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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이든 지금은 이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례한 상대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켈리는 곧바로 말투를 바꿨다.

"일이 없으면 굳이 이런 먼 곳까지 오지도 않아. 당신 힘을 빌려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웃었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태도야?"

"마찬가지잖아. 재스민을 알고 있겠지? 난 그 녀석 부탁으로 왔어."

대답은 없었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현재의 켈리는 얼굴도 이름도 세상에 잘 알려진 유명인이다. 다이애나가 말했던 것처럼 지겹게 흘러나오는 뉴스를 봤던 것이 틀림없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지.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하지만 같이 가줘. 시간이 없으니까."

"거절한다."

신장 2미터를 넘는 백곰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우주에서 그 여자가 제일 싫어."

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얘기가 전혀 다르잖아.

"당신을 지명한 건 재스민 본인인데 말이지. 당신이라면 자기를 도와줄 거라면서."

"도와줘? 내가 그 여자를? 사양하겠어."

코엔 박사는 그렇게 내뱉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켈리에게 팔을 붙들렸다.

"기다려, 형씨.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줘야겠어."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 우선 나에게 볼일이 있으면 왜 본인이 안 오는 건데?"

팔을 뿌리치면서 코엔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겉보기처럼 냉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으며 켈리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은 강렬하게 빛났다.

"올 수 있으면 직접 왔겠지만, 본인은 지금 초속 4.000킬로미터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 있어. 멈출 수도 없는 놈이라 말이지."

코엔 박사의 험악한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브래들리 정비장이 하는 말로는 전산기에 누군가가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더군. 역추진 엔진은 작동하지 않고 KS도 멈추질 않아. 아무리 저 여자가 우수한 전투기 조종사라고 해도 언젠가는 제어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 추진기관이 날아가버릴 가능성도 있지. 그러니까 도와줬으면 좋겠어."

코엔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거절한다. 이제 와서..., 그런 사정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해."

이 정도까지 가면 완고하다기보다도 오기에 가까웠다.

재스민과 어지간한 사정이 있었던 것도 같고 그 이유도 왠지 알 것 같았지만, 거절당했다고 해서 얌전히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은데, 그 여자 목숨은 당신에게 달려 있어. 안 가겠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갈 테니까."

"억지로?"

코엔은 콬웃음을 쳤다.

무리도 아니다. 신장은 어쨌거나 몸의 폭은ㅡ즉 근육의 양을 비교하면 켈리는 코엔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덤으로 이 박사는 체구만 큰 것이 아니라 실력에도 자신이 있었다.

투지를 드러내며 코엔이 단언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좋아. 억지로 해봐. 네가 날 쓰러뜨릴 수 있다면 따라가주지."

"그거 고마운 걸. 지금 한 말 까먹지 마."

"단, 그 전에 내가 널 쓰러뜨려 주겠어."

말하는 것과 동시에 바위 같은 주먹이 켈리를 향해 날아왔다.

절대로 초보자의 공격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 박.사.는 어떤 종류의 훈련ㅡ효과적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특수한 훈련을 받은 인간이었다.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저 여자도 그렇고 이 박사도 그렇고, 표면상의 직함과 실상이 전혀 달랐다. 유유상종이라는 걸까.

명중했다면 켈리의 몸은 일격에 쓰러졌을 테지만, 박사의 예리한 주먹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켈리는 해적이다. 정해진 항로에 따라 날면서 감응두뇌가 지시하는 화면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 파일럿과는 달리, 상식을 벗어난 항로를 따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비명을 지를 만한 무모한 행동을 하며 살아왔다. 당연히 반사신경도 동체시력도 일반인 이상이었다.

아무리 빠른 주먹이라도 정면에서 오는 한 켈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무엇보다도 실전과 경험의 차이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켈리는 오히려 코엔의 명치 깊숙이 주먹을 날렸다.

"크흑?!"

깨끗한 일격이 그대로 급소에 박혔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은 것만은, 과연 엄청난 체력이라고 할까.

다시 코엔의 공격이 날아왔지만 켈리는 이것 역시 손쉽게 피해내며 다시 같은 장소에 주먹을 날렸다.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명치에 두 대나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서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코엔은 지면에 쓰러졌다. 바위라도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한편 켈리는 기절한 상대를 내려다보면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미안, 박사. 임신한 부인에게는 얌전히 맞아준다 해도 처음보는 남자에게 맞아주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의식을 잃은 남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켈리는 우주선까지 돌아왔다. 도중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자 어깨에 화물을 멘 채 인사를 했다.

"잠깐 빌려가겠으니, 한동안 이 사람 집 좀 부탁드립니다."

주민들은 멍하니 얼어붙은 채 켈리와 그 어깨에 얹힌 채 운반되는 코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절한 코엔을 뒷좌석에 던져 넣고서 조종석에 앉는다.

누가 봐도 완벽한 납치극의 현장이었다. 어차피 유괴할 거라면 이렇게 무겁기만 하고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근육덩어리보다 미인이었더라면 기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켈리는 우주선을 이륙시켰다.

상공에서는 '쿠어 킹덤'이 대기하고 있다.

코엔이 정신을 차린 것은 대기권을 돌파하는 도중이었다.

조종석에 앉아 있는 켈리를 보자마자 질리지도 않았는지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켈리는 그보다도 빨리 한 손으로 총을 뽑아 어깨너머로 총을 겨눴다. 물론 얼굴은 정면을 향한 상태이고, 다른 손으로는 조종간을 붙잡고 있다.

"얌전히 있어주셔야겠어, 박사. 궤도 계산도 없이 날고 있는 거라서 지금 좀 바쁘다고."

코엔은 험악하게 신음하면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얌전해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요란한 걸 타고 저런 고원에 내리는 자식이 어디 있어?"

"곤란한가?"

"너에게는 그냥 평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 목초지는 가축들의 중요한 식량이야. 그런데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미안. 일단 공항에 내려서 차로 가려니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정확하게 기체를 항로에 진입시킨다.

항로가 설정되지 않은 곳에서 억지로 내렸다 올라온 것이다. 감응두뇌는 물론 올바른 항로를 지시해주지만, 항로에 진입하는 것은 조종사의 실력이었다.

우주 공간이라면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