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직선제 개헌 전후 이야기



1987년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4월 13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 즉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노태우 당시 여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같은 해 10월 27일 실시된 제9차 개헌 국민투표는 찬성 93.1%로 통과되었고, 개정 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는 12월 16일에 치러졌다.


후보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4%를 득표해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김영삼(28.03%), 김대중(27.04%)이 표를 나눠 가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선거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야권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민주화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정권교체와 군부세력 청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인의 핵심은 분명 야권 분열과 후보 단일화 실패였다. 득표율만 보더라도, 당시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민주화 흐름을 고려할 때 김영삼과 김대중 중 단일 후보가 나왔다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이듬해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된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은 다른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부정선거’ 주장이 자리 잡았다. 평화민주당은 “권력기관이 총동원된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사례 수집에 나섰다. 단일화 실패 책임론이 제기되자 “단일화가 되었어도 부정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부정선거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국회는 ‘양대선거부정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지만, 최종적으로 조직적인 선거 부정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미국에서는 ‘Stop the Steal’이라는 주장이 확산되었고, 이는 결국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도 ‘보이지 않는 세력이 선거를 조작한다’는 식의 불신이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국 역시 이와 유사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1987년 대선이 끝난 어느 겨울날, 한 남성이 서울 가리봉동의 한 옥상에 올라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며 “내가 죽어서라도 부정선거는 없어져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는 곧 구조되었지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불신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부정선거’라는 믿음은 한 번 형성되면 반박하는 증거조차 오히려 본인의 확신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 지바 쿤다(Ziva Kunda)는 인간의 추론이 목표에 의해 체계적으로 편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추론 목표를 사실에 부합하려는 정확성 목표와 특정 결론에 도달하려는 방향성 목표로 구분했는데, 특히 후자는 개인이 원하는 결론을 지지하는 신념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신념과 충돌하는 증거를 아예 찾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를 접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단 특정 신념에 강하게 경도되면, 반대 논거조차 그 신념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반발을 ‘부메랑 효과’라고 부른다.


선거에서도 이러한 인지적 편향은 쉽게 작동한다.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조작된 시스템’으로 돌리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쉽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1987년의 혼란은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당시 여론조사업체인 한국갤럽은 박무익 대표의 결단으로, 투표 종료 직후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선거 기간 동안 축적된 지지율 데이터는 실제 개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는 결과에 대한 사회적 수용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87년 대선을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특정 국가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리와, 이를 증폭시키는 환경—특히 최근에는 SNS와 같은 정보 생태계—이 결합할 때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현상이다.


선거는 투표와 개표로 끝나지 않는다. 패배한 쪽이 결과에 승복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공정한 절차뿐 아니라, 그 절차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투명성과 결과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정보 질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f.

Kunda, Z. (1990). The case for motivated reasoning. Psychological bulletin, 108(3),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