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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보여주시면서 외할아버지가 그러셨어. 엄마는 두 분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시골에서 대학까지 나와 학자가 되고, 잡지에 기고도 많이 하고,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정말 기쁘다고. 논문이나 학회 때문에 바쁠 테니 귀성을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불만스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어머니는 그저 가만히 숲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아스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옆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나는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어. ㅡㅡ'하지만 엄마도 언젠가는 지쳐서 일어날 수 없을 때가 올지도 모른단다. 언젠가 뒤를 돌아보고, 자신이 왔던 길을 확인하고 싶을지도 모른단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언제까지고 이 집을 지킬 거다……, 만약 엄마가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는, 네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단다, 하고 말해주기 위해 계속 집과 산을 지켜나갈 거다.' 그렇게 말했어.”

말을 잇는 동안에도, 뇌리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외갓집의 정경이 다시 한 번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겹치듯,몇 시간 전에 보았던 조그맣고 하얀 유우키의 집도. 마음이 돌아 갈 곳. 설령 물리적으로는 잃어버린다 해도, 그것은 분명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살아갈 곳이리라. 아스나에게는 이 가상세계의《숲속 오두막집》이 바로 그러했다.

이 집도 언젠가는 다시 소멸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이란 형태가 아니라ㅡㅡ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품었던 것처럼 마음, 감정,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니까.

“ㅡㅡ나,옛날에는 외할아버지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하지만 요즘은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을 위해 뛰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라고……,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삶도 있는 거라고.”

아스나의 뇌리에 키리토나 리즈벳 같은 오랜 친구들, 유우키, 시우네와 같은 새 친구들의 얼굴이 한순간 차례차례 떠올랐다.

“……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지친 사람들을 언제나 지탱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그러기 위해ㅡㅡ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그 학교에서 공부와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하고 싶어.”

말을 고르고 고르며 아스나는 겨우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채 숲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진녹색 눈동자에는 아득한 빛이 떠오를 뿐이어서 내심을 엿볼 수는없었다.

그대로 몇 분 동안, 작은 방은 오로지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거목 밑의 설원을 토끼와 비슷한 동물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며 뛰어다녔다. 아스나는 한순간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어머니의 옆얼굴을 다시 보고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어머니의, 지금은 백자처럼 투명하고 매끄러운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이 가늘게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어머니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 는지,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몇 번씩 닦았다.

"잠깐만……,뭐야, 이게. 난 딱히 울 생각은……."

“……엄마. 이 세계에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어. 울고 싶어지면 아무도 참을 수 없어.”

“불편한 곳이야.”

내뱉듯이 말하며 어머니는 몇 번이나 눈을 비볐으나, 결국 포기했는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윽고 그 안에서 어렴풋한 오열이 새어나왔다. 아스나는 몇 번인가 망설인 끝에 가늘게 떨리는 어머니의 어깨에 살짝 팔을 얹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 테이블에 앉은 쿄코는 완전히 여느 때의 분위기를 회복해 태블릿 단말기의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침 인사를 나눈 후 에는 말없이 식사가 끝나, 아스나는 편입신청서를 제출하라는 말이 나오리라 각오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느 때에 비하면 아주 살짝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아스나를 보며 갑작스럽게 말 했다.

"넌 남을 평생 지탱해줄 만한 각오가 돼 있니?"

아스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ㅡㅡ하지만 남을 지탱해주려면 우선 자신이 강해져야만 해. 대학에는 꼭 가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3학기와 내년엔 지금까지보다도 성적을 더 올리고.”

“……엄마, 그럼 전학은……."

"말했지? 네 성적에 달렸다고. 열심히 해.”

그 말만 남기고,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나갔다. 소리 높여 닫은 문을 한동안 응시한 후, 아스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엄마."

교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들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는 그대로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대문을 나온 순간 아스나는 살 얼음이 빛나는 노면을 있는 힘껏 박찼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카즈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올해도 계속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유우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역으로 향하는 인파를 누비고 달리며, 아스나는 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배어나오는 미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사흘 후, 약속대로 숲속 오두막 앞마당에서 성대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참가 맴버는 키리토,리즈벳,클라인, 리파,시리카와 같은 평소의 동료들과 유우키, 시우네를 비롯한 슬리핑 나이츠 멤버들. 사쿠야, 알리샤 루, 유진 장군 같은 일부 종족의 영주들과 그 측근들. 합계 서른 명도 넘는 대집단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식재 사냥 파티가 편성되었을 정도였다.

건배에 앞서 아스나는 슬리핑 나이츠의 멤버들을 정식으로 모두에게 소개했다. 병에 관한 것만은 감추었지만, 그들이 수 많은 VRMMO를 전전한 고수들의 모임이라는 것, 해산 전에 ALO에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은 맴버들의 허락을 얻어 모두 이야기했다.

제27플로어 보스를 겨우 일곱 명이서 공략한 수수께끼의 길드 이야기,그리고 무엇보다 길거리 듀얼로 60명도 넘는 상대를 물리친《절검》의 전설은 이미 알브헤임 전역을 휩쓸었는지, 사쿠야와 유진 같은 이들은 다짜고짜 스카우트에 나섰다. 유우키는 웃으며 사양했지만, 만약 슬리핑 나이츠 전원이 한 종족에 용병으로 가담한다면, 요정 아홉 개 종족의 파워 밸런스 는 크게 바뀌어 현재 진행 중인 그랜드 퀘스트 제2탄의 행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끌벅적한 건배 후 폭풍 같은 폭음폭식의 연회가 시작되고, 아스나도 유우키와 함께 요란하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 파티 도중 기왕 이렇게 된 거 제28플로어 보스 공략도 노려보자’ 라는 말이 나왔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2차는 제28플로어 미궁구역 답파 투어가 되었으며, 놀랍게도 그대로 최상층까지 쳐들어가선 거대한 갑각류 타입 보스 몬스터를 잡아버리고 말았던 이야기는 차라리 우스갯소리라 해야 하리라.

검사의 비에 새겨진 이름은 유감스럽게도 유우키를 비롯해 파티 리더를 맡았던 키리토 등 몇 명뿐이었지만, 29플로어는 정식으로 슬리핑 나이츠만 도전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해산했다.

알브헤임에서 모험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유우키는 쌍방향 통신 프로브를 이용해 매일 현실세계의 수업에도 참가했다. 카와고에에 있는 카즈토네 집에도 한 번 찾아갔으며, 오카치 마치의 에길네 카페에도 놀러 갔다.

처음에는 묘하게 직감이 좋은 카즈토를 경계하던 유우키도, 피차 한손 직검의 고수였던지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금방 터놓고 지내게 되어, ALO 내에서는 소드 스킬의 아이디어에 대해,현실세계에서는 프로브의 발전형에 대해 왕성한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이따금 아스나의 질투를 샀다. 슬리핑 나이츠 의 다른 멤버들도 리즈벳이나 다른 친구들과 친해져 온갖 이벤트를 기획해선 성대하게 즐겼다.

2월.

아스나와 슬리핑 나이츠는 약속대로 제29플로어의 보스마저도 단일 파티로 격파해 알브헤임 전역에 용명을 떨쳤다. 중순에 개최된 통일 듀얼 토너먼트에서는 동쪽 블록에서 키리토가, 서쪽 블록에서 유우키가 각각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어 결승에 진출했다. 이 결승전은 온라인 방송국《MMO 스트림》 에서 생중계까지 해서 최고조의 열기를 보였다.

무수한 플레이어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유우키와 키리토는 각자의 OSS를 포함한 고레벨 소드 스킬을 연발하는 화려한 격전을 펼쳤으며, 10분도 넘는 시합 끝에 유우키가 신기라고도 불릴 만한 11연격으로 키리토를 물리 쳤을 때는 전 세계가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들끓었다.

수많은 전설을 가진 키리토를ㅡㅡ그가 이도류를 쓰지 않았다곤 해도ㅡㅡ물리치고 제4대 통일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절검>유우키의 이름은, ALO의 틀을 넘어 더 시드 넥서스에 널리 울려 퍼졌다.

3월.

기말고사에서 어머니와 나눈 약속을 확실하게 지킨 아스나는, 통신 프로브를 어깨에 얹고 리카, 케이코, 스구하, 그리고 휴대단말 내의 유이와 함께 3박 4일 교토 여행을 다녀왔다. 그 무렵에는 프로브의 정보를 여러 클라이언트에 병렬 전송할 수 있게 되어, 유우키만이 아니라 시우네나 쥰에게도 교토를 안내 할 수 있어서 온갖 명소를 해설할 때에도 힘이 났다.

숙소는 유우키 본가의 넓은 저택을 활용했으며, 그렇게 남은 예산으로 화려한 교토 요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맛은 프로브로 송신할 수 없으므로, 유우키 일행은 치사해 치사해를 연발 했다. 덕분에 돌아가면 VR 세계에서 요리를 재현하기로 약속 해, 아스나는 VR 요리 소프트에서 한참 고생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꿈처럼 지나갔다. 아스나와 유우키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에서 길고 긴 여행을 했다. 가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시간도 아직 얼마든지 있다. 아스나는 그렇게 믿었 다.

4월까지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오호츠크 해에서 밀려온 한랭기단이 관동 일대에 때 아닌 폭설을 퍼부었다.

봄의 기척을 뒤덮듯이 쌓인 두꺼운 눈이 약한 햇살 밑에서 겨우 녹기 시작했을 무렵.

아스나의 휴대단말에 쿠라하시 의사가 보낸, 유우키의 용태가 급변했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ㅡㅡㅡㅡㅡ11ㅡㅡㅡㅡㅡ

단말기의 조그만 모니터에 표시된 짧은 메시지를 응시하며, 아스나는 가슴속에서 단 한 가지 말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요즘 유우키는 매우 열심히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뇌의 임파종도 진행이 멈추었다고 쿠라하시 의사본인이 말했다. 최근에는 HIV 감염 후 20년도 넘게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데 성공한 사례도 다수 있다고 했다. 유우키는 아직 겨우 열다섯 살……,모든 것이 이제부터 시작될 때인데. 급변이란 이제까지도 몇 번인가 있었던 기회감염의 중증화일 뿐, 이번에도 유우키는 넘어설 것이다.

하지만 아스나는 마음속 한구석으로 깨닫기도 했다. 의사가 직접 아스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이건 때가 왔다ㅡㅡ는 소식일 것이다. 아스나가 매일 밤 침대에서 겁을 먹으면서도 상상하다기는 지워버렸던, 그 때가.

서로 맞부딪치는 두