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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분명 이거라면 읽겠지 싶어서 요전에 빌려줬던 책도 소용이 없었다. 친구는 생리적으로 책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만화조차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소녀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속수무책.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항복. 못 말리겠다, 정말.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다가 생각이 났다.

[새하얀 사신을 봤다고 말했대?]

하얀 사신?

소녀는 뭔가가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사신이라면 대중적인 이미지로 전신이 시커멓고 얼굴 부분이 해골 같은, 그런 것이 떠오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친구가 건네준 쪽지에는 새하얗다고 적혀 있었다. 소녀에게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매우 강조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호러 종류의 시시한 소문에 왜 사신이 새하얗다는 ‘설정’이 나온 걸까?

누군가가 고의로 타인을 두렵게 만들려고 하거나 으스스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면 새하얀것 보다도 오히려 새까만 쪽이 훨씬 더 무서울 게 뻔하다. 그런데 새하얗다고 하면 마치 천사잖아. 그러면 호러... 라기보다 판타지에 가깝다.

-새하얀 사신.

그런 것이 굉장히 실감나게 느껴졌다.

1월 26일. 목요일.

흐린 뒤 맑음. 때때로 쪽지.

이만큼 추우면 이젠 목도리가 촌스럽다거나 냄새 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소녀가 갖고 있는 몇 개의 목도리 중에서 제일 따듯한 것은 슬프게도 제일 촌스러웠다. 하지만 추운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촌스럽다거나 냄새 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냄새는 안 나지만.

북풍에 지지 않고 가까스로 교실까지 도착했다. 냄새 나지는 않지만 촌스러운 목도리를 소녀는 간신히 풀 수가 있었다.

오늘도 10분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작되자마자 뒤에서 소녀의 등을 쿡쿡 찔렀다. 돌아보니 상당히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의 남학생. 그 손에 들린 종이쪽지. 남학생은 요전에 소녀와 친구의 쪽지 주고받기가 담임에게 들킨 것을 물론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휘말려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골적으로 주위를, 담임교사의 동정을 살피면서 몰래 소녀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야 물론 무지 많이 귀찮겠지만- 나도 그렇다고!

친구인 그녀에게는 단순히 지루한 시간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소녀에게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세상의 끝을 바라는 소중한 시간.

뭐, 그렇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힘이 움직여 쪽지 공격을 퍼붓고 있는지도.

...그럴 리 있냐. 쟤는 그냥 시간이 남아도는 것뿐이야.

쪽지를 펼쳤다. 어젯밤에 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그 주연 아이돌이 멋졌다나 뭐라나.

일단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1월 27일. 금요일.

흐린 뒤 눈.

세상의 끝은 찾아온다.

그러니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뀌는 것이다.

세상도, 나도.

이상 기온이다, 이상 기온이다 매년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동네에서는 제대로 눈이 내리고 겨울도 겨울다웠다. 오늘 아침 역시 조금이긴 해도 눈이 내렸다. ‘조금’ 이라고 방심한 소녀는 학생 현관에 도착하기 직전에 미끄덩 넘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 보고 있다. 본다, 본다.

창피함과 추위로 귀도, 얼굴도 새빨개졌다. 추위도 잊었다. 또 필요해진 목도리도 이젠 필요 없을 만큼.

그러고 보니 책 속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났다.

[잊어버리면 전부 끝이야. 그러니까 잊지 않을 거야. 잊어버린 줄 알고 있어도 그건 잊은 척하고 있을 뿐이지 기억의 구석에는 줄곧 남아 있거든. 그런 거야, 죽지 않는다는 건]

소녀로서는 죽든 살든 뭐든 좋으니까 이런 창피한 기분만 어서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늘도 쪽지가 친구에게서 도착했고, 당연한 듯이 그 내용은 오늘 아침에 소녀가 멋들어지게 ‘미끄덩’ 한 것에 대하여-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지금 당장 쪽지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고 싶었다.

부탁이니까 지워줘.

기억이고 뭐고 전부.

세상의 종말이 오듯이.

모조리 지워주면 좋은데.

이런 날이기 때문에 더욱 평소의 지각생이 지각해서 변명으로 웃겨주면 좋을 텐데, 왜 지각하지 않은 거야! 게다가 나보다 먼저 와 있고.

뭐냐고, 이 세상은.

뭔가가 이상하잖아.

끝나버려. 끝나버리라고.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났다.

소녀는 여전히 세마케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