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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asing Hell의 줄거리 -

Erasing Hell

- Francis Chan & Preston Sprinkle -

프랜시스 찬(Francis Chan) 목사는 미국 출신의 유명한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저술가, 강사입니다. 캘리포니아 주 시미밸리에 위치한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해 성장시켰으나, 대형교회 모델을 뒤로하고 보다 성경적인 공동체와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담임목사직을 사임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집가정 교회 네트워크 사역과 빈민가 선교에 힘썼습니다. 

국내외 베스트셀러인 『크레이지 러브』, 『잊혀진 성령』, 『Erasing Hell』 등의 저자이며, 현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타협 없는 믿음과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의 삶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대표적인 영적 리더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들에 놀랐습니다. 저라면 사용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입니다. 매우 강하고 가혹한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옥이라고 하면 불신자들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신 대상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놀라웠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셨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가 지옥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책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짓 교사에게 경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진실한 성경 교사라고 생각하지만, 거짓 교사들도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부분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시는 대목입니다.

또한 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가 사는 문화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 책을 썼는가?

그제가 성경을 편견 없이 읽는다면 무엇을 믿게 될지 꼼꼼히 짚어 보았습니다. ‘만약 편견을 갖지 않고 읽는다면 내가 성경을 통해 무엇을 믿게 될까? 교회에 대해 무엇을 믿게 될까? 성령에 대해 무엇을 믿게 될까? 또 지옥이라는 주제에 대해 무엇을 믿게 될까?’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은 나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영접한 이들이 하나님과 누리는 놀라운 영원의 세계에 대해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거절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밤낮으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공격하거나 누구와 논쟁하여 이기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고,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자녀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유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도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경이 지옥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 않는다면, 저도 기꺼이 이 주제를 빼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도 영원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말하긴 해도, 그것이 그들의 생활방식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젊은 세대가 지옥의 개념을 잘 이해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 교리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길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진정한 신자는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동일한 삶을 살며 지적으로만 믿어도 된다는 가능성이 성경에 조금이라도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하고, 입으로 고백하지만 삶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삶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로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야고보서 2:17-19) 지옥의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떨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변화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귀신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복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에게 순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회심하고 거듭났는데도 아무런 증거[외적 증거]가 없다면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 기준으로 순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에 있는 자들을 고문하실까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공정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그냥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벌하십니까?”라고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용서하십니까?”라고 질문하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고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지옥은 사랑의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장소입니다.

일시적인 효과가 있겠지만, 사람들을 두렵게 해서 천국에 보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중대성과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고 죄에 대한 형벌이 지옥이라면, 그것은 나의 죄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희는 그저 지옥을 외치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재입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왕도, 천국도 실재입니다.

나도 지옥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생애 가장 슬픈 날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날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대로라면 할머니는 저 세상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성경책을 펼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아니 지옥의 ‘지’자만 떠올라도, 나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 다른 즐거운 생각을 하려 애를 썼습니다. 내 안에는 지옥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하건대 성경을 읽고 싶은 부분만 읽으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접’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했고, 그래야만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수년간 나도 동일한 길로 사람들을 인도했지만 나중에는 방향을 바꿨습니다. 단순히 보험 차원에서 기도하려는 생각에 대해 지금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년간 나는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연구한 뒤로는 성령께서 불치병 환자를 고치고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며 믿는 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요 14:12).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갖도록 권면합니다.

참인 것을 얻기 위해 익숙한 것과 작별하려는 마음을 갖읍시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물론 나도 시키는 대로 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로 해줄 수 없겠습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마음대로 생각하려는 욕망이 있어서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으로 저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그렇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저는 그릇된 길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만이 모든 진리를 알고 계시오니 저를 당신 곁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제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그 대가가 얼마이든 옳은 것을 말하고 그대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당신에 대해서 참이 아닌 것은 결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지옥에 대해 실제로 하신 말씀

주님의 의도는 우리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셔서 우리가 지옥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지옥을 피하도록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후 세계의 개념을 말씀할 때 깊은 긍휼의 마음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은 심판 이후 영원한 형벌의 탄식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5:31-46; 마 23:33; 마 13:30, 40-43, 49-50; 마 18:8-9; 마 22:13)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강하고도 무서운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확신하건대 주님이 일부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경고를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지옥에 대해 한 말씀

바울은 악인의 운명을 ‘소멸’, ‘멸망’, ‘진노’, ‘형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80회 이상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에서 하나님의 용서, 자비, 천국과 같은 단어들보다 악인의 운명에 대한 언급을 더 많이 한 셈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다가올 진노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약 두 살배기 아들이 갑자기 길거리로 뛰어나간다면 사륜구동 쉐보레에 치여서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 소방관이 불타는 집에서 일가족을 구해 내기 위해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운다고 그 소방관을 비난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의사가 암에 걸린 사람에게 살고 싶으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 준다고 그 의사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도 진노와 심판에 대해 광범위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지옥은 너무나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친구가 “내가 정말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을 한다면, ‘아니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옥에 대한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당신의 리스트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이 생생한 경고의 목적을 간과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반응하기 원하시며 말씀의 빛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응급실 의사가 죽은 자를 충격 요법으로 살려내듯이, 지옥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안일한 믿음을 믿음의 냉동실에서 건져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만약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기로 결정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는 창조주로서 자신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만드시기로 결정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이렇게 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이것이 구원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영광과 자비의 위대함을 보이시는 방법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겠습니까?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을 거부하겠습니까? 그것이 지혜로운 결정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때때로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하고 의롭고 선하신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은 자신이 일들을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에게 해석해 달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고, 우리는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럴 때가 많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행동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옵니다.

성경 전반부에 사람들이 너무나 악해져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만드신 일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물과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신 후 나머지는 거대한 홍수로 수장시키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하나님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진영을 돌아다니면서 칼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출 32:27). 그날 3천 명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이 일로 레위 지파는 말씀에 순종했다고 복까지 받았습니다.

수십 년 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주민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 20:16-18).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셨지만 그들을 죄수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아간이라는 남자가 여리고 성읍에서 보물을 조금 훔쳤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는 자기 죄를 시인하고 모든 물건을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간과 그의 가족들은 모든 소유와 함께 모조리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수 7:1-26).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390일 동안은 왼쪽, 40일은 오른쪽으로 누워 있게 하시고, 인분으로 음식을 구워 먹게 하셨고, 하나님이 아내를 데려가셨을 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인간적인 논리와 기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행동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들이 인간들의 이해와 기준에 맞아야만 합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에게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허락을 받아야만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길들이거나, 하나님을 우리의 기준에 가두려는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내 정서의 범주와 틀에 깔끔하게 반영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지만, 그분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기쁨으로 결론이 납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당신 같으면, 죄인들을 죽음에서 건져 보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보냈겠습니까? 당신 같으면, 하나님이 인간인 여자의 자궁을 통해 피조 세계에 들어와서 여물통에서 태어났겠습니까? 당신 같으면, 아들을 고문하고 그 아들의 몸을 채찍으로 갈기갈기 찢어놓고 마침내는 그 손과 발에 못을 박도록 가만히 둘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진리들 중 무엇을 받아들일지 인간이 취사선택한다는 것은 과도한 교만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서 제외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구속의 계획이 이해가 안 되어도 제외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마샬과 그의 아내 수잔은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심장이 기형이라서 분만까지 가더라도 분만 과정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하나님과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디자인이 잘못되었으므로, 디자이너이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구하며 긍휼의 하나님께 생명의 호흡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해산일이 다가왔고 아기는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아기가 임신 기간 중에 잘 버텨온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마샬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기는 건강한 핑크빛이었습니다. 아기의 가슴이 뛰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명의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2분 뒤, 그 부부의 아들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핑크빛에서 푸른빛으로 변하더니 눈을 감았습니다. 생명의 기적 이후에 죽음이 뒤따랐습니다.

간호사가 쉘리 부부에게 아이를 위해 이름을 지었냐고 물었을 때, 수잔이 대답했습니다. 

“토비입니다. 성경 이름인 토비야의 줄임말이죠. 그 뜻은 ‘하나님은 선하시다’입니다.” 마샬이 말했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가 느낀 바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느끼고 싶은 바입니다.” — 마샬 쉘리, “영원까지 2분 남았다” —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지옥에 대해서 믿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불, 어둠 그리고 구더기의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옥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는 불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지옥을 “풀무 불”(마 13:42), “영원한 불”(마 18:8-9), “꺼지지 않는 불”(막 9:48)로 묘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 사도는 계시록에서 지옥을 사람들이 유황 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계 14:10-11, 20:10-15). 이런 불의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지옥이 실재하는 장소라고 믿으며, 그 기간이 영원하다고 믿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대다수는(존 칼뱅, 마틴 루터, C. S. 루이스, 빌리 그래함, D. A. 카슨, J. I. 패커, 싱클레어 퍼거슨) 이 불의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또, 보수적인 주석가들과 신학자들 중에는 찰스 호지, 칼 헨리, F. F. 브루스, 로저 니콜, 리온 모리스, 로버트 피터슨과 같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의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불의 이미지가 성경에서 지옥에 관련된 구절뿐 아니라 다른 많은 본문들에서도 명백하게 비문자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눅 12:49) 왔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문맥상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지구에 불을 지르시려고 문자적으로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모으시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눈을 “불꽃”(계 1:14)에, 야고보는 혀를 “불”(약 3:6)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공력이 심판의 날 불로 태워질 것이라고(고전 3:15) 비유했습니다.

불은 성경 전체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나 역시도 문자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네댓 구절을 더 보면 이 점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문자적으로 불이라고 해석하면 다른 곳에서 말한 내용과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지옥을 “영원한 불”(유 1:7)이라고 묘사하면서도 6절 이후에는 지옥을 “캄캄한 암흑”(유 1:13)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모두 지옥을 “불”(마 3:10-12, 25:41)과 “어두움”(마 8:12, 22:13, 25:30)의 이미지로 묘사했습니다.

불과 어두움의 비유가 결합된 본문들을 볼 때, 불이 있다면 완전히 어두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합을 볼 때 불과 어두움의 이미지들은 단지 비유일 뿐이라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불이 어두움을 뚫지 못하도록 막으실 수도 있고, 영들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느끼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불을 비유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이미지들은 비문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인정한다면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지옥의 존재를 종종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아니 적어도 무시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옥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럭저럭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고후 5:11)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권면했습니다. 우리도 대충대충 지옥의 문제를 다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옥의 존재를 인식하며(물론 다른 말씀들과 더불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던 바울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것이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옥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을 받아들였다고 확신합니까? 그저 지옥을 피해 가려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고민해 보길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지옥에 가게 된 불쌍한 영혼들을 보시면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겔 18:23)

우리는 모두 한 가지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생명을 선택하느냐 사망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행 14:15-17)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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