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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그쪽도 무사히 참가를 마친 모양이었다. 마음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신히요.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민페까지 끼치고......"

내 사과에 소녀는 살짝 웃었다.

"괜찮아. 버기로 달린 거, 재미있었거든. 그보다 예선 블록은 어디였어?"

"음......"

나는 다시 한 번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F블록이네요. F37번."

"아...... 그렇구나. 동시에 신청해서 그런가? 나도 F블록이야. 12번이니까...... 다행이다. 부딪친다 해도 결승이겠네."

"다행이라니, 왜요?"

"예선 토너먼트에서 결승까지만 가면 본선 배틀 로열에는 승패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거든. 글니까 우리가 둘 다 본선에 진출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거지. 하지만 만약 결승에서 부딪찬다면 , 예선이라고 해도......"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더니,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절대 봐주지는 않을 거야"

"아......, 그렇군요. 물론, 부딪치면 최선을 다해 싸워야죠."

나도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모니터를 홈 화면으로 돌려놓았다. 그때 나는 조금 전에 느꼈던 의문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서양 게임인데도 이 단말기는 우리마를 제대로 지원하네요. 공식 사이트엔 영어밖에 없었는데."

"아...... 응. 운영기업인《재스커》란 곳은 미국 기업인데, 일본 서버 스태프에는 우리나라 사람도 있대. 하지만 알다시피, GGO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도 법률상 좀 아슬아슬한 부분이 있잖아?"

"《통화 환원 시스템》때문에요?"

내 말에 소녀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떤 의미로는 사설 도박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홈페이지 같은 곳에는 최소한의 정보밖에 없어. 소재지도 실려 있지 않으니 철저하지. 캐릭터 관리나 통화 환원용 전자화폐 계정 입력 같은 게임에 관한 수속은 거의 게임안에서만 할 수 있어."

"뭐랄까, 참...... 대단한 게임이네요."

"그러니까 현실세계하곤 거의 완전히 단절된 셈이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지금의 나와 현실의 나도 마치 딴 사람처럼......"

문득 소녀의 눈동자를 엷은 그림자가 가로지른 것 같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슬슬 예선 대회장으로 가야겠다. 그래봤자 여기 지하지만. 준비는 됐어?"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다시 내 손을 잡아끌며 총독부 1층 홀의 정면 안쪽으로 향했다. 그 방향의 벽에는 엘리베이터가 여러 대 늘어서 있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가장 오른쪽의 문 옆에 붙은 하강 버튼을 누른다.

금방 문이 열리고, 소녀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이번엔【B20】버튼을 눌렀다. 보아하니 이 타워는 위로도 아래로도 긴 모양이다. 리얼한 낙하감과 감속감이 찾아오고,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어둠을 본 순간──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1층 홀과 비슷할 정도로 넓은 반구형 돔이었다. 조명은 거의 밝히지 않았으며, 곳곳에 설치된 철제 갓을 씌운 아크등이 생색만 내듯 빛을 뿜고 있었다.

바닥이며 기둥, 벽은 모두 검게 빛나는 강판 내지는 적갈색의 철망이었다. 돔 벽면에는 무뚝뚝한 디자인의 테이블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거대한 홀로그램 멀티 패널이 보였다. 그러나 화면은 칠흑으로 물든 채, 그저【BoB 3 Proliminary】라는 문자와 앞으로 28분 정도가 남았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만이 새빨간 폰트로 표시될 뿐이었다.

그러나 나를 긴장하게 만든 것은 그런 광격이나 낮게 흐르는 메탈계 BGM이 아니었다.

벽 쪽의 테이블이며 바닥에서 뻗어 나온 쇠기둥 부근에 모여 있는 수많은 실루엣──정확히는 그들이 발하는 기척이었다.

게임 안인데도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낮게 수근수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혼자 묵묵히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이 곧 치러질 BoB의 예선 참가자들이라는 것은 명백했으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거의 모두가 뼛속까지 가상세계에 물든 베테랑 VRMMORPG 플레이어라는 점이었다.

──아니지, 총 다이브 시간을 따지자면 내가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길지도 모르는걸, 왜냐면 재작년과 작년 만 2년 동안은 1초도 로그아웃 한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플레이어에게는《플레이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거의 PvE 전문이었는데 반해──그들은 모두 뼛속까지 PvP 유저일 것이 분명했다. 광택 없는 헬멧이며 두꺼운 후드밑에서 내게 보내는, 집요하리만치 정보를 캐내려는 날카로운 시선이 이를 증명했다.

나는 올봄에 ALO가 현행 운영체제로 이관된 후 대인 전투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 길고도 긴 공백 기간은 분명 나의 PvP감을 크게 무디게 만 것이 그 증거였다.

──이거 일이 아주 어렵겠는데, 키쿠오가 아저씨.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오른쪽 팔꿈치를 살짝 찔렀다. 쳐다보니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어, 아뇨, 아무것도......"

황급히 목소리를 낮춰 대답하자 소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대기실로 가자. 너도 아까 샀던 전투복으로 장비를 바꿔야지."

그리고 성큼성큼 플레이어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 발놀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으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주위에 무시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뿐이랴, 사내들은 나를 쳐다볼 때보다도 훨씬 강한 시선으로, 이글거리는 전의를 담아 소녀에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개중에는 무릎에 얹어 놓은 무서운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겨 철컥철컥 소리는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렇게나 큰 압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다니, 대체 얼마나 대담한 걸까. 나는 매우 놀라면서 모래색 머플러를 따라갔다.

돔 안쪽의 장소에는 테이블 대신 무뚝뚝한 강철문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소녀는 녹색 인디케이터가 점등된 문을 열고는 나를 안으로 데려가더니, 등 뒤에서 닫힌 문 안쪽의 조작 패널을 건드렸다. 찰칵 소리와 함께 인디케이터 램프가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내부는 약간 좁은 로커 룸 같은 공간이었다. 물론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우."

방 한가운데까지 이동한 소녀는 살짝 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원...... 다들 허세에만 찌들어선."

"허......허세?! 아까 그 무서운 사람들이요?!"

돔에 가득 찬 무시무시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되묻자,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깐. 시합 30분도 전부터 주무장을 여봐란 듯이 늘어놓다니, 대책을 마련해주세요, 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아아...... 그건 그렇구나......"

"너도 광검이랑 파이브세븐은 시합 직전까지 장비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소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휙 돌리더니.

조금 전의 대사보다도 나를 수십 배는 놀라게 할 행동에 나섰다.

다시 말해, 오른손을 휘둘러 메인 메뉴 윈도우를 불러내더니, 장비 피규어의 일괄 장비 해제 버튼을 누른 것이다.

모래색 머플러가 사라지고, 조금 짙은 카키색 재킷이 사라지고, 통 넓은 카고팬츠가 사라지고, 무늬 없는 T셔츠가 사라졌다.

이제 소녀가 입고 있는 것은 기능성 소재 같은 광택을 가진 면적 작은 속옷뿐이었다.

"으.......으아악!"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며 허겁지겁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손가락과 손가락 틈으로 소녀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며 돌아보았다.

"왜 그래? 너도 얼른 갈아입어야지."

"어, 네, 어, 그게......"

GGO에 다이브한 이래 최대급의 당혹감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이 않았다. 첫째, 무언가 변명을 찾아내 방 밖으로 도망친다. 둘째, 끝까지 여자인 척하며 보디아머만 장비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이 친절한 소녀에게 취하기에는 너무나 양심에 걸리는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가 더 이상의 무장해제를 감행한다는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제3의 선택으로 돌진했다.

최대속도로 고개를 숙이고, 동시에 메인 메뉴에서 네임 카드를 실체화 시켜 두 손으로 소녀에게 내밀었다.

"저, 저기...... 미안해! 이제까지 자기소개도 안 하고...... 나, 난 사실 이런 사람이야!"

"갑자기 말투가 왜......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