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락방, 성경의 수종자인가 성경의 사용자인가”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이제 다락방 표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에 대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4) -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에 관하여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5) - 복음이란 무엇인가?
다락방 분들은 참 답답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강조하고 복음, 전도만 말하는 다락방을 자꾸 이단이라고 공격하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다락방의 순수한 분들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류 목사는 그리스도만 말하고 있고(평신도 눈으로 볼 때 말입니다) 또 자신도 순수하게 그리스도와 전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발이 생깁니다. “그래! 너희는 그리스도 없는 ‘정통’해라. 나는 그리스도 말하는 ‘이단’하겠다.”
믿음은 “얼마나 확신하는가!” 보다도 “무엇을 믿는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락방 분들의 믿음의 순수성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순수성에 집중하시기 전에,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검토해보셨는지요. 세상에는 확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신념을 위해 분신자살하는 사람을 보셨는지요? 그러나 분신자살할 만한 확신도 그가 옳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의 강도가 옳은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번만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검토해 주십시오. 다락방 복음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복음인지를...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확연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1. 다락방 복음
다락방은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다섯 가지를 “다락방 기본메시지”라고 하고 다락방 1차 합숙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1) 세상이 망하는 이유 - 불신자 여섯 가지 상태
(2) 하나님 만나는 길 - 그리스도
(3) 하나님 만난 자가 받은 축복 - 신자의 일곱 가지 축복
(4) 세계 살리는 방법 - 성경적 전도 방법
(5) 기도의 비밀
이 내용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혀 영적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다(불신자상태).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그리스도 삼중직).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마귀자녀에서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신자의 축복).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에게 세계 살리는 방법을 주셨다(성경적 전도방법). 이 모든 것을 누리는 비밀을 주셨다(기도의 비밀).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혀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사탄을 꺾을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다락방 복음은 아주 간단하다. 결국 사탄 꺾는 그리스도이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설명을 하거나, 현장을 가지고 간증을 해도 결국 다락방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알고 확신하는 정도에 따라 복음 깨달은 유무가 결정된다. 이것이 다락방 복음이고 이것을 전하는 것이 다락방 전도이다.
그러면 성경은 복음을 사탄 꺾는 그리스도로 설명하는가?
2. 십자가 복음
“십자가 복음”이란 이상한 용어다. 마치 “머리깍는 이발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발소는 당연히 머리를 깎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그 앞에 머리를 깎는다는 말을 넣은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지금까지 한국교회 아니 전세계교회 내에서 복음이란 단어는 당연히 십자가 대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복음을 다르게 설명하고 오히려 한국교회가 복음을 못 깨달았다고 공격하기에... 같은 용어에서 오는 혼란을 피하고 성도들의 혼동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음 앞에 십자가를 넣음으로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복음을 설명하기위해 죄와 사망, 그리고 사탄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해보자.
(1) 사망 -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형벌의 상태
모든 인간은 지금 “정녕 죽으리라”는 사망의 형벌에 처해 있다.(창2:17) 일반적 용어로 사망이란 인간의 육체적 죽음 정도를 의미하지만 성경은 좀 더 넓은 의미로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고통 가운데 살아가다 육체적 죽음과 그 후의 지옥형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잠시 육체의 호흡이 살아있지만 지금 지옥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탈출구는 없다. 이것은 시간만 잠시 유예되어있을 뿐이지 형벌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이미 끝 난 것이다. 지옥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집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70-80년간 사는 동안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 계속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고난은 우리가 받고 있는 사망 형벌의 증상이요. 최종적인 육체의 죽음은 사망이 우리를 완전히 장악한 모습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구원(하나님과의 관계회복, 하나님의 자녀됨)은 전혀 불가능하다.
(2) 죄 -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다 준 원인(롬6:23)
하나님을 거부한 아담의 범죄행위가 바로 이러한 사망을 가져다 주었다. 죄란 무엇인가? 죄는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겠다고 한 것이다.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며 하나님을 거부한 첫 범죄행위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법적인 죄의 책임(죄값)과 그것으로 인해 갖게 된 아담의 부패한 본성에 오염되어 실제적인 죄인이 되었다. 이것이 원죄다. 원죄의 죄책은 인간이 법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만들고, 부패한 본성은 죄의 형벌을 받게 만든다.
(3) 사탄 - 죄를 통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
죄는 인간이 사탄에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은 것이다. 그런데 왜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는가? 예수님은 사탄과 물리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셨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 왜 사탄이 예수 앞에 패배하게 되었는가?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 위치에서 인간을 종으로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지정의가 모두 사탄에게 사로잡힌 일명 귀신들린 사람들이다.
사탄은 형벌 받을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사망의 왕이 아니라 이미 사망의 심판받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탄에게 지배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사탄과 함께 당하는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다. 죄란 바로 첫사람 아담의 법적인 죄책과 지금 내속에 있는 아담의 부패한 죄성 그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자. 사탄은 반역행위를 한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있다. 인간은 사탄의 행위를 따라 해서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사탄은 인간을 감옥에서 잡고 있고 내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형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사탄은 “큰 죄수”이고 인간은 “작은 죄수”이다. 인간은 사탄을 싫어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인간은 감옥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 “큰 죄수” 사탄이 “작은 죄수” 인간에게 너도 나와 똑같이 심판받아야 한다라고 참소한다.
여기서 인간은 사탄에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두 가지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이 사탄과 똑같은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공의 앞에 인간을 풀어줄 수 없는 법적인 문제이고 둘째, 인간이 지금도 여전히 사탄의 속성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탄의 종노릇 하는 것이고, 사탄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사탄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사탄과 함께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사탄이 놓아주지 않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죄는 아담의 법적인 죄책과 지금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과 그 열매이다.
중요한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사탄은 “이 세상 신”(요16:11)과 “이 세상 임금”(고후4:4)으로 불린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도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탄이 이 사악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상 p.355).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사탄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이다. 죄는(심지어 신자들의 경우에도) 우리의 삶 안에서 마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상 p.635).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의 나라의 토대 즉 죄의 토대가 된다(칼빈, 기독교강요 상 P451).
사도 자신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6:12)라고 한 말대로 행하라. 그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분의 지체 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칼빈, 기독교강요 중 p.95).
(4)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사탄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다. 인간은 죄만 없으면 사탄과 결별할 수 있고, 지옥형벌에 대한 사망의 공포와 고통을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형벌로 사탄과 함께 사망의 고통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5) 십자가 - 내가 형벌 받아야할 첫사람 아담의 법적인 죄책을 제거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딛 2: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계 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사망의 형벌이 이미 법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아담의 모든 죄책이 해결된다. 이 구원은 바로 단회성, 한순간에 이루어지며 불변하다(칭의).
(6) 십자가 - 구원받은 내게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을 이기게 하심
성경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성도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없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행실에 의해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행위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으면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은 얻었으나 아직 천국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루터는 구원받은 성도를 일컬어 “의롭다 칭함 받은 죄인”이라고 정의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여전히 부패한 죄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의 법적인 죄값은 지불되었지만 여전히 지금 내 본성에 남아있는 죄성과 그 열매들은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미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성도)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면 사탄의 참소와 죄의 형벌인 사망의 고통을 당한다(롬6: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롬6:3-5). 새사람이 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 부활을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성령내주, 임마누엘) 이전의 나는 죄의 본성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자였으나 이제부터 나는 내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해서 죄와 싸울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 죽음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언약백성이다.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죄의 본성과 싸우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 이것이 바로 영적 아브라함 자손, 새 이스라엘, 새로운 피조물, 이사야가 말한 남은자 렘넌트(사6:13)이다. 성경의 렘넌트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워진 하나님 백성 곧 신약교회를 의미한다(롬9장). 그래서 바울은 이미 구원 얻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한다(엡4:22-24).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평생동안 누리게 될 축복이다.(성화).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결단을 요구한다. 아직도 남아있는 우리 본성은 죄를 원하는데 우리 속의 성령은 그것을 거부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갈라디아 5:16-23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6-23)
우리는 죄에서부터 해방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아무 죄의식이 없는 거짓 자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행동을 이기는 곧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의식에서 해방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이다.
(7)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십자가는 사탄이 인간을 공격하는 큰 무기 두가지를 해결하셨다. 첫째,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요일 3:4 저가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예수님은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나셨다.
요일 3:8 죄를 범하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 죄가 마귀의 종이 되는 근거라고 말한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여기서 마귀의 일이란 마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는 법적 근거 곧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 이 땅에 오셨다.
둘째, 사망의 공포를 해결하셨다.
히2:14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여기서 앞에 기록된 사망은 예수님의 죽으심 (By his death)이다.
- 예수님이 마귀를 없이 하심은 render powerless(NASB)이다. 인간의 법적 근거를 없엔 것이다.
히2:15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사탄의 종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다.(By their fear of death)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탄이 더 이상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할 수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을 자기와 함께 멸망시키려는 모든 계획이 무산된 채, 하나님의 형벌을 기다리고 있다(마 25:41, 계 20:10). 인간이 십자가에서 법적으로 죄사함을 받고 지금 죄를 이길 능력을 가지고 되었으며, 또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공포를 이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고 사탄의 권세가 꺾였다는 의미이다. 사탄의 존재가 결박되는 것은 최후의 심판날인 주의 재림 때이다. 이제 남은 것은 구원받은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과 싸우는 치열한 영적전투뿐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 속의 죄의 본성을 유혹하고 위협함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성화는 내 죄의 본성을 유혹하는 사탄과 연관됨으로 다른 말로 영적싸움이라 불리운다.
(8) 교회는 예수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은 거룩한 백성(=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마16:13-20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9)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사탄의 나라를 정복해 나간다.
고전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레20:16 너희는 내게 대하여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거룩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자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열매이다. 칭의는 죄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가져온다. 신자가 불신자의 칭송을 받는 근거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한 도덕적 우월성이다.(행2:41-47) 비인격 종교의 특징은 윤리가 없다. 오직 자기 소원성취만 있다. 성도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다.(계7:9-10)
(10) 십자가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억압과 차별이 없어지고 자유함와 하나됨이 일어난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서서 다시는 종의 멍 에를 메지 말라.
- 여기서 윤리의식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주자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 십자가 복음만이 인종적 차별, 사회신분적 차별, 성별적 차별을 철폐하고 하나 되게 하신다.
엡2:11-13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구분(구속사적 차별)이 없어짐
엡2:14-22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인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됨
(11)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거룩해진 백성들이 누리는 자유... 이 복음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종교지도자들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행4:12)
정치권력자 - 헤롯 아그립바 (행12:1-25)
영적세력들 - 박수무당 엘루마 바예수 (행13:4-12)귀신들려 점하는 여종(행16:16-18)
십자가 복음은 도덕적 각성운동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인 운동이기에 사탄과 귀신의 세력이 떠나가게 된다.
(12)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이다.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망의 고통을 제하시고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죄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사탄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 이 십자가 복음을 붙잡은 무리가 온 세상에 가득 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온 세상으로 우리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전도요 세계복음화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고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이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5) - 복음이란 무엇인가?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6) -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다락방 복음을 사탄신학이라고 하면 다락방 측에서 거북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아마도 다락방 내의 모든 분들은 다락방 복음이 베뢰아 사탄신학과 같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다락방 분들은 자신은 철저한 개혁 보수신학 위에 강력한 영적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신학은 이론적으로는 맞는데 실제 능력이 없는 이론신학이고 다락방은 이론신학뿐만 아니라 실제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사탄신학이라는 것은 사탄만 말하는 신학이 아닙니다. 만약 다락방이 십자가 없이 사탄만 말한다면 그것은 아예 기독교도 아닐 것입니다. 사탄신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사탄을 꺾는 것에 집중하는 가르침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사건을 개인의 죄사함을 위한 것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고, 사탄 꺽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영적문제 치유, 흑암세력 결박이 바로 사탄을 꺾는 것입니다.
저의 이 말에 대해 다락방에서는 우리도 개인의 죄사함을 이야기한다고 말하겠지요. 저는 지금 무게중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약 류 목사가 복음 설명의 90%를 칭의와 성화를 통한 개인의 죄사함으로 강조하고 나머지 10%정도를 특수한 사람들 곧 귀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기위해 십자가의 왕적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어떤 신학자도 다락방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설명했다면 십자가 복음, 다락방 복음이라는 용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다락방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능력을 귀신들리지 않은 일반적인 불신자의 영역에서 귀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적용범위를 넓히는 아주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천신학적인 측면에서 복음을 개인의 칭의와 성화로 설명할 때보다 영적문제로 설명하는 것이 지금 당장 고생하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훨씬 피부적으로 와 닿아 이해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 내용의 변형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적용과 설명 차원에서 이해하기 쉬운 불신자의 용어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또 그 신학의 결과로 다락방 성도의 삶은 모든 자들에게 칭송받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다락방이었다면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초창기 다락방에 동참했던 많은 분들은 류 목사가 이런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동참한 것이고, 지금까지 다락방에 계신 모든 신실한 분들도 류 목사가 이런 복음을 주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계신 겁니다. 그러나 류 목사는 이런 순수한 모든 분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다락방 복음은 절대로 칭의와 성화를 통한 죄사함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그냥 다 아는 용어로 지나가고, 그 핵심 내용이 사탄 꺾는 것(90%이상)입니다. 그래서 다락방이 사탄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다락방 내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잡음들은 사탄신학의 결과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열매가 다락방을 사탄신학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내용이 사탄신학이니 다락방의 그 열매를 가져온 것입니다. 다락방 복음에는 위험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베뢰아의 귀신론과 구*파의 도덕폐기론입니다.
첫째, 다락방 복음은 베뢰아 귀신론과 구조가 똑 같습니다. 베뢰아 귀신론은 사탄신학의 대표입니다. 김기동 목사의 대표구호가 “예수 내 구주”입니다. 예수 보혈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류 목사가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베뢰아 귀신론을 거부합니까? 예수 십자가 보혈을 귀신 쫓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류 목사는 틈나면 불신자 죽어 귀신된다는 베뢰아 귀신론이 틀렸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귀신이 불신자 영혼이 아니고 범죄한 천사라는 것만 다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을 사탄을 직접 꺽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모든 질병은 귀신이 준 것이다”, “귀신은 불신자 죽은 영혼이다”라는 베뢰아의 거북한 내용만 살짝 바꾸었지 그의 근본 사상은 요일 3:8절을 마귀 자체로 보는 베뢰아 귀신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류 목사의 근본 신학사상입니다.
한가지 더 류 목사는 창1:2절의 흑암과 혼돈, 공허를 사탄의 타락으로 봅니다. 이것은 신학계에서는 Gap Theory(간격이론)라고 부르는데 베뢰아에서 바로 이 간격이론을 주장합니다. 즉 창1:1절과 창1:2절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1:1절의 첫 창조때 이미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타락함으로 온 세상이 흑암 혼돈 공허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1:3절부터는 하나님이 사탄 타락으로 혼동되어진 세상을 다시 창조한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류 목사는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베뢰아와 똑같이 Gap Theory(간격이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사탄의 타락을 여섯째 날 인간창조 직후로 설명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이해되고 특히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타락한 세상 속에, 사탄과 같이 위험한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사탄에 대한 주의를 전혀 주지 않으신 상태에서 인간의 범죄 책임을 물으신 악한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류 목사가 사탄신학인 것은 Gap Theory(간격이론)를 주장해서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개인의 칭의와 성화를 통한 죄사함에 두지 않고 사탄을 꺾는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락방 복음은 구*파의 도덕폐기론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초창기 류 목사 메시지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가 구원을 강조하니 구*파로 몰아갔다고 하면서 “그래 나는 구*파 할테니 너희는 멸망파 해라”라고 비꼬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구*파의 핵심은 구원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파의 구원이 “구원에 대한 확신” 특히 “(신비한) 깨달음”에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중요한 요소인 의지적 회개· 결단은 무시하고, 피동적 깨달음만으로 구원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구*파의 구원은 도덕폐기론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지금 죄를 지어도 그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구원의 증거는 내게 있는 확신,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유는 의인인 내가 하는 행동은 죄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입니다. 개인의 자범죄를 가볍게 여기는 류 목사 메시지와 그에 따른 열매들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초대교회 대표적인 이단인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오늘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락방 복음은 한국교회의 위험한 이단사상인 베뢰아 귀신론과 구*파 도덕폐기론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몇 가지 용어를 바꾸었지만 그 내면적으로는 위험 요소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베뢰아와 구*파에 대한 경각심을 해제시키고, 그 내용을 받아들이게 하는 아주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십자가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의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을 설명해 보려합니다.
1. 다락방 복음
다락방 복음의 특징은 율법에 대한 지나친 거부에 있다. 마치 율법을 공격하는 것이 복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류 목사 메시지의 근저에는 언제나 한국교회 비판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가 복음 없이 율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수의 일부 다락방 목사와 신자들도 류 목사와 똑같이 한국교회를 율법주의 바리새인으로 공격한다. 다락방 복음에 확신이 있는 사람일수록 한국교회가 율법에 묶여있다고 더욱 강조한다. 이것은 자신들은 율법에서 빠져나와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울, 신약성경이 율법을 버려야할 것으로 가르치는 것일까?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십자가를 죄사함으로 보고, 개인의 칭의와 성화에서 출발하여 모든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 십자가 복음과 십가가를 사탄꺾는 영적인 힘으로 보고, 개인의 변화없이 영적치유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사탄신학으로 나눠지게 된다.
2. 십자가 복음
복음과 율법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1) 언약 -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에게 다시 우리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 언약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 직계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의 피조물됨을 거부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사탄과 함께 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 사는 동안의 극심한 고난과 고통, 죽음 이후 육체의 파괴, 그리고 그 이후의 영원한 지옥 형벌을 향해 끌려가고 있는 절망에 빠진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그대로 형벌 가운데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회복되는 것, 다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 구원받는 것, 이 약속이 바로 언약이고 기독교의 구원이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2) 아브라함 - 하나님 백성 만드시기 위한 믿음의 조상.
창3:15절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된 인류구원의 시작은 창5:3절 아벨의 축복을 받은 셋의 후손으로 연결되어지며 창9:26-27절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창12:1-3절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조건으로 선택하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는데(창12장) 자식이 없던 그에게 네 자손이 땅에 편만해질 것과 네 자손이 거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15장)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녀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하나님 백성인 증표로 할례언약을 주셨고(창17장) 아브라함의 후손은 인간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백성임을 나타내시려, 100세인 아브라함과 경수가 끊어진 90세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셨다(창21장)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출생을 한 이삭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는데 여기서 아브라함 자손 곧 이삭의 혈통을 따라 출생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백성을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육신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보는 것이 유대교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영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의 대주제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갈3:7).
(3) 할례 - 이방인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흔적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된 표징으로 할례를 주시어 하나님의 언약을 그 살에 있어 영원히 있지 않게 하셨다(창17:13).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언약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니며 날마다 하나님 백성임을 확인하게 하신 것이다. 우상 숭배하는 이방 백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몸의 흔적을 통해서 확인시키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방인과 구별됨”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태어난 아브라함 자녀, 이삭의 직계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점차 번성하였는데 야곱은 이스라엘을 12지파로, 요셉은 12지파가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사용된 인물들이다. 애굽에 내려가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70여명의 가족형태에서 벗어나 대략 200만명이 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4) 율법 -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위한 구체적 규범
하나님은 이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시내산에서 “자신이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언약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19:5-6).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킴으로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시며 언약을 직접 맺으신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모두 백성 앞에서 낭송한 후 백성들 앞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언약을 맺는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백성된 증표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출20-23장). 이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 이방인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할례와 율법의 공통적 특징은 이방인과 구별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됨이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겨 “거룩하게 구별됨”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이고, 율법은 거룩함을 위한 구체적인 규범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스라엘의 어떤 행위와 조건을 보고 하나님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였다. 구약의 옛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자녀되었듯이 신약의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은혜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5) 거룩함 -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율법은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상숭배하는 가나안 이방인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거룩해져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니 거룩해지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 백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되었으니 그 결과 거룩한 삶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철저하게 강조하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이다. 일반 종교는 윤리가 구원의 조건이지만, 복음에서 윤리는 구원의 결과이다.
출31:13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20: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레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22:32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사62: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필연적으로 사탄을 섬기며 우상숭배하게 되어있고 우상숭배하는 이방인, 아니 죄인된 모든 인간들의 특징은 더러움이다. 여기서 더러움은 영육간의 더러움을 모두 말한다. 이는 사탄은 그 속성이 도덕적으로 더러우며, 인간은 사탄의 속성인 부패한 죄의 본성을 태어날 때부터 원죄로 가지고 있다.
레위기 18장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구체적인 계명들 중 음행과 연관된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미, 계모, 자매, 손녀, 이복누이, 고모, 이모, 백숙모, 형수, 제수, 조카··· 를 범하지 말고 간통, 동성연애, 수간(짐승과 관계함)등을 온갖 부끄러운 일들을 금지함이 하나하나 언급되어 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런 이상한 내용을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하셨을까? 과연 당시 세계는 의로운데, 하나님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니 미리 주의하라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당시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이런 문제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와 그 결과인 이러한 범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더러운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성별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더러움(=부패함)은 그 당시에만 있던 내용일까?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거부하여 죄인된 모든 인간세계는 영육간의 더러움으로 꽉 차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전혀 닮을 수 없는 더러운 영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사탄의 속성인 부패한 본성을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더러움을 주로 도덕적인 타락으로 설명하며(롬1:18-32) 귀신들림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런 범죄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인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구별된 자, 거룩한 백성 곧 성도(고전1:2)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얻어 세상과 구별되어진 거룩한 자이고 그 다음이 복음의 능력과 성도의 거룩함으로 사탄을 꺾는 영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여전히 더러움에 있을 수 있는가? 사탄을 섬기며 죄의 본성대로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가 여전히 더러운 생활을 좋아하며 즐기는 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바울은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필연적 변화이다. 성령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로 법적 거룩(=칭의) 실제적 거룩(=성화)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6) 율법의 한계 -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백성을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못함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거룩함을 얻도록 기준은 제시해 주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율법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롬8:3) 율법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룩한 것처럼 잠깐 포장시킨 것뿐이지 실제 그 내면을 전혀 바꿀 수 없다. 율법은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거룩한 종교행위는 하게 하지만 그 마음에서 솟아나는 미움, 시기, 정욕··· 등의 근본적인 죄의 본성은 전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탄식인 것이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지켜보지만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외적 행동은 그럴 듯 하지만 육체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죄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한 형식주의자만 만든다. 이런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계속)
(7) 십자가 복음 -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심
정결케 됨은 죄사함에서 오는데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얻게 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거룩함은 죄사함에서 오는 것이다. 더러움을 벗어남, 죄 사함, 의롭게 됨, 정결케 됨, 거룩해짐, 구원받음, 하나님의 자녀됨.... 모두 같은 용어이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 인간이 거룩해질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죄 때문이다. 사탄 때문이 아니다.
사탄은 원죄에 빠진 인간을, 인간 밖에서 유혹하고(고후11:14) 위협하며(벧후5:8) 참소하는(계12:10) 존재이다. 원죄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되는데(루이스벌콥 조직신학 상 P464) 첫째,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책(=죄값)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고 둘째,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가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의로워지고 거룩해 질 수 없다. 우리가 갚아야 할 법적인 죄값은 “정녕죽으리라”(창2:17)는 사망형벌이다. 이 값을 치룰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값을 치루려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죄 값이 중상 정도라야 혹시 가능성이 있지··· 죄 값 자체가 사망인데··· 내 스스로 죄 값을 갚을 수도 없고, 만약 갚는다면 사형 집행으로 모든 상황이 끝이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법적 형벌인 사망의 죄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절대 불가능하지만 혹시 인간이 법적 죄책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원죄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실제적인 문제로 지금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아담의 부패한 본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은 인간 내면에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이 바로 원죄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원죄가 아담이 지은 것으로 나와 상관없는 옛 범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아담의 옛 범죄는 지금 내게 그대로 본성적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원죄이다. 나는 아무 문제없는데 아담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아담의 부패한 죄의 본성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처한 원죄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첫째, 하나님 앞에 날마다 우리의 법적인 죄책을 참소함으로 죄값을 지불함 없이는 형벌집행 정지를 불가하게 하며 둘째, 우리 개인에게는 부패한 죄의 본성을 유혹함으로 죄의 종노릇 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전무하게 한다(롬 6:23).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죄문제 해결”, 지금까지 언급해오던 용어로는 “거룩해짐”, 바울의 로마서 용어로는 “의로워짐” 복음의 일반적인 용어로 “구원받음”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처한 이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해결하여 주신 것이다.
첫째,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순간 아담의 죄책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칭의이다(=법적 문제 해결).
둘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본성을 이기게 된다. 이것이 성화이다(=실제적 문제 해결)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문제를 해결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이제 사탄은 우리를 더 이상 참소할 수도, 위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그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죽으심 부활을 많이 말하고, 아무리 복음이라 확신하고 강조해도 죄사함을 말하지 않는 십자가는 성경의 십자가가 아니며,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다.
(8) 바울이 거부한 율법 -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의식법
바울이 설명한 복음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적 죽음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음(=죄사함, 거룩해짐, 의로워짐)” 바울의 사역은 언제나 이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부딪혔고 그의 서신은 이들의 공격에 맞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똑같다.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방법에 있어서 다르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우리 힘으로 지키면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고 바울은 그것은 불가능하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인간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것을 배제한 오직 믿음이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한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 거룩해지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법적 죄사함, 실제적 그리스도와 연합)
따라서 기독교의 거룩은 영적인 거룩, 또 실제적인 삶에서의 거룩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삶의 거룩은 이 땅에서 완전 거룩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울이 오직 율법이 아닌 오직 복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거룩하게 못하나, 복음은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따라서 복음은 율법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옛언약 복음을 새언약이라 말한다.(렘31:33) 율법은 통상 세가지로 구분된다(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 P94). 첫째, 구약의 종교 의식법(제사법), 둘째, 시민 사회법(당시 이스라엘백성에게 해당되는 희년법 토지법) 셋째, 윤리 도덕법이다.
이중 바울이 거부했던 율법은 의식법이다. 구약의 의식법을 지켜야 하나님 백성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과 교회내의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에 맞서서 바울은 끝까지 율법(의식법)을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폐지되고, 시민법은 그 정신만 남아있으되, 도덕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9) 바울이 주장한 복음 -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복음
복음은 율법을 거부하는가? 가장 율법을 공격했던 바울은 도덕 폐기론을 주장했는가? 절대 아니다. 도덕 폐기론자들은 바울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유대교의 의식법을 거부한 것을 바울이 구원 얻은 성도의 생활규범으로서의 도덕법까지 거부했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져있다. 간단하게 몇 구절만 들어보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살전4:3.7)
그 외의 일반서신에서 몇 구절 적어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벧전3:15)
이러한 거룩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또 할례같은 율법의 종교의식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화를 통해 점차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인간은 절대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거룩해질 수 없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예수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이미 거룩해졌고, 육적으로는 지금 거룩해져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가는 것이다.
(10) 마지막으로 신실한 다락방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번도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수한 동기로 따라가는 것이고, 최소한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다락방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절대로 이단이 아니고 또 이단이 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가르쳐지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책임이 아니라 류 목사와 거기에서 이익을 취하는 일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따라가고 있는 다락방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다락방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다락방은 십자가 대속, 칭의 성화, 여기에 영적문제를 해결하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따라가는 다락방은 절대로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사탄 꺽는 사탄신학입니다. 류 목사에게서 한 번이라도 칭의와 성화를 통한 죄사함을 들어보셨습니까?
내 모든 죄를 위해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한 감사 감격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적문제 해결하셨다는 말은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적문제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깨달았으니 다른 사람 영적 치유하자(=전도)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그 전도가 내 개인의 죄 사함과 성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보셨습니까? 다락방에서 복음 깨달았다는 것은 사탄을 깨뜨리신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을 깨달았다는 것이지 죄인된 나를 위해 대속제물로 돌아가시고 지금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를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다락방 복음의 깨달음은 확신과 교만으로 나타나지만, 십자가 복음의 깨달음은 확신과 감격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다락방 복음의 확신과 십자가 복음의 확신은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까지는 지적하며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류 목사는 설교 때마다 은연중에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한국교회를 복음 없다고 비난하고 다락방만이 아니 자기만이 유일한 복음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뭔가 깨닫기는 깨달았나봅니다. 깨달았다는 단어는 사실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들의 대표적인 용어입니다.
"지적인 확신"입니다. 뭔가 흔들리지 않는 "신비한 확신." 실제 삶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다락방 복음이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류 목사는 자신의 어렸을적 교회생활을 이야기하며 교회의 부정적인 것을 말하는데 그 여섯 교회가 한국교회의 전부입니까? 저는 정말 귀중한 목사님들과 성도들을 많이 만났고, 류 목사가 복음 못 깨달았다고 말하는 그분들 때문에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류 목사는 설교중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링컨, 존 워너메이커, 쉬브 등은 복음의 사람으로 칭찬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다락방 복음을 깨달은 사람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분들은 류목사가 그렇게 복음 못깨달았다고 말하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사람들입니다.
논리적인 오류이지요. 다락방 복음을 못 깨달은 사람들이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니요. 류 목사는 아마 주기철 목사님이 살아계셨으면 설교 중에 절대로 응답받은 예로 들지 않을 것입니다. 주 목사님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기에 자기 필요에 따라 다락방의 유리한 예로 드는 겁니다. 주 목사님을 복음의 사람으로 칭찬하면, 주 목사님이 나는 다락방이 아닌데 라고 말씀하실 때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류목사가 응답받았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품으로 가신 믿음의 분들입니다.
류 목사는 말에 능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선동적이고 자극적인지 일반인 여성신도들은 금방 감동받습니다. 마치 서양 고대철학사에 나오는 궤변론자 소피스트처럼 수사학과 웅변의 기술을 가졌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보다는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데로 화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 소피스트들의 윤리 없는 기능을 거부하고 참된 인간의 도덕성을 가르친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분명 류목사는 보기 드문 천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발견해서 천재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사실로 믿도록 말로 전달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의 어눌한 말속에 있는 성경의 진리 자체가 능력이 있음을 여러분은 시간이 갈수록 알게 될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세계복음화를 수도 없이 말하지만 그것은 십자가 대속으로 개인의 변화를 통한 영혼구원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역사하는 사탄을 꺾고 영적치유해서 구원한다는 다락방 복음화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것입니다(언젠가 다락방 20가지 전략에 대해서 반드시 이야기 할 것입니다). 다단계와 유사합니다. 성공사례는 많으나 내 주변에서는 볼 수 없고(=성공은 언제나 내가 확인할 수 없는 먼 곳에만 있습니다).
계속 강의를 듣고 자기 암시를 해야 지속되며, 결과는 결국 피라미드 상층부에게 돌아갑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특히 이단 소리 들어가며 다락방에 계실 정도면 전도 대한 거룩한 사명감이 불타실 것입니다. 전도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하고 생명이 영접된다고 해도(저는 영접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죄인됨과 십자가 대속을 알고 영접하는지 의문입니다), 그 전도의 내용이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전도일까요? 전략상 불신자들을 다락방 식으로 영접시켜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실천신학측면에서 얼마든지 인정하고 장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 대속없는 사탄신학만 말하고 가르친다면 과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도일까요? 다락방 복음으로 인해 여러분들 주변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열매들이 아닌 참된 열매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확신이 넘친다는 것, 삶의 방향이 전도에 맞춰졌다는 것, 육신적인 추구보다 복음을 더 생각하게 된 것, 그러나 다락방 전체를 살펴보고 복음의 내용을 성경으로 깊이 확인해보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복음의 우월성에 빠져 남을 비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고 아무리 그리스도 이름을 불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영적문제들, 갈수록 차가워지는 교회의 생활, 성경은 전혀 읽지 않고 류 목사 강단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강요받고 있는 모습, 특히 자기 교회 목사님조차 성경의 하나님 말씀이 아닌 류 목사 메시지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전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이 우리 믿음의 형제들과 단절되어 십자가 대속은 전혀 모르고 성경에는 렘넌트 7명만 있는 줄 아는 참담한 현실 앞에···.
다락방에 계시려면 한국교회를 비난하지 말고 다락방 복음을 근본적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바꾸도록 촉구해 주시고, 다락방을 나오시려면 한국교회와 함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6) -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엑소더스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7) - 영접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다락방에 참여해왔던 신실한 분들은 이런 궁금증이 있으실 겁니다.
지금 다락방 내의 메시지나 나타나는 현상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뭔가 이상하다.
열심히 전도는 하고 있지만 불신자든 기존신자든 새가족이 다락방 교회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본부에서 전략적으로 집중하는 몇 개의 중대형 교회 외에 현장 일선의 다락방 개교회들은 점점 더 약해진다.
다락방 십 수년 따라다녔는데 아직도 어떻게 해야할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결국 다락방은 구조적으로 류목사를 의지해야만 하는 전도이다.
성경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세계복음화라는 거룩한 사명에 대한 독려와 책망만 있다.
특히 성화에 대한 내용은 거의 전무하고 일부지만 다락방 목회자와 성도의 삶 또한 문제가 있다.
교회에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따듯한 교제는 없고... 이상하게 차가운 곳이 되어 버렸다.
성도들이 성경은 읽지 않고, 교회에서 성경의 기본진리들이 전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
그런데 내게 일어나고 있는 전도의 열매는 무엇인가?
전도현장에서 실제로 영접이 되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전에 한명도 영접시키지 못하던 내가 다락방을 통해서 불신자를 영접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접이 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락방은 올바르게 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다락방 내의 신실한 분들을 위해서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영접인가를 설명해보겠습니다.
1. 다락방 복음
(1) 인간의 근본문제 - “하나님 떠남, 죄를 지음, 사단에게 잡힘”
(2) 지금 인간의 모습 - 불신자의 여섯가지 상태
① 마귀의 자녀(요8:44) - 하나님 떠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② 우상숭배(엡2:2) - 그 결과 미신 우상에 빠져 점 굿 운명 사주팔자에 빠져 산다
③ 정신적 고통(엡2:3) - 불안, 허무, 정신병, 노이로제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자꾸만 망해간다.
④ 육신의 고통(행8:4-8) - 불치병 난치병 고질병에 시달리는 육체의 질병까지 온다.
⑤ 죽음과 지옥심판(눅16:19-31) - 사는 동안 영혼 정신 육체까지 고생하고 죽어 지옥에 간다.
⑥ 영적인 유산(출20:4-5) - 결국 모든 문제가 또 다시 자녀에게 대물림 된다.
(3) 여기서 빠져나오는 길 - 예수 그리스도(삼중직)
① 참선지자(요14:6) -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시고(회복)
② 참제사장(롬8:2) -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고(해결)
③ 참왕(요일3:8) -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다.(해방)
(4) 이 예수를 영접하면 - 신자의 일곱가지 축복
① 하나님의 자녀(요1:12, 롬8:14) - 영접하는 순간 신분의 변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② 성령으로 동행(요14:16-17) - 하나님은 신자를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또한 충만하게 역사하신다.
③ 기도 응답의 비밀(요16:24) - 성도는 기도할 수 있는 자격, 그리고 응답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④ 흑암 세력 꺾음(마12:28-29) - 하나님 자녀에게 사단을 꺽을 권세를 주셨다
⑤ 하늘군대 파송(계8:3-5) -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가는 곳에 주의 천사들을 파송하신다.
⑥ 하늘 시민권(빌3:20) - 하나님이 구원얻은 백성에게 주신 축복은 영원한 신분을 주신 것이다.
⑦ 세계 복음화의 축복(마28:18-20) - 세계복음화 현장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5) 구원받은 신자가 확신해야 할 것 - 다섯가지 확신
① 구원의 확신(요일5:11-13)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과...
② 기도응답의 확신(요16: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라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③ 승리의 확신(고전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④ 사죄의 확신(요일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⑤ 인도의 확신(잠3:5-6)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다락방 분들은 이 내용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신학적으로 지적해보라고 할 것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어떻게 이단이 되냐는 것이다.
맞다. 분명히 그렇다.
여러분도 이런 다락방 영접메시지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한번 자세히 찾아보시길 바란다.
일반인 평신도들은 절대로 찾을 수 없고, 전문가인 목사님들도 거의 지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자체로는 그리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비판하는 분들은 지엽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정도일 것이고
그 부분도 이것이 신학 논문에 나온 글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 현장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할 때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하나님 떠난 인간의 모습을 불신자 여섯가지 상태라고 설명한 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참 독창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교에서만 배웠던 칼빈의 그리스도 삼중직으로 설명하고
(딱딱한 교리로만 배웠던 내용을 전도현장에서 평신도들이 말하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영접이후 신자의 일곱가지 축복을 설명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적절하고
단 신자의 일곱가지 축복에는 구원받은 자신에 관한 내용만 있지 구원받은 우리들 곧 교회에 관한 축복은 없다.
이것은 다락방을 오래하면 할수록 더욱 개인주의가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하게 설명한 것이지 틀리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구원받은 자의 확신은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다섯 확신 그대로이고...
이 내용 자체로만 보아서는 절대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직접 다락방에 참여해 본 사람은 여기에 중대한 두가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내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설명하는 자의 강조점(무게중심)에 관한 문제이다.
이 내용은 누가 어디를 강조하며 설명하느냐에 따라 십자가 복음과 다락방 복음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지금까지 언급해온 교리적인 부분이다.
다락방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세가지로 말하나 결국 사단에게 잡힌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반교회 영접메시지는 성경에 기록된대로 죄에 대한 강조를 하지만 다락방은 사단에 대한 부분을 중요시한다.
죄를 지었다. 하나님 떠났다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지금 사단에게 잡혀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자 예수님은 십자가 죄사함이 아니라, 사단의 권세를 꺽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이다.
이것이 다락방 복음의 핵심이다.
둘째, 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부분이다.
다락방의 영접은 불신자의 상태와 신자의 축복을 대조 설명하고 예수를 영접시킨다.
불신자 전도할 때, 전도대상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인정하게 하고
자신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말하기보다.
죄의 심각성과 죄의 세력, 죄의 결과인 사망의 상태, 죄와 사단의 관계... 를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보다
지금 당하고 있는 불신자의 상태와 예수 영접 후 얻게 되는 신자의 축복을 비교 설명함으로
불신자들이 영접행위를 하기 쉽게 한다.
따라서 다락방 전도의 영접은 일반교회의 전도보다 훨씬 영접자의 수가 많다.
이것을 보고 류목사가 다락방에는 전도 역사가 일어난다고 자랑하고, 다락방 일반 성도들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영접한 이후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변화들을 엄밀히 분석해보고 확인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임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에 대한 고백없이 하는 영접....
영접 이후 죄를 멀리하는 의지적 결단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는 영접...
하나님 앞에 죄인됨은 전혀 모르고, 지금 자기가 고통당하고 있는 문제해결을 위해 현실적 필요에 의해 하는 영접...
이런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영접인가?
영접은 했는데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영접을 했는가? 아니면 불신자 저주에서 신자 축복을 얻기 위한 목적의 영접행위를 한 것인가?
죄사함의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사단 꺾는 다락방 복음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실제 다락방의 전도현장에서 일어나는 영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영접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2. 십자가 복음
(1) 성경 - 구원의 길(행16:17)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신가?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대한 경외감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온 우주와 나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인간은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111:10)
둘째, 나는 누구인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의 본성에 묶여 지금도 내 뜻대로 살며 계속 실패하고 있는 나...
하나님을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싶으나 절대로 거룩해질 수 없고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나...
그 결과 사단의 참소와 내 양심의 정죄로 인해 죄의식과 죄책감에 눌려 살고 있는 나...
사는 동안 사망의 고통 고난과, 육체의 죽음 이후의 완전한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나...
구원의 소망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
이러한 죄인된 자기 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을 처절한 절망가운데 빠지게 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아담의 법적인 죄책과 지금 내속의 부패한 죄의 본성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분...
십자가 대속으로 죄를 씻음으로 더 이상 사단의 참소와 공격을 이길 수 있게 하신 분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서 하나님의 대권을 가지고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
예수의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의 주가 되셔서 그들을 보호 인도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
넷째, 성령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룬 완전한 구원을 지금 내안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분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요구하는 더러운 죄를 미워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힘 주시는 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사함으로 거룩케하셔서 죄의식뿐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사단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도록 법적 실제적 의로움을 가져다 주시는 분...
또 귀신 사단과의 직접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내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나의 든든한 보호자...
비록 우리가 아직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얻은 구원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신 분
다섯째,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워진 거룩한 무리들의 공동체... 교회...
자기의 죄인 됨을 시인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한 자들의 공동체...
죄인을 거룩케 하는 십자가 복음으로 죄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치유하는 흰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들...
전도현장에서 귀신과 사단의 실제적인 공격과 싸워 이기는 복음의 영적 능력을 가진 거룩한 백성들...
여섯째,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들은 세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가진 자들이 죄로 더러워진 온 세상을 주의 거룩함으로 정복해 나가고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모든 죄와 사망의 세력이 끝나고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게 될 날
더 이상 눈물이 없고 고통도 유혹도 죄의 저주도 사망도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통치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예수 피로 거룩해진 영적 아브라함 자손, 새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는 반드시 죄와 사망, 사단과 싸워 승리할 것이다.
주의 재림 전까지 이 땅은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창조질서가 점차 회복되어 갈 것인데
하나님이 창조(Form)하신 세상이 인간의 범죄로 타락(Deform)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 진 성도가 회복(Reform)해 나간다.
이것이 성도가 갖는 세계관이다.
(2) 영접 - 이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이는 것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듣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게 되고 또 하나님 떠난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알게 된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인간은 자기을 위하여 친히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된다.
구원은 예수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적 죽으심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성립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이 이루어지고, 정결하게 되고, 의로움 얻게 되고, 거룩해지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예수를 믿는 것을 영접이라고 한다.
참고로
영접은 다락방과 한국교회에서 전도시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특히 다락방은 더욱 영접을 강조하며 특히 영접기도의 유무를 구원의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다락방의 영접은 믿는 것보다는, 迎接(=모셔들임)을 더나아가 靈接(=성령과 접촉)하는 개념으로 강조된다.
이는 다락방의 영접이 불신자 속에 있는 사단의 영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영을 모셔드리는 쪽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락방 일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접에 대한 실제적인 개념이다.
나는 불신자에게 영접기도를 따라하게 하는 것을 거부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다락방식 영접기도를 구원여부의 판단기준으로 삼아 한국교회를 비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몇 마디 언급한다.
영접은 요1:12절에 근거한 용어이다.
성경 전체에서, 구원의 첫 단계로 기술된 다락방식 영접기도, 영접행위가 기록된 것을 찾아보시라... 전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영접은 영접기도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손님을 모셔드리는 것이다.
(모든 성경구절을 찾아보시라)
구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영접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요한복음은 영접이 아닌 믿음이란 단어를 98회나 사용한다.
성경에 영접기도라는 별도의 단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도들이 그렇게 전했는가... 전혀 아니다.
사도들은 구원의 첫단계로 영접기도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믿는 것이다.
(래리모이어 구원과 전도에 관한 21가지 오해 P43)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그림언어로 잘 설명하는 것이지 영접을 별도의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계3:20 "볼지어나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이 구절은 불신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글이다.
성도에게 주님과 교제하기를 힘쓰라는 것이지 불신자에게 영접기도하라는 내용은 아니다
어려서 정상적인 믿음의 가정에 태어난 아이는 영접의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
언제 예수를 영접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배운 믿음의 말씀들이 그 속에 들어가 지금 믿고있고 구원받았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장로교회가 유아세례를 주는 이유이다.
이런 믿음의 아이에게 구원의 확신을 위해 진지하게 영접기도 시키는 것은 장려하고 나도 그렇게 하지만
어려서 믿고 예수 잘믿는 아이에게 다락방식 영접기도 안했다고 구원 못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전도현장에서 불신자 영접기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소수의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다락방 분들이 영접을 강조하되 그 정도가 지나치며, 더 나아가 그것을 기준으로 한국교회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자중하기 원해서 언급해본 것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듣고 그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일 때, 믿을 때, 영접할 때... 우리의 구원은 발생하는데 이때 영접은 몇가지 다른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믿음(요1:12) - 예수 십자가 대속을 나를 위한 사건임을 인정하는 것
이천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적 사건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건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
요1:12절에서 영접의 다른 이름은 믿음이라고 했다.
여기서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아무거나 믿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고, 강하게 믿는 것도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사단만 꺽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주로 시인함(롬10:9-10) - 나의 주인 됨을 거부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함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창조주 되심과 나의 피조물 됨을 거부하는데 있었다.
내 속에 실제하고 있는 아담의 범죄한 속성이었던 자기 주인됨을 회개하고 나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나를 위한 대속제물이셨음 그대로 인정하며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말함으로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화형당해 죽임을 당했다.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의 주되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 회개(행2:38) - 예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
회개는 구원 얻기 위해 행해야 하는 어떤 통과의례 절차가 아니다.
회개는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나를 알 때 내게 일어나는 당연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왕 되심 앞에, 또 나를 위해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무릎 꿇는 것이다.
이 복음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죄인됨이 인정되고 거기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나온다.
의도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짜내는 회개가 아니라 죄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회개가 내 속에서부터 고백된다.
나의 부패함에 대한 처절한 통회와 본성적 악함에 대한 탄식이 나오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회개하면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으면 회개의 열매가 반드시 나온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죄의 본성있는 우리 성도들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구원 후에 짓는 죄도 당연히 회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회개해야 한다”가 아니라 저절로 “회개하게 된다”. 이것은 주의 성령을 모신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범죄했을 때 회개하도록 계속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넷째, 거룩함이 나타남(고전1:2) -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새사람 된 모습
성령충만은 확신으로도 나타나지만, 그 확신은 필연적으로 교만이 아닌 겸손을 동반하며 그의 삶에 거룩함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정결케 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새사람 되게 만든다.
이전에는 본능적으로 죄를 좋아하고 즐기며 따라갔지만,
의와 거룩의 영이신 성령이 내안에 들어오신 후 부터 의를 좋아하고 거룩을 기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거룩함에서 오는 참된 자유, 죄로부터 해방됨에서 오는 기쁨...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십자가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필연적으로 위의 네가지 열매가 맺어진다.
물론 거룩의 열매가 100% 완벽하게 맺어지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방향성이 생긴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절대로 완전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열매가 맺어지는 쪽으로 결과가 나온다.
만약 그렇지 않은 영접이라면...
자기가 아무리 확신한다 하여도 다시 처음부터 점검해보아야 한다.
(3) 평양대부흥에 관한 동영상을 보며 십자가 복음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해보자.
영국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가 마틴 로이드존스는
하나님이 시대마다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는 몇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했다.(마틴 로이드존스 부흥 P71...)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 하나님에 대한 열망, 자기 죄에 대한 깊은 통회,
그리스도 보혈에 대한 엄청난 강조, 오직 믿음으로, 중생에 대한 확신, 거룩함에 대한 열망...
이것은 역사에 나타난 모든 시대와 지역의 부흥 때마다 동일하다.
여기서 부흥은 교회성장이 아니라 Revival 곧 하나님의 초대교회처럼 강권적인 임재하신 것을 의미한다
오늘 날 한국교회 성장의 태동이었던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이러한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 죄에 대한 회개, 그리스도 보혈에 대한 감격, 거룩함에 대한 열망...
십자가 복음은 죄에 물든 개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새사람으로 만들어
죄와 저주로 물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거룩으로 변화시켜 나가다가,
이를 거부하는 영적세력을 만나면 직접 사단을 쫓아내기도 하며 승리해 나가다가
주의 재림 때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케하는 완전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7) - 영접이란 무엇인가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8) - 나는 왜 다락방 목사가 되었는가
나는 1999년 9월 다락방 전도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2001년 워싱턴 임마누엘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2009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다락방을 떠나게 된 목사이다. 나는 2010년 8월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워싱턴 노회에 가입했고, 2016년 노회가 분열될 때 미국장로교회(PCA) 한인수도노회에 들어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는 류광수 목사 개인에게 어떠한 분노나 적개심이 없다. 나는 다락방 타도 같은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도 없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계, 차, 팬트하우스를 가졌건 말건 나는 그가 부럽지 않고 관심도 없다. 다락방에서 들려오는 온갖 스켄들도 내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대략 20년 전후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다락방 교회들은 각자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히9:27).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한국교회에 류광수 사탄신학을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20년 정도 시효남은 다락방 안에 있는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빨리 류광수 다락방 복음과 결별하고 2천년 기독교가 믿어온 로마서 십자가 복음의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이 글은 그 목적으로 쓰여졌기에, 그분들이 내가 다락방 목사였을 때 썼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2008년 5-6월)을 꼭 읽어보시길 원하는 마음으로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8)로 연속해서 제목 한다. 이 글은 그분들과 똑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락방에 동참했던 내가 어떻게 류광수 다락방이 사탄신학임을 말하며 십자가 정통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 변화과정을 기록할 것이다. 대략 5회에 걸쳐, 전반부는 개인간증 형식이 될 것이고, 후반부는 다락방 복음과 비교되는 정통교회의 십자가 복음을 소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내 개인의 경험이 다락방 밖의 분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다락방에 계신 분들에게는 공통경험이 될 것이기에 지나온 날들을 간증형식으로 기록한다.
1993년 가을경, 다락방을 접한 아버지(이재덕목사, 제9대전도총회장)가 내게 류광수 목사 설교테이프를 주시며 들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 태잎를 들으며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설교는 부흥회 축복 레퍼토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복음전도에 관한 내용이었고 그가 제시하는 실예 간증들은 너무도 생생했다. 당시 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주시는 테잎으로만 다락방을 접했고,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안양성결대학교 집회, 안양평성교회 집회, 기독교 백주년기념관 일일집회 등 몇 번 참석하며 1994년을 보냈다.
1995년 총신신대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다락방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목사님들이 그러했듯, 나도 아버지를 따라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교회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저녁 10시 부산동삼제일교회 35평 지하에서 열리는 핵심훈련에 여러 번 참여했다. 여름에는 매주 부산동삼제일교회로 내려가 태종대관광호텔에서 하는 1차 합숙훈련에 계속 참가했다. 아마 일곱 번 정도 참가했고, 다섯 분의 다른 강사들이 진행하는 1차 합숙 메시지를 모두 듣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중 지산옥 집사의 어린이 다락방 간증은 최고였고, 김종구 집사의 투박한 간증도 참 좋았다. 또한 백운규 전도사가 진행하는 팀사역도 세 번 정도 참여했다. 내가 이렇게 합숙훈련을 여러 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동삼제일교회 부목사가 된 내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 목동 창대교회에서 열리는 토요핵심에 매주 참석했고 전도신학원, 선교사훈련원... 당시 있었던 집회와 훈련은 모두 참석하고 수료하였다.
당시 나는 예장합동 서울남노회 대방교회 유년부(95년) 초등부(96년) 전도사였다. 나는 어린이 예배 설교 때 조심스레 다락방 메시지를 했고, 여름 성경학교 때 다락방 어린이 찬양을 가르쳤고(쿵쿵쿵 예수님의 어린군대 모여라...당시 어린이 다락방 노래는 참 좋았다), 청년교사 중 한 사람을 대학 사역하는 목사님과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무리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했지만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1996년 예장 합동총회에서 다락방이 이단정죄 되어, 아버지는 서울남노회에서 면직되고 나도 서울남노회에 있을 수 없어 1997년 신대원 3학년때 강북에 있던 다락방 교회였던 경륜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조심스럽게 다락방 할 필요가 없었다. 담임목사님과 함께 주일예배 마치고 부산동삼제일교회로 내려갔고(매주는 아니고 여러번), 류광수 목사 집회 때마다 교회 밴에 교우들을 태우고 전국으로 다녔다. 이는 당시 모든 다락방 교회의 분위기였다. 나는 집회 때 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 마지막 날 저녁집회를 마치고 밤늦게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무척 힘들었지만 집회에서 받은 감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경륜교회 학생들과 함께 토요일에는 무당집 전도를 했었다. 주로 설문조사하는 방식으로 접근했고 필요하면 복음도 전했었다. 한번은 정릉에 청룡사라는 허름한 무당집에 들어갔는데 20대 중반의 아주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는 무당을 만나러 왔다고 했고 그녀는 너무 기뻐하며 밖으로 나가 자기 남편을 데려왔다. 20대 중후반의 젊은 남자무당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묻다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밖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문을 벌컥 열고 온갖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굵은 소금을 뿌리며 저주하고 악담을 해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나는 도합 무당집 50여 곳을 다녀봤고, 두 명의 무당을 다락방 메시지로 영접시켜본 경험이 있다. 한 명은 전도캠프 하다가 만난 무당이었고 말기 암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병이 딸에게 내려가지 않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하며 예수 믿었고 몇 달이 못 되어 병원에서 죽었다. 나는 그 집에 있던 모든 무당집기들을 떼어내어 교회로 가져와 불태웠다. 또 한명은 보일러 A/S기사였던 교회집사님이 무당집 보일러를 고치러 갔다가 그녀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나를 소개해주었다. 내가 다락방 메시지로 복음 전했고 그녀는 예수 믿고 자기의 무당신당을 없애달라고 했다. 나는 그 집 무당집기들을 모두 들어내고 불태워버렸다. 그녀와 다락방을 계속하려 했으나 이상하게 그 후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는 교회 사택에서 태어나 교회 안에서만 자랐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별 문제없이 자랐고 그 흔한 세상 방황과 타락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고 정상적으로 진학했다. 지금까지 나와 교제한 친구의 95% 이상은 모두 교회에서 만났다. 이런 내가 그 무시무시한 무당집을 찾아가고 무당에게 직접 메시지로 전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락방이 아니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이 메시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언급하겠다.
1997년 신대원 졸업후 합동측 노회에서 목사안수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기에 1999년 다락방 전도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비록 내 신앙의 뿌리였던 예장합동을 떠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수많은 목사들이 면직되는 상황에 나도 함께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하는 심정으로 기쁘게 다락방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나는 내가 다락방 목사라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당시 류광수 목사의 메시지는 좋았다(요즘메시지와 비교해서, 그 당시 다락방 목사의 눈으로 보면). 주로 다락방 기본메시지였고 전도훈련은 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사역 지교회 순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매번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그 내용은 알아서 이해하라는 류목사 특유의 화법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는 다락방에서 지교회까지 전개되는 다락방 전도방법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분명 다락방은 집집마다 벨 누르는 전도와는 달랐다.
2000년도에 전도캠프라는 용어가 나왔다. 아버지가 시무하던 성암교회 부목사가 되어 전도캠프를 시작했다. 교인들과 함께 두세 차례 재미있게 캠프 했고 그 기록물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본부에서 내 기록물을 보고 전도캠프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고 했다. “지교회와 전도캠프 이해”라는 작은 책자가 나왔고 그것을 총회이름으로 출판해 모든 다락방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다락방 전도용어 해설과 전도캠프 현장경험을 기록한 글인데, 그 책자가 나를 미국으로 부르는 어떤 작은 계기가 되었다.
2001년도 5월, 미국으로 유학 간 전도사님이 나를 워싱턴 임마누엘교회 부목사로 추천해 주셨다. 그분은 내가 친동생처럼 아끼고 지금도 좋아하는 분이다. 나는 다락방을 나오며 그분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지금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당시 다락방에 대한 격한 감정을 여과 없이 담았다. 내가 다락방을 나오며 후회하는 단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 편지로 인해 그분과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나눌 대화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다락방을 나오며 이것 하나만 내가 지금까지 후회한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워싱턴 임마누엘교회 담임목사님과 여러차례 이메일을 나누고, 미국으로 건너와 한달 간 사역을 해본 후 2001년 7월 가족과 함께 다락방 전도총회 파송 선교사형식을 갖춰 미국으로 출국했다. 한국에서 평범한 다락방 목회를 생각하던 내 진로가 갑자기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다락방을 적극 지지하던 목사에서 다락방을 반대하는 목사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면서 나는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온 내가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전도방법에 대하여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4년 가을부터였다. 그 전까지 나는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본부를 추종하는 다락방 교회 부목사였다. 워싱턴 임마누엘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였다. 오직 류목사 하는 한국의 다락방 교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한국에서 온 다락방 열성분자들도 있었지만, 교회의 주된 구성원은 미국에서 다락방을 접한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2004년 후반부터 서서히 다락방과 류목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워싱턴 임마누엘교회에서의 생활은 다락방 여느 부목사와 다르지 않았다. 본부주일메시지를 요약해서 주보에 싣고, 교인들 요청하면 다락방 해주고, 토요핵심 모임에 교인들 데리고 가고, 전도신학원 강의하고, 주일오후 전도학교 강의하고... 본부훈련 참석하고,.. 여하간 평범하고 행복하게 아무런 불만 없이 다락방 부목사 생활을 했다. 나는 지금도 워싱턴 임마누엘교회를 고맙게 생각한다. 그 교회는 내게 마음을 다해 주었다. 특히 K장로님과 C권사님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나뿐만 아니라 어려운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물질을 지원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나는 그 두 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내가 실명을 쓰지 않는 것은 그분들이 아직 다락방에 계시기 때문에 혹시 나 때문에 누가 될지 몰라 쓰지 않는 것이다.
다락방 전도방법에 매료되어 있던 내게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다락방이 자연스럽게 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락방을 해도 지속되지 않았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보통 6개월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뭔가 일이 생겨 중단하게 되었다. 그것보다 내가 더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는 재생산이 안되는 것이었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다락방을 제대로 해보려 한 모두가 느끼는 심각한 문제였을 텐데, 그때 나는 나 혼자만 안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덜 깨달아서, 영적문제를 몰라서, 현장경험이 적어서, 너무 지적으로 다락방을 인도해서... 여하간 모두 내 문제로 여기고 더 훈련에 참여하고 더 본부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고 자학(?)하며 고민하고 열등감을 가졌다.
다락방 전도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락방은 정말 되어지는 전도인가? 다락방에서 불신자를 영접시켜 미션홈으로 데려와 다락방 사역자로 양육하고, 그와 함께 팀사역을 나가 다락방을 열고 그에게 다락방 사역을 맡기며, 그들의 기능과 직업을 중심으로 전문사역을 나가 또 다락방을 열도록 하고, 그런 여러 다락방과 미션홈을 모아 지교회 만들어 일주일동안 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사역까지 해내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린다. 결국 주중에 모이는 지교회 하나에는 여러 개의 불신자 다락방과 몇 개의 미션홈(요원) 모임이 있고, 일시적인 다락방 개척을 위한 팀사역과 전문사역이 계속 벌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마치 항공모함 하나가 움직이면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호위함 구축함 잠수함... 거느린 전단을 이루는 것이다. 이들이 평일에 전도하며 사역하다 주일에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30년 다락방 해온 분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다락방에서는 이러한 전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류목사가 말하는 다락방 교인 35만명 중 10% 3만 5천명에게 이런 전도가 되어지는가? 아니 1% 3천 5백명에게 이런 전도가 나타나고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30년 올인해서 훈련 받아온 다락방 핵심요원 1천명이 이런 전도를 할 수 있다면, 나는 다락방 전도방법을 되어지는 전도로 인정하겠다. 물론 다락방 전체 중에서 특출한 개인에 따라 이런 전도를 하고 있는 몇 분이 있을 수 있다. 그분은 다락방을 안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다. 다락방 전도가 모두에게 보편타당하게 되어지는 방법론이라면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평범한 수준의 사람이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본부는 자신들이 제시한 이 성경적 전도방법의 증거물들을 지금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락방에 들어왔는가? 나는 전도가 쉽게 되어진다고 해서 다락방에 참여했다. 1990년대 내내 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사역 지교회로 이어지는 전도방법이 되어진다고 해서 매료되었고 그것을 하는 것이 다락방 전도운동이라는 류목사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지금 다락방에는 이 전도가 되어지고 있는가? 다락방 교회들에게 이런 전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런 전도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지역교회 목사의 문제인가? 목사가 30년 훈련 받아도 안되는 전도라면 그게 되어지는 전도인가? 부산임마누엘교회와 서울임마누엘교회에서는 이러한 전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2004년 전반기 까지 모든 것을 내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다락방 역사가 일어난다는 강사들의 간증을 들으며 늘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락방에는 강사들만 있다. 그들의 간증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전도간증이 아니다. 류목사도 마찬가지다. 류목사의 다락방 간증은 40년 전 이야기로 그의 제자들은 강사들이 되었지 지역에서 전도하고 있지 않다. 내가 다음 시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는 다락방 핵심교회들을 집중 탐방하며 그것은 지교회를 만들어 류목사 비디오 보고 있는 시스템이지, 다락방에서 지교회까지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다락방이 제시한 전도방법은 아님을 확인했다. 그것은 다음 번에 다시 언급하겠다.
2004년 후반기 갑자기 내가 다락방이 되어지는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락방 전도방법을 정말 좋게 여겼다. 나는 다락방 전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고, 훈련도 받을 만큼 받았고, 설교도 못한다는 소리 안들어 봤고, 성경지식, 신앙경력 사회적 배경도 나쁘지 않다. 나는 최소한 다락방에서 10% 안에 든다. 이런 내가 안되면 누가 다락방을 할 수 있겠는가? 2004년 가을부터 이런 생각이 들며 기도하다가 11월 문득 다락방이 재생산 되지 않는 것은 지속할 메시지 체계가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락방을 하고 나면 내 메시지를 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락방을 할 수 없다. 손에 잡히는 정확한 교재가 없이는 재생산이 안된다. 사명자들이 다락방을 하러갈 때 지속하지 못하는 것도 다음에 할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정확하게 복음편지처럼 한 장짜리 교재로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게는 내가 워싱턴 임마누엘교회에 와서 매 주일마다 주보에 요약해 싣은 다락방 기본메시지가 3년치 약 150개가 있었고 또한 다락방에 떠돌아다니는 기본메시지 요약파일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에 복음편지 새생명새생활 현장복음메시지 등 이것만 해도 벌써 42개나 되니 이것을 가지고 평신도들이 재생산 할 수 있는 메시지 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4년 12월 당회의 지원을 받아 일주일간 남가주 임마누엘교회 시스템을 탐방하러 갔다. 내 관심은 사역자 개인의 능력으로 하는 다락방이 아닌 평신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다락방 훈련 시스템 즉 재생산 가능한 시스템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첫날 다락방에 참관해 보고 역시 시스템이 아닌 사역자 개인능력에 의존한 다락방임을 알았다. 그 일주일동안 나는 호텔 숙소에서 나오지 않고 가져간 모든 자료와 파일을 꺼내놓고, 평신도 사역자들이 재생산 가능한 메시지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과 다락방 참관 시간을 제외하고는 호텔에 머물며 그 일을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메시지 체계가 만들어졌다.
1. 새가족이 오면 ABC 대상에 따라 15개 정착 메시지를 한다.
2. 불신자가 오면 다락방 교재(복음편지 새생명 현장복음메시지) 42개의 전도 메시지를 한다.
3. 기존신자가 오면 기본메시지 ABCD에 따라 48개의 양육 메시지를 한다.
4. 사명자가 오면 사명자, 조장, EBS, 사역자훈련 등 63개 훈련 메시지를 한다.
이 메시지들은 복음편지와 같이 한 장씩 되어 있으며 그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재생산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사역자는 서론에 주일강단 메시지 5분 요약하고, 가져간 교재메시지 20분하고 마칠 때 간증 및 기도시간 10분만해도 다락방을 할 수 있다 나머지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면 사역자들이 다락방 하러 가는 것이 부담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처음에는 그 제목들까지 모두 기록했었나 그 양이 너무 많고 또 일반성도들에게는 지루할 것 같아 빼버리고 갯수만 기록한다. 이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여러 목사님들이 기록해 놓은 다락방 기본메시지들 중에서 뽑아 내가 레터용지 한 장짜리 교재로 만든 것뿐이다. 꼭 넣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내가 직접 만든 것은 대여섯 장정도이다. 또한 훈련 대상자들에 따라 보여줄 류목사 전도강의 비디오 목차도 마련해 두었다.
LA에서 돌아와 겨울 내내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몰두했고 2005년 봄이 되어 개괄적인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나는 이것을 당회에 보고 드렸고, 내가 만든 총 168개의 메시지들을 순서대로 복사해 서류파일 박스에 넣어 담임목사님께 드렸다. 또한 주변의 다락방 목사님들께도 똑같이 나눠드렸다. 세계 선교사 대회때 한국에 들어가 모든 선교사님들에게 복사해서 나눠드리라고 본부에 전달했다. 이것이 선교사님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2005년 여름부터 다락방 재생산 시스템을 실행해 보려고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이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다음 시간에는 내가 이 재생산 시스템을 어떻게 실행했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가 나왔고, 그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겠다.
PS 다락방 본부에서 나의 글을 다락방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네이버에 고발, 게시중단 시킨다면, 나는 이단전문 기독교포털뉴스(정윤석기자) 교회와 신앙(최삼경목사) 현대종교(탁지원소장)에 기고해서 구글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겠다. 현재까지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7)은 기독교포털뉴스 정윤석 기자가 자기 홈피에 올려도 되는지 문의해와 그 한 곳만 허락해주었다. 나는 다락방 내부에서 갈등하는 신실한 분들의 탈다락을 위해서만 글을 올린다. 나는 나를 반대하는 다락방 교회, 목사,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 그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는 것이고 그 결과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히9:27). 그래서 내용 전개상 반드시 써야할 경우가 아니면 생략하고 써도 그 실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 더, 내 글을 지지하는 이 까페분들도 나를 언급할 때는 이목사님으로만 불러주시면 좋겠다. 이 까페에는 많은 분들의 탈다락을 돕기 위해 아무런 댓가 없이 수고하시는 신실한 목사님들이 계신다. 멀리 떨어져서 몇 번 글 올리는 내 수고는 그분들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8) - 나는 왜 다락방 목사가 되었는가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9) - 류광수 사탄신학 속에서 눈물로 십자가를 만나다.
다락방 전도단체는 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사역 지교회를 통해 되어지는 전도 하는 곳이다. 이것이 류광수 목사가 주장해온 성경적 전도방법이요 다락방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거기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하려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락방에 참여했다. 수천명 렘넌트 집회, 수백억 RUTC는 다락방이 되어지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다락방이 되어진다고 해서 모여든 사람들을 모아 집회하며 다락방이 되어지는 증거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초창기 류목사가 한국교회는 현장에서 생명운동 안하고 건물전도 유혹목회 한다고 비판한 그대로다. 다락방 교회와 성도들 현장에서 재생산 모델이 나와야 다락방은 류목사가 주장한 대로 성경적 전도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해봐도 그 전도가 되어지지 않았고 내 주변이나 다락방 전체에서 찾아도 그 모델이 없었다.
다락방은 구조적으로 재생산이 안되게 되어있다. 사역자들은 다락방을 복음편지 이상 할 수 없고, 그 다음은 뭐해야 할지 모른다. 다락방에서 불신자를 영접시켜 사명자를 발굴하고, 미션홈에서 그를 사역자로 양육해서 다시 다락방을 개척해 파송시킨다. 이렇게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당연히 새가족 정착메시지, 불신자 전도메시지, 사명자 양육메시지, 사역자 훈련메시지 등 각 단계마다 필요한 정확히 구별된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류목사의 입이 아닌 현장 사역자 손에 교재로 들려져 있어야 한다. (다락방 훈련교재들은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이 똑같다. 류목사 집회용이다. 현장전도용도 아니다. 그 책을 가지고는 현장 다락방 사역자가 또 다른 사역자를 재생산 해낼 수 없다)
복음편지 하나로 모든 사역자 훈련을 하라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훈련계획이 없다는 말이다. 30년 다락방에 올인한 목사도 자기 교회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본부훈련과 류목사 집회 참석시켜 은혜 받게 하는 것이 다다. 재생산이 안되는 것은 모든 것을 류목사의 입에 집중하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사역자의 영적문제, 율법체질 때문이라 하면 다락방 할 사역자는 예수님뿐이다. 류목사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다락방에서 누가 누구를 치유한단 말인가?
30년 다락방한 분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그때 류목사가 지금 같은 RUTC 메시지를 했다면 다락방에 참여하시겠는가? 30년 훈련에 올인한 결과가 오늘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때 다락방을 시작하셨겠는가? 나는 전혀 아니다. 류목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락방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류광수 목사가 생각하는 세계복음화는 각 교회와 지역현장에서 재생산 되는 다락방이 아니라 자기가 메시지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세계복음화를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같이 집회만 할 수는 없다. 30년 훈련했는데도 각 교회가 스스로 다락방할 수 없다면, 30년 배운 사람들이 아직도 혼자서는 다락방을 할 수 없다면, 류목사가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것은 황모박사의 줄기세포 논문같이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일 가능성에 훨씬 더 많은 무게를 둔다.
2005년 여름이 시작되며 다락방 재생산 시스템을 시행해보기 시작했다. 책상과 현장은 다르기에 조심스럽게 실험적으로 해나가며 고쳐나갈 생각이었다. 내 목표는 하나였다. 내가 현장메시지로 사역자를 훈련하고, 내게 배운 사역자는 그 메시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락방을 한다. 2-3세대 재생산은 생각도 안했다. 1세대만 재생산되면 대성공이라 생각했다. 그것 하나만 목표했다.
어차피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기에, 기도하며 교회 내에서 두 명의 사역자를 택했다. 다락방 초창기부터 훈련에 적극 참여해온 사십대 후반의 교회 내 대표 여집사들이다. 가족 모두 다락방 요원이고, 생활수준, 기본학력... 모두 좋았다. 이분들은 복음편지를 가지고 다락방을 인도한 경험이 많고, 또 누구에게도 말로는 지지 않는 분들이었다(사역자 A, B). 마침 한국 다락방교회에서 우리교회로 온 사십대 초반의 여집사들이 있었다(사명자 Y, Z). 이분들은 다락방을 시작한 기간이 짧았고, 다락방 헌신도는 확실하지만 기본합숙정도 받고 미국으로 갓 이민 온 것이다.
나는 교회 미션홈에서 사역자 A와 B를 불러 양육했다. 그분들에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다락방과 한국교회를 살리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기도모임을 하고 사명을 고취시켰다. 다락방 재생산이 목표임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훈련시켰다. 다락방에서 해야 할 메시지들을 확인시키고 강단메시지 5분, 교재메시지 20분, 기도 및 간증 10분... 나머지는 성령인도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 A에게 Y를 맡기고, B에게 Z를 맡겼다. 나는 사역자 A와 B만 양육했다.
처음 몇 개월은 잘 되었다. A와 B는 열심히 사역했으며 Y와 Z도 다락방에 열심히 따라왔다. 교재는 진도대로 나가고 있었고, A가 사역한 Y는 한국에서 온 주재원에게 그 교재를 가지고 다락방을 몇 번 했다. 이대로만 가면 뭔가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A는 리얼터(Realtor)였는데 Y가 다른 리얼터(부동산중개인)를 통해 집을 구입한 것이다. 분명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A와 Y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Y는 A와 다락방을 하고 싶어 했다. Y는 자기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가서 해줄 메시지를 달라고 해도 A가 Y와 다락방 하기를 싫어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난감했다.
B와 Z는 다른 문제였다. Z의 남편이 교우 두 명에게 금전사기를 친 것이다. 어떤 사업에 교우들의 돈을 투자시키고 실제 그 사업을 안했다. 이 때문에 사기당한 교우들은 매우 힘들어 했고 교회는 그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B가 Z에게 다락방 하기를 싫어했다. Z는 CCC(대학생선교회) 출신으로 성품도 좋고 가능성 있는 사명자였는데 남편 때문에 사기꾼이 되었고 B와의 다락방이 중단되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2005년 가을, 다락방 재생산을 목표로 시작한 나의 첫 시도는 그렇게 지나갔다. 처음 약간의 가능성을 보이며 출발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로 다락방은 중단되었고 열매 없이 끝났다. 약간 허탈했지만,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얻은 교훈을 다락방에 적용하려고 고심하고 있는데 이번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2006년 1월, 교회가 예배당 구입을 시도하다 큰 금액을 사기당한 것이다.(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이로 인해 교회 분위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당회는 나에게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몰아가셨다.
2006년 3월, 전도신학원에서 강의하는 도중 갑자기 다락방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을 모르는 목사는 없다. 신학교에서 수도 없이 배우고 나 또한 전도신학원 선교사훈련원에서 여러 차례 강의했었다. 그런데 그 단어가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날 집에 돌아와 신학교에서 배운 강의노트와 전공서적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기독교 서점에 가서 하나님 나라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고, 하여튼 하나님 나라라고 쓰여 있으면 무조건 읽어보았다. 그해 세계선교대회로 한국 나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책 수십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내게는 하나님 나라가 다락방의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로 여겨졌었다. 모든 사역이 중단된 2006년 내내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몰고 가셨다.
나는 그때까지 다락방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재생산 메시지 시스템이 없고(그래서 2005년에 메시지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사역자들이 모든 다락방을 영적문제 흑암세력으로 몰아가는 거친 적용의 문제로 느꼈기에 2006년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기반으로 본교회 중심의 다락방을 구상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기존의 천편일률 영적문제 전도다락방에 구역모임 개념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다. 이 지역다락방에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불신자 전도, 영적 문제자 치유, 제자훈련이 모두 들어있다. 이 다락방의 가장 큰 특징은 전도 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데 목적이 있다. 전도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결론으로 되어 진다.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전도를 결과로 보는 것은 대단한 차이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지금은 큰 의미가 없어져 생략한다.)
즉 본교회 중심의 다락방 전도란, 교회가 주일예배, 성경대학, 지역다락방 시스템을 가지고 전도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주일 본교회 예배가 있고, 주중에 성경대학을 통해 하나님 나라 성경공부를 하며, 주중 지역다락방 성도의 모임을 통해 생활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전도는 이 모든 것의 종합으로 되어 진다.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시스템을 가지고 한다. 모두가 참여하되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동참하고, 그 열매는 교회 모두가 함께 얻는다. 모든 목표는 불신자 전도이고, 이를 위해 사역자 훈련은 필요한 사람만 시키고 본부 훈련에 적극 참여한다. 이것이 다락방 목사로서 그때까지 내가 가진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류목사 메시지의 문제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06년 나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본교회 중심 지역다락방을 만들겠다고 시작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셨다. 하나님은 나를 점점 십자가 신학으로 몰고 가셨다. 신학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십자가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이 아니었다. 이전에 다 배웠고 알고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내가 다락방에 십수 년 몸으로 체험한 경험들과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때는 하나를 읽으면 서너 개가 연결되어 큰 집이 지어져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러다가 2007년 초, 나는 신학 책에서만 보았던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원론과 율법폐기론(방탕론) 이단이 다락방 복음으로 재현된 것을 보았고, 그것과 대조되는 칭의와 성화의 십자가 복음을 완전히 구분하게 된 것이다. 류광수 목사가 사탄신학임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충현교회 중등부 겨울수련회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목사 서원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십자가에 감격하고 성경을 많이 읽었다. 대학 때는 네비게이토 5확신, 7생활, 60구절 180구절을 암송하고, 군대 가서 로마서의 상당부분을 통째로 외웠다. 나는 로마서를 손으로 두 번 써서 집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런 내가 왜 류광수 사탄신학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현장전도에 열광해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당시 다락방에 참여했던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은 이미 한국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가진 상태에서 전도하기 위해 류목사의 영적 메시지를 받아 들였다. 한 번도 경험 못한 불신현장 무당전도 등이 되어지는 것을 보고 다락방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뒤돌아보니 다른 곳에 와있게 된 것이다.
다락방과 신천지의 차이가 있다. 신천지는 공개적으로 정통신학을 틀렸다고 말하며 신천지 교리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다락방은 다르다. 다락방 어떤 목사도 로마서 십자가 신학을 틀렸다고 말하거나 믿는 사람은 없다. 내가 아는 한 없다. 그분들은 다락방이 정통신학 위에 전도현장 메시지를 추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다락방은 아무 문제가 없고 류목사를 이단이라 주장하는 한국교회의 지적에 동의하지 못한다.
현실은 다르다. 다락방은 전혀 십자가 정통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구원론이 정통신학과 분명 다르다. 다음시간에 보겠지만 다락방 복음은 십자가 복음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그 시작점이 다르고 그로인해 성도에게 나타나는 신앙생활(구원론)이 다르다. 류광수 다락방 복음은 분명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다른 복음이다(갈1:8) 그런데 왜 다락방 성도들은 자신들이 십자가 정통신학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까? 전도열광주의에 빠져 너무 오랫동안 류광수 사탄신학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신학적 무지에 교만함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정통신학은 이론신학이고 류목사는 불신현장 전도신학이라 용어는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고 하는데 아니다. 신학과 신앙, 강단과 현장은 분리될 수 없다. 류목사가 지금까지 설교한 것이 류목사의 신앙이고 신학이다. 류목사는 절대 정통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류목사는 사탄을 말해서 이단이 아니라, 십자가를 말하지 않아서 이단이다. 류목사가 십자가의 칭의 성화를 80% 무게중심으로 말하고 사탄을 20% 강조했다면 아무도 그를 이단이라 말하지 않는다. 류목사 설교의 무게중심은 90% 이상이 사탄이다. 죄사함과 칭의는 10%도 안된다. 그것도 용어 사용정도로 넘어간다. 그래서 사탄신학이고 이단이다. 로마서의 칭의와 성화를 정확히 알게 되면, 다락방 사람 그 누구도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과 같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이 둘이 같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중 어느 하나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2007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다락방의 문제는 재생산이 안되는 전도방법론이 아니라 류목사 사탄신학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는 다락방이 이단임을 상상도 못했다. 류목사 메시지를 내 입장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류목사도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영적 메시지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류목사는 십자가 죄사함의 칭의와 성화 복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을 결박하는 신학이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다. 다락방에서 안수 받은 목사로서, 다락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다락방 안에서 류목사 메시지를 들을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나는 금요철야에 류목사 메시지를 다운받아 틀어주고 있었다. 로마서 설교가 나오는데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류목사 사탄신학 때문에 십자가에서 멀어지고 있는 성도들을 보며 다락방 부목사로서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당시 나는 다락방이 틀렸다는 것은 알았지 이것이 복음이라고 성경전체를 가지고 말하기는 아직 부족했었다.
2007년 10월, 다락방 동부노회가 Sandy Cove 수양관에서 열렸다. 그날 회무를 마치고 목사님들은 자리에 남아 교제하시는데, 나는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로마서를 꺼내들었다.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조용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여셨고 갑자기 로마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수도 없이 암송했던 로마서가 완전히 나의 복음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류목사가 틀렸다”는 말 보다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용은 십자가 복음의 영광 23장에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주제로 세 번에 걸쳐 언급하게 될 것이다.
2007년 11월, 담임 목사님이 강단을 비우시게 되어 내가 주일설교하게 되었다. 나는 그 전날 한숨도 못 잤다. 밤새도록 보혈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이전에 다락방 복음을 설교하던 나의 죄를 회개했다. 내 속에서 복음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란 설교를 했고, 한 달 뒤에는 “우리 주님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날 이후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로마서 십자가 복음으로 설교 하기 시작했다. 내 설교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내용이 정확한 성경 진리였고, 무엇보다 마지막 적용을 다락방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서 십자가 복음을 35분 설교하고 마지막 적용 5분은 이 복음을 가지고 지역에서 누리는 것이 다락방, 전도 나가는 것이 팀사역, 요원 키우는 것이 미션홈... 지교회라고 적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이 적용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류광수 목사가 사탄신학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포기한다면 다락방 영적메시지를 한국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불신자 현장전도용이란 전제하에서 말이다. 무속신앙과 불교 문화권에 있던 불신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용어 전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에게 다락방 메시지는 약간만 수위 조절하면 십자가 복음을 적용한 현장메시지로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교회 안으로 데려와서는 칭의와 성화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는 전제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나는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야 다락방 목사님들의 순수했던 지난 날의 열정이 부끄럽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류목사는 절대 자신의 메시지를 포기할리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초, 당시 지교회 사역의 모델로 소문 난 부산임마누엘교회 H지교회를 탐방했다. 그곳은 기도수첩의 원조라고 하는 L전도사가 인도하고 있었고 나처럼 참관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 지교회로 보였다. 류목사 설교비디오를 시청하고 함께 포럼하며 그날 기도수첩을 간증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기도수첩은 문제가 많았다. 기도수첩은 몇 주 전 류목사 강의한 것을 요약해 매일 읽도록 만든 것인데, 성경도 아닌 류목사 강의요약을 그 단어 하나하나씩 하나님 말씀 성취로 적용시키는 것은 넌센스요 광신적 신비주의였다. 신학 없는 현장전도사의 신비주의 적용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용인하고 오히려 잘한다고 부추기는 목사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류광수 목사의 어록이 성경말씀과 동등한가? 그렇다는 사람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 많은 것이 있지만 전도방법론은 이제 의미 없게 되었기에 이정도로 마치겠다. 서울임마누엘교회와 Y교회 내용도 생략한다. 안양 D교회는 가보지 못했다.
2008년 5월경, 어느 분이 알려줘서 안티다락넷 까페에 들어갔다. 다락방 사람들이 복음이 뭐냐고 질문하는데 까페 측에서 적절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 자 올린 글이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이라 구분한 것은 류목사가 자신의 전유물처럼 사용하는 복음이란 용어를 되찾아오기 위함이고 또 류목사 보다 먼저 십자가 용어를 선점하려 했기 때문이다. 박윤식 구속사를 한국교회가 미온적으로 대처했기에 구속사란 용어를 빼앗겨 버렸다. 이제는 구속사란 용어를 쓰면 박윤식으로 오해받을까봐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국교회의 십자가를 류광수 목사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선점 했다.
당시 나는 다락방을 떠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전도하러 류목사를 따라가다 전도열광주의자가 되었지 신천지 같은 괴물이 아니다. 당시 나는 다락방 개혁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생각했다. 다락방 내에서 로마서 복음을 계속 전하면 류목사 메시지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류목사 아니라 그 누구도 성경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목사로 믿고 따라와 준 다락방 성도들에 대한 책임이고 또 다락방에서 안수 받은 부목사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적인 내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사용했다. 어느덧 다락방 핵심요원들에게 이광은 목사는 본부메시지가 아니라고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9년 6월,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내가 다락방 핵심요원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이것이라고 말하려면 20시간 연속설교를 해도 모자란데 그들은 그것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복음설교를 글로 남겨 그들에게 주고 싶었다. 5주간(6.12-7.25)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계속 설교하듯 글을 써내려 갔다. 십자가 복음의 영광은 신학서적이 아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에게 23번 연속 설교한 것이다. 그것도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사람들에게, 복음은 사탄 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죄사함에서 오는 칭의와 성화라고 말하는 글이다. 내 글은 오직 그 목적으로 쓰여 졌다.
한 가지, 십자가 복음의 영광은 6장부터 9장까지가 중요하고 그중 핵심은 9장이다. 또 제9장 죄와 사탄의 관계 챕터에는 “십자가 복음과 사탄신학의 갈림길에서”라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류목사 메시지가 베뢰아 김기동과 동일함을 베뢰아 책들을 인용하며 각주를 달아 설명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을 꺽으려고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그런데 내 동생목사가 내 글을 읽은 다락방 사람은 누구라도 내가 류목사를 사탄신학이라 말하고 있음을 아는데, 구태여 내가 직접 말하므로 내 책을 류목사 비판서적으로 제한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인쇄 직전에 삭제했고 올바른 결정이었다.
2009년 10월 17일, 십자가 복음의 영광을 복사용지에 프린트하여 당회에 제출하고,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핵심목사님들 20여분에게도 보냈다. 그분들에게 내가 다락방 교회에서는 이렇게 설교했더니 복음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떤 부분이 다락방과 다른가를 정중하게 묻고 수정할 것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2009년 12월 첫 주 당회에서 나의 사임이 결정되었다. 우리교회는 임마누엘 지교회이기에 당회장은 류광수 목사이다. 십자가 복음의 영광은 12월 1일 최종교정 후 출판사 인쇄에 들어갔고, 나는 12월 마지막 주, 모든 성도 가정들마다 한권씩 정성껏 포장해서 전달하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라고 정중하게 말하며 다락방 교회를 떠났다.
십자가 복음의 영광은 우리주님의교회 홈페이지에 전체 게시되어 있다. 지금 보면 복음 설명이 많이 부족하지만, 15년 전 다락방 부목사의 글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마음대로 다운받으시길 바란다. 그리심 출판사와는 모든 판권계약이 종료되었고, 내가 인세로 받은 것은 책 20권이 전부다.
내가 이 까페에 글을 올리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 때문이 아니다. 다락방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없다. 나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처럼 순수하게 전도하러 류목사를 따라가다 사탄신학과 율법폐기론을 만났고, 그 속에서 고통당하며 눈물 흘리다가 십자가를 만났다. 내게는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이런 것들이 신학용어가 아니다. 내게는 십자가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요, 진리와 생명 그 자체이다.
다락방의 고통은 우리로 족하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와 똑같이 류광수 사탄신학에 눈이 가려 한국교회를 비난하며 십자가 없는 멸망의 길로 가게 할 수는 없다. 우리 자녀들이 다락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말로는 그리스도 하나 내면은 고통 속에 방황하게 놔둘 수는 없다. 우리 자녀들이 류목사 단 한 사람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실한 성도들과 거룩한 공동체를 누리게 못하게 만들 수는 없다. 사탄신학은 류목사 혼자 믿으시고, 류목사 혼자 하나님 앞에 가서 책임지시라(히9:27). 나는 이곳에 함께하는 선후배 목사님들과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드린다.
개인간증은 이것으로 마무리 한다. 다락방을 떠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많은 은혜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끼리 있을 때 하겠다. 다음 번에는 류광수 사탄신학과 십자가의 칭의와 성화 복음은 무엇이 다른가를 세 번에 걸쳐 기술하겠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9) - 류광수 사탄신학 속에서 눈물로 십자가를 만나다.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0) - 류광수 사탄신학의 근거들
이 글은 다락방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탈다락을 돕기 위한 목적인바, 철저히 다락방 안에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적는다. 오늘은 어떤 분의 요청에 따라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차이를 개괄적으로 기록한다. 류광수 사탄신학은 이곳의 많은 목사님들이 정확히 지적해 주고 계신다. 나는 그 목사님들의 글을 종합해서 일곱가지로 간략히 정리해본다.
2009년 12월 다락방을 떠날 때, 나는 류광수 목사와 전도총회에 사탄신학을 버려야 한다는 공문을 여러 차례 내용증명으로 보냈고, 후에 다락방 모든 목사님들께도 이메일로 발송했다. 이로 인해 2010년 이후 류목사와 다락방에서 원죄의 개념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다락방 복음의 핵심구조상 변화가 없다. 류광수 사탄신학에 대한 내 글은 철저히 녹취록에 근거하며 나는 그 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전도할 때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 사람 속에 역사하는 사탄을 결박해야 그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탄신학이고,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도록 기도하며 그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 십자가 신학이다.
당신은 당신과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시는가? 사탄으로 말미암은 영적문제라고 생각하면 사탄신학이고, 죄로 인한 사망의 현상들로서 성도에게서 죄를 제거하며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성화) 하나님의 방법이요, 신앙생활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십자가 신학이다.
1. 원죄와 영적문제 = 모든 인간은 하나님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혔다.
다락방 복음의 핵심은 창세기 3장(원죄 = 영적문제 = 죄, 육신, 사탄) 사건과 그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이다. 이는 죄(원죄), 육신, 사탄으로 요약되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원죄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것이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는 죄로 인해 사탄에게 잡혔기 때문이다. 셋째, 사탄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존재이다. 이것이 류목사 사탄신학의 기본출발점이다.
다락방에서 영적문제란 창세기 3장, 인간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힌 그 문제 곧 원죄 사건을 말하며 그로 인해 발생된 오늘 개인에게 나타나는 각종 어려운 문제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구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 세 직분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신다(선지자) 예수님은 원죄 문제를 해결하셨다(제사장),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셨다(왕) 즉 다락방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창세기 3장 영적문제를 해결하신 분이란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고 다락방 복음의 핵심이다.
2. 죄와 사망 =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는 아담의 본성을 가졌다.
이에 대해 십자가 정통신학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의 범죄는 사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탄은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사랑을 의심하도록 하와에게 거짓말 한다. 하와는 사탄의 거짓말을 듣고 하나님을 불신앙하며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범죄를 저지른다. 아담도 하와의 범죄에 동참한다. 죄를 짓도록 유혹한 것은 사탄이지만 죄는 아담이 저질렀으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피조물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이 죄이다. 이 죄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게 하므로 아담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단절되었다(창6:3,육체) 이 죄가 아담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시켜(사망)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받게 한다. 사망은 범죄한 아담에게 즉시 임했다. 아담은 살아가며 죽음의 현상을 체험한다. 생존을 위한 극심한 수고(창3:17), 인간관계의 갈등(창4:8) 갑작스런 사건 사고(잠27:1) 마음과 정서의 고통, 무거운 짐(마11:28) 육체의 늙고 병들고, 썩음과 해체되고(히9:27) 마지막에는 영원한 죽음, 유황불못(계20:15)에 이른다. 사탄에게 잡힌 영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사망이다.
3. 내가 저지른 자범죄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사탄인가 나인가
류광수 사탄신학은 창세기 3장 영적문제 곧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힌 것으로 정의하지만, 십자가 정통신학은 인간이 아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본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원죄라고 한다. 원죄는 인간 내면의 부패한 본성문제이지 내가 알지 못하는 영적세계에서 사탄이 나를 잡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 속에 있는 부패한 아담의 본성(=원죄,sin)은 내가 살아가며 만나는 상황 속에서 죄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자범죄,sins) 일반종교는 자범죄(죄들)을 없애라고 가르치지만, 복음은 자범죄만 없애면 소용없고 먼저 죄의 뿌리인 원죄를 없애야 하고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즉 십자가를 믿어 죄없다하심(죄용서)을 받고, 성령 받아 의롭다하심(칭의)을 얻을 때 죄의 권세를 이김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원죄가 사탄에게 잡힌 것이면, 자범죄는 내 책임이 아니고 사탄이 원인이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내 책임도 있겠으나 긍극적 원인은 사탄이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사탄을 꺽는 기도를 한다. 예수님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의 십자가는 사탄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류광수 사탄신학의 가르침이다.
만약 원죄가 내 속에 부패한 아담적 자아라고 한다면 자범죄는 내 책임이다. 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내 죄의 본성과 싸워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칭의와 성화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에서 자유함을 주시는 힘이다. 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고 거룩함을 얻도록 하시는 능력이다. 로마서 십자가 신학의 가르침이다.
류목사는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모든 문제를 사탄에게 잡힌 결과와 현상들 곧 영적문제라고 통틀어 말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사망이라 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 900여년을 더 살았다. 이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사망심판이 유보된 것이 아니다. 사망은 즉시 시작되었다. 그 현상이 아담과 그 후손들 삶의 온갖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으로 인한 영적문제가 아니라 죄로 인한 사망이다.
4.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고 위협하고 속이는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12:9) 우리 형제를 밤낮 참소하는 자(계12:10) 거짓의 아비(요8:44) 시험하는 자(마4:3)... 기록한다. 즉 사탄은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고(고후11:14), 유혹하고(창3:1-6), 위협해서(벧전5:8)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자다. 이것이 중요하다. 피조물 사탄은 하나님처럼 피조세계에서 자기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어떤 큰일을 스스로 실행하며 자기 뜻을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사탄에게 속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무당)이 있고, 두려움과 약함 등 어떤 이유이든 자기 지정의를 사탄에게 내어줌으로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 이들은 소수임을 명심하라. 성경의 주된 가르침은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죄인)이지 이런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을 통해 악한 일을 하게 만들뿐 사탄 스스로 자기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탄이 하는 일은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말을 듣도록 속이고 유혹하고 미혹하고 위협하는 것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탄을 과대평가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사탄을 과소평가해 무시해서도 안된다. 사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권세가 깨어졌다. 사탄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얻음을 막을 수가 없다. 지금 사탄의 나라는 무너지고 있다. 사탄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 사탄은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을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고 위협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불신앙)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도록(불순종) 만들 수는 있다. 이러한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무시하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험에 든다.
5. 초대교회가 전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의미
다락방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영적문제 곧 사탄에게 잡힌 것을 풀어주셨다는 뜻이다. 제사장 선지자도 언급하나 결국 사탄 꺽는 왕적 그리스도이다. 다락방 성도들은 이것이 초대교회가 증거한 복음의 핵심이라 이해한다. 즉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하나님 만나는 길(선지자), 죄 문제 해결(제사장),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심(왕)이라고 복음을 증거 했다고 생각한다. 다락방은 2천년만에 초대교회와 똑같이 원색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사탄을 깨뜨리신 왕이 강조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 정통신학은 다르다.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그리스도의 의미는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삼중직을 말하지 않는다. 교회사에서 삼중직은 4세기에 불완전한 형태로 처음 나타나고 조금씩 발전하다가 16세기 요한칼빈에 의해 오늘 같은 형태로 완전히 정립되었다. 즉 초대교회와 사도행전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다락방처럼 왕 선지자 제사장의 뜻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메시야/그리스도 예언은 모세(신18:15)와 다윗(삼하7:13)에게도 있지만, 주로 이스라엘 멸망기에 활동한 16명의 문서선지자들(대소선지서)의 핵심예언이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멸망, 성전파괴, 바벨론 포로를 목도하며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신약교회)이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한다, 그때는 새언약이 출범하며(렘31장)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며(욜2장) 새이스라엘이 일어나고(겔37장) 새성전이 세워지며(겔41-42장) 여호와께서 새성전에 좌정하시고(겔43장) 새예배가 드려지며(겔43-46장) 새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며(겔47장) 새하늘과 새땅(사65장)이 도래한다(already, not yet) 그 때가 여호와의 은혜의 혜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며 말세이고(사61:2) 유대인과 이방인 차별 없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슥13:8)가 돌아온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신에 충만한 그리스도(사11장)와 그의 속죄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고(사53장)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왕권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나라(신약교회)를 세우신다(단7장)
“예수가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님이 그 그리스도(Jesus is the christ)”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었고 거짓 왕이지만 헤롯도 있었다. 그들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들이지만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그리스도는 아니다. 초대교회가 전파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약 모든 선지자들 특히 16명의 대소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예언들을 성취하신 분이란 뜻이다.
한가지 더, 초대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 7장의 인자 곧 영광의 왕으로 오는 정치군사적 영웅지도자 그리스도를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흘려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사53장) 하나님의 아들(시110:1)이셨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전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뜻은 십자가에서 속죄제물로 죽으심으로 죄인들에게 새언약의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 나라 참이스라엘 곧 신약교회를 창조하신 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본체라는 의미이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린 왕,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신 선지자,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제사장이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았다. 삼중직은 후대에 교회가 예수님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다 보니 예수님의 역할이 구약 하나님 나라의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셨다고 알게 된 것을 설명한 것이다.
6. 거룩함이 구원의 핵심이다. 성령은 죄인을 거룩하게 만든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의로 거룩하고, 거룩해지고, 거룩해져야 하고, 거룩해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고/연합되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인을 거룩하게 만든다. 죄인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기에 복음으로 죄를 이기게 하신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없다하심(죄용서) 받는다. 죄용서는 이전의 지은 죄책을 사하심이다. 형벌면제하심이다. 또한 죄인이 예수 믿으면 의롭다하심(칭의)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속죄 피를 근거해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해주심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령이 내주하심이다. 칭의는 지금 역사하는 죄의 권세를 이기게 함이다. 결국 죄에서 벗어나게 하심이다. 죄에서 자유를 얻음이다.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닌 죄를 짓지 않을 자유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신학용어를 몰라도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신다. 완전거룩은 불가능하다. 거룩을 향하는 방향성을 말함이다. 우리 할머니 세대는 신학이 없고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도 예수 믿으면 죄를 멀리하고 거룩을 사모했다. 성령 받으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성도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성령은 거룩의 영이시며 성결케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다면 성령 받았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절대 그럴 수가 없다. 방향성을 말함이다.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은 동일한 그리스도 구원언약이다. 구약은 돌판에 세긴 율법을 자기 힘으로 지켜 거룩해지고, 신약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세긴 하나님의 법을 지켜 거룩해지는 것이다. 신구약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됨이다. 거룩해지는 방법에 있어 율법을 스스로 지키느냐(구약) 성령의 능력으로 지키느냐(신약) 차이만 있을 뿐이다. 복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한다. 성령은 죄인을 거룩하게 만든다. 거룩함이 신앙의 결과이다. 성령 받으면 거룩을 향해 나아간다.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살후2:13-14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전4:3-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고전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PS 거룩에 관한 암송구절 50개는 더 적을 수 있다. 이 분명한 진리를 다락방 율법폐기론 때문에, 복음은 성도를 거룩하게 만든다고 성경구절로 제시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다. 다음번에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죄인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을 언급하겠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0) - 류광수 사탄신학의 근거들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1) -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까지
죄는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에서 기원한다. 내가 저지른 죄들은(자범죄) 부패한 아담의 본성으로 오염된(원죄) 나의 의지에서 기원했다. 사탄이 유혹했지만 그 유혹을 듣고 내가 판단했고(지성) 내가 좋아했고(감정) 내가 하고자 했다(의지). 그러므로 내가 저지른 죄의 책임은 내게 있다. 사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이 저지른 죄의 내용이 기록되지만 “죄”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죄”는 가인과 아벨사건에서 처음 등장한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이 피조물임을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에덴의 그 죄(Sin)가 가인의 본성 속에 자리 잡아 자범죄(sins)를 저지르게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는 용어로 직접 말씀하셨다.
창4:7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죄의 소원(욕구.의지)가 있지만, 가인은 그 죄의 욕구대로 행해서는 안된다. 사탄의 유혹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저지른 죄의 책임은 사탄에게 전가할 수 없다. 저지른 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죄는 내 영혼(인격)의 의지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약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 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도 죄의 기원은 자기 욕심(하고자하는 마음, 의지) 때문이라 말한다. 시험(유혹)에 넘어진 책임을 하나님 혹은 사탄이라 핑계하지 말라. 내 죄의 욕심(소원,의지)이 나로 자범죄를 짓게 만들고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받게 만든다. 사탄이 나를 유혹하고 미혹하고 위협했겠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판단하고 좋아하고 하고자 해서 그 일을 저질렀기에 그 책임은 내게 있다. 죄책은 내게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원죄로 인한 자범죄의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도 이 죄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스스로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거룩해질 수 없다. 구원 얻을 수 없다. 모두 죄의 종이며 사망의 형벌에 놓여있다. 마치 사고 난 여객기가 수심 5000m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나올 수도 없고 누가 들어가 건져낼 수도 없다. 그게 죄에 묶인 죄인의 현상태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출발점이다.
1. 십자가는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로 죄인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선포한 바울의 복음설교 전체를 기록한다(행13장). 분명 바울은 자신이 가는 모든 회당에서 이 복음내용을 증거했을 것이다. 누가가 다른 회당 설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중복되기 때문이고,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드로아에서 바울이 밤새도록 강론한 내용도 이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바울은 드로아 강론 얼마 전, 고린도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상세히 적어 로마교회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의 로마서이다.
행13:38-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구원은 죄인을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사람 인격에 내재된 아담의 본성(죄)을 제거하므로 죄인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게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으로 죄인에게 죄없다하심(=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을 주는 구원이다.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 지은 것이므로 죄용서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한다. 죄용서는 반드시 죄 값인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하기에 하나님께서 대신 내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성삼위 하나님의 본체 제2위격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누구든지 예수님 십자가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면 죄용서 받는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 받음으로 여기신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는 회개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함께 죽는 것이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 앞에서 엎드려, 피조물인 내가 마땅히 섬겨야할 하나님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내가 주인되어 살아온 모든 것을 회개함이다. 나의 옛사람, 아담적 자아(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 회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믿음). 회개를 동반한 믿음이 죄사함 얻게 하고(눅24:47), 믿음으로 귀결된 회개가 생명을 얻게 한다(행11:18)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믿음은 바알종교의 기복신앙이고, 예수를 주님으로 믿지 않은 회개는 바알종교의 자기학대이다(왕상17장). 이것이 “그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24:47)”이고 “생명 얻는 회개(행11:18)”이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말한 “구원 얻는 믿음(행16:31)”이고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20:21)”이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때 회심이 일어난다.
3.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것
복음과 그리스도를 깨달음은 성경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심오한 진리를 깨우쳐 갑자기 도사가 되거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꺽는 왕이심을 크게 확신함이 아니다. 복음을 깨달음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절대로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진리의 성령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중생)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조명을) 해주신 사건이다.
진리의 성령은 언제나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요17:17)“가 선포될 때,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엡1:13)”이 선포될 때 역사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선포하는 복음이 증거 될 때, 성령께서 그 복음진리와 함께 역사하사 죄인의 마음을 열어주신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깨달음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죄에 대한 통회자복, 십자가 구원에 대한 감사감격의 눈물이 나온다. 이것 외에 다른 깨달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4. 죄인을 죄없다하심(죄사함) = 예수님을 믿는데 내 죄가 용서되는 이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갈2:20).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믿는 나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다. 그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의 형벌을 받고 죄의 값을 치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죄를 전가하신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 외에는 죄인을 실제로 죽이지 않고 죄값을 지불하는 방법이 없다.
회개하고 예수 믿는 죄인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전2:7)요 하나님의 비밀(골1:27)이며 하나님의 감추었던 계시(롬16:26)요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엡1:9) 곧 십자가 복음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주신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 자기 죽음을 선언하지 않는 자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는 자에게는 죄용서가 없다.
죄사함이란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덮으심으로 죄없다하심이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 받고 죄용서 받았어도 부활이전 까지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죄를 다시 짓는 점이다. 죄의 형벌은 면제되었으나 죄의 권세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죄인에게 죄사함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일으킨다.
죄사함은 분명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에게 죄가 없고 형벌이 없다고 법정적으로 최종선언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혼란을 발생시킨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는 회개함으로 용서받음이 이해된다. 현재에 지은 죄도 지금 회개하면 죄용서 되니 이해된다. 그런데 아직 짓지도 않은 미래의 죄까지 이미 용서되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어차피 마지막 날에 다 용서받을 것이니 오늘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논리적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 이게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가?
5. 죄인을 의롭다하심(칭의) = 성령내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다.
그래서 죄사함은 반드시 의롭다하심(칭의)과 함께 주신다. 죄사함은 내가 저지른 죄의 형벌을 면제하고, 칭의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 죄의 권세와 싸울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칭의가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구원받은 죄인이 오늘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사함 받고 성령 받아 칭의를 얻을 때뿐이다. 죄인이 칭의를 얻음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죄없다하심(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의 구원론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는 곳마다 전파했고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설교에 그 핵심을 정확히 기록했다(행13:38-39) 참고로, 죄사함과 칭의는 회개와 믿음처럼 분리될 수 없는 동시적 구원사건이지만 이처럼 논리적으로 구분해서 이해함이 훨씬 유익하다.
우리는 이미(already) 구원받았지만 아직(not yet) 부활의 완성은 받지 못했다. 우리는 죄용서(죄값을 치루고 형벌면제)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고(원죄) 자범죄를 짓는다.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죄의 권세아래서 힘들어 하며 내 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 루터의 표현처럼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죄인이다.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이지만 여전히 죄인이다.
죄용서 하셨지만 여전히 죄인인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의롭다하시는 로마서의 칭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필요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류구원 완성을 선언하시면 지구역사는 종결되고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며 그때 우리는 죄가 없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내 죄와 싸우는 고통도 없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이 더 있으시기에 인류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그때문에 죄인인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의롭다하심(칭의)의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6. 칭의로 구원 얻은 죄인은 반드시 죄를 멀리하는 성화의 삶으로 나타난다.
반드시 그렇다. 사람마다 성화의 속도가 다르고, 성화의 강도가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받고 성령받은 사람은 그가 어떠한 죄인이든지 반드시 달라지게 되어있다. 이것이 없다면 성령 받은 것이 아니다. 오늘 성화의 삶으로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가 칭의구원 받았음을 선언 받는 것이 아니다(유보적칭의). 오늘 성화의 삶으로 우리가 이미 칭의구원 받았음을 입증해내야 함도 아니다. 오늘 성화가 없다면 칭의 자체가 없는 것이다.
성화는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되고 안되고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시면 그 누구라도 성화가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성령이 없으면 성화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임하므로 그가 어떤 죄인이었든지 성화가 나타난다. 이는 필연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이전까지 완전성화는 없다 거룩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로마서의 구원론은 죄용서 받은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칭의)이 어떻게 성도의 삶에서 의로움으로(성화) 나타나느냐는 가르침이다. 왜 그렇게 성화가 중요한가?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기독교 모든 교파는 칭의로 인한 성화의 구원을 가르친다. 구원 받았지만 죄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성도가 어떻게 오늘의 삶에서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백성이 되어가는가(성화)를 말하지 않는 교파는 단 하나도 없다. 신학전통에 따라 칭의와 성화의 다른 면을 강조할 수 있지만,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칭의가 반드시 성화로 열매 맺는다는 가르침이다. 성화가 없다면 성화를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칭의를 확인해야 한다. 예수 믿음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7. 나머지 몇 마디...
내 40년 친구가 있다. 대학 같은 과에서 만났다. 1학년 때 방황하는 그에게 나는 복음을 전했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보다 1년 먼저 신대원에 들어가 예장합동측 목사가 되었다. 공교롭게 그도 미국 동부에서 20여년을 목회를 했고, 두 아이는 잘 성장했으며, 올해 1월 한국에서 초빙하는 교회가 있어 귀국했다. 나는 그가 귀국하기 2주 전에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그 친구가 떠나며 내게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광은아! 내게 복음 전해줘서 고맙다.” 나는 그 한마디에 울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었다. 하나님은 그 한마디로 지나온 나의 모든 수고를 위로해주셨다.
내가 예수 믿고 거듭날 때나, 내 친구가 복음 듣고 구원 받을 때나 사단결박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탄이야기 하나 없는 로마서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구원받았다. 우리 이전에 구원받은 모든 신앙의 선배들도 그러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주기철목사 등 모든 선배들도 사탄결박하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무당이나 귀신들린 사람은 다른 상황이다. 그들은 복음 자체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음전할 때는 사탄을 대적하며 직접 싸우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소수에 해당하는 아주 특수한 상황임을 명심하자. 모든 사람은 죄인이지 사단에 잡혀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하신 약속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 백성삼겠다는 하나님 나라 구원 약속이다. 이 하나님 나라 구원을 받는 방법이 십자가 복음이다.
다락방의 언약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언약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그리스도 또는 복음이라고 축약하고 단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이 없어진다. 다락방에서 언약이 확실하냐는 말은 그리스도 혹은 복음에 답이 났느냐는 말과 같다. 이는 류목사가 하나님이 쓰시는 시대적인 전도자이며 다락방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체임을 결론냈냐는 말로도 발전한다. 성경의 언약개념과 전혀 다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락방이 말하는 복음, 그리스도, 언약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계속 말해왔다. 다락방 복음은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다락방 그리스도는 모든 불신자를 사로잡은 사탄을 꺽는 그리스도이며, 다락방 언약은 사탄 꺽는 그리스도가 확실하다고 믿는 언약이다. 성경과 다르다.
여기에 다른 이견이 없었으면 좋겠다. 자기교회의 목사님이 어떻게 설교하시든, 본인자신이 다락방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하셨든, 류목사가 이렇게 가르쳤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십 수년간 수없이 말해온 류목사의 설교 녹취록은 명확하다. 류목사가 사탄신학이고 그게 다락방임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아직도 JMS를 재림예수로 믿는 사람이 2만명이 넘고, 94세 이만희가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것을 믿는 신천지 신도가 10만명이 넘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성령의 역사를 담보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명의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다(마7장) 사도요한은 교회가 정치권력(열뿔짐승)의 핍박과 종교권력(두뿔짐승)의 미혹 속에 광야에서 힘들게 살아감을 환상으로 본다(계13장) 음녀 바벨론은 화려한 옷을 입고 손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포도주 금잔을 들고 그리스도를 버리고 함께 음행에 참여하자고 교회를 유혹한다(계17장).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두뿔짐승 거짓선지자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라 광야로 나간 열한 교회와 열여덟 분의 목사님을 지지하고 함께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 다음에는 성만찬 메시지를 통해 구원의 본질과 기도의 의미를 기술하겠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1) -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까지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2) - 성령 받은 증거, 회심 성화 견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니쉬마트 하임)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영(네페쉬 하야)이 된지라”(창2:7)
사람은 육체(body)를 가졌으나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호흡(루아흐,성령)을 불어넣어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이 생영(네페쉬 하야)이란 의미이다.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사람창조의 특별한 원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도록 창조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뵈옵고 섬길 수 있었을까? 아담은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다. 아담은 그의 영혼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루아흐)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교제하고 섬겼다. 이는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새에덴)에서도 동일하다. 성도는 보좌에 앉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의 눈으로 보지만 영이신 성부하나님은 그렇지 못하다. 부활한 성도는 첫 아담이 그러했듯 그의 안에 충만하게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성부하나님을 인식하고 동행하고 경배하게 된다.
성령이 구원의 보증임은 우리가 부활이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것을 지금 먼저 주심이다.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돕기 위해 한시적으로 보조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천국생활의 핵심이다.
고후5:4-5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전통적으로 루아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석하고, 네페쉬는 생영(살아있는 영혼=네페쉬 하야) 곧 하나님의 호흡을 가진 사람의 영혼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생영은 네페쉬 하야이다. 이 네페쉬 하야는 하나님의 호흡을 가진 영혼이기에 나는 하나님의 호흡을 성령이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루아흐라고 설명한다.
좀더 자세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니쉬마트 하임(생기=하나님의 호흡.영)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네페쉬 하야(생령=살아있는 영혼)가 되었다. 네페쉬 하야(생령)는 니쉬마트 하임(생기)를 가진 사람의 살아있는 영혼이다. 중요한 것은 물고기와 새, 땅의 모든 짐승을 창조하시고 그들도 네페쉬 하야라고 했다. 즉 네페쉬 하야는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지 않은 모든 살아있는 짐승들에게도 쓰였다.(창1:20.21,24)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네페쉬 하야(줄여서 네페쉬)라는 단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호흡/생기 니쉬마트 하임(줄여서 네샤마)가 들어간 여부 외에는 없다. 그래서 흙으로 만드신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하나님 호흡 네샤마(생기) 속에는 사람의 영혼이 들어있되, 사람의 영혼을 살아있는 영혼(네페쉬) 되게 하는 하나님의 호흡(네샤마)의 핵심은 루아흐(성령) 이다.
하나님의 호흡(네샤마) 속에 성령(루아흐)과 사람의 영혼이 함께 있었다고 해서 이 둘은 결코 뒤섞이거나 혼합되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의 영혼 속에 영의 기능을 담당하는 한 부분이 아니다(삼분설) 사람의 영혼은 지금 우리와 동일하되(이분설)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을 감싸고 붙잡고 연합해주시는 것이다. 이는 신약에서 가르치는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동일하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시자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을 육체라고 부르며(창6:3), 사람의 살아있음이 오늘날 의학적으로 숨을 쉬는 여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나셨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신 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사람 창조 때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실 때가 가장 적합하다(창2:7). 왜냐하면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호흡 없이 단 일초도 살지 않았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성령은 아담이 창조된 그 시점에 들어가셨을 것이란 사실과 일치한다.
또한 에스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루아흐=성령)을 불어넣으니 살아나는 것(겔37장),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요20장), 아담은 산영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 바울이 말한 것(고전15장), 구원은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요3장) 무엇보다, 성만찬 강화에서 성령을 구원의 핵심원리로 말씀하신 것(요14장-17장) 등... 신구약의 전체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1. 생명 = 성령 받은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삶(창2:7)
에덴에서 아담은 살아있는 영적존재였다(창2:7). 에덴에서 아담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고 섬기며 살아가던 삶이 생명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성령께서 사람을 떠나시므로(창6:3)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게 되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단절 되었다. 창조 때 사람에게 주신 에덴의 생명을 상실했다.
사망에 처한 사람이 다시 에덴의 생명,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인류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 구속경륜을 진행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고(요3:16)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으로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사람은 성령께서 내주할 때 에덴의 생명을 회복하고 새하늘과 새땅의 부활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참고로, 지금은 죄로 인해 성령내주와 성령충만이 구분되지만, 에덴의 아담과 부활한 성도는 자기주인됨의 죄가 없기에 성령내주가 곧 성령충만이다. 에덴의 생명과 부활생명은 상실가능한 조건적 생명과 상실불가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생명의 본질은 동일하다.
요1:33-34 “...나에게 말씀하시되...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2. 하나님의 형상 = 성령내주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움 거룩함...(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흙으로 만든 피조물 아담에게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까? 그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거하시니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첫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기록이 없기 때문),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기고(골3:10), 하나님의 성품인 의로움과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이다(엡4:22-24).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3. 성령을 받으면 죄인에게 생명이 임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후4:3-4)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구원은 죄인이 예수 믿는 순간 부활영화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 되었어도, 여전히 죄인으로 죄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죄의 본성과 싸울 힘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칭의요, 성령내주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그리스도로 옷입음이며,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것이다.
죄인이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형상(갈4:19) 곧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죄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골3:10) 생기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게 된다. 그에게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엡4:24). 죄인에게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의 생명이 회복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임한 것이다. 지금은 죄가 현존하기에 이 생명을 부분적으로 체험하고 부활 이후에는 완전히 체험하게 된다(영생)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골1:14-15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4. 성령 받은 구원의 외적 증거 = 회심, 성화, 견인
이처럼 구원은 성령 받음이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갈4:6)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고전12:3) 내적 증거가 있다. 이 확신은 분명 성령께서 주시는 올바른 증거이지만 주관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데 누가 확인해볼 수 있는가? 이단들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 구원의 내적 확신은 객관적인 외적 증거로 상호보완 교차검증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구원의 외적 증거가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을 말씀하신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과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안다. 성령도 그렇다. 성령은 영이시기에 볼 수 없지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로 성령이 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14:16) 성령은 생명의 말씀(행5:20) 구원의 복음(엡1:1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일(행2:11)이 선포될 때 죄인의 마음을 여사 구원진리를 깨닫도록 해주시는 영이시다.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셔야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눈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게되는 것이다.(성령의 조명=깨닫게하심)
이때 성령은 죽어있는 사람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생명의 씨앗이 되어주신다(중생)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중생한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다(행20:21). 이것이 회심이다.
그는 회심했지만 부활영화의 몸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기에 성령은 그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의가 되어주심으로(칭의) 그에게서 자기 의(=죄)를 벗겨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하신다. 그래서 죄인은 죄를 이기며 의를 행할 힘을 얻고 점점 거룩해져간다(성화)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입양)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법적인 후사로 삼으심이다(롬8:16) 성령은 우리 속에 영원토록 거하시고 떠나지 않으시며(요14:16) 보증으로 인쳐주셨다(고후1:22). 그래서 성도는 다시 죄인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생동안 죄의 유혹과 시험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며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는다(견인) 참고로 견인은 자동차처럼 견인함이 아니다. 성도가 죄의 유혹과 시험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한다는 뜻이다.
구원의 외적 증거는 회심(죄를 버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믿음) 성화(죄를 이기고 거룩해져감) 견인(죄의 유혹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함)이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이 임하면 사람에게 반드시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성령께서 중생을 주시니 그가 회심을 한다. 성령께서 칭의를 주시니 그가 성화를 한다. 성령께서 하나님 자녀로 법적 입양해서 내주하시고 떠나지 않으시니 그가 일생을 견인의 삶으로 마친다. 성령이 먼저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니 사람이 자기 지정의를 사용하여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
회심 성화 견인은 거룩해짐을 일컫는 세 가지 용어이다. 죄인이 죄를 버리고 거룩해지는 첫 시작이 회심이며, 일생을 살아가며 죄를 버리고 거룩해져감이 성화이고, 일생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 돌이켜 보니 그는 다시 죄인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거룩함에서 이탈되지 않았음이 견인이다.
중생회심, 칭의성화, 입양견인은 모두 성령께서 시작하시고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성령임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은 회심 성화 견인뿐이다. 이것이 성령 받은 증거, 구원의 외적증거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은사는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5. 포도나무 비유 = 우리는 성령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하나님과 연합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의 성만찬 강화는 성령 안에서 성부하나님과 연합되는 에덴의 생명(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첫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하시고 성삼위 하나님 안에 있음 곧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설명하신다.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 연합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단절된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붙여진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지금은 이 생명을 부분적으로 체험하지만 부활이후에는 완전히 체험할 것이다(영생).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첫아담의 범죄로 성령이 떠나셨고 둘째아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므로 하나님과의 연합된 생명을 다시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마1:20) 일생동안 성령으로 충만하셨으며(요3:34) 우리에게 보낼 성령의 품고 계신 성령의 담지자가 되시고(마3:16) 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의 파송자가 되셨다(요14:16) 성령을 파송하기 전에 먼저 우리 죄를 대속하셔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아담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하신 그 모습이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몸(Body)를 가지셨지만 성령충만으로 24시간 하나님과 연합되어 사셨다. 그분은 일생동안 자기 생각, 자기 뜻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6)
요14:10-11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신 모든 말이 스스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이라고 하셨다(10절) 또한 당신께서 행한 모든 기적과 일들도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11절)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둘째아담으로서 우리에게 그러한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다. 성령내주(성령충만)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구원(생명)을 말함이다.
예수님께서 24시간 성령 안에서 성부하나님께 순종하시기에,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로봇이란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정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시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말과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성부하나님과 하나가 되심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본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도 피조물이다. 우리는 신이 되는 것은 아니라 본래 창조하신 완전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피조물을 자녀 삼아주시고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라고 부르신다(히2:11-13) 피조물에게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 이것이 첫아담이 에덴에서 가졌던 생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인간의 온전하고 완전한 모습이다(마5:48,요17:23).
히2:11-13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6. 기도응답 =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부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증거
예수님은 하늘보좌에 앉으사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께서 하나님과 연합되었던 그 모습 그대로가 되게 하셨다. 구원받은 우리 모두도 그렇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저도 할 것이고 이보다 더 큰일도 한다는 것이다. 기도응답을 말함이다. 기도응답이 우리가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된 증거라는 것이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응답 주신다는 말씀에 오해가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구세주, 그리스도, 기도응답 주시는 분 등을 의심 없고 믿고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만찬 문맥 전부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하신 성령내주로 하나님과 연합되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연합되어) 하나님의 말과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그렇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말이 너의 안에 거하면" 이란 의미이다(요16:7)
요16:23-24“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직접 하나님께 연합되는가?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 그것이 예수이름으로 기도함이다. 예수이름으로 기도함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생명을 얻어 성부하나님께 붙여진 사람임을 선언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 예수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 무엇이나 기도함은 내가 원하는 아무거나 기도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면 태양이 멈추라고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기도를 하셨다.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하게 된다.
7. 글을 마치며
기독교 구원론은 죄인이 구원받은 후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의 삶(=신앙생활) 곧 구원의 현재에 집중한다. 성도는 분명 성령을 모시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주인된(=죄) 옛사람과 그리스도께서 주인된 새사람 사이에서 분명히 갈등하게 되고, 갈등해야만 한다. 사도들의 가르침 대부분은 이 문제를 다룬다.
성화를 말하지 않는 구원론은 강도구원론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다(눅23:43) 그에게는 성령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의로워져가는 거룩함(성화)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
일반성도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강도구원론을 가르치면 그는 죄의 종이 되고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그는 신앙이 자랄 수 없고 일평생 죄가운데 방황하다가 불 가운데서 겨우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고전3:15) 이런 구원론을 가르치는 자는 올바른 목사가 아니다.
복음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 안에서 죄를 이겨나가며 거룩해져간다는(성화) 기쁜 소식이다. 다른 종교는 자기 힘으로 수없이 노력해도 안되는데, 예수 믿으면 성령께서 되어지게 하시기에 기쁜소식이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닌 죄를 안지을 자유이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확신, 기쁨, 열정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다. 이단들은 더하다. 신천지 강사들의 확신에 찬 얼굴을 보라. 그런데 자세히 보라.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 십자가 앞에서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눈물이 없다.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감격의 눈물이 없다. 이는 절대 흉내낼 수 없다. 성령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마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으로 다섯 번에 걸친 나의 글을 마치겠다. 앞으로는 내가 글을 써야할 상황이 되면 쓰겠다. 이 글에는 나와 내 가족의 30년이 들어있다.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 아직 다락방에 있는 임마누엘서울교회 H장로님, 워싱턴임마누엘교회 K장로님 C권사님, 내 동생 같은 K목사를 그리워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류광수 다락방 복음이 아닌 바울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도드린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2) - 성령 받은 증거, 회심 성화 견인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3) - 여자의 후손 예언과 사탄결박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5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20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창3:15-21)
창세기 3장 15절 예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사탄과 여자, 사탄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들), 사탄과 여자의 후손이다. 즉 원복음은 사탄과 여자(=생명의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는 하와)에서 시작한 예언이 사탄의 후손(=죄와 사망에 잡힌 백성들/집합명사)과 여자의 후손(=생명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신구약교회/집합명사)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으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는 여자의 후손(=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언으로 최종 압축된다. 이 글은 cross님 글을 읽고 하와가 생명이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사탄결박까지 기록한다.
1. 사탄은 여자와 원수가 된다.
여기서 여자는 하와이고, 하와는 생명과 가죽옷의 구원언약을 믿고 바라보는 하와이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이라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개역개정 성경에는 하와를 생명이라고 직접 각주해 놓았다. 범죄 후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여자의 후손 예언과 가죽옷 속죄제사 언약을 직접 받은 후, 자신의 범죄로 사망에 이른 자신의 후손들(인류)에게 생명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었다. “하나님은 하와(생명)가 낳을 후손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주실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여자의 후손 예언을 받은 아담의 믿음이었다. 아담은 하와를 생명을 주실 자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후손들(신구약교회)을 낳게 되는 여자로 알았다.
가죽옷(21절)은 하나님이 천국창고에서 가죽잠바를 가져다 아담 하와에게 입히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직접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겨 아담에게 입혀주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한 번도 짐승의 죽음을 본 적이 없고, 자신이 직접 짐승을 죽여 본 적도 없다. 이런 아담이 스스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시며 피흘림의 속죄제사 방법을 직접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이는 레위기 제사법에서 희생제물의 가죽은 제사장에게 주는 것과 동일하다(레7:7). 그래서 가죽옷은 그리스도 피의 언약을 뜻한다.
2. 사탄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들이 원수가 된다.
사탄의 후손(집합명사)은 아담의 범죄로 사망에 이른 인류를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아담과 하와의 거룩한 자녀들이 이 땅에 가득해지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동행/연합하는 생명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시고 모든 사람은 사망의 자녀로 태어난다. 하나님과 단절/분리된 육체가 되었다(창6:3). 이들이 뱀(사탄)의 후손들이다(요8:44).
모든 사람이 육체가 되어 죄와 사망의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지만 그들 가운데 생명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전해들은 여자의 후손 예언과 가죽옷 희생제사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구약과 신약의 여자의 후손들이다. 사탄의 후손인 사망의 백성들은 생명의 언약을 믿고 따르는 여자의 후손들(이스라엘/신구약교회)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성경과 교회사, 인류역사 그대로이다.
사도요한은 여자가 만국을 철장권세로 다스릴 아이를 낳으려고 애쓰고, 사탄은 그 여자를 죽이려 함을 환상으로 보았다(계12:1-2) 이 여자는 요셉의 꿈처럼 해와 달, 열두 별이 감싸고 있다(창37장). 이스라엘 구약교회를 말한다. 여자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용이 하늘에서 내어 쫓긴다(계12:9) 그리스도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이다. 용은 땅으로 내려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분을 내며(계12:12) 열뿔짐승(국가권력,정치지도자) 두뿔짐승(종교권력,거짓선지자)을 내세워 여자의 후손들(신약교회)를 핍박하고 미혹한다(계13장). 사도요한은 그 여자의 후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힌다. 그들은 신구약교회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참고로,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키는 구약 이스라엘과 예수의 증거(복음)을 가진 신약교회는 분리된 두 집단이 아니다(세대주의).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이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 예언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율법 지켜 구원받고 신약은 예수 믿어 구원 얻음이 아니다. 둘 다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 율법과 성막규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백성 됨을 예표하기 때문이다(히11장) 구약 이스라엘은 구약교회이다(행7:38).
3.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문다.
사탄결박에 해당하는 이 예언의 핵심부분이다. 사탄(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들(구약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계12:5).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만(발꿈치를 뭄),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 이제부터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죄사함과 부활생명으로 살아난다(칭의,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제부터 죄인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의와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구원). 이것이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이다. 사탄의 권세가 꺽이고, 무너지고, 결박된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다(요일3:8), 마귀의 일이란 우리가 죄를 짓고 불법(불의)를 행하는 그 일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요일3: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일을 다 이루셨다(요19:30). 하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도말(제거)하시므로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시고(현대인의 성경) 십자가로 승리를 선포하셨다(골2:15)
요일3:5-8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골2:13-1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4. 사탄결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된 구속사적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이는 주의 재림 때 사탄을 유황불못에 넣는 최종심판 선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지금 현재 사탄이 결박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도요한은 지금 사탄이 천사에 의해 사슬에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혀있음을 본다(계20:1-3). 세대주의는 사탄결박을 휴거와 7년대환란 이후 세워질 유대인의 천년왕국 때 일이라 말한다. 이는 지금 사탄이 결박되지 않았고, 예수께서 아직 왕이 아니시며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님을 뜻한다. 이는 신약의 가르침과 다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이미 받으셨고(마28장)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오순절 베드로 설교가 바로 그 증거이다(행2장)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마12장, already not yet).
개혁주의는 지금 사탄이 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권세가 결박되어 있고(=죄인이 구원받음을 막지 못함)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므로, 지금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무천년설=현천년설=실현된 천년왕국) 지금 사탄이 결박되어 있음이다.
사탄이 무저갱(아뷔소스,계20:1,계9:1,눅8:31)에 갇힘은 사탄의 권세가 제한되고 결박됨을 표현하는 그림언어이다. 타락한 천사 사탄은 사슬에 묶이지도 않고, 물리적 공간에 갇히지도 않는다. 존재결박이 아니라 권세결박이다. 이는 “지옥(타르타로스)에 던져 어둔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조포스)에 가두셨으며”(유1:6) 모두 동일하다. 아뷔소스(무저갱), 타르타로스(지옥), 조포스(흑암) 모두 마지막 날 유황불못(게헨나)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탄은 그의 권세가 제한되고 결박되었음을 말한다.
참고로, 우리말로 지옥(벧후2:4)은 한자어로 땅의 감옥이며 무저갱이다. 유황불못(게헨나)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타는 지옥이란 말은 사탄을 심판 전까지 결박하는 무저갱 감옥(계20:1)을 최종심판지 유황불못(계20:10)으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 무저갱 지옥에 불이 타오르고 있을 수 있지만 지옥의 본래 의미는 현재 사탄이 결박된 감옥을 말한다. 영원히 타오르는 유황불못이 최종심판지이다(마25:41).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안식교 여호와증인 이단이 원어로 집요하게 물어볼 때 난처해진 경험이 있어 그냥 적어본다.
5. 사탄결박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사탄이 하늘에서 내어 쫓긴 그 사건이다.
무저갱에 결박된 사탄은 지금 교회와 세상을 무섭게 핍박하고 미혹하고 유혹하고 위협하고 있다. 이게 결박된 것인가? 무저갱은 그림언어이다. 영적존재 사탄은 그의 존재가 사슬에 결박될 수 없다. 그런데 왜 사탄이 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다고 하는가?
사탄결박은 지금 사탄이 죄인들의 왕노릇하는 권세가 결박되었음을 말한다. 지금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통해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 됨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은 죄와 사망의 나라가 무너짐을 막을 수 없다. 비록 사탄이 지금도 활동하며 성도와 교회를 핍박, 미혹, 유혹, 위협하며 시험에 들게 하지만,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지키시는 교회와 성도는 결코 이길 수 없다(마16:18) 이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이다(창3:15).
예수님이 귀신을 축출하심은 사탄이 결박된 증거였다(마12장). 이것은 다니엘 환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받으심을 말하며(단7장),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자 용이 내어 쫓긴 것과(계12장) 천년왕국 그림에서 사탄이 천년동안 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갇힌 것을 말한다(계20장). 세 사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다니엘 7장 환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왕권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실 때 작은뿔(사탄)은 한때 두때 반때 동안 성도를 핍박한다(단7:20-25) 여자가 낳은 아이가 하늘에 올라가자 용은 하늘에서 내어 쫓겨 땅으로 내려와 한때 두때 반때 동안(=42개월=1260일=반이레) 성도를 핍박한다(계12장). 열뿔짐승이 세상권세를 받은 42개월(계13장) 이방인이 성전바깥 마당을 짓밟는 42개월, 두 증인(신약교회)가 복음증거 사명을 감당하던 1260일(계11장) 모두 동일한 기간이다. 지금을 말한다
지금이 바로 사탄이 땅으로 내어쫓겨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분을 내고 있는 한때 두때 반때이며, 지금이 바로 작은뿔(사탄)이 성도를 핍박하는 마지막 반 이레이다. 천년왕국은 바로 이 기간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는 다니엘의 70이레(단7장,9장,12:7)와 요한계시록(계11-13장)을 보면 명확한데 이것까지 언급하면 글이 너무 길어져 다음에 기록하겠다.
6. 사탄이 이 세상 신, 이 세상 임금,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의미는?
그렇다면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4:4), 이 세상 임금(요12:31),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사탄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지금 사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주인되어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의 왕노릇을 하고 있다. 사탄은 유황불못(계20:10)으로 들어가고 있는 죄인들의 제일 큰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사탄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은 사탄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사탄과 함께 사망의 형벌을 받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못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죽지 않는다. 사탄은 보이지 않는다. 사탄은 창조이후 지금까지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과거 일을 다 보았고, 다 알고 있다. 이 세 가지만으로도 사탄은 세상 사람들에게 신이며 임금이며 권세자 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고(고후11:14) 유혹되고(마4:3) 미혹되고(딤전4:1) 위협받으며(벧전5:9) 사탄과 함께 유황불못으로 들어가는 멸망의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은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기 계획을 세우고 자기 뜻을 펼치는 신이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일 뿐이다. 사탄은 자기 것을 창조해낼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하고, 위협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진리(=복음,엡1:13)를 알지 못하고 사탄 자신과 함께 멸망하도록 속이는 일 뿐이다. 사탄은 죄인들을 속이며 왕노릇 하는 가짜 왕이다. 사탄은 진짜 왕이 아니다.
사탄은 뛰어난 사상가(칼막스), 정치가(스탈린), 생물학자(다윈), 종교인(마호멧) 동성애 운동가, 뉴에이지 음악가, 각종 비성경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작가 감독을 통해 세상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천재, 영웅, 영화배우, 아이돌에 열광하며 따라가지만 그들이 전파하는 인본주의 사탄문화 세계관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세상은 완전히 사탄의 지배아래 놓여있다. 이것이 사탄은 이 세상 신, 이 세상 임금,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뜻이다. 사탄이 세상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대마왕이란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사탄은 세상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왕이었다.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속임과 거짓,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도 죄와 사망 사탄의 나라에서 구원 받을 자가 없었다. 겨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율법과 성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바라보며 믿고 구원을 얻었을 뿐이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를 주셨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고 중생, 칭의, 입양을 주심으로 죄인이 거룩해지는 회심, 성화, 견인을 하게 해주셨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고 실제로 거룩해진다. 이제 사탄은 더 이상 속임과 위협으로 죄인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하늘에서 내어 쫓긴 것이며(계12장), 공중권세를 박탈당한 것이며(마12장), 무저갱에 사슬에 매여 그 권세가 결박된 것이다(계20장). 지금 사탄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막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지금 우리 가운데서 성취 체험되고 있다.
7.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결박되었고, 우리는 사탄결박 할 수 없다.
강한자(사탄)를 결박하고 세간을 늑탈한다는 말씀을 지금 성도가 사탄결박 해야 함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마12장). 사탄결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사탄결박 할 수 없다. 우리가 결박되라 말할 때 결박되는 사탄이라면 그런 사탄을 왜 두려워하고 그런 사탄과 뭐 싸울 일이 있는가?
사탄결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다. 사탄은 이미 하늘에서 내어쫓겼고 귀신축출은 그 증거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왕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하였다.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을 때 사탄과 대적하며 기도함은 맞다. 이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해당하는 특별한 상황이다. 류목사는 이것을 사탄결박이라 말하지만, 사탄결박은 이런데 쓰는 용어가 아니다. 사탄대적기도라고 해야 그나마 적당하고 이는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을 경우임을 다시 한 번 말한다. 아래 본문도 정확히 사탄대적기도를 가르침은 아니지만 귀신들린 사람에게 그 정도 용어는 용인할 수 있다.
약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모든 상황 속에서 흑암을 꺽고 사탄을 결박하라는 류목사 사탄신학이 성도로 하여금 칭의와 성화의 십자가 은혜는 잊어버리고, 매일 흑암세력을 결박하는 사탄강박증 환자가 되게 한다. 그 어떤 목사, 장로, 총재, 협회장, 총회장도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못 누리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사망의 종노릇한다. 사탄의 참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찬송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8. 결론 - 칭의와 성화의 복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사탄을 이긴다.
성경은 죄를 인하여 사망에 빠진 인류에게 생명주실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다(창3:15). 구약성경은 그 여자의 후손 예수님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구약교회의 기록이며 신약성경은 그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를 받아 생명을 얻고 점점 거룩해져가다가(성화) 마지막 날 부활(영화)에 이르게 될 모든 인류 신약교회의 기록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아담의 본성에 오염되어(원죄) 하나님과 단절(사망)된 채 태어나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자범죄) 사탄과 함께 멸망 받는 사탄의 후손들이다(요8:44),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구원언약을 믿고 죄사함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을 얻은 여자의 후손들(교회/성도)이다(계12:17).
사탄의 후손들(세상사람들)은 여자의 후손들(교회)을 적대시하고 핍박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 사탄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 권세가 결박되었고 이미 하늘에서 내어쫓겼다. 비록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지금 활동하며 교회를 위협하고 있지만 천로역정에 나오는 사슬에 묶여있는 사자가 마지막 심판 날 유황불못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시 으르렁거리며 겁박하고 있을 뿐이다(계12장),
사탄은 죄사함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해져가는 성도들(교회)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죄에서 해방되고 사탄을 이긴다. 교회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며 거룩함을 사모하자. 거룩함이 능력이다. 사탄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하데스,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3) - 여자의 후손 예언과 사탄결박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4) - 삼위일체 하나님의 율법 : 하나님의 형상
삼위일체는 예수님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기독교의 근본진리이다.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속죄제사가 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성경계시에 따라,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지만 그 설명은 성경용어로 할 수 없었다. 성경은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할 수 없이 철학용어를 가져와 예수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했다. 그것이 삼위일체이다.
1. 삼위일체는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근거를 설명한다.
삼위일체는 3위격 1본체를 줄인 말이다. 여기서 위격은 사람처럼 독립적인 자유인격체임을 말하며, 하나님께는 인격(人格)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기에 위격(位格)이라고 높여서 부르는 것이다. 즉 위격은 성삼위 하나님을 호칭하기 위해 교회가 만들어낸 신학용어이다. 영어로는 person이다. God in three Persons, blessed Trinity! (찬송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본체는 “동일본질의 불리불가한 하나의 실체”를 줄인 말이다. 실체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다. 삼위일체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 위격 본체 본질 본성 실체... 이 용어를 사용해야만 삼위일체가 설명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단들과의 논쟁이 종결된다. 이 철학용어 사용은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다.
삼위일체를 한 문장(sentence)으로 정의하면 “세분의 개별위격 하나님이 동일본질의 분리불가한 하나의 실체를 가지셨다.” 이를 더 줄여서 “각 삼위께서 하나의 전 본체를 취하셨다” 이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이 “삼위일체”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언제나 함께 사역하신다는 뜻이다. 물론 각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다르다.
삼위일체는 반드시 이 문장으로만 설명해야 한다. 절대로 다른 용어와 다른 문장을 쓰면 안된다. 초대교회 경건한 신학자들은 수백년간의 치열한 연구와 검증 끝에 이 철학용어 문장을 탄생시켰다. 교회는 이 철학용어 문장이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가장 잘 표현함을 확인하고 이 문장만 사용하기로 최종 확정했다. 이 문장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이단이다.
지금까지 교회사에 등장한 수많은 삼위일체 이단들은 이 한 문장 때문에 패배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문장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순간 일신론(사벨리우스 양태론)과 삼신론(아리우스 유사본질) 이단으로 변질되는 문이 열린다. 전문용어 휘포스타시스, 페르소나, 우시아, 섭스텐시아 사용에 따른 신학논쟁은 필요한 분만 찾아서 보시면 된다.
이 문장 내용이 니케아 신조(도그마)이다. 도그마란 모든 교회가 검토하고 확인 후 받아들인 더 이상 검증이 필요 없는 절대적 진리이다. 성경과 같은 권위라고 해서 신경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기독교 교리(독트린)의 기초가 되는 신학의 구구단이다.
위와 같은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정립되었으면, 이제 각 삼위께서 하시는 역할을 알아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함께하시며 모든 사역을 함께 하시는데 각각 그 역할이 있으시다.
2.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예수님이 실행하시고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성경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의 역할은 뜻을 세우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from, 로부터) 창조, 구원, 작정, 선택, 예정, 섭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계획, 뜻)에서 나온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직접 실행하신다(through, 말미암아, 통하여) 그래서 중보자시다.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서 실행하신 일을 우리(구원)와 세상(창조,보존,통치)에 적용 완성하신다(in, 안에서) 그래서 성령내주 만이 구원의 보증이다.
근거구절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면 일반성도들이 읽기 어렵고 너무 양이 많아진다. 예장합동 총신에서 가르치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니 그냥 받아주시면 된다. 여러분들의 교회 목사님은 신학교에서 이미 배웠고 잘 알고 계신다. 여기까지가 어렵고 나머지는 쉽다. 삼위 하나님의 역할에 따라 우리 구원을 위한 경륜적 삼위일체가 나온다(엡1장).
구원은 성부 하나님의 뜻/예정과 선택(2-6절),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실행(7-12절),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인치심/적용과 완성(13-14절)으로 얻는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계획 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량구속 하시고, 지금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우리가 구원 얻었다고 배웠다. 신학자들에게는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중요하지만, 일반성도들은 구원의 경륜적 삼위일체만 알면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와서, 삼위일체의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존재적으로나 사역적으로 결코 분리되지 않으심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창조 구원 계시... 모든 일에 있어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며, 언제나 함께 사역하신다. 그 근거는 삼위일체 니케아 신경(도그마)이다. 각 삼위께서 동일본질의 분리불가한 하나의 실체이며 각 삼위께서 전 본체를 취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하여 율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다.
3. 에덴의 아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거하고 계셨다.
에덴의 아담 속에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계셨고(창2:7) 그 성령은 성육신 이전 그리스도(요1:1,로고스)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담 속에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거하셨다. 구원은 이것을 회복한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영이신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동행하고 있었다(요17:21).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하심으로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아담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있었고 아담은 그 법에 따라 거룩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갔다. 이것이 아담의 의로움(righteousness, 옳음, 맞음, 바름)이다.
죄는 불의(의가 없음)와 불법(법이 없음)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없음이다. 일반적으로 율법은 시내산에서 출애굽 백성들에게 최초로 주신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율법은 에덴에서부터 있었다.
4. 아담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에덴의 거룩한 율법이었다.
에덴에는 단 하나의 율법계명만 있었다. 선악과 금령이다. 에덴에는 왜 율법계명이 하나밖에 없었을까? 이미 그의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아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율법) 그 자체이시다. 그래서 아담은 수 만가지 일을 해도 무엇이 거룩함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옳고 맞고 바른 일(=의)인줄 알았다. 이런 아담에게는 단 하나의 계명만 필요하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게 선악과 금령이다.
에덴의 아담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가르쳐 주셨던 예수님(로고스)이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구약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께서도 여호와 하나님 이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중보자시기 때문에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기적은 모두 예수님께서 중보자로서 직접 실행하신 것이다.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도 성삼위 하나님이시며 그중 모세를 음성으로 직접 부르신 분은 성자 예수님이시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심도 그렇다.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십계명과 613개의 규례)을 주셨다. 시내산 율법은 613개의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과 하나만 먹지 않으면 되던 율법이 613개로 늘어났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죄로 인해 성령(=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죄인들에게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가르치려니 그 당시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내용이 많아졌다.
5. 율법은 하나님 형상 곧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법이다.
시내산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덴에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성품을 회복하기 위한 법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과 그리스도께서 회복완성 하신 새에덴(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지식도 재능도 아니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사람 곧 본래인간의 거룩한 내면적 품성을 갖춘 사람이다. 율법은 바로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다.
십계명 율법이 바로 그것이다. 십계명은 일단, 지금 죄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고 그 파괴력이 심각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언, 탐심 같은 것들을 하지 말라고 부정명령으로 금지시킨다. 부활 후 새하늘과 새땅에서 십계명이 필요할까? 당연히 필요하다. 천국에서도 살인 간음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부활이후에는 십계명이 폐기됨이 아니라 십계명을 모두 지키기에 더이상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완성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긍정명령 하나로 바꾸셨다(요13장).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 613개 상황 이외의 수천가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거룩한 일을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동일한 계명이며 복음은 율법을 더 잘 지케게 만든다.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율법은 죄인들에게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에덴과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십계명 같은 하나님 형상 거룩한 성품의 법만 있고 그것이 율법의 본래의미이다. 그러나 시내산 율법은 죄인들에게 주셨다. 죄인은 거룩한 율법을 알고도 지킬 수가 없다. 행동으로는 살인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죽였고 또 실제 죄를 저지른다. 그러므로 시내산 율법에는 반드시 죄용서 받는 속죄기능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세를 포함한 그 어떤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제사와 절기, 성막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율법 613개 조항 중에 성전과 제사와 관련된 것은 317개나 된다. 이것이 에덴의 율법과 시내산 율법의 차이이다.
다음은, 율법이 BC 15세기 출애굽 백성들에게 주셨음도 기억해야 한다. 소가 들이받아 사람을 죽였을 때 소 주인이 배상하고 책임져야 할 일,... 오늘날 텍사스 목장주들에게나 해당되는 계명이 율법에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만약 시내산 율법을 오늘 주셨다면 분명 온라인 범죄, 크레딧 사기, 교통사고 배상 항목이 다수 들어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 조항들은 아마 613개 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시내산 율법은 크게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6. 시내산 율법 = 하나님 형상의 윤리도덕법 + 종교의식법 + 국가사회법
첫째, 창조 때 사람에게 주신 거룩한 성품 곧 하나님의 형상에 해당되는 법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에덴의 거룩한 성품을 회복하기 위한 법으로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성도가 갖게 될 윤리도덕법이다. 이것이 율법의 본래 모습이다. 이 법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해당 된다. 부활이후의 성도들이 이 법을 완전하게 지키게 된다. 하나님 백성의 내면적 성품의 법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계시하는 성막, 절기 제사 등 종교의식법이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가르치되 그 거룩함을 어겼을 때 속죄 받는 성막규례들이 있다. 만약 율법이 성막규례들과 함께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닌 사망을 확증하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레위기 정결법, 제사 절기 성막 등 종교의식법은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기에 당연히 폐지되었다. 초대교회 바울이 강력하게 폐지를 주장한 율법이 바로 종교의식법이다.
셋째, BC 15세기 출애굽 백성들에게 주신 국가사회법이다. 노예규례, 토지규례, 왕정규례 등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율법이 주어졌다면 노예나 왕을 세우는 규례는 없고 인터넷과 연관된 규례들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BC 15세기 국가사회법은 영원한 법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노예의 귀를 뚫어야 함은 아니다.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신15:17). BC 15세기 이스라엘 국가사회법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법의 기본정신은 남아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지킬 필요가 없다. 폐지되었다.
정리하면, 시내산 율법은 에덴의 아담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직접 가르쳐주시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출애굽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말씀해주셨고(십계명과 윤리도덕법), 죄를 지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십자가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고(종교의식법) 이것을 BC 15세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주셨다(국가사회법).
시내산에서 예수님은 율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다. 율법의 어떤 조항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없는 부분이 없다. 비늘 없는 물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레위기 음식정결법까지도 모두 부정불결, 더러움의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에 율법은 613개 모든 조항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이 십자가로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에덴의 아담에게 주셨던 성령을 다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하늘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아담에게 주셨던 에덴의 생명을 주셨다. 구원해주셨다.
7. 아담 속에 거하셨던 예수님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도는 에덴의 아담 속에 거룩한 법으로 거하시던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시 거하시는 사람이다. 성도는 첫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거룩함이 나타난다(창1:27). 성도는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난다(갈4:19) 젖먹는 아기는 본능적으로 부모를 찾듯, 성도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다. 본능이고 필연이다. 그는 이전에 짓던 죄에 대한 거부반응과 저항감이 생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이게 구원이다.
이제 시내산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그리스도 구원의 길을 직접 예표하는 음식정결법(레11장-20장) 제사 절기 성막 등의 종교의식법은 당연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유대인들은 제사와 절기 등을 계속 지켜야한다고 했고, 심지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이방인들도 할례와 레위기 음식법 등을 지키며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폐지를 강력하게 말한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여전히 할례와 안식일, 음식정결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것이 예표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며, 새언약은 시작되지 않았고, 초대교회의 성령도 가짜라는 엄청난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의식 율법과 구원의 행위로서 율법지킴을 강력히 반대한 것이다.
율법의 윤리도덕법은 당시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율법폐지는 복음을 믿되 할례와 절기, 음식정결법등의 종교의식법도 함께 지켜야 구원 얻는다는 거짓교사의 가르침을 배척함이다. 초대교회와 사도들 그 누구도 율법의 윤리도덕법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바울은 율법은 폐지되었으니 성도는 살인 간음 도둑질을 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할례와 안식일 음식정결법 같은 종교의식법을 믿음과 함께 구원의 필수요소로 주장하는 거짓교사들을 배척함이다.
그런데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고 율법은 폐지되었으니 윤리도덕법까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신학적 율법폐기론자들과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나 행동으로는 그런 실천적 무율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이 구약에는 거짓선지자요 신약에는 이단이다.
복음을 믿고 성령 받으면, 십계명만 억지로 겨우 지키던 사람이 백계명 천계명도 넉넉하게 지키고 더 지키고 싶어진다.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 거룩한 성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기 힘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이다. 비록 그가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와 성령께 순종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성도는 죄를 미워하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점점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거룩해져 간다. 이것이 생명이다.
8. 신학적 율법폐기론이나 실천적 무율법주의자는 이단이다.
반복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복음 안에서 자유하며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적으로 불가능하고 현실적으로 더 불가능하다. 이제 막 구원받은 초신자가 성경을 몰라 죄를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진실된 성도라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몰라서 잠시 실수할 수는 있으나 참된 성도라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서 점점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구원이고 성령받음이다. 신학을 잘 알아야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죄는 사탄이 준 것이니 죄를 지어도 괜찮고 복음을 믿고 더욱 그리스도를 붙잡으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 한 두 번은 가능하다. 그럴 수 있다. 우리도 다 사탄이 유혹할 때 죄의 본성에 넘어지기 쉬운 죄인들이다. 이해한다. 그런데 30년째 그러고 있으면 어떨까? 30년째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라고 수도 없이 전하는데 그 자신이 죄와 사탄을 이기지 못하고 있고, 그 메시지를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도 역시 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무엇이며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거짓 복음, 거짓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절대로 그런 복음 그런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성도들에게 1억원 빚을 내서 헌금하라고 한다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교회강단이 아니라 다른 곳이다. 다음에는 언약의 하나님과 율법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리겠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4) - 삼위일체 하나님의 율법 : 하나님의 형상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5) - 언약의 하나님과 율법 : 하나님 백성의 삶의 규범
성경은 66개의 낱권으로 묶여있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언약이다. 성경은 분명히 언약 구조로 되어있다. 언약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나타나고, 옛언약(율법)과 새언약(복음)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글은 개혁신학이 다루는 언약 전체를 기술하는 학술논문이 아니라 다락방 내부에 만연한 각종 윤리도덕적 타락이 옛언약 율법에 대한 신학적 무지 때문이며 그 근원에는 류목사 사탄신학이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정통신학이 다루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간략히 용어정리하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은혜언약 속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바르게 살펴보겠다. 궁극적으로 율법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복음은 율법으로 완전해지고, 율법은 복음 안에서 완성됨을 결론으로 맺겠다.
1.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세상은 하나님 나라 에덴이 되었을 것이고, 인류는 에덴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행위언약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신약교회)와 맺은 언약이다. 은혜언약은 아담이 파기한 행위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죄인들을 자기와 연합시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는 것이기에 성도들의 행위나 실수로 파기되지 않는다.
이처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중보자의 유무와 언약파기의 가능성에 따른 구분으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언약이해의 큰 틀이다. 용어이해 정도로 넘어가자. 행위언약은 율법(구약)이 아니라 아담언약이고, 은혜언약 속에는 율법(옛언약)과 복음(새언약) 등 구약의 모든 언약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즉 율법은 행위언약이 아니며 은혜언약임을 기억해두자.
은혜언약이 가능한 것은 영원 전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원협약(=구속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슥6:13,평화의 의논). 구원협약은 인류구원을 위하여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과 성령하나님 사이에 맺으신 구원의 역할방법에 관한 언약이다. 이 언약으로 성자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 방법으로 구원하심이 작정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창조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시며,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믿는다.
구약성경은 은혜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점진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여자의 후손 예언이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으로 이어지고 예레미야와 대소선지자들의 새언약 예언으로 구약성경은 끝난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므로(갈4:4) 신약성경이 시작된다.
2. 은혜언약 속에서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이 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 가운데 왕으로 거하시겠다는 하나님 나라 약속이다, 언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한 문장으로 요약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목적이기도 하다. 언약은 죄와 사망에 빠진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에덴)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은혜언약 속에서 옛언약과 새언약을 알아보자. 참고로, 구원과 복음도 은혜언약과 연관된 용어이다.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말하고, 복음은 죄인을 하나님 나라 백성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구원과 십자가 복음의 책이다. 이는 다음에 자세히 기술하겠다.
구약(옛언약)은 시내산 모세언약을 일컫는 명칭이나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너와 네 자손을 내 백성 삼으시겠다고 하신 언약부터 시작된다(렘31:31-34). 옛언약(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함으로 모형적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파기됐지만, 새언약(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신약교회)를 통해 파기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다.
렘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옛언약(구약)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구원시켜 율법과 성막을 주시고 가나안 땅에 가시적이며 예표적인 하나님 나라 다윗왕국을 세우는 언약이었다. 이는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을 모형적으로 회복하는 일이었다. 구약성경은 이 언약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기록한다. 옛언약(구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다. 성전은 파괴되고 옛언약이 지향했던 모형적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 다시 애굽노예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새언약(신약)은 출바벨론을 배경으로 예언되었다. 출애굽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남은자)를 구원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 에덴을 다시 회복완성 하는 언약이다. 이는 첫아담이 잃어버린 성령을 다시 부어주시겠다는 언약이기에 모형과 예표가 아닌 실체와 완성의 언약이다. 새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거나 파기되지 않는다. 새언약으로 탄생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신약교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내산 옛언약은 스스로 율법지켜 구원얻으라는 행위언약이 아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이 행위언약이다. 옛언약 율법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은혜언약이다. 이것을 잊으면 율법은 행위구원, 복음은 은혜구원이라는 오해가 생기며, 여기서 율법폐기론으로 가는 이단의 문이 열린다.
3. 옛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으로 성취되었다.
에수님은 성만찬에서 새언약을 제정하셨다. 모세가 구약 이스라엘 열두지파 두령들에게 짐승의 피를 뿌리며 옛언약 체결의식을 하듯(출24장), 예수님도 신약교회의 대표인 열두 사도들에게 자신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주시며 새언약 체결의식을 하셨다(눅22장)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구약에서 짐승의 피를 사람에게 뿌림은 시내산에서 옛언약 체결식때 단 한차례만 있었다. 그 이후 어떠한 경우에도 짐승의 피를 사람에게 뿌림은 없었다. 모든 피는 번제단과 그 사면에 붓거나 바르거나 뿌린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새언약을 제정하신다. 제자들은 성만찬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피를 자신들의 몸에 뿌렸다. 이로서 새언약이 출범되고 옛언약은 그 역할을 다하고 종결되었다. 옛언약은 새언약 안에서 성취되었다.
옛언약의 종결과 새언약의 출범에 따른 구약 이스라엘(모형)과 신약교회(실체)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하고 특히 율법과 복음의 예언과 성취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행위와 은혜로 오해하면 율법을 거부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지기 쉽다. 어느 교수님 말씀처럼 복음 없이 율법만 있으면 율법주의가 되고, 율법 없이 복음만 있으면 무율법주의(율법폐기론)이 된다. 복음은 율법과 함께 있을 때 바른신앙 바른복음이 되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구원을 받게 된다.
4. 율법은 복음의 시작이며,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구약은 율법을 지켜 행위로, 신약은 복음을 믿어 은혜로 각각 다르게 구원받지 않았다. 신구약 모두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 아담의 범죄이후 행위구원은 불가능하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림자이기에 은혜구원을 가르친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 누구라도 행위로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은 자가 없다. 그들 모두 구약의 율법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었다(히11장). 율법(모세언약)은 첫아담처럼 스스로 지키는 행위언약이 아니라,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키는 은혜언약임을 이미 서두에서 말했다.
율법은 에덴의 아담 속에서 거룩한 법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현현이며, 범죄한 아담후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를 가르치는 구원의 길이다, 율법의 성막규례들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윤리규범이 아니다. 오직 죄사함을 얻기 위한 속죄의식이다. 짐승의 피로 죄용서 받는 매우 야만적이고 혐오스런 희생제사를 누가 고안했을까? 그리스도의 속죄제사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율법의 성막제사와 속죄일 규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기록한 신약교회의 레위기 주석이다. 성막은 하늘성전의 모형이었다(히8:5). 속죄일에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신다(히10:18) 이처럼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율법을 통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이다(히11장).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그러므로 구약을 행위구원으로 신약을 은혜구원으로 분리해서 율법과 복음을 적대적 관계로 이해함은 잘못이다. 2세기 영지주의 이단 중 말시온(Marcion)이 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거부하고 신약의 복음만 믿었다. 그는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권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등도 구약의 율법 냄새가 난다고 폐지했다. 그는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 하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거짓교사 이단이다. 율법폐기론의 구원파가 영지주의 말시온 이단의 아류이다.
5.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 성령을 주셔서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율법의 완성이란 죄인이 율법을 지킬수 있게 하신다는 말이다. 복음이 없다면,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살인하지 않아도 살인하고 싶은 미움의 감정이 가득차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다. 율법은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다. 복음이 죄용서와 칭의를 통해 죄인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죄인이 복음을 믿어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면 저절로 율법을 지키게 된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옛언약의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했던 거룩한 성품이었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벧후1:4) 베드로가 말한 여덟가지 신의 성품도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함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이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마5장) 이들 모두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율법은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나 죄인이 거룩한 성품을 갖도록 만들지 못한다. 성령이 임하면 거룩한 성품이 생기게 된다. 죄에서 자유케 되기 때문이다. 복음이 죄인에게서 아담의 형상(=죄)을 벗겨내어 하나님의 형상(=의)을 만든다. 율법의 완성이란 이 말이다. 예수님은 이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다.
6. 율법은 새언약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규범이다.
교회는 모든 인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교회는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피로 새언약 체결의식을 했다. 옛언약(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했지만, 새언약(신약)의 교회(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에덴을 세웠고(already), 세워가고 있고, 부활의 날에 최종 완성할 것이다(not yet). 신약교회는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이다.
율법은 새언약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규범이다. 할례와 절기 제사 같은 율법의 종교의식규범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역할을 다했고 폐지되었다. 지금도 그런 율법규례를 지키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십계명 같은 율법의 윤리도덕법은 지금도 유효하며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법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율법을 지키며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어간다.
율법지킴이 어려운 것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사람이 아닌데 거룩한 계명을 지키려 하니 어렵고 외식적 종교생활이 나오는 것이다. 복음은 실제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 죄사함과 칭의의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거룩한 율법이 지켜지는 것이다. 일부러 지키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이게 복음이고 이게 율법이다.
바른복음으로 구원받고 성령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하나같이 경건함과 거룩함이 나타난다. 검은 옷에 털모자 쓴 초정통파 바리새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자유하고 넉넉하되 사랑과 겸손함이 넘쳐나는 온유한 사람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들은 율법의 간음죄를 범하며 복음으로 자기 합리화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귀신쫓는 목사의 확신에 찬 얼굴에서 볼 수 없는 하나님 형상의 품위와 영적권위가 흘러넘친다.
율법이 금하는 윤리적인 죄를 범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다. 그것도 한두번 실수가 아닌 체질화된 죄 말이다. 지금 교통사고 낸 목사를 십계명의 살인죄로 정죄함이 아니다. 경건한 목사도 운전미숙으로 사람이 죽는 사고를 낼 수 있다. 십계명의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탐욕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저지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전도하면 간음죄를 반복적으로 저질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7. 글을 마치며
류광수 목사는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마음대로 죄 지어도 된다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류목사는 그렇게 설교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어떤 다락방 목사도 대놓고 신학적 율법폐기론을 주장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며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게 영지주의 이원론의 이단사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류목사는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 끝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이면 다 끝났다. 율법에 잡히지 말라.” “복음은 죄를 덮고, 율법은 죄를 지적한다.” “죄를 지적하며 전도를 막는 것이 가장 큰 율법이다.” 이것이 류목사가 율법폐기론 이단사상을 복음과 전도라는 말로 포장해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에는 자신이 신학적 율법폐기론 이단인줄 모르면서 실천적 무율법주의 이단인 사람들이 많다. 모두 다 류목사의 교묘한 설교 때문이다.
류목사는 전도자가 아니다. 류목사가 전도자라면 바울은 전도자가 아니다. 다락방을 나와서 류목사 설교를 들어보라. 차마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설교가 아니다. 그에게는 성경이 필요없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낸 검증안된 전도방법론을 돈 받고 파는 전도학원 강사일 뿐이다. 그런 강의를 오래들으면, 은혜와 감격 없이 죄책감과 우월감을 사로잡혀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기 교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교회는 학원이 아니다. 그런 학원을 왜 다니며, 그런 강의를 교회에서 왜 듣고 있는가? 더구나 고액의 강사료까지 지불하며 말이다.
나도 류목사를 전도자로 생각한 때가 있었다. 초창기 그는 복음을 잘 정리해서 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복음에는 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무속인 전도용으로 어느 정도 용인될 수도 있었다. 사실 불신자 전도현장 속에 누가 칭의와 성화를 자세히 설명하겠는가?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전도 메지지의 복음 내용이 부족해도 심지어 사탄을 너무 강조해 약간 오류가 있어도 무속 현장전도용으로는 관용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교회에서는 바른 복음을 가르치면 되기 때문이다. 류목사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래야 한국교회를 섬기겠다는 그의 말의 진실성이 입증된다.
류목사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그는 자기 세력을 만들어 무당전도용 다락방복음을 바울의 십자가 복음처럼 말하며 30년간 수많은 집회와 수련회, 각종훈련을 만들어 상당한 재력을 쌓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1억원 건축헌금을 독려하고 있다. 그를 따랐던 순수한 목회자와 교회들은 전도는커녕 류목사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 이게 우리가 생각했던 다락방의 모습인가? 이게 바울과 같은 전도자의 모습인가?
다락방 내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린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류목사 메시지를 완전히 끊고 건강한 교회 목사님들의 십자가 설교를 한 달만 들어보시라. 성경중심의 십자가 설교를 확인하고 그 교회를 찾아가 탐방하고 실험적으로 3개월만 주일예배에 참여해 보시라. 그러면 당신은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차이를 확연하게 구분하게 될 것이다.
다락방 내의 신실한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요청드린다. 지금 심각한 고민 중에 있는 줄 잘 알고 있다. 다락방은 더 이상 전도단체가 아니다. 류목사의 신학적 문제를 이제는 잘 아실 것이다. 류목사 메시지로는 회심도 없고 구원도 없다. 세미(준)베뢰아 사탄신학 거짓복음이다. 더 이상 새가족도 없다. 기존신자도 은혜가 없다. 개교회는 없어지고 류목사와 다락방 본부만 남을 것이다. 그 책임은 복음 못깨달은 개교회 담임 목사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류목사와 단절하고 교회 성도들을 잘 인도해서 십자가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시길 기도드린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5) - 언약의 하나님과 율법 : 하나님 백성의 삶의 규범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6)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율법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며, 모든 일을 함께 사역하신다. 그 근거는 각 삼위께서 동일본질의 분리불가한 하나의 실체이시기 때문이다(니케아 신경)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일하시는가? 니케아 신경의 주역 아타나시우스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역방식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신다.”(요14:10) - 서철원 교의신학 2권 하나님론 P142 -
1.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따라 로고스(예수)께서 성령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성령 안에서 창조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만물을 새가 알을 품듯이 감싸고 운행하시며(창1:2)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어 창조목적대로 잘 살아가도록 유지보존하심이다.
성령 안에서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따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로 속량(구속)하시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죄와 사망을 이기도록 생명으로 충만케 해서 구원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다시 한 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성령께서 죄로 죽은 우리 영혼을 다시 창조의 생명 곧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사역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점점 거룩하게 살아가다가(점진적 성화), 죽으면 즉시 하나님 품에 거하고(완전성화), 부활의 날에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다(영화).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불신죄인에서 예수 믿을 때(과거), 죄용서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은 죄인으로 살아갈 때(현재), 죽어 하나님 품에 거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영혼이 되었을 때(가까운 미래), 마지막 날에 영화로운 모습으로 부활완성에 이를 때(최종미래)까지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심으로 구원얻음이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2.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이 생명은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 안에 있었다(성삼위일체 성령).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자녀 되는 생명을 얻는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4,12)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은 성령이었다. 성령을 받아야 첫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본래인간의 그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게 하시겠다는 샘물도 성령이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던 그 생수도 성령을 말함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7-39)
생명이란 죄로 죽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하나님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에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되어진다(요17:21). 구원은 이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 방법은 십자가 죄사함과 성령내주를 통해서만 얻게 된다.
3. 진리의 성령과 생명의 성령.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성만찬 강화에서 생명의 성령이 아닌 진리의 성령이 오신다고 말씀하셨나? 생명은 우리가 구원의 복음진리를 들을 때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진리를 깨닫게 하셔서 죄를 회개케 하심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요14:16-17)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은 진리와 함께 역사하고, 진리는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알게 된다. 진리는 죄인에게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전하는 복음이다. 진리란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구원의 복음이며(엡1:13) 예수님은 이것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구원의 소식이라 말씀하셨다(요16:8).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이시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죄인은 복음진리를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 거룩한 의를 힘입어(칭의) 거룩하게 살아가게 된다(성화).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의 생명을 회복한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4. 너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행2:38)
사도행전은 복음이 전파될 때 진리의 성령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생명을 주시는 기록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회개하면 죄사함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눅24:47). 사도들은 너희가 회개하면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행11:18) 회개하면 죄사함과 생명을 얻는다.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고(행16:31)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기가 3년 동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음을 기억하라고 했다(행20:21).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회개와 믿음을 하나로 말하는 신학용어가 회심(conversion)이다.
진리의 성령은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역사하신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은 죄인에게 죄를 회개케 하고 주 예수를 믿게 하는 복음이었다. 죄인은 바른 복음을 들어야만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회개와 믿음을 통한 회심이 일어나고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생명은 반드시 진리의 복음이 선포될 때 진리의 성령의 역사로 얻는다.
성령이 임한 증거는 거룩함이다. 거룩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삶을 버리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다(엡2:1-10). 이는 율법조항 지키는 것을 넘어서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다.
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율법 (롬8:2)
구약에서 예레미야는 새언약(신약)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법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 마음에 기록한다고 했다(렘31:31-34) 에스겔은 마음에 새겨진 새언약의 법을 성령이라 말한다(겔36:25-28) 이 예언에 근거하여 바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했다(롬8:2).
왜 바울이 성령을 생명의 법이라고 했을까? 성령을 돌에 새겨진 율법(십계명)과 동일하게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언약(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죄와 의를 구분하는 율법조항 613개를 사람에게 가르쳐서 알게 만든다. 그는 율법을 끊임없이 배워 삶에서 무엇이 거룩이고 무엇이 죄인지를 잘 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율법대로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거룩을 가르쳐주지만 죄인이 거룩을 행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 이게 구약이다.
새언약(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가운데 거하시며 죄와 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그는 돌판율법 조항을 완전암송 내면화시켜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율법을 마음에 두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는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신약이다.
돌판율법을 수 없이 배우고 내면화시킨 종교인과 성령율법을 마음에 받아 새사람 된 그리스도인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옛언약을 종결하고 새언약을 출범시키신 이유이다. 성령 받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6. 성령이 임하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
구약율법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가르친다. 특히 구약의 절기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구원을 예표 한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내 앞에 절기를 지키리라”(출5:1) 하셨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기록된 절기를 대대로 지켰고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절기를 철저히 지킨다. 그런데 하나의 절기는 성경에 지켜진 기록이 없다. 희년이다.
희년(Jubilee)은 구원을 예표하는 가장 큰 절기이다. 7번의 안식년 곧 50년째 되는 안식년이 희년이다.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은 개인의 구원을 기억케 한다. 개인은 안식일을 지키며 죄가 가져온 노동의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고 에덴의 생명을 잠시 기억한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나라 전체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희년이 되면, 백성들 사이에서 49년간 전당잡힌 토지를 돌려주고, 49년간 노예 되었던 사람을 해방시켜 준다.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은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이 없어지고 다시 에덴의 안식 곧 생명으로 돌아간다(초기화 리셋). 희년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구원의 완성이다.
희년은 구약에서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히스기야 요시야 때 국가적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은 있으나 희년을 실행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학자들 중 희미한 몇 구절을 가지고 구약에 희년이 지켜졌다 주장하기도 하나 토지를 돌려주고 노예를 풀어주는 희년율법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국가적으로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윗 솔로몬도 희년을 선포하지 못했다. 희년은 현실국가에서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희년을 전 국가적으로 시행하면 큰 부작용이 생긴다. 가난한 자는 희년이 가까우면 돈을 일부러 빌리고 토지나 가옥을 무조건 판매할 것이다. 부자는 이것을 뻔히 알기에 희년이 가까이 오면 사지 않고 빌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가난한 자는 희년을 생각하며 일 안하고 돈 빌리고, 부자는 희년에 돌려줄 것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희년은 사람의 소유본능(=죄)과 반대되는 것이기에 강제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
희년이 시행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토지와 사람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는 죄의 욕심을 가진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사람으로 바뀔 때만 가능하다. 희년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만 지킬 수 있다. 그래서 희년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구속사의 최종완성 예표 절기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나사렛 회당에서 구약 이사야 61장을 읽으시며 희년을 선포하셨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의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희년이 도래한다고 선포하심이다. 오순절 초대교회의 자발적 기쁨의 구제가 바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희년의 성취였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은 희년의 율법을 저절로 지키게 된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6-21)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성령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재물(맘몬)을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 물론 기독교는 무소유 공동체가 아니다. 자기 삶을 유지할 기본적인 것은 남기고 나머지를 다 팔아 구제함이다.
성령 받은 성도들은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여분의 재물들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생겼다. 그들은 희년율법을 억지로 지킨 것이 아니라 희년율법을 지킬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지킬 수 없는 희년율법도 넉넉하게 지킨다.
7. 내가 류광수 다락방을 거부하는 이유
구원은 십자가 정문으로 들어가야 얻는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심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성령 받아 생명을 얻었고, 우리 마음에 새긴 성령율법을 통해 죄에서 벗어나 의를 행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 복음이고, 우리 앞선 모든 성도들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 도적이요 강도다. 다른 복음은 없다. 내가 류광수 다락방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첫째, 류광수 목사는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사탄신학 무당복음으로 바꿔버렸다. 그래서 다락방에는 죄사함의 회개가 없고 회심의 역사가 없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류목사 메시지를 듣고 회심한 사람을 보았는가? 지금까지 다락방에서 죄사함의 감격과 회심의 눈물을 흘리며 거듭난 사람을 보았는가? 과연 다락방의 구원간증은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구원간증과 본질적으로 동일한가?
류광수 무당복음으로는 절대로 회심이 있을 수 없다. 불신자 상태에서 신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예수 영접한다고 회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알고 영접한다고 회심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고 내가 죄인임을 회개하지 않고는 회심이 없다. 진리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둘째, 류광수 사탄신학은 성령께서 죄인을 거룩케 하시는 성화사역을 율법주의로 냉소하고 율법폐기론 방탕주의 타락을 복음누림이라 가르침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였다. 다락방 목사들의 윤리적 타락은 한 번의 실수나 개인적 일탈이 아니다. 그들의 타락은 류광수 사탄신학과 복음누림 방탕신학에 근거한 확신있는 결과물이므로 성령모독죄와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6-29)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4:3-8)
셋째, 사람의 관심이 어디있는가는 그의 말이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안다. 전도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는 아무리 바빠도 지금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있을 것이다, 돈을 사랑한다면 그는 아무리 거룩하게 포장해도 결국 돈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류목사가 누리는 상식 이상의 과도한 부는 그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신실한 다락방 성도들이 세계복음화를 위해 금식하며 30년간 헌금한 수많은 목적헌금은 과연 그 목적에 맞게 쓰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재정자료를 홈페이지에 공개하면 금방 의혹 해소될 텐데 아무리 요청해도 계속 미루고 공개하지 않아 수많은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가 교리적 이단임은 분명히 알지만, 부당한 재물까지 축적한 사이비 이단 교주는 아니길 바란다.
[출처]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6)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율법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7) -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교리적 문제이다.
지금 다락방에는 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갈등하고 있을 줄 안다. 지금 드러난 수많은 재정 비리와 성비위 윤리적 타락은 잘못임을 인정하지만 다락방 메시지는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락방의 타락은 류목사가 가르친 복음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개인의 잘못이지 교리적 문제가 아니다. 류목사는 오직 그리스도 오직 복음 오직 전도만 외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다락방은 신천지 JMS 같은 이단이 아니다. 다락방에 참여한 목회자들도 주로 보수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다. 그분들이 바보가 아닌데 다락방이 이단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는가?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류광수 목사를 이단이라 주장하게 되었는지 개인간증을 하겠다. 지나온 내 어린 시절부터 말하게 됨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1. 다락방 이전 신앙배경 – 정통신학 배경에서 성경을 읽으며 자라났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충현교회 중등부 동계수련회에서 회심을 했다. 당시 교회 담임선생님은 성경 읽기를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나는 매일 하루 한 두장씩 꼭 성경을 읽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충현교회 본당 아래 소예배실에서 강도사님이 가르치는 로마서 강의를 배운 기억이 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 나는 목사가 나의 소명이었기 때문에 전공서적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었고 공부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10시간씩 앉아 신약성경을 20번 읽은 기억이 난다. 군대 가서는 성경을 읽을 수 없어 성경암송으로 바꿨고 로마서를 비롯한 400구절정도 암송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설교를 했다. 개척교회였기에 고등학생인 내가 여름성경학교 마지막날 결단의 시간 영접초청 설교를 했고 그때 예수 믿고 지금도 신앙생활 잘하는 몇 사람이 있다. 대학 1학년, 2학년 때는 친구의 시골교회 중고등부 여름수련회 강사를 했고 첫날 개회예배는 수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학생들과 전교인 앞에서 수요예배 설교로 했다. 마을 어른들까지 약 150여명이 왔던 것으로 생각난다. 대학 생활 내내 후배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졸업 후 교사생활 할 때 역시 선교부 학생들과 기도모임을 만들어 성경공부와 신앙교육 시켰다.
이처럼 장황하게 말한 목적은 나는 기본적인 성경지식과 신앙배경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예수 믿고 바로 다락방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미 성경을 여러차례 읽었고, 대학 때는 CCC, 네비게이토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배웠고 또 가르쳤었다. 이런 내가 1993년 아버지에 의해 다락방을 알게 되었고, 류목사 테입을 듣다가 1995년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락방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신대원에 가서 조직신학을 좋아했다. 신학박사를 목표하지 않았기에 평범하게 공부했지만 조직신학 교리공부 만큼은 열심히 했고 재미있었다.
2. 다락방 메시지를 만남 - 전혀 이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이런 내가 다락방 메시지를 들었을 때 이단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CCC 사영리나 네비게이토 브릿지 예화에 비하면 사탄이 강조되지만 그게 이단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하나님 떠남, 죄 가운데 빠짐, 사단에게 잡힘, 불신자 여섯가지 상태, 왕, 선지자, 제사장 그리스도 영접. 신자의 일곱가지 축복... 이것처럼 복음적이고 현장전도적인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다락방은 아무리 보아도 이단이 아니었다. 사단이 조금 심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고 왕 선지자 제사장 그리스도 삼중직을 설명하고 영접하는데 뭐가 이단인가? 비록 류목사나 다락방 목사들이 말을 거칠게 하고 한국교회를 비난하지만 그것은 개인인격이 모자란 것이지 그것 때문에 이단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2007년 1월 까지 류목사와 다락방 메시지가 이단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교회에서만 살았던 내가 다락방 메시지로 두 명의 무당을 영접시켜 보았기 때문이다.
3. 2007년 1월 어느 날 내게 일어난 사건 -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됨
2007년 1월 하나님 나라 책을 계속 읽던 어느 날, 갑자기 죄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원죄와 자범죄 등 기본지식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내가 가진 그 지식이 너무 원론적이었다. 그래서 죄에 관한 정의를 모아보기 시작했다. 기독교 백과사전, 원어사전, 로이드존스 로마서강해, 각종 조직신학책들... 몇 일을 조사하며 찾다보니 성경과 2천년 기독교회가 믿고 가르쳐 왔던 죄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원죄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아담적 본성이다. 이 부패한 본성이 모든 인류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그 본성 때문에 사람은 자범죄를 짓는다. 마이클 호튼은 이것을 죄책과 오염으로 설명했다.
교리적으로는 배웠고 원리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 진리가 내 영혼을 관통한 것은 그 날이었다. 나는 이 진리를 그동안 딱딱한 교리로 알고 있었다. 다락방의 원죄를 몰랐다면 나는 지금도 원죄를 교과서 진리로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날 나의 십자가 복음이 시작되었다. 그 날 죄가 이해되니 갑자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의 속죄 피로 세운 하나님 나라 구원까지 한 순간에 이해되었다. 그 날 나는 왜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게 진리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순간이었다. 물론 오랜시간 기본지식을 축척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 진리가 하나로 꿰어지는 것은 단 한순간이었다. 진리의 성령께서 내 눈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류광수 목사가 사탄신학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2007년 1월의 어느날 사건이다.
이날부터 나는 다락방 메시지가 정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현장전도를 위해 인간이 하나님 떠나 죄에 빠져 사탄에게 잡혔다고 설명하는 그 단순한 원죄 설명이 어떠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회심을 체험하고 성경을 읽던 배경에서 다락방을 만났다. 전도를 위해 다락방 메시지를 사용했고 나름 불신자 전도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전까지 다락방 메시지는 현장전도용 메시지이기에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불신자 전도하겠다는데 그 정도 사탄강조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고, 뭐가 이단이냐는 생각했었다.
4. 십자가 신학과 사탄 신학의 차이점을 한 눈에 알게 됨
죄가 무엇인지 눈이 열린 그날, 나는 류목사가 죄를 “내 속에 있는 부패한 아담의 본성”이 아닌 “모든 사람이 사탄에게 잡혀있다” 주장하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류목사가 늘상 말하는 인간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혔다는 그 말은 전도메시지가 아니라 그의 핵심사상이었다.
나는 류목사가 안창마을 무당현장에서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달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죄를 깨닫는 순간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신학이 한 순간에 세워졌듯 류광수 목사도 죄는 사탄에게 잡힌 것이란 것을 깨달은 그 순간에 오늘 다락방 메시지 전체가 세워졌을 것으로 확신한다. 증거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 신학을 공부하신 목사님들과 신앙이 깊은 성도들은 얼마든지 원죄 자범죄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다. 이 땅의 모든 고통이 죄 때문이라는데 가슴에 잘 부딪히지 않는다. 그 증거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무리 그리스도를 말해도 감격이 없고 십자가 죄사함은 딱딱한 교리에 불과하다.
이때 죄를 사탄에게 잡힌 신분 소속 상태(운명,영적문제)라고 이해해 보시라. 눈이 번쩍 뜨인다. 세상 모든 문제 원인이 한 눈에 보인다. 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생생하게 보인다. 이때 어느날 나는 알았네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노래가 나온다. 이게 다락방에서 복음이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깨달아 진 것이다. 죄가 이해되지 않은 사람들이 사탄문제로 그리스도를 볼때 오는 착시현상이다.
5. 사탄강조 이단신학과 복음누림 방탕메시지 때문에 다락방 목회자들이 타락함
2009년 12월 다락방을 나올 때, 나는 다락방의 타락상을 그리 잘 몰랐다. 간혹 몇가지 소문으로 들었으나 개인적 일탈로 생각했지 류목사 자신과 다락방 핵심목회자들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진 타락인지는 잘 몰랐다. 그런 사실은 나 같은 다락방 부목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 카페에 들어와 다락방 본부목사들의 타락상을 보고 너무 놀랐다. 한 두 사람이 아닌 대부분 다락방 목사들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는 죄가 아닌 사탄을 강조하는 류목사 이단신학이 복음누림 실천메시지가 되어 목회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락방 개혁연대의 기폭제가 된 그 분은 초창기부터 잘 알던 분이다. 나는 그분이 다락방에서 지식과 인격, 신학을 갖춘 몇 안 되는 귀한 분으로 알고 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분의 엄청난 행위도 있지만 그분이 한 말이었다. 고신출신 그 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R 목사는 여자문제 많다. 지금도 R 목사는 최xxx 와 같은 집에 산다. 근데, 괜찮아. 그거 상관없는 거야. 중요한 건 그런 윤리적인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 분을 사용하실 거냐의 문제인 거지.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끝나는 거야."
세상에... 이게 내가 좋아했던 그분이 한 말인가? 그 반복되는 음행 속에 빠져있는데도 하나님이 류목사를 사용하고 계신다고 말하는게 제정신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류목사는 사탄, 마귀, 귀신... 온갖 더러운 악령들에 잡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 경건하고 올바른 신학의 고신출신 목사는 어디 갔는가? 류광수 사탄신학과 40년 함께하니 류목사와 똑같이 된 것이다.
지금 다락방의 윤리적 타락을 보며 그래도 메시지는 맞지 않는가 생각하시는 모든 분들께 분명히 말씀드린다. 회심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다. 당연하다.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몇 번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괴로워하며 탄식하고 깊은 회개를 할 것이다. 그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결코 그를 그냥 놔두시지 않는다. 그는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다락방의 타락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음행을 반복하며 복음 붙잡았으니 다 끝났다고 자기가 자기를 용서한다. 사실 음행 같은 죄는 목사에게 너무나 치명적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음행은 한번만 저질러도 목사로는 거의 회복불능이다.
다락방 목사들은 밧세바 사건을 좋아하는데 3천년 전 고대왕국의 절대군주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우습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1천명의 아내를 합법적으로 두었던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다윗은 수년 동안 침상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통한의 회개를 했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간음죄를 범하지 않았다. 다윗이 회개를 멈춘 것을 솔로몬을 낳고 나서다. 그 이전까지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없었다. 다윗은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여 달라고 계속 탄식하며 회개했다(시51편).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시며 여디디아(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 이름을 주실 때에야 비로소 다윗은 죄용서 받음을 확신했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대상3:5) 아무리 짧게 잡아도 음행이후 최소한 5년 이상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다윗은 비로소 성전에 들어갈 기쁨의 사죄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6. 죄를 사탄으로 바꿨기 때문에 회개와 성화가 없는 타락한 거짓복음이 됨
윤리적 타락은 교리적 이단의 결과이다. 죄를 내 속에 있는 부패한 아담의 본성이 아닌 사탄에게 잡힌 것으로 시작한 세미베뢰아 이단신학이 다른 그리스도, 다른 십자가, 칭의와 성화 없는 다른 구원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오직 복음만 말하는데 어떻게 이단이 되느냐고 한다. 그들은 구원의 조건을 오직 예수가 아닌 행위구원 공로사상 등을 추가하는 것만 이단으로 안다. 아니다. 오직 예수 오직 복음해도 그 복음 내용이 십자가 정통신학이 아닌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해도 이단이다. 신천지와 JMS 를 보라. 거기도 오직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다른 예수이다.
나는 류목사가 제시한 20가지 성경적 전도방법은 이단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론적 허구라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사역 지교회로 이루어지는 평일 평신도의 집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현장 전도방법론은 그런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락방 복음이 아닌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다락방에서 지교회까지의 전도방법론을 한국교회에 추천할 용의가 있다.
다락방 전도메시지는 정통교회의 전도메시지 보다 영접이 많을 수 있지만 참된 영접인지는 확인해야 한다. 물론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런 영접도 감사하다. 교회로 데려와서는 반드시 칭의와 성화의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사탄이 강조된 다락방 메시지도 불신자 현장전도메시지로 어느 정도 사용할 마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류광수 목사 스스로 사탄신학 다락방 메시지를 폐기한다는 공개 선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이전까지는 어림없다.
열매는 나무의 결과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님은 열매로 거짓선지자들을 안다고 하셨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하며 온갖 메시지를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신다(마7장).
선한목자는 양들이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지만, 강도와 도적은 양들을 속이고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운다(요10장). 그동안 개척교회 담임목사들이 땀 흘리며 전도한 새신자들은 어느 교회로 이동했고, 그 목사님들이 힘들게 낸 수많은 집회 참가비용은 누구에게로 돌아갔는가?
7. 글을 마치며
나는 다락방 이단박멸 사명이 아니다. 류광수 목사에게 개인적인 원한 감정도 없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떻게 살던 별 관심이 없다. 그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믿는다. 나는 다락방 이단교리 비판하는 것보다 십자가 설교하기도 바쁘다. 지난 10여년간 다락방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유튜브 동영상이 간혹 보여도 클릭조차 안했다.
10여년 만에 우연히 이 까페에 들어와 글을 읽다보니, 탈다락을 고민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년 올인한 다락방을 나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도 잘 알기에,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신광 목사가 나에게 쓴 반박 글을 읽었다. 나는 그분과 논쟁할 이유가 없다. 그분과 싸워 내가 지금까지 주장했던 내용이 맞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를 전혀 못느낀다. 그분이 정말 나와 싸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락방 본부에서 시켜서 글을 썼을 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신학이 다락방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락방 본부에서 붙여놓은 싸움에, 나나 최신광 목사가 놀아날 필요가 없다.
내 관심은 다락방 내의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을 탈다락 시키는 것이다. 나는 그 일 하나 때문에 내 귀한 시간을 쓴다. 나는 이번에 다락방 본부에서 두려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됐다. 나는 현대종교를 통해서 계속 말을 할 것이다.
한국기독일보에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1-18) 전체를 기고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98% 실어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2%의 가능성이지만 만약 게재해준다면 나는 정말 정말 기도응답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겠다. 그러면 다락방 모든 성도들과 한국교회 성도들 앞에서 류목사 녹취록과 동영상을 가지고 류광수 다락방 이단신학 공청회를 하겠다. 물론 다락방 대표신학자와 한국교회 대표신학자 모두 함께 참여할 것이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내가 가진 모든 자료를 가지고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일들은 이 카페를 지켜준 여러 목사님들과 귀한 성도들의 헌신과 눈물의 기도 덕분이다. 이 카페의 귀한 사역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류광수 다락방과 완전히 단절하고 또한 신실한 다락방 성도들이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드린다.
오랜만에 폴 워셔 책을 보다가 딱 다락방 이야기라서 공유합니다.
복음을 축소하면서 많은 폐해가 발생했다.
첫째,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졌다. 오늘날 “회심자”들 가운데에는 교회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종종 다시 타락하거나 죄의 습관에 매여 속된 삶을 일삼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예배당 자리만 채우다가 떠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도 이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전도 집회에서 손을 들었다거나 기도를 따라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 이런 그릇된 확신은 그들이 참된 복음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 영접기도 한 번 따라했다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거짓된 확신을 계속 주입하는 다락방. 진정한 회심을 가로막는다.
둘째, 축소된 복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집합체로 교회를 전락시킨다. 이런 교회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공동체가 아니다.
- 내 경험상 다락방 성도들은 인격이 성장하지 않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가 아니라는 증거다.
셋째, 축소된 복음은 최근의 문화적 흐름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기발한 마케팅 전략을 추구한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복음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태도를 부추긴다.
- 전도 우상화, 전도자 성역화, 목사 계층화.
넷째, 축소된 복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온전하지 못한 복음을 전하면, 회개하지 않은 속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권징을 소홀히 하는 탓에 그들은 어떠한 책망이나 훈육도 받지 못한 채 교회 안에 머문다. 그로 인해 교회는 순결함과 명예를 잃고, 하나님의 이름은 비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 다락방은 살린다고 하면서 권징하지 않는다. 권징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권징하지 않는 것은 성도와 교회를 죄악에 빠져살도록 방치하는 일이다. 다락맨들은 누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냐는 논리를 들고 나오지만 우리가 모두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말과 목사들이 성도 강간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다락방 목사들은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또는 성도가 떠날까 두려워 권징하지 않는다.
폴워셔가 말한 복음을 축소한 네 가지 결과 모두가 다락방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다락방의 문제는 결국 복음을 축소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다락방 목사들은 복음을 잘 모른다. 작게 '편집된' 복음은 알지도 모르겠다. 오직 복음, 원색 복음이라면서 청소년 수련회에서 구원의 길만 10년 넘게 그리고 있지 않은가? 모든 설교 전에 구원의 길을 5분씩 그리는 교회도 있다. 우스운 일이다. 성경 각 본문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말이다.
----------------------
폴워셔, The Gospel`s Power and Message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5), 9-12
[출처] 다락방이 복음을 축소한 결과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오트밀
류광수 다락방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이단 규정을 받은 단체이다. 다락방은 왜 이단일까? 류광수 목사의 설교나 다락방 메시지를 처음 들어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직 복음, 오직 예수를 말하는데 뭐가 문제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주의에 치우친 은사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기도, 오직 전도를 강조하는데 뭐가 잘못이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이 정치적 이단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너무 강하게 나가다 보니 괘씸죄로 이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류광수 다락방은 교리적으로 분명한 이단이다. 베뢰아 귀신론과 구원파 율법폐기론을 정통교회 용어로 바꿔 사용하는 이단이다. 구원론은 십자가 죄 사함이 아닌 십자가 사탄 결박이며 칭의와 성화의 구원이 아닌 “다 끝났으니 누려라”는 식의 방탕주의적 율법폐기론이다.
다락방에도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고, 다락방의 이단성을 모른 채 전도를 목적으로 지금도 다락방에 남아있는 분들이 있다. 또한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 중에는 다락방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다락방을 경험해 본 목사로서 바라본 류광수 다락방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단이 아니라 교리적 이단임이 분명하다.
원죄와 영적 문제, ‘죄’가 아니라 ‘사탄’이 초점
류광수 목사는 원죄에 대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혀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근본 문제이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영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원죄라고 설명하지만, 결국 사탄에게 잡혀 있는 영적 문제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류광수 신학이 가진 오류의 출발점이며 다락방 이단 교리의 시작점이다.
모든 문제 해결자, 예수 그리스도
모든 불신자는 마귀의 자녀로 태어나 우상숭배 하다가 정신적 고통과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죽어 지옥 심판을 받으며 영적인 유산을 남겨 자녀들도 똑같이 망한다고 다락방은 주장한다. 즉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고(선지자)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며(제사장)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셨다(왕)는 것이다.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해 다락방은 선지자와 제사장을 언급하지만, 결국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왕을 강조한다. 다락방은 이것을 초대교회가 증거했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의미로 믿는다. 즉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린 왕적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탄 결박과 영적 문제, 회개와 성화가 없는 다락방의 교리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영적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직접 사탄을 결박하고 귀신 들린 자를 구원하셨다고(마12장) 다락방은 주장한다. 예수님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세간을 늑탈하셨듯이 우리도 모든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을 결박해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사탄을 결박해야 영적 문제가 치유되고, 자녀와 가문의 영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다락방은 믿는다.
내 죄 때문에 발생한 일이면 내가 책임져야 하고, 사탄 때문이면 사탄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원죄론에서 시작된 다락방의 교리적 오류는 기독론의 오류를 야기하고 구원론에서 회개와 회심 칭의와 성화 없는 그저 사탄만 결박하려는 다락방 신도로 만든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는 결박되었다. 사탄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은 죄와 사망으로 멸망하는 자신의 나라를 막을 수 없다. 사탄은 그 권세가 결박되었고 주의 재림 때 유황불 못에 들어간다. 이것이 교회의 이해이다.
류광수 목사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면 사탄을 결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적 십자가 사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삶에 적용한다. 다락방에는 회개와 성화가 없고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한 사탄 결박만 있다.
“다 끝났다. 복음 누려라” - 구원파식 율법폐기론 교리
류광수 목사의 사탄 신학은 사탄도 이기지 못하고 죄도 이기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수없이 외치고 강조해도 계속 죄를 짓게 된다. ‘율법은 끝났고 복음을 누리라’는 구원파식 율법폐기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다락방 교인들의 삶을 회개와 성화 없이 방종하게 만든다.
다락방의 방탕함은 사탄 신학의 필연적 결과이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사탄 신학과 방탕주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없다(갈5:21).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고 성경은 권면한다.
많은 다락방 교회가 탈퇴하고 있다. 다락방의 교리적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 네이버 카페 “다락방 밖으로“를 참조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류목사와 다락방 =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3-20)
1. 사역의 열매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다.
거짓 선지자는 겉과 속이 다릅니다. 그의 모습은 선한 양처럼 보이지만 속은 이리입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임은 시간이 지난 후 맺어지는 열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맺혀지는 열매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열매는 사역의 열매가 아니라 개인의 전 인격에 나타나는 생명의 열매를 말합니다. 선지자 자신에게 복음이 말하고 있는 죄를 이기고 거룩해지는 성령의 열매, 구원의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거짓열매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매는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알려주는 증표일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에게 성령이 거하시는 여부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성령의 나무가 아니면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2. 성령의 나무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죄의 열매가 있습니다. 음행, 더러움,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이단투기 술취함 방탕함(갈5장) 음란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고전6장)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롬1장)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장).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벧후1장). 믿음 소망 사랑(고전13장)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마5장)
죄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는 완전히 다릅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절대 혼동될 수도 없습니다.
3. 다락방 목사들의 탈퇴는 교리적 이단문제이기 때문이다.
30년 다락방에 참여한 목회자들이 다락방을 탈퇴하는 것은 본부 목사들 때문이 아닙니다. 류광수 목사 때문입니다. 류광수 목사의 성비위와 재정의혹은 류목사의 이단 신학에서 왔음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상은 다락방 본부 목사들이 아니라 바로 류목사 자신입니다.
지금 예장통합은 총회장의 불륜사실로 아주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도 통합총회를 탈퇴하지 않습니다. 개인문제이지 교리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통합총회 교리가 통합총회장 불륜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락방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락방 목사들이 왜 다락방을 탈퇴를 할까요? 류목사와 다락방의 비리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교리 때문입니다. 온갖 성비위와 재정비리는 류목사의 잘못된 교리의 열매일 뿐입니다. 설령 류목사가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인격이 완벽해도 다락방 목사들은 탈퇴합니다. 삼위일체 이단 아리우스는 당대 최고의 인격자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흠을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이단입니다. 그에 비하면 류목사는 ...
4. 다락방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떠나야 하는 소돔과 고모라이다.
이제 다락방은 개혁할 대상이 아니라 유황불이 쏟아지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류목사와 본부측근 목사들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락방 안에 있는 신실한 목사님과 성도들을 염려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류목사 실수는 인정하나 다락방 메시지는 맞다는 오해를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반복적인 상식을 넘어선 범위의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그의 본심입니다. 다락방 용어로는 잡힌 것입니다. 류목사는 처음부터 메시지가 틀렸고 그 틀린 메시지로 인해 온갖 불미스런 죄의 행동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 카페 여러 목사님들이 그동안 써왔던 교리적인 글들을 진지하게 읽어주십시오. 이 카페를 조금만 살피면 류목사의 교리문제를 다룬 글이 많습니다. 못봤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클릭하면 얼마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
5. 이번 탈퇴선언 이후, 우리는 류목사 이단신학과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번 다락방 목회자 탈퇴선언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교회를 향해 류목사가 교리적 이단임을 알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현대종교, 기타 기독교 언론매체를 통해 계속 알려나갈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몇 년 걸릴지 모르는 류목사와의 이 싸움에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서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나설 것입니다.
[출처] 류목사와 다락방 =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다락방 밖으로(다락방 탈퇴자의 모임)) | 작성자 h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