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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시간을 잡아먹었지 뭐야. 어, 근데...... 넌 출전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

그러자 슈피겔이라 불린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게, 페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시논을 응원하러 왔어. 여기선 시합도 큰 화면으로 중계해주니까."

보아하니 두 사람은 친구거나 길드 멤버 같은 사이인 모양이었다. 시논이 몸을 비켜주자 슈피겔은 당연하다는 듯 그 옆에 앉았다.

"그건 그걸혹, 생각지도 못한 일이란 건 뭐였어?"

"아......, 그게, 저기 있는 사람을 여기까지 안내해주기도 하고, 뭐."

슈피겔의 질문에 시논은 정색을 하며 한순간 싸늘한 눈을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내심 혀를 차면서 움츠러든 고개를 쭉 뻗고, 지금 처음으로 나를 알아차린 듯한 슈피겔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있는 사람입니다."

"아......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 시논의 친구인가요?"

나름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보아하니 슈피겔은 그 날카로운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예의 바른 성격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아니면──역시 그도 내 성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재미있을까 생각하며 내가 말을 고르고 있으려니, 시논이 금세 폭로해버렸다.

"속지 마. 남자야, 그 인간."

"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슈피겔에게 어쩔 수 없이 평범하게 이름을 댔다.

"아─키리토라고 합니다. 남자에요."

"나, 남자......? 그, 그렇다면, 어......"

슈피겔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시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시논이 남자플레이어와 함께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아하, 오호, 으흠, 대충 눈치를 챈 나는 살짝 장난기가 발동해 그의 혼란에 연료를 부어주기로 했다.

"시논이 많이 챙겨줬어요. 이것저것."

그 순간 시논이 푸른 레이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거친 말투로 속삭였다.

"야...... 그만두지 못해? 내가 언제 챙겨줬어? 게다가 왜 남의 이름을 함부로......"

"에이, 서운하게 왜 그래."

"서운하긴 무슨! 넌 남이잖아!"

"뭐~? 무장 코디까지 봐줬으면서?"

"그......그야 네가......"

여기까지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돔 안에 나지막한 볼륨으로 흘러나오던 BGM이 페이드아웃되더니, 대신 거친 전자기타의 팡파르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이어서 달콤한 울림의 합성음악이 수백 명의 머리 위에 큰 소리로 쏟아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제3회 불릿 오브 블리츠 예선 토너먼트를 개시하셨습니다. 참가해주신 플레이어 여러분께서는 카운트다운이 끝난 후 예선 제1회전 필드 맵으로 자동 전송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돔 안에 요란한 박수와 환청이 들끓었다. 드르륵륵 하는 기관총 소리며 찢어지는 리에저 발사음이 뒤를 따르고, 천장을 향해 형형색색의 빛이 마치 폭죽처럼 솟아올랐다.

소란 속에서 시논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오른손 검지를 쭉 내밀었다.

"결승까지 올라와. 머리를 날려버러 줄 테니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트 신청이라면 안 갈 수가 없지."

"이, 이게......"

20초 남짓하던 카운트다운이 0에 다가감에 따라, 나는 시논에게 손을 흔든 후 전송에 대비해 앞을 돌아보았다. 그때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슈피겔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날카로운 눈에서 명백한 경계와 적의의 빛을 보고, 이거 좀 심했나 생각한 것도 찰나──.

내 몸을 푸른색의 빛줄기가 감싸더니 금세 시야 전체를 뒤덮었다.

전송된 곳은 어둠 속에 떠 있는 한 장의 육각형 패널 위였다.

눈앞에는 엷은 붉은색 홀로그램 윈도우가 나타났으며, 위에는【Kirito VS. (한자)】라고 크게 적혀 있다. 이름에 알파벳밖에 못 썼던 SAO와는 달리 GGO는 일본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아마 '우에마루'라 읽는 모양이지. 그 이름은 물론 내 기억에 없다. 그리고 윈도우 아래에는【남은 준비시간: 58초 / 필드: 잃어버린 고대 사원】이라는 문자열이 있었다.

아마도 지정된 필드에 적합한 장비를 갖추기 위한 준비시간으로 1분이 주어진 모양이지만, 예비 무장도 맵 지식도 없는 내게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 오른손으로 메뉴를 불러 내 ALO의 것과 흡사한 장비 윈도우를 불러냈다. 무장 항목에서 주무장에는《카케미츠 G4》라는 고유명을 가진 광검을, 보조무장에는 권총《파이브세븐》을 세팅했다. 장비하지 않은 방어구는 없는지 대충 확인하고 윈도우를 닫았다.

남은 시간을 알리는 디지털 숫자가 느릿느릿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한 가지 뜬금없는 가능성에 대해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논이라는 소녀가 한순간 보여준 무서운 미소. 그 어떤 방패나 갑옷조차도 관통하는 라이플 탄환 같은, 응축된 살기.

마치 텔레파시처럼 내 뇌리에 울려 퍼진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강한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어떤 의미로는 어린아이 같다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직설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순간 SAO 시절을 통틀어서도 몇 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 내의 역활 연기를 넘어선 현실적인 의사가 그녀의 조그만 몸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전자신호가 자아내는 가상의 세계에서 그렇게까지 의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플레이어를 만난 적은 거의 없다. 여성 플레이어 중에서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진짜 실력을 발휘할 때의 아스나 말고는 모른다. 아니──《섬광》. 그리고 그 이전엔《광검사》라고까지 불렸던 아스나라 해도 그렇게 무서운 인사을 주지는 못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내가 찾는《사총》본인일 가능성이 있을까?

키쿠오카가 내게 들려주었던 음성 파일을 떠올려보았다. 금속이 삐걱거리는 듯한 사총의 불쾌한 고함소리와 시논의 맑은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GGO는 어디까지나 SAO와는 다른 통상의 게임 세계다. 한 플레이어가 여러 명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필요할 때마다 다른 캐릭터로 로그인하는 일도 아주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말투로 보자면 시논은 불릿 오브 블리츠 본선 대회진출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진 것 같았다. 사총이 분명 그 대회에 나올 거라는 내 예측이 옳다면 후보자는 30명까지 압축할수 있다. 시논도 그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은 검토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마켓으로 안내해주고 이것저것 설명을 해줄 때의 그녀에게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아니라 어딘가 쓸쓸해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던 것 같다.

대체 어느 쪽이 진짜 시논일까.

──지금 아무리 생각해 봤자 결론은 나오지 않겠지. 검을 맞대면, 아니아니, 총을 맞쏘면 분명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가가고 내리깔았던 시선을 든 그 순간. 남은 시간 표시가 0이 되었다. 다시금 전송 이펙트가 내 몸을 감쌌다.

다음으로 튀어나온 곳은 음울한 황혼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였다.

드높은 피리 같은 소리를 내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공에서는 누런 구름이 찢어질 듯 흘러갔으며, 발밑의 마른 풀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바로 곁에는 아오니아 양식인지 코린트 양식인지 하는 거대한 기둥이 보였다. 3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ㄷ자 모양으로 몇게나 이어져 있다. 어떤 기둥은 위쪽이 허물어졌으며 어떤 기둥은 완전히 쓰러져, 아득한 옛날에 무너진 신전의 페허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일단 가까운 기둥에 몸을 딱 붙인 채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바랜 초원이 천천히 물결치며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낮은 구릉 저편에는 지금 있는 곳과 비슷한 유적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시논의 설명에 따르면 필드는 가로세로 1000미터라고 하는데, 지평선까지 수십 킬로미터는 될 것 같았다. 아마도 하천이나 절벽의 형태를 가진 이동 제한 영역이 설정되어 있겠지.

그녀의 해설을 계속 떠올려보았다. 대전자는 현재 적어도 500미터 이상 떨어진 위치에 나타나곘지만, 시야 안에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분명 나와 마찬가지로 유적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적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커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선 상대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대로 나도 계속 숨어 있다가 적이 인내심의 한계에 달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위치를 찾아내는 작전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기다리는》것은 도저히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보다도 일단 가장 가까운 다른 유적까지 있는 힘껏 달려가, 일부러 총격을 유도해 적의 위치를 확인하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별 생각 없이 왼손으로 허리에 장비해 놓은 핸드건──《파이브세븐》의 감촉을 확인했다.

그때 한층 강렬한 바람이 쏴아악 불어가고 주위의 초원이 격렬하게 물결쳤다. 돌풍이 자나가고 풀이 다시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바로 눈앞, 겨우 20미터 정도 떨어진 풀숙 속에서 소리도 없이 사람의 모습이 벌떡 일어났다.

이미 양손으로 든 채 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