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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겨우, 해답을…… 찾은,것 같 아……. 의미, 는…… 없어도…… 살아가도 괜찮은…… 거라 고…….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이, 이렇게나…… 충만하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서…… 여행을, 마칠 수 있으니까……."

유우키는 짧은 숨과 함께 말을 마쳤다. 두 눈은 아스나를 지나 어딘가 아득히 먼 곳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다른 세계ㅡㅡ영웅들의 영혼이 모여든다는 진정한 요정의 섬을.

아스나는 이제 떨어지는 눈물을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떨어진 물방울은 잇달아 유우키의 가슴에서 빛의 입자를 흘뿌렸다. 하지만 입가에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올랐다.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아스나는 유우키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나……나는,꼭, 다시 한 번 너와 만날 거야. 어딘가 다른 곳에서,다른 세계에서, 반드시 또 만날 테니까……, 그때, 가르 쳐줘……, 유우키가,찾아낸 걸……."

순간 유우키의 보라색 눈동자가 정확히 아스나의 눈을 보았다. 그 안쪽에서 과거 만났을 때와 똑같은, 무한한 활력과 용기에 가득 찬 광채가 한순간 번똑였다. 그것은 금세 두 개의 물방울로 형태를 바꾸고, 넘쳐나고, 유우키의 하얀 뺨을 따라 흐르더니 빛이 되어 사라졌다.

입술이 가늘게 움직이며 미소의 형태를 이루었다. 아스나의 의식에 직접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최선을 다해, 살았어……. 이곳에서,살았어…….

무구한 설원에 마지막 결정이 한 방울 떨어지듯, <절검>유우키는 살짝 눈올 감았다.

ㅡㅡㅡㅡㅡ12ㅡㅡㅡㅡㅡ

교복 오른쪽 어깨에 문득 어렴풋한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떨어뜨리니, 연한 분홍색 꽃잎 한 장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스나는 왼손 손끝으로 신중하게 꽃잎을 집어 손바닥에 얹었다.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한 타원형 꽃잎은 마치 무언가를 말 하고 싶은 것처럼 한동안 떨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찾아온 바람에 휘말려 똑같이 허공을 춤추는 무수한 하얀 점 속으로 모습을감추었다.두손을무릎 위로 돌리고,아스나는 다시안개가 낀 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4월 첫 토요일 오후 3시.

일주일 전 여행을 떠난 유우키의 고별식이 바로 조금 전에 끝난 참이었다. 식장이 된 요코하마 시 호도가야 구의 구릉지 대에 위치한 성당은 주위가 벚나무에 에워싸여 있었다. 일제히 지기 시작한 꽃도 마치 유우키를 보내주는 것 같았다. 고별식은《조용하게》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유우키의 친척 참석자들은 상주를 지낸 고모라는 여성을 포함해 겨우 넷뿐인 데 반해, 친구를 자청한 10대, 20대 참석자들이 백 명을 훨씬 넘었던 것이다. 물론 거의 모두 ALO 플레이어였다. 3년을 넘는 입원생활을 거치며 고별을 하러 올 유우키의 친구는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친척들도 접수대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식이 끝나고도 다들 성당의 넓은 앞뜰에 삼삼오오 모여<절검>의 추억담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나는 어째서인지 그 안에 가담할 마음이 들지 않아, 몰래 빠져나와선 예배당 뒤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유우키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ㅡㅡ어깨의 프로브 너머 로 환호성을 지르고, 숲속 오두막에서 아스나의 요리에 만면의 미소를 짓던 유우키가 먼 세계로 떠나버려 두 번 다시 돌아 오지 못한다는 것을, 도저히 현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은 겨우 말랐지만 인파 속이나 카페 한구석,혹은 알브헤임의 바람 속에서 문득 유우키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몇번이나 있었다.

요즘 생명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곧잘 했다.

모든 생명은 유전자의 운반장치에 불과하며, 자신의 복제 정보를 늘려 남기기 위해서만 존재하다는 설이 항간을 떠들썩하게 뒤흔든 것이 몇 십 년 전이었던가. 그 관점에서 보자면 유우키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HIV,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는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오로지 증식하고 복제를 되풀이한 끝에, 결국 숙주인 유우키의 목숨을 빼앗았고 동시에 자신들도 죽어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간도 똑같은 행위를 수천 년에 걸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기 위해 때로는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타국에 희생을 강요한다. 지금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츠기 기지에서 떠올라 어디론가 날아가는 전투기의 편대가 봄안개 너머에 하얀 구름을 끌고 있다. 인간도 언젠가는 바이러스와 똑같이 스스로 살아갈 세계 그 자체를 파괴하고 말 때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별종의 지성과 생존경쟁에 돌입했다가 구축당하는 것은아닐까…?

유우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지금도 귓속에서 메아리쳤 다. 무엇을 낳지도, 주지도 못한 채ㅡㅡ. 분명 유우키는 자신 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스나는 생각하면서 교복 리본을 살짝 매만졌다. 이 가슴속에는 아주 짧은 접촉을 통해 유우키가 깊이 새겨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거대한 곤란에도 겁먹지 않고 맞서던 <절검>의 당찬 모습, 그 영혼 그 자체가 확실하게 숨을 쉬고 있 다. 그것은 오늘 이 장소에 모인 백 명도 넘는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령 시간이 조금씩 기억을 퇴색시키고 추억을 결정으로 바꿔나간다 해도, 남는 것은 분명히 있을 것 이다.

그렇다면 생명에는 네 종류의 염기로 전해지는 유전 정보만 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기억, 정신,영혼을 운반히는 기능도 있다는 뜻이다. 밈(meme), 모방자라는 애매한 개념이 아니라 언젠가 먼 미래, 정신 그 자체를 순수하게 기록할 수 있는 매체가 출현한다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이 불완전한 생명의 자멸을 막는 단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ㅡㅡ.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우키의 마음을 전해나가자.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되풀이해서 들려줘야지. 현실과 가상세계의 틈에서 기적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던, 한 조그만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가슴속으로 자신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스나는 어느샌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러자 앞뜰에서 건물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손끝으로 눈 꼬리에 배어 나온 물방올을 떨어뜨렸다.

여성이었다. 한순간 어디선가 만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약간 키가 컸으며, 검고 심플한 원피스에 숄을 걸쳤다. 어깨까지 오는 스트레이트 헤어는 짙은 검은색이고, 가슴께에 걸친 작은 목걸이가 유일한 장신구였다. 나이는 20대 초반쯤일까.

여성은 아스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선 꾸벅 인사했다. 아스나도 당황하며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혈색이 엷은 창백한 모습은,과거 긴 잠에서 갓 깨어났을 무렵의 자신을 떠올릴 만한 것이었다. 새삼 보니 솔 에서 엿보이는 목덜미며 손목은, 건드리면 부러질 정도로 가늘었다.

여성은 말없이 아스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대추씨처럼 생긴 예쁜 눈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스나 씨이시지요? 그쪽과 얼굴이 아주 똑같아서 금방 알 아봤어요.”

침착하고 촉촉한 톤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아스나도 그 여성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아……, 혹시 시우네……?"

"네, 맞아요. 본명은 안 시은이라고 하지요. 처음 뵙겠습니 다……. 오랜만이네요.”

"저, 저야말로 처음 뵙겠습니다! 유우키 아스나예요. 일주일 만이네요.”

피차 어딘가 모순된 인사를 나누고, 아스나와 시은은 키득 웃었다. 시은에게 왼손으로 벤치에 앉도록 권하곤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그제야 겨우 아스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슬리핑 나이츠 멤버들은 모두 난치성 질환과 싸우는 몸이며, 그것도 터미널 케어, 종말기 의료가필요한 단계의 병증이 아니었던가. 이렇 게 실외에서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은 걸까.….?

시은이 아스나의 의구심을 민감하게 눈치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올 4월 들어 겨우 외출 허가가 나왔거든요. 물론 오빠가 보호자로 함께 나왔지만, 저쪽에서 기다리고있답니다.”

"…그럼, 저어……, 몸은, 이제……?"

"네. ……제 병은 급성 임파성 백혈병이라는 건데……,발병 한 건 이미 3년 전이었지요. 한번은 화학요법으로 완해(緩 解)……,그러니까 몸 안에서 백혈병 세포가 일시적으로 사라 졌지만 작년에 재발히는 바람에……. 재발한 다음에는 효과적인 치료법은 골수이식밖에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가족은 누구도 백혈구 형태가 적합하질 않고……,골수은행에도 기증자가 되어주실 분을 발견하지 못했지요. 저는 오래 전에 마음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고자 생각했는데……."

시은은 한순간 말을 끊더니, 가만히 시선을 머리 위의 벚꽃 으로 향했다. 조그만 회오리가 무수한 꽃잎을 말아을리며 눈처럼 흘뿌리고 사라졌다.

“ㅡㅡ재발한 후 골수이식을 할 수 없을 때는, 구제요법이라 고 해서 다양한 약물을 조합해 완해를 꾀하지요. 신약이나 시험약도 적극적으로 쓰기 때문에 부작용도 심해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젠 됐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어요. 어차피 가망이 없다면 남은 시간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치료로 전환 해 달라고, 몇 번이나 의사선생님에게 말하려 했지요……."

꽃보라에 흔들리는 시은의 머리카락이 가발이라는 것을, 아스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유우키와 만날 때마다 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우키는 똑같은 괴로움과 15년이나 싸웠는데, 나이도 훨씬 많은 제가 겨우 3년 가지고 무슨 우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지요. 그런데 2월경부터 조금씩 약의 양이 줄고……, 의사선생님은 수치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드디어 그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 했어요. 구제요법에서 QOL 우선요법으로 전환하는 거라고. 물론 무서웠지만……,반면 안심하기도 했어요. 유우키의 상태를 들었으니까……, 유우키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어딜 가도 저를 지켜줄 거라고……,이상하지 요? 나이도 어린 아이에게 이렇게나 의존하다니…… ”

"아니에요……,이해해요.”

아스나는 짧은 말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은도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ㅡㅡ그랬는데……, 일주일 전, 유우키와 작별한 다음 날이었지요. 의사선생님이 제 병실로 오셔선……,완전 완해,그러니까 백혈병 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젠 퇴원해도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나 싶었지요. 흔히 말하는……, 가족과 보내기 위한 일시 귀가일까 이것저것 생각하고……,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 다다음 날에 정말 퇴원을 하고 말았던 거예요. 어쩌면 정말 병이 나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어제쯤이 었죠. 치료약 중에 하나가 극적으로 효과를 발휘한 건지……."

잠시 말을 끊고, 시은은 울음과 웃음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아직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아요. 잃어버렸던 시간이 갑자기 돌아와도 당혹스럽기만 하고요. 게다가……, 유우키가……."

살짝 목소리가 떨렸다. 눈 꼬리에 조그만 눈물방울이 맺힌 것을 알고, 아스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유우키가 기다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 남아도, 되는 걸 까……. 유우키와, 란과, 클로비스와 메리다와……,언제까지고 함께 있자고 약속했는데, 저는, 저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시은은 고개를 숙이 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란이란 초대 길드 리더였던 유우키의 언니를 말하는 것이리라. 나머지 두 사람도 전에 죽었다는 슬리핑 나이츠의 맴버일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역경 중 가장 힘든 처지에서 맺어진 유대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이나 연인보다도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스나는 자신이 대체 어떤 말을 건넬 자격이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왼손을 뻗어 벤치 위에 늘어진 시은의 오른손을 살짝 쥐었 다. 앙상하고 가녀린 손가락이었지만, 분명한 온기를 아스나의 손바닥에 전해주었다.

"시은 씨,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