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저씨 아들 할래요.”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퉁퉁 부어버린 눈을 하고서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두 팔로 친히 아이를 받쳐 들고 있던 남자의 만면으로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내가 아직 아빠가 될 나이는 아닌데. 너희 부모님이 서운해 하시지 않겠어?”

 “…….”

 아이의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어느 모로 봐도 긍정의 표시였다. 쪼그만한 주제에 생각할 게 뭐 그리 많은지. 순식간에 입을 꼭 다문 채 혼자만의 고민에 잠긴 아이의 시간을 남자는 침묵으로 기다려 주었다. 소리는 다섯 번째 걸음이 바닥을 디딜 즘에 다시 이어졌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구해 줘요?”

 “그럼, 당연하지. 아저씨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치…….”

 아이는 숫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어어? 남자의 입에서 황당함이 묻어나는 추임새가 흘렀다. 살짝 흘러내린 몸을 고쳐 안으며 남자가 무어라 말을 보태기도 전에 이젠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에게서 다시 물음이 쏟아졌다.

 “그건 언제 끝나요?”

 “글쎄다. 정년퇴직 할 때?”

 “정년퇴직이 뭔데요?”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든 나이가 되면, 일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거야.”

 “그게 언젠데요?”

 “음…….”

 꼬맹이가 지금보다 네 배는 더 살아야 해. 그런 간단한 대답을 건네는 대신 남자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능력의 흔적이 남은 바닥, 그 위로 사체가 되어 쓰러진 이괴, 멀리 보이는 검은 문. 바람은 생각보다 한 발 빠르게 문장이 되었다.

 “전부 사라지는 날. 괴물들도, 저 문들도, 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전부.”

 “내가 도와줄게요.”

 “하하, 정말?”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느새 올곧게 남자를 향해 있었다. 소방복을 움켜쥔 수수부꾸미가 비장했다.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도와줘. 지금은 말고 조금 더 어른이 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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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꿈을 꿨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0여 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한 조각. 길게 나눈 대화도 아니었으며 특별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상대방이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대화는 그날부로 이로하를 이루는 뿌리가 되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이에게도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천하의 이로하조차 피해 갈 수 없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놓치지 않게 꼭 붙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이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던 감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도망치는 인파에 떠밀려 강제로 끊어진 연결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아는 얼굴이,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어지러운 풍경과 무질서하게 아이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덩그러니 선 채 넘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고작이었다. 세상에 버림받아 홀로 남겨진 외로움. 이로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포를 배웠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의 무리에서 쫓겨나 무너진 건물로 향했던 어린 이로하는 잔해가 만들어낸 작은 틈새로 숨어들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어린아이가 택한 최선의 방어책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먹잇감을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가 있었다. 어렵지 않게 죽음을 직감하며 이로하는, 때맞지 않게 이것이 어린 동생에게 향하는 사랑을 시샘했던 자신에게 주어지는 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나락으로 굴러떨어져도 구원은 있는 법.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에 벼락처럼 다가온 손길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의 울음 버튼을 눌렀다. 다시 없을 사람, 다시 없을 사랑.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임을 알면서도 천성이 욕심쟁이인 이로하는 그것을 독점하고 싶었다. 내가 대신 전부를 없애고 모두를 구한다면, 네 손길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으나 당시의 자신은 제법 진지했다. 그때의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브리핑이 끝나고 익숙하게 전투 준비를 마친 뒤 전장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다치지 마시구요, 이 전투가 끝나면 꼭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인사였다. 팀원들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웃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혹은 약간의 긴장이 서린 얼굴. 각양각색의 얼굴을 하고서도 똑같이 다정하게 돌아오는 대답들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로 모두 흩어져 각자의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 이로하는 한 마리의 나비를 발견했다. 크기가 사람만 한 데다 날개가 얇지도 않아 귀여운 단어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괴가 지닌 화려한 문양과 형태는 확실한 나비였다. 곧바로 공격을 가하는 대신 무언가의 작품을 감상하듯 그것을 물끄러미 구경하다 넌지시 대화를 청했다.

 “한 곡 어울려 주시겠어요?”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요. 긴 무대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그 말에 화답하듯 나비가 날개를 펄럭거렸다. 바람에 흩날려 오는 날개 가루를 얼리고 불을 지피자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때맞춰 하늘로 터진 섬광탄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주었다. 가볍게 뛰어올라 나비의 날개로 대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찢어진 피막 사이로 검은 줄기가 자라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되었다. 곧장 다시 달려가는 순간에 망설임은 없었다.

 곳곳에서 이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폭음, 총성, 짖는 소리. 배경음악과 함께 하늘로 깔리는 연기를 커튼으로 삼고, 내리꽂히는 번개를 연출 효과로 삼으며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무대 속에서 지난한 공방을 이어갔다. 끈질긴 재생력을 자랑하는 이괴는 바닥이 온통 흥건해져 발 디딜 틈이 없을 때까지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액체를 흘리다 끝내 숨을 거뒀다. 차오른 숨을 고르며 근처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춥다. 얼어붙은 손에서는 이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무릎을 굽혀 품에 안았다. 이렇게 앉아 있을 때면 꼭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직전까지 덮어 따뜻하게 체온이 남아 있던 담요를 건네며 외로움이 가실 때까지 함께 있겠다던 사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늘 자신의 곁에서 밤을 지새워주던 사람. 고작 이틀을 함께 지냈는데 그새 정이 들어버린 로로도, 아닌 척하면서 항상 다정하게 자신을 살피던 그 주인도. 아저씨가 지금의 날 보면 분명 기뻐하실 거라고 했는데.

 고개를 들자 멀리서 반짝이는 하얀 구체가 보였다. 스스로를 공주님으로, 이로하를 왕자님으로 칭하며 살면서 봤던 것 중 가장 아름다웠던 빛무리를 보여준 사람의 것이었다. 옅게 웃음이 흘렀다. 아, 핑크 다이아 반지. 아직 대답 못 돌려줬는데……. 결혼을 약속해놓고서 아이를 달래듯 위니퐁을 언급하던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거짓말쟁이. 작은 투정이 입밖으로 흘렀다.

 하늘은 이제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매일 이 시간 즘 인사를 건네던 바른생활 고양이가 떠올랐다. 밝아 오는 하늘에도 가려지지 않는 번개는 은혜 갚는 뱁새의 능력이겠지. 뱁새가 멋있어지면……, 기러기가 되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무릎 위로 뺨을 기댔다. 도손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던, 꼬리가 긴 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삶은 야채, 맑은 스프, 기름이 적은 하얀살 고기. 언젠가 대접하기로 했던 음식의 목록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도 음식을 만들어주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뭘 만들어 주시려나. 기대 어린 상상은 다른 팀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무릎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함께 뜨개질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도, 유행이 20년은 지난 달고나 라떼를 만들어 주기로 한 사람도, 함께 바닥을 굴러도 화 한번 내지 않고 상대를 살피던 사람도, 몸이 젖는 것도 마다않고 자신을 구하러 수영장에 들어오던 사람도, 딱딱한 군인의 얼굴을 하고서 형처럼 어리광을 받아주던 사람도, 자신을 볼 때마다 구마를 당하는 기분이라던 사람도, 천사라 불러준 사람도, 서로의 MVP가 되었던 사람도, 자신을 칭찬 지옥에 빠뜨리려던 사람도, 다쳐서 돌아오면 속상해할 거라던 사람도. 고양이 조각은 다 완성 됐으려나…….

 모두가 그리웠다.

 귀에 꽂힌 인이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차분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 춤을 출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언젠가 두 손을 맞잡고 그저 빙글빙글 돌기만 했던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돌아가면 다시 추자고 해야지.

 그제야 이로하는 불현듯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껍데기 뿐인 환상에 눈이 멀고 싶진 않아요. 그랬다간 정말 소중한 것까지 놓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언젠가 석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세등등하게 건넸던 문장은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실소가 흘렀다. 아저씨, 나는요. 세상에 아저씨 같은 사람은 아저씨 하나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네요. 눈이 멀어 있던 건 나였어요. 소중한 것들은 곁에 있는데도.

 나, 사랑받고 있나 봐요.

 짧은 한 줄의 감상과 함께 의식의 끈을 놓았다. 조금만 자고 돌아갈게요,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