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식 원죄론
(탈다락 새내기를 위한)
다락방식 원죄론
(탈다락 새내기를 위한)
탈퇴는 하였으나 아직 교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본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을 탈다락 새내기님들에게 드립니다.
다락방은 100% 잘못된 단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나은 점도 많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불신자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은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99% 생수에 1% 독극물을 섞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1% 독극물이 끼치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직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 이 둘의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내용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같이 사용하는 용어 속에 담긴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입니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락방식 복음이란?
다락방 복음은 인간의 근본문제 곧 원죄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 신분과 소속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언약을 거부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두 불신자의 저주 상태에 빠져있고 그 해결책은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와 제사장도 언급하지만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일반교회와 차별화시켜 구체적으로 사탄을 꺾으신 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락방에서 복음을 깨달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고 특히 사탄을 꺾으신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월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다락방이 일반교회에는 복음이 거의 없거나 희미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마귀꺾은 그리스도의 왕직입니다.
이 부분을 차별화하며 이 부분에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이 강하고,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격하고, 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에 헌신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원죄와 사탄과의 관계에 대한 차이점
다락방 복음에서는?
다락방 복음에서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탄이 원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죄와 사탄이 존재론적으로 같다고까지 확신 있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입니다.
다락방 목회자들도 원죄에 대한 이 정의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알면서 그렇게 가르치면 그분은 신학계에서 언급되어지는 사탄신학을 가르치는 분입니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한국교회에서 사탄신학을 드러내놓고 자신 있게 가르치는 곳은 베뢰아와 그 아류들 밖에 없는데 설마 다락방 목사가 자기는 베뢰아 신학을 동의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 모르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락방 목사는 원죄를 인간이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힌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교인들에게는 원죄 속에 사탄을 포함시켜 가르치고 설명하고 그렇게 믿도록 가르치지만 혹시 신학적 질문이 들어오면 죄와 사탄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물론 죄는 비인격적이고 사탄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원죄에 빠진 인간은 인격적 존재 사탄에게 결정적으로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원죄 속에 사탄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알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죄와 마귀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다락방식 원죄론에서는 원죄를 해결하는데 사탄을 직접적으로 꺾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게 잡힌 것이기에 원죄를 해결하려면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을 꺾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탄을 꺾어야 죄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논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말하긴 하지만 그 비중이 약한 이유는 마귀 꺾는 그리스도가 다락방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강한자를 결박한 후에 그 세간을 늑탈한다는 구절을 근거로 삼아 마귀의 손에서 해방됨이 구원이라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구원은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입니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는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복음에서의 구원은 임박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는 것입니다.
롬3: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마귀의 손아귀에 잡힘으로써 마귀가 가져다 준다는 불신자의 저주스러운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저주의 원흉이 되는 마귀를 꺾는것이 복음이 아닌 이유는 인간사에서 발생한 모든일들, 생사화복은 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 심지어 불신자에게 벌과 진노를 내리시며 지옥에 떨어뜨리시고, 지옥의 불을 더 뜨겁게 달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영원토록 지옥을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엔 분명 사탄의 역사와 사탄의 멸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사탄을 너무 대단하게 여겨서도 안됩니다.
아담하와가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게 되었음은 창세기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선악과 금령을 어긴 사건에 대하여 사탄에게 책임을 더 지울 것이냐, 아니면 아담에게 책임을 더 지울 것이냐가 우리의 신앙관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한 주체는 인간입니다. 사단은 그저 선악과를 먹으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므로 마귀탓만 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에게 속은 것은 맞지만 분명 자신의 의지로써 죄를 지은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날에 사단에게 속아 죄를 짓게 되었다는 변명은 안통합니다.
성경에서말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특히 바울이 설명하는 죄는 첫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받게 될 형벌 즉 죄에 대한 책임과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갖게 된 부패한 죄의 본성, 원죄로 인한 오염까지를 죄라고 설명합니다.
즉 원죄란 내가 지은죄가 아닌 아담의 죄인데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고,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된 부패한 본성도 나에게 있어서, 부패한 본성에 의해 발생되는 자범죄들까지도 다 원죄의 범위안에 들어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원죄란?
첫째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아담이 지은 범죄인데 아담이후 모든 인간에게 짊어지워진 법적인 책임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니며 내가 선악과 먹은게 아닙니다.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죗값, 죄에 대한 책임이 모든 인간에게, 나에게도 짊어지워 있습니다. 그 증거가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모든인간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이것을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원죄란 원래 있는 죄로써 인간은 원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서 원죄는 나와 상관없이 아담이 지은 죄만 말하는 게 아니라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태어나면서 가진 죄의 본성, 친죄 성향, 부패한 성향까지 원죄에 포함됩니다.
이 부분이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원죄의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즉 원죄는 아담으로 인해 얻게 된 인간의 부패한 본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죄로 인한 친죄성향,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부패한 본성때문에 자범죄가 나오는데 우린 이 자범죄를 우습게 여겨선 안됩니다.
그런데 다락방식 원죄론에서는?
그런데 다락방식 원죄론에서는?
창세기 3장문제가 모든 인간의 근본문제라 설명하고,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인간의 근본문제가 다 해결되니까 인간의 모든문제가 다 끝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문제해결자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엔 모든 죄는 다 끝난 것으로 간주하는데, 실제론 원오염과 부패한 본성으로 인해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나는 해방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정신승리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패와 친죄성향으로 인해 발생되어지는 자범죄는 죄로 취급도 안하는 아이러니에 빠졌으며,
내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욕구와 그로인해 발생되는 자범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가르쳤으니 율법에 의하여 죄인으로 지적받기를 인정하지 않으므로써 영접한자에게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가 가진 원죄 즉 부패한 본성이라 여기지 않고 사탄에게 있다고 간주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마귀에게 책임을 돌리는 다락방식 원죄론
'사단에게 속았다'라는 명제는 '내가 지은 자범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분명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것은 맞는 일이지만, 그것이 음주든, 폭력이든, 음행이든 이미 영접기도 따라한 후에 정신승리에 빠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이 확실하고, 내가 지은 죄는 단지 그 순간 사단에게 속아서 발생된 사건이기에 그 책임도 마귀에게 있다는 논리가 되며 이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범죄의 중함을 자꾸 경감시키게 됩니다.
죄를 짓게 만든 원인이 마귀이니까 죄를 지은 나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못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통신학에서는 죄책은 끝났으나 죄감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반면 구원파식 복음은 죄감과 죄의식은 필요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술마시고 죄를 지은 자가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외치며 무죄를 주장하거나 형벌의 경감을 주장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죄성을 보며, '사단에게 속아서'라는 말을 고백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고백하며 괴로워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고백할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롬 7:21-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죄는 내가 내 인격을 동원하여 내 감정,내의지, 내 판단, 내 결정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지은 것이며, 그 책임도 나에게 있고, 그 형벌도 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그랬다고 한다면 마치 창3장의 아담 하와와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에 아담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여자 때문에 라고 핑계를 댓었고, 하와는 저 뱀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었는데, 죄로 물든 인간은 우리조상 아담과 같이 똑같이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흑암세력에게 속아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핑계 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이 마귀때문입니까?
자동차 시동 안걸릴때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야 합니까?
성문제를 일으킨건 마귀가 도발한것이니 덮어줘야 합니까?
다 마귀 떄문에 그랬다는 핑계를 대는 논리가 정형화 고착화 되어지면
비상식적인 인격과 신앙관을 가진 파렴치한자가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만 하면 된다는 말도 안되는 무개념주의자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먹는 것이며 영화 밀양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수치를 은폐하려는 것은 아담을 닮은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율법에 의해 자신의 죄가 드러날때에 그 즉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며 나아가야함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구원파식 신앙관은 죄인임음을 깨달아 은혜를 의지하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복음을 못깨달은 종교생활이라 치부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오는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대단한 경지, 1% 엘리트 서밋에 이른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도훈련 많이 받은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헌금 많이 낸 순서대로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전도 실적과 말씀현장 개설 갯수가 많은 순서대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죄성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함으로,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다락방에서는 회개가 필요없다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그보다 죄책감에 눌리지 말고 하나님 자녀된 신분과 권세를 누리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에게 놀라운 신분과 권세를 주셨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으니 미래의 죄도 다 끝난것이고, 그러니, 더 이상 죄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죄감을 느껴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긴다면 아직 율법에 메인 상태로써 이미 다 끝내신 그리스도를 못깨달은 것이며 복음 못깨달은 종교생활이라 설명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잃어버른 다락방식 구원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분이 보장된것은 사실이지만,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려고 예수께서 희생의 값을 치루셨다는 성경 말씀에는 눈과 귀가 둔감해집니다.
다락방식 신앙생활은 구원의 은혜와 감사와 감격은 점점 사라지게 되며, 흑암에 덮인 세상에 다락방과 베뢰아식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으로만 신앙의 내용이 채워지니 실제로 교인들은 영적으로 늘 갈급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권세를 누리며 비싼돈을 지불하는 전도훈련에 인생을 올인해야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될수 있다고 배웠으니,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간직하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은 점점 잊혀져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원수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입니다. 그러니 항상 거룩하려 노력해야 하며, 혹여나 실수 할지라도 범죄하였다면 회개하며 십자가를 붙듬이 마땅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죄를 문제삼지 않으려니 드러나는 죄악에 대하여서는 영적문제라는 그럴듯한 표현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실제로 다락방에서는 인간의 죄를 문제삼는 경우는 구원의길 메시지를 전할 때 창세기 3장문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마귀에게 잡혔다는 설명을 하면서 살짝 언급합니다.
그 후엔 죄는 영적문제로 치환되어 언급됩니다.그런데 영적 문제는 개인이 치유 받을 문제일뿐 회개할 문제가 아닌것입니다.
죄를 경히 여기는 다락방식 신앙생활
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영적 문제는 하나님과 나를 분리시키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나의 발목을 붙잡아 나를 실패하게 만드는 문제이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므로써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인격자와 인격자 사이에 발생한 윤리적 문제라면 영적문제는 하나님이 개입될 필요가 없는 인간 개인이 치유 받고 해결할 문제인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범죄할 때마다 치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게 아니라 회개하므로써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옷을 찟고 재를 뒤집어쓰고 납작 엎드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회개하는 신앙생활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다 끝내셨다. 다 이루었도다 테텔레스타이 다 지불되었다는 구속의 의미를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다며 더 이상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내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긴다면 못깨달은 것이라 치부해버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속의 의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속하신게 맞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범죄한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원죄와 자범죄를 포함한 모든 죄의 대속입니다, 그런데 대속이라는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대속이란 죄가 없어졌다게 아니라, 죄를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입니다. 의의 옷을 입은 죄인일 뿐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죄를 즐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가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회개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실제론 죄인인데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는 안본걸로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원래는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있었어야 했는데 특별사면 받아 출소했다면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 하겠다는 회개의 다짐과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출소한 죄인은 호적에 빨간 줄이 있는 사회인입니다. 감옥에만 안 들어가 있을 뿐 알고보면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죄인입니다. 또 죄지으면 빨간줄 하나 더 생긴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더욱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영적싸움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죄사함을 받았겠지만, 성도가 죄를 지을수 없는 완전한 영화의 상태로 승화된게 아닙니다. 언제든지 죄지을수 있습니다. 요것이 신자의 영적싸움입니다. 흑암꺾는다고 죄 안짓는게 아닙니다. 성령을 힘입어 죄와 싸워야 합니다.
사무엘 루더포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은 인간의 죄를 도말함과 동시에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내 안에 죄성은 살아 숨쉬고 있으며,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는 또 막힙니다.
죄에 넘어지면 그 순간부터 회개하기 전까지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 마음 한켠이 무겁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왠지 꺼려집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음에 새겨진 율법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율법이 폐기되어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렸으니 이는 성령을 거부한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9: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9: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스스로를 병든자라 여기는 자가 의사를 찾아갑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가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내가 죄인인줄 모르기에 그리스도 또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교회를 성장 시켜줄수 있을거 같은 전략들 뿐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으니까 주식회사 예수만 찾습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찾으나 그 실상은 바알이 준다는 세상적인 성공과 세상적인 영만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문제 해결자 그리스도라는 표어만 외치는 것입니다.
성경과는 다른 다락방식 기독론
만사형통의 응답을 갖다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사하신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육신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복음 잘 누리는 사람이라는 공식은 히브리서 11장 명예의 전당에 오른 신앙위인들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다락방에서는 죄사함의 확신을 강조하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죄가 다 끝났다고 가르치니까 회개가 아닌 신분 권세와 복음을 누리는 신앙행태가 경건과 거룩으로 채워져야할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었으니 죄가 성립되지 않고,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이미 다 끝났으니 죄에 대한 경각심은 없어집니다.
그러면서 점점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며.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죄에 대한 심각성을 못느끼고, 뻔뻔한 크리스챤, 죄와 더불어 먹고 사는 몰지각한 크리스챤들이 계속 양산이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은 마귀에게 속아 발생한 원죄 때문에 망했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저지른 자범죄 때문에 망했습니까? 자범죄로 망한것입니다.
그들의 탐욕, 하나님도 예배하지만 바알도 함께 섬기는 배교와 우상숭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저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시행하지 않고,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자를 돕지 않고, 오히려 억압하고, 압제하며, 긍휼과 자비를 저버린 죄악된 행위 때문에 망한것입니다.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시려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담의 선악과 사건만 해결하신게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을 새언약의 백성답게 만드시려고 그들이 짓고 있는 죄악들 곧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로 인하여 발생된 오염물들, 부패한 본성이 만들어낸 자범죄들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경고 하십니다. 그 방법이 성령의 역사이며 마음판에 새겨진 율법이며, 그 율법을 기뻐 순종할수 있는 새언약의 백성으로 만드심입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외식하는 자들아, 바깥어둠가운데서 슬피 이를 갈며 울리라 하시며, 회개하고 돌이키라 명령 하셨습니다.
성경은 원오염과 부패을 갖고 태어난 우리에게 끊임없이 죄와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잠언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시편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잘못된 다락방식 교회론
하물며 교회안에서 발생된 죄악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교회 내부에 알리지 않고 , 복음적 처사로써 전도자니까 그냥 넘어가자 해버리면 그 죄악과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물론, 사탄은 분명 이간하고, 분리시키고, 죄를 짓게 하고, 악한일을 꾀합니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뒤에서 기쁘게 웃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이겨낼 때, 성령이 기뻐하십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회개는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늘 돌아가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면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백성에게 징계하는 목적은 회개케하여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다락방의 죄론은 죄를 짓거나, 문제가 생기거나, 뭔일이 생기면 사단에게 속았다, 영적문제다 라고 핑계를 대는 신앙생활을 가르치므로써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죄에 무감각해지며 전혀 죄의식이 없는 반사회적 비인격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전염병자와 문둥병자는 성 밖으로 쫓아냅니다. 전염병은 남에게 옮기는 것이며, 문둥병은 감각이 없는 증상으로써 다 죄의 성질과 관계된 질병들입니다.
구원파는 죄에서 완전해방 되었다며 기뻐합니다. 더 이상 정죄감에 억눌릴 필요가 없다함이 그들에겐 기쁜소식입니다. 이런 교리가 교회안에 죄악이 누룩처럼 퍼지는 원인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한 전도열광주의에 빠져 어쨌든 저쨋든 전도만 하면 다 포용된다는 잘못된 신앙관과 죄의식을 못느끼는 무율법주의는, 심지어 룸싸롱에 가서 한잔 마시며 여기저기 주물러대도 복음만 전한다면 아무문제가 아닌것이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 끝났는데 무당과의 잠자리를 못할게 무엇이냐는식의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을 심지어 여자 목사의 입에서 서슴없이 뱉어내며 에스키모인의 관습을 따라 남의 아내도 취할수 있어야 복음라는둥 말도 안되는 음행을 정당화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악입니다.
결론 - 다락방식 원죄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창세기 3장 문제가 인간의 근본 문제라고 설명하는 다락방식 원죄론에서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소속과 신분이 마귀에게 잡힌 상태이므로 마귀에게서 해방됨과 마귀를 꺽는 그리스도와 마귀가 가져다준다는 불신자 상태의 저주에서 해방됨이 구원이라는 논리가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져야 할 법적인 책임까지 간과하게 되었고, 원죄로 인한 친죄성향을 십자가에 못 박는 믿음의 선한 싸움 또한 놓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이란 마귀로 인하여 발생되었다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어쫓김받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짐이 구원인데, 마귀로부터의 해방만을 구원이라 설명하니 결국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로 귀결됩니다.
구원은 창세기 3장 문제만 해결됨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모든 죄까지 해결되는 것로써 칭의와 성화 두 가지를 다 포함하여 설명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신분과 권세에 합당한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칭의만을 강조하고 성화를 소홀히 하면 신자 속에 내재 된 친죄성향과 부패한 본성을 방치하는 꼴이기에 방종과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길이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며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