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글 / 임보람] 이후의 땅, 이후의 삶
죽음이 현실이 되는 장소들이 있다. 애도가 유예된 장소들이 있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에 흐르는 장소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그러한 장소들을 환기하고 싶다. 비단 전쟁이나 자연 재해 뿐만 아니라 인류는 자본주의, 내셔널리즘, 자원 개발, 도시 환경과 생태 등 여러 가지 이념으로 장소의 의미를 재고하면서 상실의 장소를 탄생시킨다. 이러한 상실의 장소에서 《애프터랜드》가 탐구하는 것은 장소의 기억과 그 ‘사후성’이다. 《애프터랜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 속에서 ‘상실’을 겪은 사람들, 그리고 격변하는 운명의 땅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창조와 파괴의 순환 속에서 어떠한 시간을 품고 기억을 전해왔는지, 지역 리서치를 기반으로 수집한 자료를 재구성하여 창작한 이야기다.
이후의 땅
어떤 장소들은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 그 연유는 지리적 위치나 특징보다는 그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혹은 기억과 관련한 것일 수 있다. 박경리 소설가의 한 시구는 생전에 살았던 그의 오래된 집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 뿐이었다”[1]. 장소는 기억을 새긴다. 우리는 박경리 소설가의 옛집에서 살았던 경험도 없거니와 그 집을 본 적도 없다. 다만, 이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의 한 형태를 우리가 감각할 뿐이다. 우리는 그 장소가 어떠한 기억을 새기고 있는지 알기 위해 ‘상상적 투사’를 실천한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2]을 상상하니,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3]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또는, 경험한 적이 없는 역사적 비극에 상상적 투사를 하기도 한다.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클럽 아틀레티코 납치 감금 고문 사건의 한 생존자는 갇혀 있던 장소에 대한 기억으로 ‘탁구공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라고 증언한다. 매일같이 탁구공이 튕기는 소리가 났다는 그녀의 진술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딘지 모를 곳에 갇힌 채 죽음과 고통에 직면했던 그곳에서 들려오는 탁구공 소리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상상한다. 그 상상은 우리의 경험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에 새겨진다.
나는 여기서 장소의 기억에 대하여 감히 포스트메모리와 역사적 비극의 트라우마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를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생과 사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창조와 파괴가 반복되는 땅에서 포스트메모리가 갖는 시간의 지연성을 죽음의 현재성으로 환유하고, 다소 주술적인 태도에서 단지 장소가 품은 기억의 ‘사후성’을 사유하고자 한다. 포스트메모리라는 단어를 창조해 낸 마리안 허쉬(Marianne Hirsch)는 과거와 포스트메모리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적 투사와 창조에 의한 매개라고 여긴다. 전달된 기억은 동시대 목격자나 참여자의 기억과는 구별되는 것이고, ‘포스트’에는 시간적 지연이 내포된다.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기억은 뒤늦은 시간을 공유하며 연속성과 단절 사이를 불안하게 진동한다. 우리는 어떤 사건들을 직접 보거나 겪거나 그 영향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사건들과 우리의 관계는 사후성과 매개된 형태의 지식에 의해 정의된다.[4]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세대를 넘나드는 정서적 힘의 수사학이다. 현재에도 지속되는 과거의 기억이 있고, 그것을 품은 장소가 있다. 역사적 비극을 겪은 장소, 표식 없는 무덤들을 위한 기념비, 공원묘지, 재난 이후의 땅. 이 모두가 죽음이 현실이 되는 장소이자, 영원히 애도가 유예되는 곳이며, ‘죽음과 삶의 연극적 유희가 동시에 존재하는’ [5] 반복의 땅이다. 그곳에는 상상적 투사에 의해 매개되는, 과거와 사후 기억의 연결이 있다. 사후성에는 이미 죽음이 내포되어 있고, 죽음이 현실이 되는 장소에서 시간의 지연성은 죽음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기억, 비물질성, 유령성, 흐름
이러한 개념은 《애프터랜드》에서 몇 가지 장치로 은유 된다. 그중 하나는 가상의 존재, 장소의 정령이라는 설정이다. 이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작품의 서사적 장치로서 숨겨져 있다. 정령은 가시화되지 않은 것들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실체 없는 주체들을 대변하는 역설의 존재이자, 떠도는 신[6]이며, 마치 유령과 같은 존재다. 아니, 비존재인가? 유령과 포스트메모리는 ‘기억만 존재하고 몸체는 없다’ [7]는 점에서 유사하다. 《애프터랜드》의 영상 작품 속에서 정령은 기계의 눈을 한 카메라이자 비인간 주체로 분하여, 생명의 파괴와 창조, 즉 생과 사의 순환을 매개하는 동시에 죽음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유령적 장치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령을 대신한 카메라는 이 때문에 인간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속도와 시각을 갖는다. 물속을 느리게 이동하거나, 수면 위와 아래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낮은 위치에서 골목을 빠져나간다. 출입이 금지된 장소를 탐험하고, 풍장터 안에 들어가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풍화되어 육신이 사라진 후에 남겨진 영혼처럼 머무르면서, 장소에 축적된 시간을 영상의 타임라인에 올려놓는다. 한편으로 보면 《애프터랜드》의 정령이라는 은유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것을 속세로 불러오는 주술적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가시화는 마치 토속 신앙에서 신을 형상화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 혹은 신체(神体)와 같은 맥락이다. 예로부터 장소를 구성해 온 자연환경과 그 요소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점차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왔고, 그 힘은 다시 속세에서 애니미즘으로 현상하여 인간의 삶에 동행하게 된다. 작품은 이러한 애니미즘을 근간으로 한 속설을 내러티브의 일부에 엮어 넣는다. 물이나 햇빛과 같은 자연환경, 유리구슬과 같은 사물, 너구리, 닭, 뱀, 코끼리와 같은 동물에 얽혀 전해지는 속설들이다. 정령은 물과 함께 흘렀다가, 유리구슬이 반사하는 한 줌의 빛 속에서 움직였다가, 코끼리가 바다를 건너듯 장소를 이동해간다. 이렇게 서로 얽힌 내러티브는 두 장소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애프터랜드》의 정령과 함께 작동하는 또 다른 은유적 장치는 ‘물’이다. 영상 언어로서 물은 유동적이며 고정되지 않는 것으로 비물질의 물질화를 의미하는 장치다. 《애프터랜드》에서 기억의 비물질성은 부유한다. 물은 정령과 함께 이동하고, 흐르고, 솟아오르며, 장소와 그 장소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조우한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수십 년 전에 땅에 스며들어 지하 깊숙하게 축적된 것이며, 우리는 그 수십 년 전의 기억을 퍼 올려 마신다. 이렇게 기억의 사후성과 시간의 지연성은 물의 순환으로 다시 환유 된다. 비단 영상 이미지의 알레고리로서가 아니더라도, 《애프터랜드》 속 장소의 역사 문화적 측면에서도 물은 자연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자원이자, 신앙이며,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힘을 대변해 온 신체와 다름없다. 수십만 년에 걸친 화산 활동은 파괴와 창조를 거듭해 왔다.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는 땅이 되고, 솟아오른 물은 순환한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힘을 지님과 동시에 한순간에 삶을 앗아가는 파괴의 힘을 지녔다. 고대 국가로부터 현대 도시에 이르기까지, 물의 순환과 땅의 움직임은 전설이 되고 토속신앙이 되고 믿음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땅의 격변에 직면한 지금 그곳에서, 《애프터랜드》는 과거의 기억을 퍼 올리듯 다시금 물을 상기한다. 장소와 장소를 이동해가는 정령과 같이, 장소에서 장소로 흐르는 물이 있다.
이후의 삶, 두 개의 땅
《애프터랜드》 기획의 발단이 된 사건은 시간을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다시 3년이라는 시간을 되돌린다. 나는 2019년에 《고스트씨티》[8]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는 쉼 없이 해체되고 재생되는 현대 도시에서 사라지는 장소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개인과 사회의 일면을 다룬 전시였다. 당시 기획의 일부로서, 2016년 구마모토 대지진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재난 피해자로서의 예술가들, 장소를 잃은 예술가들이 장소의 부재에 대해 구술하는 영상을 제작하였다. 이틀 사이에 진도 7의 지진이 두 차례 연이어 발생하면서 역사상 ‘대지진’으로 기록된 이 재난에 의해 무너진 도시는, 지자체와 시민들의 신속한 대처와 협력으로 빠르게 복구되었지만, 재난 이후 도시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삶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 이외의 가치는 희생되거나 보류되었다. 당장 집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또 당장 자신의 집을 잃은 예술가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장소를 잃은 사람들과, 그 물리적 해체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실’이 남겨진 장소. 그러나, 그 장소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단지 한 번의 재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전의 과거와 더 긴 시간 이후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때문에 나는 《고스트씨티》에서 마저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후의 땅’과 ‘이후의 삶’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상실이 남겨진 장소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것은 죽음과 상실의 감정적 공통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땅에 새겨진 기억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 과거의 시간을 물려받은 포스트메모리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해 세상은 팬데믹 상황을 맞이했다. 또다시 3년, 수많은 밤을, 망설이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2022년 여름, 고영찬 작가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상실의 장소’를 함께 찾아가지 않겠느냐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그는 ‘사파리 섬’을 내밀었다. 지자체가 추진한 관광개발 사업이 십 년 이상 보류되면서 방치된 농지가 있고, 섬 주민들과 지자체, 개발업자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들썩이는 땅이 있는 곳, 결국 사파리 섬이 아닌 ‘수국 공원’을 만들어낸 섬. 그 섬은 무엇을 상실했으며 어떤 기억을 새긴 것일까. 그렇게, 《애프터랜드》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공간이 존재한다. 화산 활동으로 생명과 파괴의 순환을 살아가는 땅, 자칫 사파리가 될 뻔했던 기구한 운명의 섬.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두 개의 시공간은 《애프터랜드》에서 만나, 서로의 운명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과 자연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역사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존재다.
《애프터랜드》 프로젝트는 3가지로 구성된다. 4채널 영상, 사운드와 영상 아카이브, 그리고 기록들을 엮은 책이다.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협업 제안을 수락하고 2년 여 동안 제작에 동참해 준 고영찬 작가, 2023년 답사부터 2024년 로케이션 촬영까지 일본 현지에서 아낌없이 도움을 준 와타나베 부부, 전무한 경험임에도 기꺼이 멋진 목소리를 녹음해 주신 고토코 씨, 발군의 능력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 현지 코디네이터 쿠로다 씨, 프로덕션 자문으로 기술적 도움을 주신 안건형 감독님, 사운드 초보인 나를 무한한 소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정상인 작가님, 그리고 가족들, 여기 다 언급하지 못할 수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1]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15쪽.
[2] 위의 글, 15쪽.
[3] 위의 글, 15쪽.
[4] Marianne Hirsch,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Poetics Today, 29.1, 2008, pp.106-107.
[5]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36쪽.
[6] 애초에 나는 이 정령을 ‘성주신’으로 상상했다. 한국민속신앙에서 신줏단지에 숨어 지내며 집과 터전을 지켜준다는 신이자, 하지만 매우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이라서 집안에 화가 있으면 가출을 한다는 신이며, 신줏단지가 깨지면 사라진다는 신이다. 본디 집에 머물렀어야 할 신이 집을 나와 떠돌게 된 연유를 어떤 사건에 의해 장소가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본 것이다.
[7] 필자가 집필한 <애프터랜드> 각본에서 인용하였다.
[8] 《고스트씨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전시명: 고스트씨티
× 개최일자: 2019년 9월 4일 ~ 9월 29일
× 전시장소: 플레이스막 연희, 스페이스55
× 참여 작가: 김희연, 리슨투더시티, 오카마츠 토모키, 이재욱, 이주타+최호진, 조준용
× 기획: 임보람
× 협업: 플랜비워크그룹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원고는 서적 『애프터랜드』(플랜비북스 펴냄)에 수록되었습니다. 출판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