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맑고 화창했다. 높게 트여 푸른 하늘은 새하얗고 한가로워 보이는 구름 몇 뭉치를 동실동실 품은 채 간만에 황금의 땅을 다시 찾아온 두 사람의 짧은 여정을 축복하듯 온화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터미널까지, 외부와 단절된 실내 공간에서 쾌적하게 누리고 있던 찬 기운은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훅 끼쳐 드는 여름의 더운 공기에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건조한 바람에 주홍빛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가다듬지 않고 나부끼도록 내버려두었더니 결국 한 가닥이 눈을 쿡 찌르는 바람에 샤이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하, 괜찮아요?”
“눈이 따가워요.”
어디 봐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름옷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시어도어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샤이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비행기에서 이미 몇 시간 동안을 나란히 앉아 부대낄 만큼 부대끼며 왔음에도 이렇게까지 가까운 거리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얼굴이 가까워지기만 하면 자연히 그다음을 기대하게 된 것이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티버의 묵직하고 섬세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샤이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일렁였다.
“음. 멀쩡하네요.”
담백한 진단과 함께 멀어지는 시어도어의 얼굴을 좇아 이번에는 샤이의 몸이 기울어졌다. 쪽, 기어이 입을 맞추고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마주한 채로 시어도어가 입을 연다. 그러나 그의 목에서 소리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카랑카랑하게 외치는 높은 소리가 먼저 들렸다.
“샤샤!”
“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샤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맑은 파란색의 지프차를 옆구리에 낀 헤일리 잭슨이 한 손을 높이 들고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우리 둘째 누나예요.’ 시어도어를 향해 그의 정체를 간략하게 설명해 준 샤이가 캐리어를 돌돌 끌어 헤일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내 차 끌고 왔어!”
“이게 왜 네 차야. 아빠 차지.”
“아빠가 나한테 준댔어.”
“퍽이나. 타기나 해.”
응. 얌전한 대답과 함께 반쯤 돌아가던 샤이의 몸은 별안간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는 듯한 탄성과 함께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시어도어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제 막 입술을 열었던 헤일리가 의아한 낯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헤일리에게 시선을 둔 채 시어도어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인사부터 해. 이쪽이 내가 말했던 사람.”
“시어도어 콜먼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아까 말했다시피 둘째 누나예요. 미안해요. 데리러 올 줄 몰라서 미리 얘기를 못 했어요.”
“집에 있는데 가만히 기다려서 뭐 해. 데리러 와야지. 반가워요, 콜먼. 헤일리 잭슨이에요.”
악수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던 샤이에게 헤일리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알겠다니까. 테오, 먼저 타요.” 둘을 챙기는 동시에 시어도어가 들고 있던 캐리어까지 야무지게 낚아채 자동차의 트렁크에 모두 실었다. 문을 닫기 직전, 뒷좌석으로 올라타는 시어도어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살며시 지어지는 웃음을 함께 싣고 트렁크를 닫았다. 이윽고 그가 앉아 있는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발할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헤일리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족들을 픽업하기 위해 밥 먹듯이 나오다 보니 그새 요령이 생긴 것 같았다. 익숙하게 핸들을 조작하는 헤일리를 향해 샤이가 말을 건넸다.
“헤일리, 아빠는?”
“출장.”
“그럼 엄마는?”
“여행 갔어.”
“왜 같이 안 가고?”
“회사에서 가는 거래.”
내가 말했죠? 그런 의미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선이 잠시 시어도어를 향했다. 그러자 가벼운 눈짓이 돌아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입매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샤이가 생각에 잠길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고 헤일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샤샤. 너 개 좀 데리고 있어라.”
“개라니! 테디가 들으면 상처받아.”
“테디는 너보다 포용력이 좋아서 웬만한 걸론 상처 안 받아.”
“내가 속이 좁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리고 우린 놀러 왔는데!”
그 말에 헤일리가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로 보아, 역시나 생각에 변화는 없는 듯했다.
“하루만. 대신 집 비워 줄게.”
“어차피 갈 거였으면서.”
설득이 통하지 않자 헤일리는 곧장 타깃을 변경했다.
“콜먼, 부탁할 수 있을까요?”
“헤일리!”
“하하, 그럼요. 마침 테디랑 인사도 하고 싶었거든요.”
시어도어의 태연한 대답에 샤이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여행으로 와서 졸지에 누나의 생떼를 들어주게 생겼다. 괜히 마음에 걸린 탓에 슬며시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안해요.” 작게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요. 나랑 잘 맞을 것 같다면서요. 보고 싶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작은 속삭임이 돌아왔다.
확실히, 샤이 또한 둘을 붙여놓고 한눈에 보고 싶긴 했다. 테디와 테오. 노랗고 커다란 개와, 검고 커다란 사람.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싶어 하는 것은 DNA에 새겨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결국, 샤이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이야.”
“아하하! 고마워요, 콜먼.”
“별말씀을요.”
LAX에서 어바인 우드브릿지까지는 대략 50분이 걸렸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가벼운 근황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집에 도착했을 즘에는 해가 꼭대기에서 제법 내려와 있었다. 짐을 챙겨 집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지척에 드넓게 자리 잡은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불과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여행이 끝나도 함께 하기로 약속을 나눴던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샤이의 입술에 걸려 있는 미소의 의미를 눈치챈 시어도어가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 해요.”
“쫄딱 젖은 테오 생각이요.”
“하하, 당신도 마찬가지였으면서.”
“그렇게까지 승부욕이 강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말했잖아요. 여태까지 날 이긴 사람은 없었다고.”
유치한 꼬리잡기 끝에 실없는 웃음이 따라붙었다. “들어가요.” 호수를 등지고 현관으로 향했다. 정원이 딸린 2층짜리 단독 주택의 상아색 벽면은 일광을 반사하며 자아낸 밝고 따스한 노란 빛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기분 좋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멀리서 토도독, 소리가 들리더니 오래지 않아 복슬복슬하고 커다란 강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왕!”
“테디!”
반가운 인간을 한눈에 알아본 테디가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샤이에게 날아들었다.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르는 몸을 두 팔로 힘껏 받쳐 안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다시피 쪼그려 앉아 노랗고 부드러운 털을 박박 쓰다듬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샤이의 캐리어는 뒤따라 들어온 시어도어가 잘 갈무리해 바로 세웠다. 얼굴을 마구 핥아대는 축축한 혀를 피해 고개를 돌리는 샤이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 그만해, 테디. 간지러워!”
샤이의 사정 따위에는 아랑곳없는 테디가 연신 앞발을 폴짝거렸다. 한참을 당한 끝에 견디다 못한 샤이가 한 손을 뒤로 뻗었다. 일련의 사태를 그저 웃으며 방관하고 있는 시어도어를 붙잡아 끌어오기 위함이었다.
신이 난 테디는 낯선 얼굴을 보고도 아주 잠깐 동안 멈춰 섰다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곧장 시어도어를 향해 뛰어들었다. 당장 대회에 나가도 될 법한 점프 실력을 뽐내며 허벅지를 짚는 모습을 기쁜 낯으로 응시하던 샤이가 그 틈에 구석으로 밀려난 캐리어를 챙겨 냉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게요.”
“괜찮아요! 테오는 테디랑 놀아 줘요. 걱정할 필요가 없었겠는데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당신을 너무 좋아한다는 말을 남긴 샤이가 곧장 2층으로 사라졌다. 이름이 비슷한 둘만을 1층에 덩그러니 남겨 놓고.
샤이가 어딘가로 향하든 말든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테디는 주둥이로 시어도어의 손을 툭툭 건드리며 쓰다듬기를 종용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테디는 결국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의 손길을 받고서야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슬쩍 바라보며 시어도어의 옷깃을 가볍게 물어 당겼다.
“따라오라는 거야?”
“왕왕!”
시어도어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짖은 테디가 조금은 다급한 기색으로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이따금 시어도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하느라 혼자 바빴다. 어느덧 계단참을 지나 2층의 입구가 보일 무렵,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오자 테디가 쏜살같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향해 달려갔다.
“……인, ……이야!”
“그래. 네가 뭐든.”
“Hey!”
컹! 복도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있는 샤이와 헤일리의 사이를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테디가 비집고 들어갔다. 샤이의 고개가 계단 쪽을 향해 돌아갔다. 이제 막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시어도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샤이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옆으로 굴렀다가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헤일리는 웃으며 무릎을 굽히고 앉아 테디와 눈높이를 맞췄다. “싸우는 거 아니야. 진정해.” 차분한 어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테디가 금세 배를 깔고 엎드렸다. 손, 옳지. 반대쪽도. 아이 착해. 반려견이 있는 집이라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문장 몇 개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나면, 헤일리가 다시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샤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테오, 헤일리 나간대요.”
“푹 쉬다 가세요. 테디는 내일 데리러 올게요.”
“고마워요. 쉬는 걸 괜히 방해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네요.”
차 키를 쥐고 신발을 고쳐 신던 헤일리가 시어도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오, 전혀요! 덕분에 오히려 아무런 방해 없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됐는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잘 놀다 와요, 헤일리.”
“그럴게요.”
샤이는 어느새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헤일리가 피식 웃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마구 흩뜨리며 가벼운 투로 툭 던졌다.
“꽁해 있지 마. 장난이니까.”
“알아. 가.”
“오냐.”
망설임 없는 걸음이 곧장 계단을 향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슬며시 옆으로 비켜 서는 시어도어와 헤일리의 눈이 마주쳤다. 사람 좋게 웃는 낯을 가만히 바라보던 헤일리가 잠깐의 고민 끝에 시어도어를 향해 나직이 부탁을 건넸다.
“동생을 잘 부탁해요.”
헤일리는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빠르게 시어도어를 스쳐 지나갔다.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오래지 않아 자동차의 배기음이 이어졌으며, 다시 조금이 지나자 그마저도 점점 멀어졌다. 샤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이리 와요.”
시어도어의 손을 감싸 쥐고 짧은 복도를 지나 여기저기 붙어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곳곳에 위치한 방을 하나씩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왼쪽에는 부모님이 사용하는 안방과 작은 창고, 정면에는 누나들이 사용하는 방 두 개. 마지막으로 복도를 U자로 꺾어 들어가면, 욕실을 지나 샤이의 방이 나왔다.
동쪽과 남쪽으로 각각 커다란 창이 나 있으며, 화이트와 우드 톤으로 이루어진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 그저 둘러보기만 해도 구석구석에서 샤이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방이었다. 장식장 위에는 하이스쿨 시절 받았던 각종 트로피와 손때 묻은 농구공이 진열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책과 DVD, 사진 앨범 따위가 빽빽하게 꽂혀 있다. 스크린으로 활용하기 위해 텅 비워 놓은 벽면의 맞은편에는 넓은 침대와 빔 프로젝터가 놓인 벽 선반이 자리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을 대충 눈으로 한 번 훑은 샤이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음, 이렇게 방에 누군가를 데려오긴 처음이에요. …왠지 민망하네요.”
“친구들 데리고 집에 놀러 온 적 없었어요?”
“있긴 했는데, 항상 아래층에서만 놀았거든요. 대부분은 내가 놀러 가는 편이었고요.”
“…아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시어도어를 향해 편하게 둘러 봐도 괜찮다는 말을 남긴 샤이는 여태껏 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고 구석에 세워 놓은 캐리어를 향해 다가갔다.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졸졸 쫓아온 테디가 선물을 기대하는 눈치로 킁킁거리며 캐리어의 냄새를 맡았다. “테디 건 없어. 저기 가 있어.” 가볍게 손짓을 해도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에 결국 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짐을 펼쳤다.
캘리포니아 행이 바로 어제 결정되었기에 미처 세탁하지 못한 옷가지들을 한데 모아 바구니에 넣고, 케이스에 잘 감싸인 카메라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뒀다. 캐리어에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파묻고 내부를 살피던 테디도 그 무렵에서야 관심을 잃고 시어도어의 주변을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테오, 세탁할 거 있어요? 지금 한 번에 돌려 두게요.”
가까이 다가온 테디를 그새 익숙해진 손길로 쓰다듬어 주고 있던 시어도어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부터 짐을 정리하고 있는 샤이를 한 번 쳐다보더니, 테디를 놓아주고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음…. 그럼 몇 가지만 부탁할게요.”
시어도어는 이미 펼쳐진 것 옆에 자신의 캐리어를 나란히 열어젖히고 그 안에서 빨랫감을 몇 개 꺼냈다. 샤이가 내민 빨래 바구니에 단출하게 셔츠와 양말 따위를 집어넣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불쑥 물음을 건넸다.
“그런데요, 샤이. 아까 누나랑은 싸운 거예요?”
“아, 신경 쓰였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요.”
내가 그랬나? 하는 문장을 얼굴에 고스란히 써붙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던 샤이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이내 가로저었다.
“그냥…, 평소처럼 장난삼아 시비를 좀 걸었을 뿐이에요.”
오늘따라 유독 열을 받았던 것 같다는 설명 뒤에는,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시어도어를 달래는 말이 따라붙었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얼추 정리가 끝난 바구니를 들고 방을 나서려던 참에 샤이의 팔이 붙잡혔다. 미약한 힘, 부드러운 미소, 다감한 온기. 어느 것 하나 강제성이라고는 없는 요소들에 늘 쉽게도 이끌리던 샤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시어도어를 향했다.
“샤이. 빨래는 얼마나 걸려요?”
“건조까지 세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왜요?”
“그동안 나랑 산책하러 가요. 소개해 준다면서요, 샤이가 좋아하는 것들.”
그 말에 뜻밖에도 테디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나가자는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폴짝거리는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던 샤이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하지 않겠냐는 걱정에는 고맙게도 부정의 말이 돌아왔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잰걸음으로 세탁실을 향했다.
샤이가 빨래를 돌리러 가는 사이 그와 함께 사라졌던 테디는 스스로 하네스를 찾아 입에 물고 방으로 돌아왔다. 책장을 구경하고 있는 시어도어의 발치에 그것을 툭 내려놓고는 앞발로 정강이를 긁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바라는 바가 명확한 행동이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생소한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는 시어도어를 기다리며 얌전히 꼬리를 흔들던 테디는, 샤이가 빨래를 집어넣고 돌아올 무렵에는 완벽하게 하네스를 착용하고 목줄까지 맨 상태였다.
인기척에 휙 돌아보는 까만 콩 세 개와 마찬가지로 까맣고 동그란 머리를 불시에 맞닥뜨린 샤이가 문턱에서 주춤했다. 생각 이상으로 파급력이 상당한 까닭이었다.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리려는 표정을 다잡기 위해 잠시 손으로 입가를 가려야만 했다.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있어요.”
“테디의 배신에 충격받은 상태예요.”
차마 곧이곧대로 ‘귀여워서요.’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샤이가 태연하게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는 사이 손이 아래로 떨어졌으나 둥글게 휘어진 입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테디, 너! 왜 나한테 안 오고!”
“왕!”
“하하, 테디는 테오가 더 좋대요.”
“Bad boooooy.”
장난 같은 투정과 함께 샤이는 해맑게 웃는 테디의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를 위해 잠시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시어도어에게서 목줄을 넘겨받고는, 헤일리가 두고 간 차 키를 챙겼다. 샤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시어도어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물음을 건넸다.
“멀리 가려고요?”
“바다 산책 가요! 차로 20분이면 가요.”
뜻밖의 행선지에 시어도어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는 나란히 집을 나선 뒤 차고에 주차된 지프에 몸을 실었다. 운전은 샤이의 몫이었다. 뒷좌석에 설치한 테디의 카시트를 다시 한번 점검한 샤이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정면을 바라보며 핸들을 움직이는데 어쩐지 조수석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따끔따끔한 옆얼굴을 견디지 못하고 샤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요?”
“운전이 익숙해 보여서요. 면허는 언제 얻었어요?”
“음, 이제 4년 됐네요. 얻을 수 있는 나이에 바로 얻었어요. 학교 다니면서 많이 끌고 다녔거든요.”
연습 면허 2년을 제한다면 실제로 혼자서 몰고 다닌 경력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앞선 기간 동안 누나들에게 운전 셔틀처럼 부려 먹힌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법 요긴하게 쓰였다. 그 얘기를 들은 시어도어는 모든 경험은 다 쓸모가 있는 법이라며 본인의 나이에 걸맞는 대꾸를 돌려주었다. 샤이는 익숙하게 긍정했다.
계속해서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금세 뉴포트비치에 도착했다. 뒷좌석의 창문을 살짝 열어주자 바다 냄새를 맡은 테디가 얼른 나가자는 듯 힘차게 짖으며 두 사람을 재촉했다. 즐겨 찾던 위치에 깔끔하게 주차를 마친 뒤 차에서 모두 내리자마자 신난 테디가 다리에 모터를 장착한 것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와아악―!!” 또랑또랑한 비명을 남기며 샤이 또한 함께 사라졌다. 테디의 목줄을 쥐고 있는 만큼 같이 달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시어도어를 어깨 너머로 살핀 샤이가 얼른 오라는 듯 크게 손을 흔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게 없다는 듯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테디는 멀찍이 떨어진 시어도어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근처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졸지에 테디와 함께 왕복달리기를 하게 된 샤이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그다지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높게 자란 야자나무 숲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삼고 뛰어놀던 강아지와 사람 하나는 기어이 털에 바닷물을 잔뜩 묻히고서야 조금씩이나마 진정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진 샤이 또한 출발하기 전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쫄딱 젖은 테디는 매번 꼭 시어도어의 옆으로 가서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혼자서 보송보송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쏟아지는 물방울 세례를 받는 시어도어를 보며 샤이는 시원하게도 웃음을 터뜨렸다.
실컷 달릴 만큼 달리고 난 뒤에는 셋이서 나란히 걸음을 옮겨 외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전망대로 향했다. 깎아지른 절벽을 왼쪽에 낀 채 사방이 야자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 꼭대기에서 시선을 들면, 해변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깝고 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샤이 잭슨이 자부하는 보물 상자였다. 십몇 년간 이곳을 찾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만큼 인적이 드물었으며, 그만큼이나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좋아하는 곳에 마음에 드는 것을 채워 넣은 샤이가 행복감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탁 트인 원경을 응시했다.
“여기예요. 특별히 데려오고 싶다고 했던 곳. 어릴 때부터 엄청 자주 왔었거든요.”
“샤이의 추억이 가득 담긴 공간인가 보네요.”
“히히. 맞아요! 친구들도 여기는 잘 몰라요.”
“오, …영광인데요. 어쩌다 발견하게 됐어요? 오는 길이 제법 멀던데.”
“음…, 조난?”
시어도어의 눈썹이 슬며시 들렸다. 그것을 발견한 샤이가 샐쭉이 입꼬리를 올리며 난간에 두 팔을 기댔다.
“하하! 사실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고, 지나치게 열심히 놀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 버렸어요.”
잠깐 눈을 뗀 사이 아이가 없어져서 깜짝 놀란 가족들이 한바탕 식겁을 했었다. 인명구조요원을 동원해 바다까지 뒤졌으나 정작 샤이는 멀쩡하게 저 멀리서 걸어오며 해변에 무슨 일이 났는지 궁금해하기에 바빴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그쳤지만, 엄마는 아직도 종종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선득해진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처음엔 너무 무서웠는데, 이 전망대를 보고 바다를 헤쳐 나왔었어요. 이왕 발견한 김에 올라와 봤다가…, 큰 위로를 받았었죠. 그때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소금기 섞인 물이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느긋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서 차를 타고 우드브릿지로 향했다. 샤이는 일부러 길을 살짝 돌아 얼마 전까지 다녔던 하이스쿨과 그 근처의 농구장을 시어도어에게 가볍게 소개했다. 그리고는 자주 가던 레스토랑을 들러 맛있는 로스트 치킨과 감자 요리를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건조가 끝난 빨래를 챙기고 테디를 씻긴 뒤, 든든하게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서야 깔끔하게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 ༄༅ ༄༅
샤이 잭슨이 떼를 써가면서까지 손에 넣으려 들었던 당초의 목적지로 향하게 된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전날 오전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고된 일정을 수행한 여파로 나란히 뻗은 두 사람은 정오가 다 되어 갈 무렵에서야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둘 다 아침 일찍 눈을 떴으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던 샤이가 시어도어를 온몸으로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졸지에 코알라를 매단 유칼립투스 신세가 된 시어도어는 샤이의 휴대전화에 점심을 먹고 테디를 데리러 오겠다는 헤일리의 메시지가 도착하고 나서야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헤일리가 사둔 것으로 추정되는 부드러운 빵과 몇 가지 식재료들로 산뜻하게 배를 채우고 체리로 깔끔하게 입가심했다. 자동 급식기 앞에서 밥을 챙겨 먹은 테디가 식탁 옆을 서성거리며 자기도 한 입만 달라고 낑낑거렸다. 테디를 봤다가, 체리를 봤다가, 끝내 샤이에게로 돌아오는 물빛 눈동자를 지켜보고 있던 샤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육만 조금 주는 건 괜찮아요.”
어느새 창밖으로 헤일리의 차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체리를 반으로 쪼개는 시어도어의 엄지손가락에 모든 정신을 집중한 테디는 발을 동동거리느라 눈치도 못 챘다. 샤이가 일어나서 부엌에 딸린 창문으로 밖을 살피는 사이, 테디는 원하는 바를 입에 넣고도 아직 모자라다는 듯이 시어도어의 허벅지 위에 턱을 얹으며 애교를 부렸다. 식탁으로 돌아오는 길에 뽑아온 물티슈를 시어도어에게 건넨 샤이가 테디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가볍게 헤집었다.
“돼지.”
“샤이랑 닮았어요.”
“……무슨 뜻이에요?”
“하하.”
시어도어는 웃기만 하고 끝내 무슨 뜻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나도 돼지라는 건가? ……많이 먹긴 했지. 흔쾌히 수긍한 샤이가 체리를 하나 더 갈라 씨를 바른 뒤 시어도어의 손에 얹어주었다. 그가 자그마한 행복을 테디에게 전달해 주는 동안 그를 위해 가져왔던 물티슈로 붉은 과즙을 닦아냈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집을 나섰던 어제 오후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헤일리는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니,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테디를 챙겨 다시 차를 타고 떠났다. 아마도 헤일리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테디는 멀리 가는 거예요?”
“응? 아니요. 사실 바로 근처라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예요. 아쉬워요?”
“음…, 약간은요.”
“아하하! 보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같이 보러 가도 되고, 다시 데려와도 괜찮으니까요.”
테디와 작별한 두 사람도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새파란 지프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의 남부에 위치한 샤이의 집에서부터 목적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국도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노래부터 들어본 적 없는 노래까지, 바퀴 달린 주크박스 속에서 수많은 곡을 들으며 감상을 주고받았고, 영화에 관련된 주제를 잠시 다루었으며, 튜나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짧은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온통 하얗게 채워져 있는 여행 계획을 확인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미래에 둘이서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늘어놓다가, 끝내는 입이 심심해졌다며 샤이가 투정을 부렸다. 뒷좌석에 미리 챙겨온 간단한 주전부리들을 꺼낸 시어도어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샤이를 향해 먹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간식을 공급했다. 야금야금 받아먹던 샤이는 문득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워졌는지 웃음을 터뜨렸고, 그것은 옆에 앉아 있던 시어도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전하는 도중에 기름이 다 떨어질 뻔한 바람에 샤이가 진땀을 흘리는 순간도 있긴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국도변에 있는 주유소를 금방 만난 덕분에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한참을 나아간 끝에 마침내 끊임없이 풍경이 뒤바뀌던 창밖으로 드넓은 해안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적셨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씻어낼 것처럼 시원하게 밀려들었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는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수평선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확인한 샤이가 국도에서 내려와 바다로 뻗어진 길을 따라 달렸다. 거기에서부터는 시어도어의 도움이 필요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위치에 주차를 마친 뒤 집에서부터 챙겨 온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간만에 하는 오랜 운전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길게 늘인 샤이가 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시어도어의 기억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공간에. 가슴이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을 잠시 뒤로 미뤄둔 채 시어도어의 손을 붙잡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번져오는 온기는 반가웠다. 늘 그랬듯이.
“더 가까이 가요.”
샤이가 재촉했다. 둘은 느릿한 속도로 해변을 향해 함께 발을 움직였다. 시어도어가 어릴 적에 왔다던 바다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동화되듯, 마음속에 차오르는 여유로운 기분과 함께 조금씩 가까워지는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저물어가는 한낮의 햇살을 반사하는 부드러운 물결이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며 이쪽을 향해 내달린 끝에 희게 부스러졌다. 지나치게 눈부신 것을 마주한 것처럼 눈살을 살짝 찌푸린 시어도어가 적당히 발이 젖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서 멈춰 섰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샤이는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었다. 살짝 먼 곳으로 신발을 던지듯 놓아두고는 청바지의 밑단을 대충 접어 올렸다. 이윽고 몇 발짝을 이동해 시어도어의 앞을 마주 보고 섰다. 그대로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질수록 이어진 손이 조금씩 팽팽하게 당겨 올라갔다. 차가운 바닷물에 뒤꿈치가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말간 웃음과 함께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안 올 거예요? 그런 물음을 담아 부추기는 동작이었다.
샤이와 빤히 눈을 맞추고 있던 시어도어의 물빛 눈동자가 아래를 향해 가라앉았다. 곧이어 몸도 함께 기울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은 다음, 샤이의 운동화가 놓여 있는 곳 옆에 나란히 자신의 것을 던져둔 그는 가까이 다가오는 동시에 잡고 있던 손을 풀어냈다. 샤이의 눈매가 대번에 둥글어졌으나 그것을 마주할 사람은 없었다. 시어도어가 곧장 다시 아래로 사라진 탓이었다.
“젖고 있어요, 샤이.”
그 말에 샤이의 시선 또한 아래를 향했다. 시어도어의 말대로, 대충 걷은 밑단이 스르르 풀려 바닷물을 함빡 마시고 있었다. 단정한 손이 샤이의 바짓단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샤이는 시어도어의 손길에 순순히 종아리를 반쯤 드러낸 채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간지러운 웃음이 새어나갔다. 목적을 달성한 시어도어가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샤이의 손을 쥐었다. 얌전히 붙잡힌 샤이가 손가락을 살살 얽어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그대로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발목을 적시는 파랑이 모래 위로 새겨지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훔쳤다. 자연의 소리로 채워지는 떠들썩한 침묵을 즐겼다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가. 그렇게 한참을 걷는 와중에 두 사람은 해변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오래된 미끄럼틀과 그네를 발견했다.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을 배려해 설치해 둔 모양이었다. 그것을 맞닥뜨리자마자 당연하게도, 샤이는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말을 꺼냈다.
“그네 타고 싶어요.”
가볍게 웃음을 지은 시어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본인은 딱히 탈 생각이 없었는지, 샤이를 그네에 앉혀 놓고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가만히 지켜봤다. 양손으로 그넷줄을 잡은 샤이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다 말고 그네를 조금씩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 사이로 간간이 금속이 삐걱거리며 마찰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해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다에서부터 불어오는 푸른 바람 한 줄기가 두 사람을 차례로 스치고, 샤이는 그네에 앉은 채로 카메라를 쥐었다. 익숙하게 조작을 마치고 시험 삼아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바다를 몇 장 찍었다. 샤이의 렌즈가 향하는 곳을 따라 시어도어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쨍한 푸르름으로 빛나던 바다는 이제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하늘의 색을 비추며 흐릿하게 뒤섞였다. 넓게 펼쳐지는 동시에 가물가물 떨어져 가는 일광에 시어도어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윤곽선이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고개가 바다를 향해 있는 탓에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빛을 받지 못한 부분이 점차 검게 번지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런 시어도어의 뒷모습을 뷰파인더 너머로 바라보는 사이, 문득 샤이의 가슴 속에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유원하여 닿지 않을 듯한 감각. 익숙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홀로 이곳에 남겨 두고, 아무리 달려도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곳으로, 아득히 먼 수평선과 함께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흔들리는 믿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서서히, 시어도어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돌아왔다.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샤이의 숨이 조금씩 옅어지며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순간을 붙잡아 길게 늘이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앉아 있는 샤이의 몸체가 그리는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느릿하게, 끝없이 이어질 듯한 움직임으로 들어 올린 물빛 눈동자가 마침내 뷰파인더를 통해 샤이와 맞닿는 순간.
차칵― 시야가 뒤흔들렸다. 탁, 타닥. 움찔 튀어오른 손에서 굴러떨어진 카메라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 내가 셔터를 제대로 눌렀던가. 테오가 멀리서 자꾸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쿵쿵거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도무지 뭐라고 하는 건지 들리지가 않…,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찰칵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다행인 일이었다. 예쁜 순간을 놓쳤다면 분명히 후회했을 테니까. 눈을 마주쳤는데, 주홍빛 아래, 물들어 반짝이는 물빛이, 유리 너머로, 시선에, 담겨 있는 게…, 어쩐지 테오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내 카메라는 어디로 갔지?
“샤이!”
“…….”
방황하며 굳어 있는 사이 성큼 다가온 시어도어가 샤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샤이, 왜 그래요?”
염려가 분명하게 서린 눈동자가 샤이의 녹빛 눈동자를 들여다 봤다. 목울대가 제멋대로 일렁였다. 때에 맞지 않게 샤이는 불현듯, 어떠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나? 머릿속에서 문장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전신으로 열이 퍼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큰일이었다. 그를 들여다보러 왔다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생겼다. 사람은 당황하면 혀가 먼저 굳는다던데, 그 말이 딱 맞는 모양이었다.
“손…, 손이, 미끄러졌어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근육을 간신히 풀어 입을 열었으나 꼴사납게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얼른 허리를 숙여 모래밭을 굴러다니는 카메라를 주워들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자 불쑥 치미는 현기증에 시야가 비틀거렸다. 시어도어의 손이 빠르게 샤이의 팔을 낚아챘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아픈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더욱더 얼굴이 발갛게 익어버린 샤이가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 멀쩡해요.”
어느 모로 보아도 신빙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지, 시어도어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침묵이 이어졌다. 볼을 긁적인 샤이가 슬며시 시어도어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옅게 퍼졌다.
“…이제 돌아가요.”
“벌써요?”
“볼 만큼 다 봤잖아요.”
“정말 안 아파요!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잖아요. 나랑 조금만 더 걷다 가요, 그럼.”
응? 부러 가족에게 자주 그랬듯 애교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시어도어를 바라보자 그는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샤이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변화무쌍한 표정만큼이나 머릿속도 복잡했다. 아쉽다는 말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에 더욱 가까웠다. 이대로는 다시 운전대를 잡을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무언의 어필이 이어졌다.
“……고집쟁이.”
“헤헤.”
한참 후에 돌아온 답은 질책을 닮았으나 결국 긍정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샤이가 모를 리 없었다. 좋다고 웃는 낯을 잠시 바라보던 시어도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갈 땐 내가 운전하게 해줘요.”
“괜…….”
“괜찮아요 금지.”
시어도어의 목소리가 제법 단호하게 흘렀다. 카메라를 주우며 휘청거린 바람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을 빼앗겨 입을 꼭 다문 샤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대답을 건네고는 다시 손을 뻗었다. 시어도어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손을 잡아 왔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 그 너머로 사라진 해의 흔적을 덧그렸다. 해는 떠나도 시어도어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어느 순간도 이전과는 같지 않았다. 그 당연한 깨달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한 반짝임으로 샤이의 세계를 또 한 번 다채롭게 물들였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시어도어 또한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를, 마음으로 깊이 바랐다.
“……그런데요.”
“네, 샤이.”
“아직도 그 소원, 유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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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하루하루가 즐거운 샤이 잭슨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기억 속의 바다를 다녀온 뒤로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자주 가던 장소를 소개해 주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며, 하루를 온전히 시어도어에게 맡긴 채 그에게 이끌리기도 하는 등의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돌아온 LAX. 캐리어를 쥔 사람은 하나였다.
시어도어를 힘껏 껴안았던 팔을 풀고 그의 얼굴을 눈에 가득 담았다. 조형미가 좋은 사람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의 충족감을 들게 했다. 도통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아쉬움으로 여긴 것인지, 시어도어가 주홍빛 머리칼을 가볍게 흩뜨렸다.
“약속 지키기로 했잖아요.”
그러니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정답일 것이다. 무어라 덧붙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연락은 할 수 있……. 아, 연락?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졌다. 둘이서 늘 붙어 있느라 서로에게 특별히 연락할 일이 없었다. 즉, 자신은 아직까지도 시어도어와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은 것이다!
“번호 알려 줘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어도어에게 내밀자 그가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손끝으로 톡톡 조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던 끝에 숫자가 적힌 화면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Theo]. 담백하게 저장을 하려다 말고 뒤에 여우 이모티콘을 하나 덧붙였다. 시어도어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왜 여우예요?”
“그냥, 테오를 보면 생각이 나요.”
이유는 많았다. 여우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야기의 영향도 있었으며, 하는 짓이 얄밉기도 했고, 동시에 미워할 수 없게 사랑스러웠다.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대신 뭉뚱그린 한 문장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시선이 돌아왔으나 태연하게 모른 척을 하며 휴대전화를 도로 집어넣었다.
“연락할게요.”
늘 사람이 많은 공항이었음에도 국내선 수속만큼은 일사천리였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웃는 낯으로 시어도어를 뉴욕으로 떠나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곧장 씻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원래부터 혼자 쓰던 공간이었음에도 누군가가 잠시 머물렀다고 빈자리가 선명했다. 손을 옆으로 뻗어 시어도어가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와 품에 안았다. 그의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은 채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보통 뭘 하는지 고민했다. 그동안은 노느라 바빠서, 그리고 바로 곁에 시어도어가 있어서, 여러 이유로 차마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들이었다.
보통은, 손을 잡고, 미래를 약속하고, 데이트도 하고. 달콤한 말을 주고받으며 키스도 하고, 마음이 내키면 섹스도 하고. 거기까지 나열하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미 다 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나는 테오랑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사이인가? 그러나 딱히 그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아, 있나? 하지만 너무 스치듯이 말한 탓에 그다지 그렇고 그런 뜻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로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걸! 그럼 테오는 날 좋아하긴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호감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계속 같이 있자는 얘기를 하진 않을 테니까.
베개를 안은 채로 몸을 뒤집었다. 여전히 자세가 불편해 아예 한 바퀴를 굴렀다. 시어도어가 누워 있던 위치에 오도카니 멈춰 선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럼 우린 FWB인가? 고지식한 걸 좋아한다더니 지나치게 캐주얼한 거 아닌가? 별안간 배신감이 치밀었으나 그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기에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론 연락처가 있긴 하지만, 이런 건 적어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리 생각을 좀 해볼 걸 그랬다.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에 이불을 걷어차다가 잘 시간이 다 되어서 눈을 감았다.
꿈에는 테오가 나왔다. 얄밉게 웃는 얼굴로 “뭘 바랐어요? 사랑한다는 말?” 따위의 사람 미치게 하는 대사를 날리는 장면이 지나가는 순간 씩씩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손목에 매인 하늘색 끈을 노려보다 말고 테디와 함께 새벽부터 밖으로 나가 뛰어다니기나 했다. 평소보다 러닝 코스를 두 배는 길게 잡은 덕에 신이 나서 펄쩍거리던 테디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잠을 청했다.
그렇게 돌아온 주말, 부모님이 각각 출장과 여행 일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기념으로 오랜만에 첫째 누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모여 식사 시간을 가졌다. 포크를 입에 물고 애꿎은 블루베리에게 눈싸움을 걸고 있던 샤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뜬금없는 샤이의 헛소리에 곧바로 헤일리의 질책이 날아왔다.
“밥이나 먹어.”
“넵.”
때때로 말을 잘 듣는 샤이는 곧장 생각을 멈추고 블루베리를 쿡 찔렀다. 그러고는 정말 말 그대로 밥이나 먹었다. 그런 샤이의 모습을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지켜보던 엄마는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넌지시 같은 주제를 꺼내 들었다.
“샤이,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켁, 콜록, 콜록!”
“엄마는 그런 걸 왜 주스 마시고 있을 때 물어봐요. 먹다가 뱉으면 더럽단 말이에요.”
“닦으면 되지, 뭘!”
숨이 넘어갈 듯 기침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헤일리와 엄마는 태연하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목에 걸린 주스를 어느 정도 해결한 뒤 못마땅한 눈으로 둘을 쳐다보자 오히려 기대 어린 시선이 꽂혀 들었다. 샤이의 눈동자가 구세주를 찾듯 아빠를 향해 돌아갔다.
“속도위반은 안 된다.”
“아, 진짜!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요!”
믿었던 아빠마저 샤이를 저버렸다. 심지어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렸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샤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털레털레 할머니에게 다가가 안겼다.
“할머니, 다들 날 괴롭혀요.”
“다들 샤이를 좋아해서 그런 거지.”
“히이잉…….”
불쌍한 표정을 지은 샤이는 한참 동안 할머니에게 토닥임을 받은 끝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는 아빠가 예쁘게 깎아 올린 과일이 한 접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금세 활기를 되찾은 샤이가 냉큼 오렌지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참, 난 곧 뉴욕으로 갈 거예요.”
“여행?”
“음…, 아마?”
“아마는 또 뭐야.”
“이번에 가면 3월까지는 안 돌아올 것 같아서. 아직 확실하진 않아.”
예상치 못한 소식에 크게 뜨인 다섯 쌍의 눈이 곧장 샤이에게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중에도 없는 샤이는 부지런하게 과일을 먹어 치우기에 바빴다. 고맙게도 샤이의 걱정은 헤일리가 대신 해줬다.
“돈은 있어?”
“아직 여유 있어! 부족해질 것 같으면 가서 파트 타임 구하면 되지.”
그 대답에 헤일리의 몸이 샤이에게로 가까이 기울어졌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귓가에 대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너, 그 사람한테 가는 거지.”
“응.”
조심스러운 헤일리의 태도에 반해 샤이는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순순히 긍정하자 헤일리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 샤이가 묻자 헤일리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됐다 싶어서.”
“내가?”
“그 사람이.”
“왜?”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은데?”
“오,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살짝 짜증 나.”
보나 마나 집에 온 첫날과 같은 꼴로 대화가 마무리될 것이 뻔했다. 샤이는 찌르라고 심장을 내어주는 대신 안전하게 사리기를 택했다. 그래봤자 장난에 불과한 말투로 샤이의 단점 몇 가지를 줄줄 늘어놓는 것이 전부였겠지만, 헤일리는 샤이를 잘 아는 만큼이나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사람을 아프게 찌르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헤일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샤샤. 없어도 자주 하고.”
“맨날 내 메시지 씹잖아.”
“네가 쓸데없는 내용만 보내니까.”
“알겠어.”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엄마가 대화를 이어받아 물음을 건넸다.
“그래, 엄마랑 아빠한테도 자주 연락하고. 언제 출발할 거니?”
“음…, 다음 주 금요일이요.”
“닷새 남았네. 그때까진 집에 있고?”
“그럼요! 친구들이랑 실컷 놀다 가려고요.”
“잘 됐다. 시간 날 때 엄마랑도 좀 놀아 줘.”
샤이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놀자는 말로 꼬셔서 데려간 곳이 집에서부터 한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보육원이었으며, 엄마의 기업 차원에서 진행하는 임직원 봉사활동 현장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지만, 어쨌든.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냈더니 시어도어가 곁에 없는 시간들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샤이는 연락을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화도 문자도 남긴 적이 없으니 샤이의 번호를 알지 못하는 시어도어에게서 받을 수 있는 연락 또한 없었다. 물론, 샤이라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발신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도 일하는 중일까 봐, 자고 있을까 봐, 쉬는 것을 방해할까 봐 미루다 보니 결국 한 통조차 걸지 못했다.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 막 사춘기를 맞닥뜨린 숙맥처럼 굴게 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의도하지 않은 일도 쌓이고 쌓이다 보면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오히려 행동의 이유가 되어서 돌아오는 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서프라이즈로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샤이는 끝내 시어도어 모르게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LA에서 뉴욕까지 약 6시간. 시차까지 고려한다면 9시간이 될 거리였다. 시어도어가 먼저 향했을 길을 따라가는 내내 그에게 건넬 말을 하나씩 떠올렸다. 잘 지냈어요? 음, 너무 약 올리는 것 같다. 뻔하기도 하고.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별로다. 그 뒤로 이어진 문장이라고 해봤자 특별히 기발하지도 않았다. 죄다 비슷한 종류였으며, 하나 같이 쓸만한 게 없었다.
기내용으로 챙긴 더플백을 열어 비닐에 포장된 인형을 꺼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채 앙증맞게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복슬복슬한 사자 인형이었다.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오지만, 혼자 두면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인형 부피만으로도 가방이 반쯤 채워졌다. 엄마를 따라 봉사활동을 갔다가 닮았다는 말과 함께 건네받은 것이었다. 이제 곧 시어도어의 품으로 들어갈 것이기도 했고. 차라리 이걸 냅다 안겨주는 게 나을까? 고민과 함께 검지를 뻗어 오동통한 주둥이를 쿡 찔렀다. 바스락,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공항에서 도시로 빠져나온 이후에는 곧장 차를 타고 시어도어의 주소를 불렀다.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 페리 스트리트, 이하 상세 주소. 냅킨을 펼치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의 필체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 마주한 도시의 정경을 느긋하게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헤매지 않고 곧바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을 앞섰다.
그러나 이미 주인보다 빠르게 달려 집에 도착해 있는 마음과는 다르게,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뉴욕에 떨어진 탓에 샤이는 애매하게 러시아워에 걸칠 수밖에 없었다. 숨을 길게 내뱉으며 창틀에 팔을 기대고 도로 위를 빽빽하게 점령하고 있는 자동차의 숫자나 의미 없이 헤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캘리포니아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높은 건물이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게 자리한 LA에 비해 이곳은 어디를 둘러 봐도 죄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꼭대기가 높은 탓에 샤이가 있는 낮은 차 안에서는 하늘도 잘 보이지 않았다.
테오도 이 안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겠지. 퇴근은 했으려나. 어쩌면 그도 이렇게 막힌 도로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자 더 보고 싶어졌다. 낯선 땅 가운데 홀로 익숙한 것. 갑갑하게 막혀 오는 숨통을 틔울 곳이 필요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린 이후였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시어도어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금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변호사들의 근무 시간은 살인적인 수준이라던데, 제대로 휴식은 취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가 미리 일러주었던 대로 현관의 왼쪽에는 아담한 화분이 놓여 있었다. 직접 키우는 걸까? 의문과 함께 화분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 아래에 깔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용도를 다한 물건은 다시 제자리에 넣어 두었다.
“실례합니다아.”
어둑한 실내는 한나절 동안 고인 여름 공기가 가득했다. 현관에 캐리어를 잘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건조한 바깥 공기가 순식간에 샤이가 서 있는 내부로 밀려 들어오며 순환을 시작했다. 만족스럽게 손을 털어내고는 비행기에서부터 품에 안고 왔던 사자 인형을 거실 소파 위에 잘 내려놓고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발을 함께 올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배가 고파서 가방에서 빵을 꺼내 먹은 뒤에는 등받이에 모로 기댄 채 단잠에 빠져 들었다.
고르게 퍼지던 숨소리가 흩어진 것은 열 시를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창밖을 지나가는 차가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에 퍼뜩 눈을 뜬 샤이가 시계를 확인하고, 현관을 한 번 봤다가, 아직 시어도어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다시 소파에 기댔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가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까닭이었다. 아직껏 열어 뒀던 창문을 잘 닫아 잠그고 현관문까지 단단히 단속한 뒤에는 가로등이 밝혀져 있는 도로 앞까지 걸어 나갔다. 집 앞으로 길게 나 있는 인도의 좌우를 살폈다. 시어도어가 어느 방향으로 올지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샤이는 집 앞에 동그마니 쪼그려 앉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바닥 타일의 규칙성을 점검했다가, 가로등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날벌레의 춤사위를 구경하다가, 문득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
길쭉한 인영이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걸음걸이, 단정한 자세. 특유의 분위기와 날뛰기 시작하는 심장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요소가 다 선명하게 그를 향해 시어도어 콜먼이라 말하고 있었다. 의식했을 때 샤이 잭슨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테오!”
활기찬 부름과 함께 파도처럼 밀려가 그를 휩쓸어 안았다. 겹쳐진 몸이 잠시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단단히 중심을 잡았다.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던 시어도어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것인지 샤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몇 달은 보지 못한 사람처럼 반가운 마음이 넘실거렸다. 준비했던 말은 남김없이 모조리 휘발되었는데도 목소리에는 절로 웃음기가 묻어났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대신 가장 솔직한 마음을 내밀었다. 시어도어를 캘리포니아에서 떠나보낸 이후로 내내, 샤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를 생각했다. 당장 그가 곁에 없다고 해서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중요한 것을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만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가 텅 빈 듯 하염없이 외로운 느낌이었다. 그가 습관적으로 짓고 다녔던 웃음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기분을 견뎌낼 수 없었을 테니까.
시어도어 콜먼이 샤이에게 남긴 것은 깊고도 무거운 자각이었다. 이따금 심장이 뭉근하게 짓눌리는 감각이 일었으나 버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위의 꿈을 그리며 온도가 비슷한 곳을 찾아 바람처럼 떠돌던 샤이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달가운 마음이었다. 시어도어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실었다.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그와 나눈 약속을 하나씩 되새겼다. 방황, 고립, 현재와 미래, 평생, 함께. 여행이 끝나도 같이 있을 것. 망치더라도 견뎌낼 것. 마지막으로…, 그를 믿을 것. 믿는 순간 원하는 것을 얻는다. 두려울 것 하나 없었다. 샤이 잭슨이 이기는 법칙은 늘 정해져 있었다. 발 닿는 곳을 모조리 자신의 땅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지금 샤이는, 두 발로 시어도어의 공간을 밟고 서 있었다. 주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단순히 옆에 있기로 약속한 것 이상으로, 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샤이 잭슨에 비해 살아온 경험이 조금 더 많을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매번 중요한 것은 이야기해 주지 않고 치사하게 굴었던 이유를 마냥 모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샤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샤이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일 수 있겠지만.
“테오가 날 망가뜨리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테오야말로 단단히 각오해요. 난 생각보다 더 성가셔요. 손도 많이 가고요.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아요. 내가 만족할 만큼 날 달래줄 때까지 귀찮게 굴지도 몰라요.”
언젠가 시어도어가 남겼던 경고의 형식을 끌어 왔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을 건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잖아요. 단정을 짓고서 건네는 통보였다. 그가 제게 잘 견뎌보라 말했듯이. 화사하게 걸린 미소와 함께 몸을 살짝 떼어내고 얼굴을 마주한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는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주치는 시선만큼은 또렷했다. 여전히 좋아하는 색이다. 시어도어 콜먼이 지닌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궁금한 거 있어요. 우리 사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