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호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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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서있던 것은 어머니 미도리였다. 이 병실의 슬라이드 도어는 리니어(linear) 방식이라 여닫히는 소리가 매우 작기 때문에 그녀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총무성： 일본의 행정 조직 중 하나. 일본 국내의 기본적인 제도나 시스템을 만둘고 관리한다.

미도리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코스모스 꽃다발을 침대 곁의 꽃병에 꽂아놓은 후，스구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면셔츠와 슬림한 청바지 위에 가죽점퍼를 걸친 간소한 옷차림이다. 화장도 열었으며，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한데묶은 그 용모는 도저히 내년에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드는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 관련 정보지 편집자라는 직업 탓도 있겠지만, 본인 또한 나이를 의식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스구하에게는 어머니 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존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마야말로 용케 왔네. 마감 직전이잖아”

스구하의 말에 미도리는 씨익 웃었다.

“떠넘기고 빠져나왔어. 평소에는 오기 힘들지만, 오늘같은 날은 시간을 내야지”

“그러게……. 오늘은…… 오빠 생일이니까”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문채, 침대에서 잠든 카즈토를 바라 보았다. 커튼을 살랑살랑 흔드는 저녁놀빛 바람이 방으로 들어오자 코스모스 향기가 어렴풋하게 감돌았다.

“카즈토도…… 벌써 열여섯이구나……”

미도리가 문득 중얼거 렸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각이 나는걸. 나랑 그이가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카즈토가 느닷없이 뒤에서 나타나선「친부모님에 대해 가르쳐줘」그러는 거야.”

립스틱 기운이 살짝 지워진 입술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열은 쓴웃음이 배어나오는 것을 스구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놀랐지 뭐니. 카즈토는 그때 겨우 열살이었어. 스구하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그러니까 한 7년은 더 비밀로 해둘 생각이었는데，이놈은 자기 힘으로 주민등록 네트워크의 말소 기록을 발견한거야.”

그 부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스구하는 놀라기보다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오빠답네，그거.”

“너무 놀라서 시치미를 떼지도 못했어. 그게 카즈토의 작전이었다는 걸 알고，그이는 나중에 제대로 당했다고 씨근덕거렸지”

두 사람은 아하하，하고 소리를 내어 웃은 후，잠든 카즈토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오빠인 키리가야 카즈토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줄곧 함께 지냈으나, 그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구하의 (사촌오빠>였다.

키리가야 미네타카，미도리 부부의 친딸인 스구하의 위치에서 보자면 카즈토는 미도리의 언니, 다시 말해 이모의 아들이었다. 이모 부부는 외동아들이 첫돌도 지나기 전에 사고로 타계해, 큰 부상을 입고도 목숨을 건진 카즈토는 미도리에게 맡겨졌다.

스구하가 그 사실을 부모님에게 들었던 것은 2년 전 겨울一 카즈토가〈소드 아트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가상세계에 사로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미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던 스구하는 매우 혼란스러워하며，미도리에게 왜 좀 더 일찍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그리고 왜 이제 와서 가르쳐주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 혼자만 아무것도 몰랐다는 소외감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우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구하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사실을 전달하려는 본래의 예정을 앞당긴 것은, 결국 카즈토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을 모두 밝혀야겠다는 부모님의 괴로운 결단이었던 것이다. SAO 사건이 발발하고 한 달 사이에 2천 명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숫자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상황에서는 두 사람 모두 카즈토의 죽음을 좋든 싫든 각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만 후，하다못해 스구하가《모르고 있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一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상충하는 수많은 감정을 품은 채，스구하는 틈만 나면 병원을 드나들며 열심히 생각했다. 오빠가 친오빠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된 후,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겨우 도출된 해답은 (아무것도>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잃어버리지 않았다. 진실을 알기 전에도, 알고 난 후에도 자신은 마찬가지로 카즈토의 생존과 귀환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 후 2년간, 스구하의 기도는 절반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있지, 엄마.”

카즈토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스구하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왜？”

“……오빠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계속 온라인 게임만 했던거랑…… 상관이 있을까?”

키리가야가(家)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과，라는 한마디를 생략한 질문이었으나 미도리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상관없을 거야. 왜냐면 이 녀석은 여섯살 때 이미 내 방에서 중고 부품을 주워다 자작 머신을 조립했는걸. 오히려 내 컴퓨터 마니아 기질이 유전된 거라고 봐야지. 정신적으로”

키득 웃은 스구하는 어머니의 팔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러고보니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게임광이었다고 외할머니가 그랬어”

“그러엄. 난 초등학생 때부터 온라인 게임을 했는걸. 카즈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시 한번 둘이서 소리를 내어 웃은 후，미도리는 자애로운 눈으로 카즈토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어떤 게임이건 한번도 톱 플레이어가 되지 못했어. 끈기랑 각오가 부족했거든. 그쪽 피는 내가 아니라 너랑 이어졌나봐. 8년이나 검도를 계속한 너랑 같은 피가 흐르니까，카즈토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는 거겠지. 이러다 곧 불쑥 돌아올거야”

스구하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으며 미도리는 일어났다.

“그럼 난 먼저 갈 테니까，너도 너무 늦지 않게 오렴.”

“응. 알았어.”

스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도리는 다시 한번 카즈토를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몇 차례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얼른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두 손을 교복 스커트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스구하는 크게 심호흡을하고 오빠의 얼굴을 덮은 헤드기어의 LED 인디케이터를 다시 바라보았다.

네트워크 접속과 대뇌 접속 스테이터스를 알리는 푸른 별은 바쁘게 깜빡거리고 있다.

지금 네트워크 저편에 있는 SAO 서버와 카즈토의 의식은 너브 기어를 통해 무수한 신호를 주고받고있다.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도를 한 손에 든 채 어두운 미궁 속을 헤매고 있을까? 도구상에서 물건 값을 훙정하고 있을까? 아니면一무시무시한 몬스터를 상대로 용감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을까？”

살짝 두 손을 뻗어 다시 한번 하얗고 가느다란 오른손을 감싸보았다.

카즈토의 실제 피부감각은 너브 기어가 모조리 연수에서 차단해 뇌에는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맞닿은 피부를 통해 분명 자신의 격려가 전해질 것이라고 스구히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스구하 또한 느끼는 것이다. 오빠一정확하게는 사촌오빠인 이 소년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가. 반드시 살아남아，다시 현실세계로 귀환하고 말겠노라는 확고한의지가.

하얀 커튼 너머에서 일렁이는 황금색 빛이 마침내 짙은 붉은색으로，서서히 보라색으로 변하며 병실이 어스름에 휩싸여도 스구하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오빠의 어렴풋한 숨소리를 언제까지고 듣고 있었다.

카즈토가 눈을 떴다는 급보가 병원에서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2024년 11월 7일이었다.

소드아트온라인·페어리 댄스

덜컹，덜컹.

원목 흔들의자가 테라스 위에서 가벼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이프레스 가지사이로 비쳐드는 늦가을의 부드러운 햇살면 호수에서 불어오는 미풍.

내 가슴에 뻗을 기댄채 잠에 빠져드는 그녀. 조용한 숨소리.

황금색 평온으로 가득 찬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덜컹, 덜컹.

의자를 흔들며 나는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졌 다. 잠을 자면서도 그녀는 입술에 어렴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앞뜰의 잔디에서 뛰노는 새끼다람쥐들. 부엌에선 스튜 솥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나는 숲속의 조그마한 집을 중심으로 한 이 아름다운 세계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있다.

덜컹，덜컹.

의자 다리가 소리를 낼 때마다 시간의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

이에 저항하듯, 가슴 위의 그녀를 꼭 끌어안으려 한다.

그러나 내 두 팔은 허무하게 공기만을 안는다.

흠칫 눈을 떴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해도 분명히 몸을 맞대고 있었던 그녀의 몸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무대장치처럼 저녁놀빛이 점차 짙어져갔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어둠이 숲을 검게 물들인다.

나는 냉기가 더해져가는 바람속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다. 다람쥐들이 사라진 앞뜰에도，등뒤의 부엌에도 그녀의 모습은 없다.

어느샌가 집 주위는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집안의 조그만 가구며 벽이 종잇장처럼 타박타박 쓰러지며 사라져간다. 마침내 암흑 속에 나와 흔들의자만이 남는다. 아무도 앉지않았는데도 의자는 여전히 흔들리고있다.

덜컹,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