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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나는 눈을 감고，귀를 막고,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울려 퍼져，눈을 뜬 후에도 그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소리를 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침대 위에 누운 채，나는 지금 막 꾸었던 꿈의 시작지점으로 돌아가기위해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포기하고 살짝 눈을 떴다.

병원의 새하얀 패널이 아니라 가느다란 널빤지를 잇댄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도 젤 소재가 아니라 면 시트를 뒤집어 씌운 매트리스이며，팔에는 수액용 주사기도 없었다.

이곳은 나 키리가야 카즈토가 현실세계에서 쓰는 방이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빙글 둘러보았다. 세 평짜리 방은 요즘 보기 드문 천연목 바닥. 가구는 심플한 PC용 책상과 벽걸이 선반, 내가 앉아있는 파이프 침대 세가지뿐이다.

벽걸이 선반의 가운데 단에는 낡은 진청색 헤드기어가 놓여 있다.

{너브 기어》라는 이름의 그 장치는 나를 2년 동안이나 가상세계에 묶어놓았던 풀 다이브형 VR 인터페이스다. 길고도 괴로운 싸움 끝에 나는 저 장치로부터 해방되어, 지금 이렇게 현실세계를 보고, 만지고，느끼고 있다.

그렇다. 나는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함께 검을 휘두르고, 마음을 나누었던 그녀는…….

질끈 눈을 한 차례 감고, 너브 기어에서 시선을 돌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너머 벽에 걸린 거울을 흘끔 쳐다본다. 내장된 EL 패널이 내 얼굴 위에 날짜와 시각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2025년 1월 19일，일요일. 오전 7시 15분.

현실세계로 돌아온 지 이미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 한때 존재했던 검사 키리토와 지금의 자신，키리가야 카즈토는 기본적으로 같은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빠졌던 체중이 아직까지 완전히는 돌아오지않아 T셔츠 안쪽의 앙상한 몸이 너무나도 빈곤해 보였다.

거울 속 자신의 뺨에 두 줄기 눈물이 빛나는 것을 깨닫고, 오른손으로 닦아냈다.

“나, 완전히 울보가 됐나봐……. 아스나.”

중얼거리며 방 남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자 겨울 아침의 얌전한 햇빛이 방안을 열은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키리가야 스구하는 서벅서벅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앞뜰에 돋아난 서릿발을 밟으며 걷고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은 금방 녹았지만，1월 중순의 아침 공기는 아직도 피부를 에는듯 차갑다.

살얼음이 낀 연못가에 멈춰서서 오른손에 쥔 죽도를 한쪽의 곰솔나무 줄기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몸속에서 졸음의 잔해를 떨쳐내듯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두 손을 무릎에 대고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은 온몸의 근육을 천천히 풀어나간다. 발끝，아킬레스건, 장딴지 등에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따끔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란히 모은 두 손을 아래로 쭉 뻗어 허리를 숙였을 때 스구하는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연못을 향해 몸을 내민 자신의 모습이 오늘 아침에 낀 매끄러운 살얼음 위에 비쳤다.

눈썹 위와 어깨 위에서 가지런히 자른 머리는 파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흑발. 마찬가지로 짙은 먹물색을 띤 눈썹은 굵었으며，그 아래의 커다란, 약간 드세 보이는 눈과 맞물려 어딘가 남자아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얼음 속의 소녀. 몸에 두른 것이 고풍스러운 흰 도복과 검은 하카마이고 보니 더더욱 그렇다.

一역시…… 안 닮았구나, 오빠하고……

요즘 곧잘 떠오르는 생각. 화장실이나 현관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딱히 자신의 용모가 싫은 것은 아니었으며，애초에 그다지 마음에 둔 적도 없는 편이지만 오빠 카즈토가 이 집에 돌아온 후로는 자꾸만 머릿속으로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ㅡ생각해 봤자 어쩔 수 없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스구하는 다시 준비운동을 시작했 다.

스트레칭을 마친 후 곰솔나무에 기대놓았던 죽도를 손에 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손에 익은 칼자루를 꽉 짜듯 쥐고, 등을 쭉 편채 중단으로 들었다.

한순간 그 자세 그대로 호흡을 가다듬고一예리한 기합성과 함께 치켜든 죽도를 정면으로 내지른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놀란 참새 몇 마리가 머리 위의 가지에서 날아갔다.

키리가야 가는 사이타마 현 남부의 어떤 성하(城下)에서도 특히 전통 양식 주택이 밀집된 지역에 세워진 오래된 일본식가옥이다. 잡안 내력도 제법 오래된 둣，4년 전에 타계한 스구하의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엄격한 옛 기질을 가진 분이었다. 오랜 기간 경찰에 봉직했으며 젊었을 때는 검도로 이름을 떨쳤다고 들었다. 외아들 미네타카, 다시 말해 스구하의 아버지도 같은 길을 갔으면 하고 기대한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죽도를 쥐었어도 금방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 그대로 외국계 증권회사에 취직하고 말았다. 일본 지사로 전속을 받은 후 어머니 미도리와 만나 결혼했으나, 그 후에도 태평양을 넘나드는 생활이 이어졌으므로 할아버지의 정열은 스구하와 한 살 위의 카즈토에게 쏠리게 되었다.

스구하와 오빠는 초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근처의 검도장에 다녀야 했다. 그러나 컴퓨터 잡지의 편집자인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오빠는 죽도보다도 키보드를 사랑해 2년 만에 도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오빠에게 빌붙어 입문한 스구하는 어찌 된 일인지 검도가 적성에 맞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도 죽도를 놓지 않았다.

스구하는 지금 열다섯이다. 작년에 치른 중학교 마지막 대회에서는 전국 상위 랭크에 올랐으며，봄부터는 현 내에서도 손꼽히는 검도부를 가진 고등학교에 추천 입학이 결정되었다. 하지만一옛날에는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망설인 적이 없었다. 검도를 좋아했고, 주위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그러나 2년 전. 전국을 뒤흔든 그 사건에 오빠가 말려든 후 스구하의 내면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태어났다. 그것은 후회라고 할 수 있으리라. 스구하가 일곱 살 때 오빠가 검도를 그만둔 후，두 사람 사이에 생긴 넓고도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

죽도를 버린 오빠는 그때까지 굶주렸던 것을 모두 채우려는 듯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초등학생인 주제에 부품을 모아 자작 PC를 조립할 줄 알았고,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오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스구하에겐 그야말로 외국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스구하도 학교 수업시간에 컴퓨터 조작을 배웠으며, 방에는 소형 PC가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하는일이라곤 고작해야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웹서핑을 하는 정도일 뿐，오빠가 사는 세계는 스구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오빠가 몰두했던 온라인 RPG에는 큰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을 속이는 가면을 쓰고，똑같이 가면을 쓴 상대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다니. 자신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오빠와 사이가 좋았다. 그런 오빠가 먼 세계로 가고 말았다는 쓸쓸함을 메우려는 듯 스구하는 검도에 몰두했다. 몰두할수록 거리는 벌어지고，하루하루 대화도 줄어들어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본심으로는 항상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빠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으며, 자신의 시합도 보러 와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말로 전하기도 전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

악몽의 타이틀《소드 아트 온라인》. 전국 1만 젊은이들의 영혼이 전자감옥에 붙잡힌 채 긴긴 잠에 빠졌다.

오빠가 사이타마 시의 대규모 병원에 수용되어 처음으로 병문안을 갔던 날.

침대 위에서 수많은 코드에 묶인 채 가증스러운 헤드기어를 뒤집어쓰고 잠든 오빠의 모습을 보았을 때，스구하는 오열했다. 오빠의 몸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태어난 후로 그렇게 큰 소리로 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젠 두 번 다시 말을 나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 좀 더 일찍 오빠와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자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텐데도.

검도를 계속하는 의미와 동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황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빠와 만나지 못한 채 스구하는 열네 살，열다섯 살이되고, 주위에서 권하는 대로 추천 진학을 결정했으나, 이대로 이 길을 가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마음속의 불안감은 사라질줄을 몰랐다.

오빠가 돌아오면, 그때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자. 고민도，망설임도 모두 털어놓고 상담을 부탁해보자. 스구하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두 달 전，기적이 일어났다. 오빠가 자력으로 주박을 끊고 귀환한 것이다.

ㅡ그러나 그때 이미 오빠와 자신의 관계는 크게 바뀌고 말았 다. 엄마 미도리의 입을 통해, 카즈토는 스구하의 친오빠가 아니라 사촌오빠라는 사실을 듣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미네타카는 외아들이었으며，미도리의 하나뿐인 언니 또한 젊어서 타계했으므로 아직까지 스구하에게는 사촌이란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카즈토가 사실은 이모의 아이라는 갑작스런 말을 들어도 정확한 거리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한 없이 멀어진 것 같기도 했고，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카즈토와의 관계를 아직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야. 딱 한 가지, 바뀐 게 있어…….

가슴속으로 문득 중얼거린 후，스구하는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한층 날카롭게 죽도를 휘둘렸다.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서 의식을 몸에만 돌린 채 그저 한결같이 후리기를 계속했다.

정해진 횟수를 마쳤을 때는 아침 해도 제법 높이 떠올랐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죽도를 내리고 빙글 돌아서서一.

“아……”

집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마자，스구하는 쩍 얼어붙고 말았다.

어느샌가 스웨터 차림의 카즈토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안녕”

그 말과 동시에 오른손에 들고있던 미네랄워터 병을 획 집어던진다. 왼손으로 받아들고 스구하도 말했다.

“아, 안녕. ……에이참，보고 있었으면 말이라도 하지”

“아니, 너무 열심히 하길래”

“안 그래. 이젠 습관인걸……”

요 두 달 사이에 이 정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 것을 은근히 기뻐하면서도，카즈토의 오른쪽 곁에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다. 죽도를 세워놓고 병뚜껑을 열어 입을 가져가자 시원한 물이 달아오른 몸에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그렇구나. 줄곧 계속했으니까……”

카즈토는 스구하의 죽도를 들더니 앉은 채 오른손으로 가볍게 휘둘렸다. 금세 고개를 갸웃한다.

“가볍네……”

“뭐어?”

스구하는 병에서 입을 떼고 카즈토를 바라보았다.

“그거 참대나무로 만든 거라 꽤 무거운걸? 카본으로 만든 거에 비하면 50그램은 더 나가”

“아，응. 그러니까…… 이미지라고 할까……, 비교 문제라고 나 할까……”

카즈토는 스구하의 손에서 병을 슬쩍 뺏어들더니 남은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