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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목소리에 시달리면서 아스나는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지만, 이옥고 한 차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다음 새로운 메일 프로그램을 기동했다. 키리토와 리즈벳 같은 친구들에게 그리고 시우네를 비롯한 슬리핑 나이츠 멤버들에게 똑같이 짧은 한 마디를 일제 송신했다. 그 작업이 끝나자 평상복을 벗어던지고, 복장을 고르는 시간도 아까웠으므로 기계적으로 학교 교복을 걸쳤다. 신발을 신은 얼마 안 되는 시간조차 조바심을 내며 대문을 뛰쳐나가자,부드럽게 내리쪼이던 3월 하순의 햇살이 길가의 잔설에 하얗게 반사되어 아스나의 눈을 찔렀다.

3월 말의 일요일 오후 2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고대 하던 봄의 도래에 들뜬 것처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곁을 스쳐 지나가며,아스나는 열심히 역까지 뛰었다.

어떻게 전철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어떻게 갈아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호쿠 종합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의 개찰구를 뛰어서 지나던 참이었다. 마치 머릿속이 새하얗게 헐레이션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토막 난 생각의 파편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유우키, 기다려.

아스나는 질끈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며, 때마침 로터리로 미끄러져 들어온 택시에 뛰어올라탔다.

병원 면회 창구에는 이미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아스나가 굳은 어조로 방문 목적을 알리자, 간호사는 즉시 플레이트를 건네주고 서둘러 중앙동 최상층으로 가라고 말해주었다.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가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을 초조함 과 함께 기다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왔다. 보안 게이트의 센서에 플레이트를 부딪치듯이 들이대 통과한 다음에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뛰었다. 하얗고 무기질적인 통로를 기억을 더듬어 지나 마지막 모퉁이를 꺾자, 마침내 유우키가 잠든 무균실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ㅡㅡ그 순간, 아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우뚝 멈춰 섰다.

두개의 문중 가까운 쪽이 모니터 룸의 입구였다. 그리고 그 안쪽, 자못 엄중한 주의사항 팻말이 커다랗게 적힌 곳이 밀폐 된 무균실 문. 전에 아스나가 이곳을 찾아왔을 때는 당연하다는 듯이 굳게 닫혀 있었던 곳이,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그곳에서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간호복을 몸에 걸친 간호사가 한 사람 종종걸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간호사는 아스나를 보자마자 짧게 끄덕이더니, 옆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등을 떠밀려 비틀비틀 몇 걸음을 나아가 문 앞에 섰다.

온통 새하얀 방의 내부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나 잔뜩 있던 기계류 대부분은 왼쪽 벽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중앙의 젤 베드 주위에는 두 명의 간호사와 한 명의 의사가 붙어, 누워 있는 조그만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명 모두 평범한 백의 차림이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아스나는 깨달았다. 모두,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서고 말았다는 것을. 아주 오래 전부터 정 해졌던《그 때》가 찾아오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쿠라하시 의사가 고개를 들더니 아스나의 모습을 보았다. 왼손으로 재빠르게 손짓을 한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아스나는 실내로 들어섰다.

젤 베드까지는 겨우 몇 미터밖에 안 되는데, 그것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냉철한 현실로 이어지는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깎아나가듯이 걸어가, 아스나는 침대 결에 섰다.

하얀 시트를 목까지 걸친 깡마른 소녀가 누워 있었으며, 앙 상한 가슴이 아주 천천히 오르내렸다. 오른쪽 위의 심전도가 미미하게 녹색 파형을 그린다.

예전에 봤을 때는 소녀의 얼굴을 거의 다 덮었던 메디큐보이드의 장방형 몸체가, 둘로 갈라진 채 귀 바로 윗부분이 90도 뒤로 젖혀져 있었다. 내부는 사람의 머리 모양이었으며, 그곳에는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처음 보는 현실세계의 유우키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야위었 으며 속이 비칠 것처럼 색소가 희미했다. 하지만 그 용모는 아스나에게 어딘가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만약 진짜 요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없이 유우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어느샌가 곁에 서 있던 쿠라하시 의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입니다……,늦지 않아서.”

늦지 않았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든 아스나는 눈에 힘을 주고 의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안경 안쪽의 이지적인 두 눈은 다독이듯이 아스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다시 의사가 말했다.

“40분 전,심장이 한 번 멈추었습니다. 투약과 제세동으로 맥박은 돌아왔지만, 아마 다음에는……."

아스나는 숨을 꽉 참으며 악다문 이 틈새로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말을 조합할 수는 없었다.

"왜……, 왜죠……? 유, 유우키는……, 아직……,"

의사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ㅡㅡ사실 1월에 아스나 양이 이곳을 찾아온 후에는 언제 이 날이 와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HIV 소모성 증후군에 따른 발열과 원발성 뇌 임파종의 진행 때문에, 유우키 군의 목숨은 계속 살얼음 위를 걷는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유우키 군은 지난 석 달 동안 우리도 놀랄 정도로 노력했습니다. 절망적인 싸움을 하루하루 이겨나가고 있었지요. 정말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노력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따진다면……."

그때 처음으로 의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유우키 군에게는 지난 15년의 삶 그 자체가 길고도 긴 싸움이었지요. 병하고만 싸웠던 것이 아니라……,냉혹한 현실 그 자체에, 그녀는 저항하고 또 저항했습니다. 메디큐보이드 임상시험도 그녀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유우키 군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메디큐보이드의 실용화는 분명 1년은 늦어졌겠지요. 그러니 이제는ㅡㅡ편히 쉬게 해 주십시오……."

의사의 말을 들으며 아스나는 가슴속에서 가만히 유우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유우키ㅡㅡ지지 않을 거지? 왜냐하면 넌《절검》……,뭐든지 베지 못할 것이 없는 절대최강의 검사니까. 유우키는 이겼어. 병에도……,운명에도ㅡㅡ.

그때였다.

유우키가 어렴풋이 고개를 움직였다. 얇은 눈꺼풀이 떨리며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이미 빛을 잃었을 회색이 낀 눈동자가 맑은 빛을 머금고 아스나를 똑바로 보았다.

거의 피부와 똑같은 색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동시에 시 트 밑에서 가느다란 오른팔이 꿈틀 떨리더니 천천히,천천히 아스나 쪽으로 다가왔다. 의사가 목메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스나양……, 손을잡아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나는 두 팔을 뻗어 유우키의 앙 상한 오른손을 감싸고 있었다. 서늘한 손이 무언가를 갈구하 듯이 아스나의 손을 꽉 잡았다. 순간 아스나는 하늘의 계시처럼 이해했다. 유우키가 사실 무엇을 원하는지를.

유우키의 손을 잡은 채 살짝 고개를 든 아스나는 의사에게 재빠르게 말했다.

“선생님……,지금 메디큐보이드를 쓸 수 있나요?"

"네ㅡㅡ? 그야, 전원을 넣으면……, 하지만……,유우키 군 도 마지막은 기계 밖에서……."

"아니에요. 유우키는 다시 한 번 그 세계에 가고 싶어해요. 저는 알 수 있어요. 부탁이에요……,메디큐보이드를 쓰도록 허락해 주세요."

의사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아스나를 바리웠지만, 마침내 고 개를 끄덕였다. 곁의 간호사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메디큐보이드 측면의 핸들을 쥐고 위쪽을 가만히 돌려 유우키의 머리에 씌웠다.

“기동에 1분 정도 걸릴 겁니다……, 아스나 양은?"

"옆방의 어뮤스피어를 쓰겠어요!”

그렇게 말한 아스나는, 마지막으로 유우키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몸 옆에 놓아주었다.

기다려,곧 갈 테니까ㅡㅡ.

그렇게 속삭이고 몸을 돌렸다.

무균실을 뛰쳐나와 옆방의 모니터 룸으로 뛰어들며 안쪽 문을 열었다. 두 개 나란히 늘어선 시트 한쪽에 뛰어오르자마자, 헤드레스트 옆에서 어뮤스피어를 집어 머리에 썼다. 파워 스위치를 켜고 기동 시퀀스룰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스나의 마음은 이미 그 장소로 날아가고 있었다.

숲속 집에서 눈을 뜬 아스나는, 전에 병원에서 로그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실 창문을 통해 뛰쳐나가 전속력으로 주거 구역을 향해 날았다. 비행하는 동안 원도우를 열고, 만약을 위해 대기시켜놓았던 리즈벳이나 시우네 같은 친구들에게 메시지를날렸다.

텔레포트 게이트로 뛰어들어 망설임 없이 파나레제를 지정 했다. 호수도시에 출현하자마자, 이번에는 호수 저 멀리 보이는 그 섬을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거목 아래로.

아인크라드는 저녁놀에 물들어 있었다. 바깥쪽 가장자리에 서 새어드는 석양이 호수를 금색으로 물들였다. 그 빛의 띠에 이끌리듯이 아스나는 똑바로 섬 상공에 도달해선, 급강하해 부드러운 풀밭 위에 내려앉았다.

나무 주위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유우키는 이미 아득한 옛 날처럼 여기지는 그날, 두 사람이 검을 마주하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었다. 약간 서늘한 바람에 진남색 롱 헤어를 흘날리면 서, 임프 소녀검사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아스나의 모습을 보자 유우키는 생긋 웃었다. 아스 나도 한껏 노력해 미소로 대답했다.

“ㅡㅡ고마워, 아스나. 내가 중요한 걸 하나 잊었지 뭐야. 아 스나에게 줄 것이 있었어. 그래서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어.”

그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명랑했지만 살짝, 아주 살짝 흔들 렸다. 그렇게 일어나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유우키가 혼신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다는 것을 아스나는 깨달았다.

하지만 아스나는 유우키의 앞까지 걸어와선, 고개를 갸웃하며 똑같이 명랑하게 물었다.

“뭔데? 나에게 줄게.”

“음, 있지……,지금 만들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씨익 웃더니, 유우키는 윈도우를 열고 무언가 간단한 조작을 시작했다. 그것을 지우더니, 오른손으로 허리에 찬 검을 소리 높여 뽑아들었다.

붉은 석양을 받은 유우키의 흑요석 검이 타오르는 것 같은 광채를 쁨어냈다. 그것을 몸 정면에서 거목 줄기를 향해 쭉 내민다. 그대로 유우키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검 끝의 한 점에 모으려는 것 같았다.

유우키의 옆얼굴이 고통을 느낀 것처럼 살짝 일그러졌다. 휘청 윗몸이 흔들렸지만 살짝 벌린 다리에 힘을 주며 버렸다.

이젠 됐어, 무리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스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저 기다렸다. 바람이 풀밭을 휩쓸고 지나가더니 멎었다. 그 순간 유우키는 움직였다.

"야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