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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다. 그러니 현재의 소소한 행복에 집착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마음속 어디선가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갈등을 겁내고,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무는 것에 이것저것 변명을 갖다 붙였다.

하지만 유우키는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싸웠던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과 끊임없이 싸웠고, 곧 다가올 종식의 순간을 알면서도 그렇게나 밝은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아스나는 굳게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어디선가 아득한 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을 유우키에게 말을 걸었다.

ㅡㅡ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너를 만나고 싶어.

만나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부딪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고,유우키는 말했다. 약한 자신을 뒤덮듯이 몸에 걸친 것을 모조리 벗어던지고, 유우키와 다시 한 번 말을 나눌 수 없다면 우린 무엇 때문에 만난 걸까.

문득 눈꺼풀 안에서 뜨겁게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스나는 오른손을 유리창에 대고, 매끄러운 표면에서 무언가의 감촉을 찾으려는 듯이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지 마, 아스나.』

아스나는 용수철처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눈을 뜨고 침대 위의 유우키를 응시했다. 조그만 실루엣은 조금 전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이 누워 있었다. 얼굴을 뒤덮은 하얀 머신에도 변화는 없다. 하지만 이쪽 측면에 설치된 인디케이터 중 하나가 불규칙하게 푸른 빛을 깜 빡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니터 패널의 표시도 몇 초 전과는 달리,조그만 문자로 [User Talking]이라는 문장을 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우키……?"

아스나는 입속으로 속삭인 다음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떨리기는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우키? 거기, 있니?"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보아하니 격벽 유리 위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응. 렌즈 너머긴 하지만 보여, 아스나. 굉장하다……,그쪽 세계 얼굴하고 정말 닮았네. 고마워……,와줘서.』 “……유우키…… 나, 나……."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말은 나오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에 가슴이 꽉 눌렸다. 그러나 입술을 열기 전에 다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 다.

『선생님,아스나에게 옆방을 쓰게 해 주세요.』

"뭐……?"

당황하면서 돌아보자, 쿠라하시 의시는 약간 엄격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금방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ㅡㅡ저 문 안쪽에 제가 언제나 면담에 사용하는 풀 다이브용 시트와 어뮤스피어가 있습니다. 문은 안쪽에서 잠글 수 있지만, 시간은 20분 정도로 해 주세요. 이것저것 수속을 생략한 거라서."

“아……,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스나는 다시 한 번 메디큐보이드에 드러누운 소녀를 바라보았다. 금방 유우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플리케이션 기동 런처에 ALO도 들어 있으니까, 로그인 하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으로 와줘.』

"응…….알았어.기다려. 금방 갈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등 뒤의 쿠라하시 의사에게도 고개를 숙인 다음 아스나는 몸을 돌려 모니터 룸 안쪽의 벽에 마련된 문까지 몇 걸음만에 도달해 센서에 손을 댔다. 칙 소리와 함께 슬라이드 도어가 열리자마자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 너머는 모니터 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방이었 다. 검은 가죽제 리클라이닝 시트가 두 개 나란히 있었으며, 양쪽 헤드레스트 부분에는 눈에 익은 원관형 헤드기어가 보였다.

돌아서서 록을 잠그는 짧은 시간에도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스나는 백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까운 쪽 시트에 몸을 눕혔다. 팔걸이 앞쪽의 버튼을 눌러 등받이를 적당한 각도로 조절한 어뮤스피어를 들어 머리에 썼다.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전원을 켜자, 눈앞에 하얀빛이 펼쳐지며 아스나의 의식을 현실세계에서 차단해주었다.

숲속 오두막집 침실에서 운디네 세검전사로 눈을 뜬 아스나는, 제 세계에 감각이 싱크로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날개를 울렸다.

날개를 울리며 허공에 떠, 바닥에 한 번도 발을 대지 않은 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알브헤임은 이른 아침 시각인 듯, 깊은 숲은 온통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휘릭 몸을 돌려 급상승해 안개의 커튼을 뚫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두 손 을 몸에 딱 붙이고 플로어 중앙을 향해 맹렬히 대시했다.

3분도 되지 않아 주거구역 상공에 도달하자,아스나는 광장 한복판에 푸르게 빛나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강하했다. 주위에 몇 명 있던 플레이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올려다보는 가운데 몸을 돌려 급제동을 가한다. 속도가 상쇄된 순간 정확히 게이트에 뛰어들었다.

"텔레포트! 파나레제!”

외친 것과 동시에 청백색 빛이 폭포처럼 흐르며 아스나를밀어내기 시작했다.

전이는 한순간에 끝나고,몸이 튀어나온 곳은 이미 제24플로어 주거구역 파나레제의 중앙광장이었다. 요란하게 돌 블록을 박차며 이륙해, 이번에는 도시 북쪽의 조그만 섬으로 향했다. 아침 안개가 흐르는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전속력으로 비행했다.

금세 맞은편에서 한충 커다란 나무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뿌리께에<절검> 즉 유우키가 매일 길거리 듀얼을 했던 것이 마치 아득한 옛날 같았다. 당시에는 수많은 갤러리로 들끓던 섬은 이제 고즈넉하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아스나는 서서히 스피드를 낮춘 것과 동시에, 거대한 나무의 줄기를 돌며 착륙태세에 들어갔다. 하얀 안개가 농밀하게 피어오르는 탓에 지표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슬을 머금은 풀을 살짝 울리며 지면에 내려서자 아스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출 직전이라 광량이 적기도 해서 겨우 몇 미터 앞조차 볼 수 없었다. 초조함에 사로잡힌 채 종종걸음으로 나무 주위를 돌았다.

반쯤 돌아 나무의 동쪽으로 나왔을 때였다. 겨우 가장자리에서 밀려든 서광이 한순간 아침 안개를 밀어내주었다. 하얀 커튼 틈새에서 아스나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습을 발견했다.

유우키는 아스나에게 등을 돌리고 긴 군청색 머리카락과 수 레국화색 롱스커트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가만히 바라보자, 임프 소녀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돌아서더니 자수정색 눈동자로 아스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색이 엷은 입술에 녹아들기 직전의 눈 같은 덧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ㅡㅡ어째서일까. 아스나가 현실세계의 나를 발견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아무것도 안 가르쳐줬으니 그럴 리가 없는 데도 말이지."

속삭이듯이 말하며, 유우키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스나는 와줬어. 내 예감이 맞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말이야. 기뻤어……, 너무너무.”

만나지 못한 것은 겨우 며칠인데도,유우키의 모습에 모종의 투명감이 늘어난 것 같아 아스나는 가슴이 꽉 옥죄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눈앞의 소녀가 환영이 아닐까 두려워하듯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

앞으로 내민 손가락이 유우키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 순간 그곳에서 느껴진 온기를 확인하고 싶디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채, 아스나는 두 팔 속에 조그만 소녀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유우키는 놀라지도 않은 채, 어린 새싹이 바람에 몸을 눕히 듯이 아스나의 어깻죽지에 머리를 기댔다. 아머 너머로 맞닿은 몸에서는 전자 펄스가 중개해주는 디지털 데이터 이상의 마음이 떨리는 듯한 따듯함이 전해져,아스나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눈을감았다.

“……언니가 안아줬을 때랑 똑같은 냄새가 나. 햇살 냄새 가.……."

온몸을 맡긴 채 유우키가 속삭였다.

아스나는 자칫하면 떨릴 것 같은 입술로 간신히 첫 마디를 입에 담았다.

"아이코……라고 했지? 언니도 VRMMO를 했어……?"

“응. 그 병원은 일반병실에서도 어뮤스피어를 쓸 수 있거든. 언니는 슬리핑 나이츠 초대 리더였는데,나보다도 훨씬,훠얼씬 강했어……."

유우키의 이마가 어깨에 꽉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아스나는 오른손을 들어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순간의 긴장은 금세 풀리고, 유우키는 말을 이어나갔다.

"슬리핑 나이츠 멤버는 처음엔 아홉이었어. 하지만 이젠 언 니를 포함해 세 명이 줄었어……. 그래서 있지, 시우네랑 다른 친구들이랑 의논해서 결정한 거야. 다음에 한 사람이 갈 때가 되면 길드를 해산하자고. 그 전에 다 함께 최고의 추억을 만들자고……,언니랑 다른 사람들에게 가슴을 펴고 선물로 가져 갈 수 있는 굉장한 모험을 하자고.”

"……."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건 <세일링 가든>이라는 의료계 커뮤니티 내부의 버추얼 호스피스였어. 병은 각자 다 달라도, 큰 의미에선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VR세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놀고, 마지막 순간을 윤택하게 보내자는 목적으로 운영되 는서버야……."

병원을 찾아와 쿠라하시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스나는 마음속 어디선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유우키를 포함한 슬리핑 나이츠 맴버들에게 공통된 강함, 명랑함, 그리고 조용함. 그 이유는 모두 같은 곳에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예상은 했어도 유우키의 말은 어마어마한 무게가 되어 아스나의 가슴속에 쌓였다. 시우네, 쥰, 텟치, 노리, 타루켄 의 밝은 미소가 하나하나 뇌리를 가로질렀다.

"아스나, 미안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서. 봄에 슬리핑 나이츠가 해산하는 이유는 다들 바빠져서 게임을 은퇴하기 때문이 아니야. 길어도 앞으로 3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은 멤버가 두 명 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그래서 우린 어떻게든 이 멋진 세계에서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었어. 그 커다란 기념비에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어.” 다시 유우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스나는 그저 두 팔에 한 층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잘 안 돼서……, 딱 한 사람만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자고 상담했어. 반대 의견도 있었지. 만약 우리에 대해 안다면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거라고, 안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될 거라고. ……정말 그렇게 됐잖아. 미안해……,미안해, 아스나. 만약 가능하다면……,지금부터라도 우리를 잊 고……."

“그럴 순 없어.’’

짧게 대답하고 아스나는 유우키의 머리에 뺨을 비볐다.

"폐라고 요만큼도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