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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마치 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번뜩이는 칼날은 시스템에서 규정한 소드 스킬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몬스터를──혹은 플레이어를 자유자재로 베어댔다. 특히 데스 게임 후기에《메이트 초퍼(Mate Chopper)》라는 불길한 이름의 대형 대거를 입수한 놈은 공략파 플레이어조차 두려워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혈맹기사단의 히스클리프와는 대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리스마성으로, PoH는 서서히, 서서히, 자신을 흠모해 모여든 무법자의 심리적 제한장치를 풀어나갔던 것이다.

게임 개시로부터 1년이 지난 2023년 12월 31일 밤.

서른 명 가까운 규모로 불어난 PoH의 일당은 필드의 관광명소에서 야외 파티를 즐기던 소규모 길드를 급습해, 전원을 살해했다.

다음 날, 시스템으로는 규정되지 않은《레드》속성을 자청하는 길드《래핑 코핀》결성 고지가 아인크라드의 주요 정보꾼들에게 전해졌다.

조금 전 나와 접촉했던 회색 망토의 플레이어는 적어도 PoH당사자는 아니다. 억양 없이 더듬거리는 듯한 말투는 머신건처럼 격렬하고 선동적이던 PoH의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놈이 분명《래핑 코핀》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놈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그리고 아마 검을 나눈 적이 있을 것이다. 일반 멤버가 아니라 매우 상급 간부, 그 점까지 추측할 수 있는데도 왜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 것일까.

아니, 그 이유도 사실은 알고 있다. 나 자신이 떠올리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래핑 코핀》은 2024년 설날 결성되어 8개월 후, 어느 여름날 밤에 소멸했다.

자발적 해산이나 내분에 의한 자멸이 아니었다. 공략파, 다시 말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플레이어들 중에서 50명 규모의 토벌부대가 조직되어 검의 힘으로 궤멸시킨 것이었다.

원래는 좀 더 초기에 그렇게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8개월이나 걸린 이유는 래핑 코핀의 아지트를 도무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크라드에서 플레이어가 구입할 수 있는 집이나 방은 도시 구역 안이건 밖이던 NPC 부동산 업자에게서 정확한 소재지를 확인할 수 있다. 놈들의 아지트는 서른 명 이상이 숙식을 해결한 만한 규모여야 하므로, 어느 정도 큰 저택이나 요새 수준의 물건을 구입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공략파의 의뢰를 받은 정보꾼들은 제1층부터 시작해 모든 대형 가옥을 일일이 조사하고 다녔다.

그러나 몇몇 중소 규모의 오렌지 길드 아지트는 발견했지만, 정작 중요한 래핑 코핀의 본거지만은 몇 달이 걸려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들은 이미 공략된 하부 플로어의 던전──그것도 상부 플로어로 이어지는 탑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배치만 해놓고 잊어버린 듯한 작은 동굴의 안전지대를 거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공략파 플레이어는 원래 미궁 구역 탑 공략 말고는 관심 없었으며, 중급 플레이어도 사람이 많은 던전에만 들어갔다. 물론 드물게는 우연히 문제의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가 본 플레이어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모두 입을 열 수 없는 몸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교모히 감추어진 래핑 코핀의 아지트가 8개월 후에야 겨우 발견된 이유는. 아마도 살인의 죄책감에 견디지 못한 맴버 중 하나가 공략파에 밀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보를 토대로 정찰이 이루어지고, 문제의 동굴이 틀림없이 놈들의 본거지라는 확신을 가진 후, 드디어 대규모 토벌부대가 조직되었다. 리더를 맏은 것은 최대 길드《성룡연합》의 간부.《혈맹기사단》을 비롯한 유력 길드에서도 수많은 실력자가 참가했으며, 솔로 플레이어인 나도 의뢰를 받아 부대에 가담했다.

아지트 급습은 오전 3시에 이루어졌다.

인원도 평균 레벨도 래핑 코핀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아지트인 안전지대를 입구와 출구를 봉쇄하고 놈들을 항복시키는 것조차 충분히 가능하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놈들에게서 밀고자가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극비에 극비를 거듭해 계획된 토벌작줜의 정보 또한.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놈들에게 새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던전에 돌입했을 때. 래핑 코핀의 멤버 중 안전지대에 있던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전에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놈들은 던전의 갈림길에 몸을 숨긴 채 우리를 뒤에서 기습했던 것이다.

함정, 독. 섬광탄 등등 온갖 준비를 갖춘 후의 기습이었다. 토벌대는 매우 혼란에 빠졌으나, 돌발사태에 대한 대응이야말로 공략파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즉시 태세를 재정비한 우리는 맹렬히 반격했다.

──그러나. 래핑 코핀과 토벌대 사이에는 생각지도 못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기피감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광분상태에빠진 래핑 코핀의 멤버들이 제아무리 HP 바가 줄어도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매우 동요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사전에 의논하기는 했나.

그리고 그럴 때는 적의 HP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HP 바가 레드 존에 돌입한 상대에게 정말로 마지막 일격을 휘두르리라 각오했던 자는,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토벌대 중에는 검을 내던지고 주저앉아버린 사람마저 있을 정도였다.

우선 토벌대에서 몇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리고 똑같이 광란에 빠진 공략파의 반격으로 래핑 코핀에서도 몇 명이 죽었다.

그 다음은 피로 물든 지옥이 되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토벌대에서는 11명, 그리고 래핑 코핀에서는 21명의 플레이어가 사라진 후였다. 그중 두 사람의 HP 바를 날려버린 것은 내 검이었다.

적의 사망자, 포획자 중 두령인 PoH의 이름은 없었다.

조금 전에 마주친 회색 망토의 플레이어가, 그 전투에서 살아남아 흑철궁 감옥에 갇혔던 래핑 코핀의 멤버 12명 중 한 사람이라면, 나하고는 전후 처리 중 언제 어디선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말투를 기억하는데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내가 래핑 코핀 토벌 사건을 억지로 잊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망토 안에 있던 것은

내가 내 손으로 죽였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자, 나는 의자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꼴로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깨져 나갈 정도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 SAO 사건의 피해자 4천 명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증오했던 사람을 포함해 모두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회색 망토는 래핑 코핀의 생존자 12명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이름을 모두 알고 있을 텐데. 깊이 파묻힌 기억을, 끊임없는 고통에 저항하며 파해치려던────.

바로 그때.

나는 너무나 새삼스러운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고 신음했다.

그 회색 망토의 금속성 같은 일그러진 목소리, 극히 낮은 속삭임만을 말하던 그놈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다면 어떻게 될까.

귓속에서 1주일 전 들었던 음성 파일 속의 절규가 떠올랐다.

『나와 이 총의 이름은《사총(死銃)》............ 《데스 건》이다!!』

똑같다. 틀림없다. 목소리의 파형은 한없이 일치했다.

그놈이────.

그 회색 망토가《사총》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GGO에 다이브해 주목을 받고《사총》의 타깃이 된다는 이번 임무를 일찌감치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전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다.

《사총》이 SAO 생환자이며, 게다가 래핑 코핀 소속 레드 플레이어였다니.

게임 내에서 총격을 가해 현실세계의 플레이어 두 명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자.

그 힘은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갑자기 누군가가 왼쪽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흠짓 몸을 떨며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선명한 하늘색 쇼트 헤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슨 얼굴이 그래."

눈살을 찡그리며 말하는 소녀──시논에게, 나는 굳은 얼굴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웃음 비슷한 것을 지으려 했다.

"어......아,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시합이 힘들었어? 그런 것치곤 상당히 빨리 온 것 같은데."

그 말에 간신히 내가《불릿 오브 블리츠》의 예선 토너먼트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눈을 깜빡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광대한 돔에 바글거리던 플레이어들은 어느샌가 거의 반으로 줄었다. 예선 1회전이 대충 끝나고 패배자는 지상으로 전송된 거시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 다음 대전자가 결정되어 2회전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도저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슈피겔과 바로 앞에 선 시논을 순서대로 쳐다보며, 힘이 빠진 입술에서 천천히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시논이 날카롭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겨우 1회전에서 그 모양이라니, 결승은 꿈도 못 꾸겠네. 정신 좀 차려. 난 네게 빛을 받아내야 하니까."

그리고 주먹을 쥐어 다시 한 번 내 어께를 쿡 쥐어박았다.

나는 밀어지려는 그 손을 무의식중에 양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가슴에 끌어당겨 뺨에 가져다 댄다.

"뭐, 뭐야...... 무슨 짓이야!"

시논이 당황한 듯 속삭이며 손을 빼려 했지만, 나는 한사코 놓지않았다.

폴리곤 아바타에서 전해지는 가상의 열량조차 지금의 내게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몸속에 자리 잡은 공포의 냉기를 자각한 것과 동시에 온몸이 새삼스럽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왜 그래............?"

당황한 속삼임이 들리고, 가슴속의 작고 따뜻한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