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상자의 역습, 스티븐 존슨

슬리퍼 커브(Sleeper Curve). 우디 앨런의 영화 슬리퍼(Sleeper)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모티브로 하는 단어이다. 영화속에서 미래의 과학자들은 현재 우리가 나쁘다고 하는 junk food들이 실제로는 매우 건강에 좋으며 영양가 없는 채식등을 권장한 현재의 우리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처럼 지금 대중이 생각하기에 저속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문화가 실제로는 매우 지적이고 긍정적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슬리퍼 커브이고, 스티븐 존슨이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과연 우리가 저속하다고 평가하는 대중문화가 실제로 그렇게나 저속한 것인가? 대중적 인식속에서 미국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닌텐도 중독자의 천국이다. 사람들은 소비지향적이고 파괴적인 문화속에서 독서같은 기성세대의 고상한 문화로부터 매우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진실인가?


스티븐 존슨은 명쾌하게 No 라는 대답을 한다. 우리가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인 폭력성, 선정성, 단순성 등을 통해서 저속하다고 평가하는 현재의 대중문화는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지적 활동이며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그 문화적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얻게 되는가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문화는 전체적으로 우리 인류를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속에서 발견하는 사회성, 상황분석능력. 울티마 온라인, 심시티, 그랜태프트 오토, 젤다의 전설까지 수많은 게임속에서 발견되는 지적개발, 소프라노스같은 현대적 구성의 드라마를 보는데 필요한 상황분석능력 등 이 모든것들이 종합적으로 인류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라면 아무도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았을 복잡하고 어려운 지적활동을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지금의 그 저속하다고 평가받는 문화의 효과라는 점에서 현재의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바보상자의 역습이라는 책은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다.


인간은 도전하는 생물이다. 도전과 성취에 따른 보상은 일종의 오르가즘처럼 인간의 본성에 강하게 어필한다. 책 속에서 "보상회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신기제이다. 과거의 수동적 문화와 달리 탐색하고 순서를 매기고 올바른 일의 순서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접어넣기, 교묘하게 생략되어 있거나 숨어있는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인 채워넣기 등 다각화 적응 능력이 필요한 현재의 능동적인 문화는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 존슨의 시각은 과거의 경험을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통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인류의 발전이 오로지 이성적인 판단력 적응력 으로부터 기원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는다. 바보상자의 역습에서 예로들고 있는 거의 모든 사례들은 감성적인 측면이나 영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러한 측면들이 인류문명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대의 저속하다고 판단되는 문화 조차도 이미 대중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보상자라고 불리는 문화적 특성은 북미, 유럽, 극동아시아의 몇몇 선진국들의 도시화된 문화이다. 인류 전체의 문화라고 대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도의 수도자들이나, 티벳 라마승들의 삶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영적인 문화의 측면,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적 추구에 관련된 감성적인 문화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슬리퍼 커브라고 불리우는 것의 의미는 좀더 확대되야 한다. 단순히 현재 저속하다고 평가받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측면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가능성을 열어두야하 한다는 시각이되어야 한다. 우리가 슬리퍼 커브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현대의 소비지향적 도시문화를 비판하는 여론을 견제하는 것 또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미래에는 평가받을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서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미래 우리 후손들에 의해 평가받을 것이다.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라는 거대한 흐름의 구성요소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균형있는 시각에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